윤예지 작가는 뻔하지 않은 이야기를 즐겁게 그려냅니다. 인터넷 서핑하다가 발견한 짤, 길을 걷다 마주친 귀여운 풍경, 전에 읽었던 책의 한 문장에서 작업이 시작되는데요. 작가만의 상상력을 한 방울 떨어뜨려 일상적인 이미지에 위트를 더하려 노력하죠. 수많은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기억에 남는 이미지가 되는 것,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남는 이야기를 만드는 게 그의 목표랍니다. ‘진부한 작가’는 죽어도 되기 싫은 윤예지 작가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그림 그리는 윤예지입니다. 딴 데로 새지 않고 한 길만 꾸준히 걸어오니 어느새 17년 차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어요. 기억할 수 있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일러스트레이터를 직업 삼아 돈을 벌고, 시간과 공간을 확장할 수 있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현재 출판, 포스터,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국적의 클라이언트와 작업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을 누비고 싶었는데, 그림으로 그 꿈을 이룬 것 같아요.
『존엄을 외쳐요 -함께 만드는 세계 인권선언』, 2022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만화가, 디자이너, 화가를 꿈꿨어요. 말이나 글보다는 그림으로 제 생각을 표현하는 일이 좋았거든요. 대학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제게 잘 맞는 작업이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그렇게 한 길만 파다 보니 주위에서 알음알음 작은 일이 들어왔고, 시간이 쌓이다 보니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네요. (웃음)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홍대에 있는 공용 작업실을 10년째 쓰고 있어요. 다양한 사람들과 동물들이 짧게, 혹은 길게 작업실을 스쳐 지나갔죠. 저는 직업에도 공간에도 크게 변화를 주지 않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Blue›, 2018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20대 시절에는 관계에서 생기는 미묘한 감정 상태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지금은 시선을 외부로 돌려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며 작업합니다. 그런데 영감은 굉장히 흔한 곳에서 얻을 수 있어요. 인터넷 서핑하다가 발견한 짤, 길을 걷다 마주친 귀여운 풍경, 전에 읽었던 책의 한 문장이 영감이 되곤 하죠. 흔한 것을 디테일하게 관찰하면서 제 나름의 상상력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영감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
‹Yellow Brothers›, 2017
인터넷 책방 알라딘과의 협업 작업, 2021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과정이 제일 힘든데요. 보통은 책과 영상에서 수많은 이미지와 이야기를 찾아봅니다. 그중 트리거가 되는 대상을 마주할 때마다 러프하게 스케치를 남겨요. ‘뭔가 되겠다!’ 싶은 구도의 이미지가 모이면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채색으로 넘어갑니다. 구상할 때 창의력과 집중력을 쏟아붓고, 채색 과정에서는 ‘왼손은 거들 뿐’ 같은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진행하는 편이에요. (웃음)
작가님의 최근 작업들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서울동물영화제›로 이름을 바꾼 ‹카라동물영화제›와 4년째 작업을 이어오고 있어요.
‹제2회 카라 동물영화제 공식 트레일러›, 2019
‹KARA 동물영화제›, 2019
덴마크 에너지 회사 ‘외르스테드Ørsted’의 그린 에너지 캠페인을 위해 광고회사 와이든+케네디 암스테르담과 그림책 작업을 하기도 했어요. ‘Is This MY Home?’이란 제목으로요.
매일 개인적인 드로잉 작업도 이어갑니다. 요새는 바람에 털이 날리는 모습의 동물을 그리고 있어요.
『Is This MY Home?』 그림책 작업
‹Windy Dogs›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수많은 이미지 속에서 기억에 남는 이미지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의 주의를 잠깐이라도 사로잡을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요.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수면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푹 자고 다음 날 아침 9시~10시쯤 일어나요. 오전에 운동하고, 점심 먹고, 작업실로 출근해 오후부터 밤까지 작업합니다. 밤 11시 넘어서 퇴근한 뒤 책을 조금 읽다가 잠에 들어요. 평일과 주말 간의 경계를 따로 두지 않고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에는 늘 작업을 합니다. 기본적으로 작업량이 많지만, 업무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어서 좋아요.
