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Visual Portfolio

스스로 장르가 될 수 있다면

Writer: 송승준

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송승준 디자이너는 네덜란드와 서울에서 활동하는 다학제적 디자이너입니다. 말 그대로 분야를 막론하고 통합적으로 생각하며 작업을 펼치고 있어요. 요즘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주제는 자연입니다.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밀웜에서 유기농이라 부를 수 없는 유기농을 발견하기도 하고, 한국의 비무장지대(DMZ)가 잉태한 순수한 자연에서 폭력성과 모순성을 바라봅니다. 폭넓은 장르의 스펙트럼에서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어 인류의 불안을 포용하고 싶다는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송승준입니다. 작년 말 네덜란드에 있는 디자인아카데미 에인트호번에서 컨텍스추얼 디자인Contextual Design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어요. 현재 서울에서 활동하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이원적 사고를 해체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이어 나가는 중입니다. 최근 한국의 비무장지대(DMZ) 생태계를 주제로 작업했어요.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제 장래 희망은 자원봉사자였답니다. (웃음) 대학에서는 디자인을 전공했는데요. 다수를 위한 디자인을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2016년부터 약 3년간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 페시PESI를 공동으로 창립해 운영하기도 했어요. 이후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문화, 사회 등에서 비롯한 요인을 디자인으로 살피고 위로하고 싶어서 네덜란드 유학을 결심했죠. 그때부터 개인 작업을 하나둘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Design Academy Eindhoven GS22, Dutch Design Week», 2022

«Design Academy Eindhoven GS22, Dutch Design Week», 2022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저는 리서치 기반의 작업을 하는 터라 주로 글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하는 편입니다. 특히 생태 철학 분야의 책에 관심이 많아요. 흥미로운 정보는 작업의 양분이 되기 때문에 꼼꼼히 기록해 둡니다. 여러 담론을 살펴보면서 제가 어떤 위치에서 해당 담론을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이미지 위주의 아이데이션을 가장 경계하는 것 같아요.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주제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창작 루틴에서 밤 산책은 빼놓지 않는 것 같아요. 낮 시간에는 생각을 방해하는 시각 요소가 많아서 밤을 선호합니다. 새로운 길보다는 익숙한 길을 반복해서 걷고요. 걷는 행위가 무의식의 경지에 이르면 비로소 생각의 차원으로 입장하게 됩니다. 밤 산책을 통해 머릿속에 떠다니는 추상적인 단어를 메모장에 문장으로 적어놔요.

작가님의 최근 작업들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오늘날의 비무장지대는 그 이름과는 다르게 ‘중무장지대’가 되었어요. 미확인 지뢰와 철조망, 감시초소처럼 폭력적 객체가 DMZ를 점거하고 있죠. 이런 폭력적 객체들은 인간뿐 아니라 DMZ에 서식하는 생물에게도 위협적으로 보이는데요. 어떻게 오늘날의 DMZ가 한반도의 핵심 생태축으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 궁금증이 들었어요. 그리고 깨달았죠. DMZ의 서식종이 안정적인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DMZ의 폭력적 객체가 필요하단 사실을요. 폭력성에 적응한 종들이 DMZ에 서식하기 시작하면서 폭력성이 도리어 외부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거죠. 결국 DMZ의 폭력적 객체들이야말로 현 DMZ 생태계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셈입니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부재한 자연’을 ‘순수한 자연’으로 그려내는데요. 저는 DMZ 생태계가 순수한 자연이 폭력에 의해 성취되는 섬뜩한 결과를 잘 보여주는 개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결론은 ‹DMZ 생태계 디오라마를 위한 테라리움 화병›(2022)으로 이어졌습니다. DMZ 생태계를 미니어처 버전으로 표현한 작품인데요. 철조망 사이로 팽창한 유리는 폭력성에 적응하고 뒤엉킨 공간을 창조합니다. 유리와 철조망 간의 불가분한 관계는 지금의 상태를 영속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는 DMZ 생태계를 대변합니다.

‹DMZ 생태계 디오라마를 위한 테라리움 화병›, 2022

‹DMZ 생태계 디오라마를 위한 테라리움 화병›, 2022

‹DMZ 생태계 디오라마를 위한 테라리움 화병›, 2022

 ‹유기농 샐러드›(2020)도 소개하고 싶어요.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밀웜이 스티로폼을 자연 분해할 수 있다는 흥미로운 글을 접했습니다. 밀웜과 같은 토양 무척추동물은 지구 생태계에서 쓰레기를 분해하고, 유기물을 배출함으로써 질 좋은 토양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데요. 이들이 플라스틱을 먹으면서 오히려 생태계 속 그들의 역할이 전복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스티로폼을 먹은 밀웜은 멀쩡하지만 그들이 배출한 유기물에는 미세 플라스틱 입자와 발화 지연제(HBCD) 같은 독성물질이 그대로 존재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밀웜에게 스티로폼을 섭취시키고 그들이 배출한 독성 유기물을 추출해 토양과 배합한 후 여기에서 한 달간 채소를 재배했어요. 이렇게 완성한 ‹유기농 샐러드›는 인간이 얼마나 지구 생태계에 개입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꺼내면서, 팬데믹을 부른 COVID19처럼 인간이 초래한 보이지 않는 재앙의 귀환에 대한 메타포로 작용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미래에는 유기농 샐러드를 더 이상 ‘유기농’ 샐러드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Organic Salads›, 2020

‹Organic Salads›, 2020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자연의 개념을 생태계의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철학자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은 “모든 것이 자연이라면 그 어떤 것도 자연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자연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지구 생태계를 암묵적으로 대상화하고 이를 사회 벽 외부의 것으로 인식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자연이 ‘everything’을 가리키는 고정된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시간적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자연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태계의 조성과 붕괴를 반복하는 일종의 현상과도 같습니다. DMZ처럼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도래해도, 자연은 인간을 신경 쓰지 않고 생태계를 끊임없이 창조하며 앞으로 나아갈 거예요.

최근 진행한 작업에서 작가님이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창작자로서 매번 발전된 결과를 추구하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늘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작업을 진행하며 더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데 익숙해졌다는 점은 만족스러워요. 예전에는 가구를 주로 디자인했지만, 지금은 껌, 샐러드, 삽화, 시나리오 등을 디자인하니까요. 유형을 먼저 설정하지 않고, 도출한 메시지를 어떤 유형으로 번역할지 고민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M14 Chewing Gum›, 2021

‹M14 Chewing Gum›, 2021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일단 책을 많이 읽고요. 그 외에는 밖을 자주 돌아다닙니다. 전시회도 가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아해서 술자리도 자주 가져요. 인풋 없는 아웃풋은 없으니까, 바쁘게 움직이며 여러 인풋을 얻어려고 노력합니다.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최근에 열린 전시가 아닐까 해요. 지난 5월 6일부터 5월 28일까지 약 한 달간 오스트리아에 위치한 슐로스 홀레네그 포어 데지큰Schloss Hollenegg for Design에서 열린 단체전 «Ashes & Sand»에 참여했어요. 5월 17일부터는 가회동에 위치한 갤러리 크래프트온더힐Crafts On The Hill에서 저의 첫 개인전 «DMZ 생태보고서 누락종»을 열고 있습니다. 6월 17일까지 진행되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웃음)

«DMZ 생태보고서 누락종», 갤러리 크래프트온더힐, 2023

«DMZ 생태보고서 누락종», 갤러리 크래프트온더힐, 2023

«DMZ 생태보고서 누락종», 갤러리 크래프트온더힐, 2023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작가에게는 업과 일상을 분리하는 노력이 모호한 것 같아요. 아이디어는 그 속성상, 한순간에 떠오르지 않고 켜켜이 축적되어 발현하기 때문이죠. 저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예를 들어, ‘원기둥’이란 주제를 다룬다면, 습관처럼 원기둥 모양의 동공으로 세상을 필터링하며 바라보곤 한답니다.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싫증과 불안이 엉킬 대로 엉켜버리면 ‘멍때리기 운동’을 시작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운동이란 단어를 붙여 보기 좋게 포장한 말인데요. (웃음) 네덜란드에 있을 때 깊은 슬럼프가 온 적이 있어요. 그 때 에인트호번 북쪽에 있는 필립스 더용Philips De Jongh 공원에서 매일 15분씩 멍때리기 ‘운동’을 했죠. 어떻게 보면 멍때리기 운동은 ‘움직임을 강요하는 세상에 대한 항의’와도 같죠. 세상에 멈춰있는 건 존재하지 않잖아요. 하늘의 구름도 바람 따라 조금씩 움직이고, 경직되버린 노목에서는 개미들이 바쁘게 움직이니까요. 그렇게 가만히 아무 생각하지 않고 멍때리다 보면 다시 생각할 힘이 차오른답니다.