‹Melting –Climate March poster with Wepresent›, 2021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얼마 전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일어난 대지진. 돈과 자본주의의 잔인함. 자본주의 앞에서 언제나 뒷전일 뿐인 기후 위기. 아프지 않은 몸. 핸드폰과 소셜 미디어에 지배당하지 않는 뇌. 상대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랑하는 법.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심각한 삶을 지양해요. 재미나고 웃긴 대상을 관찰하기 좋아하거든요. 너무 가벼워서 금방 휘발하기보단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남는 이야기, 그리고 인생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제 작업이 지향하는 바도 같아요. 위트를 보여주면서 마음에 남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위로받고 싶은 시대의 단상›, 타이포잔치2021, 2021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일단 자고, 다음날에 생각하려고 해요. 슬럼프를 극복할 때까지 잠에 들고, 일어나서 다시 책상에 앉는 일을 반복합니다. ‘계속’ 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최근 들어 작가님에게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새로운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다는 초조함이 들어요. 작년엔 NFT, 올해는 AI를 공부해야 할까 고민할 정도였죠. 3D 작업과 모션 그래픽도 마찬가지고요. 그렇지만 제가 모든 걸 잘할 수는 없으니까요. 눈과 귀는 열어두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정말 좋은 콘텐츠는 기술을 뛰어넘는다고 믿어요.
『마당을 나온 암탉』 그림책 작업, 2020
『마당을 나온 암탉』 그림책 작업, 2020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일러스트레이터는 창작자이면서 동시에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서비스직이기도 해요. 그래서 제 업무 철학은 ‘돈을 받고 일할 땐 퀄리티와 시간을 지킨다’입니다. 창작자로서의 철학이라면 ‘일차원적인 아이디어에서 항상 한발 더 나아가려고 애쓸 것’입니다. 진부해지고 싶지 않거든요.
‹Winter is Coming : scene from Ladakh›, 2019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먼저,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세요. 즉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인지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혼자 할 수 없는 일은 타인의 도움을 받는 거죠. 체력이 모든 창의력과 지구력의 기본이 된다는 걸 명심하세요. 운동을 생활화하는 게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관계는 언제고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사람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합니다.
‹씨앗저장소 시드볼트›, 2022
‹Tigeryear –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2022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뻔하지 않은 이야기를 즐겁게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시간이 흘러도 구닥다리 그림을 그리지 않는, 촌스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 중입니다.
현재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지나치게 오래 살고 싶지는 않고,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않아요. 건강하게 계속 일하다가, 제정신일 때 잘 죽고 싶어요. 그런데 제가 죽기 전에 이미 지구가 제정신이 아닐 것 같긴 해요. 불확실한 절망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봐야죠.
Artist
윤예지는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로 출판, 포스터,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국적의 클라이언트와 작업하고 있다. 흐르는 것에 대해 예민한 편이며, 시시각각 변하는 시간과 감정의 흐름을 잊기 전에 이미지로 기록한다. 세계의 다양한 변화에도 관심이 많아서 그림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주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 탐구 중이다. MBC 예능 ‹라디오 스타› 로고 제작, NIKE 팝업 스토어, 애플 앱스토어 그림, 네이버 컬래버레이션 로고, 쿠팡 로켓 프레쉬백 아트워크, ‹서울동물영화제›, 댕댕런 포스터 등을 작업했다. 『땅콩나라 오이제국』, 『산책가자』, 『존엄을 외쳐요 -함께 만드는 세계 인권선언』 등의 그림책뿐 아니라 최근 광고회사 와이디+케네디 암스테르담과 함께 덴마크 에너지 회사 외르스테드의 그린 에너지 캠페인을 위한 그림책 『Is This MY Home?』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