‹Obsidian›, 2020

‹Sienna›, 2019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동료나 후배 작가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고민 중 하나가 ‘정체성’에 대한 거예요. 그럴 때면 저는 작가의 정체성을 모자이크 양식에 빗대어 설명하곤 해요. 모자이크는 여러 작은 조각을 모아 하나의 색상을 이루는 미술 양식입니다. 작가의 정체성은 어떤 이미지를 기대하고 예측하면서 만들어 가는 게 아니라고 믿어요. 작가는 그저 눈앞에 놓인 사각 캔버스를 현재의 경험과 감성으로 칠하면 됩니다. 첫 번째 캔버스를 빨강으로 칠했다고 해서, 다음 캔버스도 빨강을 고집할 필요는 없죠. 두 번째 캔버스는 파랑 혹은 노랑으로 칠해도 됩니다. 그렇게 다양한 책으로 칠한 사각 캔버스가 모자이크처럼 군집을 이룰 때 작가의 색채가 구체화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정작 작가 본인은 이 색깔을 알 수 없어요. 캔버스와 멀리 떨어진 제삼자 입장에서 바라봐야 색깔의 정체를 알 수 있죠. 작은 캔버스가 거대한 모자이크를 이루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작가의 색깔을 작가 본인이 결코 판단할 수도 없죠. 그래서 계산적인 사고와 두려움을 버리고 자유롭고 진취적으로 표현하는 용기가 중요하다고 봐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세상에는 맥시멀리스트와 미니멀리스트가 있어요. 덧셈과 뺄셈의 가치를 높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저는 곱셈을 가장 가치 있게 여깁니다. A를 하다가 B를 하면 단순히 B로 변하는 게 아니라, A와 B, 그 사이에서 탄생한 시너지를 합친 C로 재탄생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곱셈의 가치를 삶에 적용하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오히려 변화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죠. 이런 가치관은 창작자가 분야의 경계를 초월한 자유분방한 사고와 아이디어를 실현하게끔 돕는 순수한 의지를 촉진한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영화감독 조지 밀러George Miller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 ‹매드맥스Mad Max› 시리즈를 연출했지만 동시에 3D 애니메이션 ‹해피 피트Happy Feet› 시리즈를 맡았어요. 이처럼 장르의 양극단을 오가는 조지 밀러를 보면 그의 이름 자체가 새로운 장르로 느껴질 정도죠. 저도 조지 밀러처럼 폭넓은 장르의 스펙트럼에서 ‘송승준’이라는 고유의 장르를 만든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어요. 인류의 불안을 포용하는 치유적인 성격의 장르를 추구하고 싶습니다.

현재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관계와 공생을 의미하는 생태계적 관점을 바탕으로 자연을 이해하는 세계.

Artist

송승준은 네덜란드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다학제적(multidisciplinary) 디자이너다. 자연이란 개념을 둘러싼 문화적·역사적 맥락을 재조명하고, 이런 자연 개념이 생산한 편견과 오해가 우리 현실을 어떻게 조종하는지 이야기한다. 그는 인간과 자연의 이원적 사고를 해체하기 위해 디자인을 매개로 삼고, 상호관계적인 생태계적 관점에서 자연의 개념을 재정의한다. 최근 한국의 비무장지대(DMZ) 생태계를 주제로 삼은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Thank You for Subscription!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애티튜드»는 매주 금요일 아침 10시 1분, 창작자의 반짝이는 감각과 안목을 담은 소식을 메일함에 넣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