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Project
아티스트와 나눈 깊은 대화를 시리즈로 만나봅니다
«비애티튜드»는 아티스트와의 심도 깊은 인터뷰를 통해 그의 작업 세계와 창작에 대한 태도를 공유하는 ‘아티스트 프로젝트’를 진행해요. 두 번째 주인공은 디지털 페인터 람한 작가입니다. 시각적 ASMR을 추구하는 그는 감각의 끝자락을 간지럽히는 듯한 몽환적이고 이색적인 작업을 선보여요. 신기하게도 작업을 보면 시각적 팅글이 느껴진답니다. 람한 작가와 나눈 다채로운 이야기를 아티클 시리즈에서 만나보세요. 더불어 저희와 함께 협업한 익스클루시브 굿즈인 메쉬 탑도 B(A)SHOP에서 살펴볼 수 있답니다!
아티스트 프로젝트 02: 람한
«비애티튜드»는 특정 아티스트와의 심도 깊은 인터뷰를 통해 그의 작업 세계와 창작에 대한 태도를 공유하는 ‘아티스트 프로젝트Artist Project’를 선보인다. 그 두 번째 주인공으로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람한을 선택했다. 한예종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람한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연필보다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더욱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일러스트레이터로 데뷔 후 사람들의 폭넓은 공감을 이끄는 요소에 주목해 아름답게 왜곡되는 기억과 추억을 주제 삼아 시각적인 자극을 강조하는 디지털 페인팅을 선보였으며 동시대 디지털 네이티브의 환호를 기반으로 미술 신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우리는 그가 작업을 시작하고, 전개하며 완성하는 과정과 그 태도에 주목하며 총 세 편의 인터뷰를 발행한다.
Part 1. 작업 세계에 대한 이야기
Part 2. ‘소닉 노스탤지어’에 관한 문답
Part 3. 창작자로서의 애티튜드
아티스트 프로젝트를 통해 다른 창작자가 다양한 영감과 정보를 얻고, 서로의 입장과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더불어 지속가능하고 흥미로운 창작 생태계가 구축되길 응원해본다.
Part 1: 디지털 페인터, 그 이름은 람한
디지털 기기에서 탄생한 람한의 그림은 무한한 노동과 집중력의 산물이다. 픽셀 하나에도 민감한 그의 섬세함이 투영된 작업은 사람의 감각을 자극하고 즉각적으로 마음을 훔치며 ‘시각적 ASMR’로 기능한다. 커머셜 작업과 개인 작업을 균형 있게 병행하는 람한이 늘 관심을 보이는 대상은 사람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반응하는 여러 감각 요소를 파악해 한 장의 그림에 압축시킨다. 기억과 추억의 왜곡에서 비롯되는 공감과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그의 다채로운 작업 세계를 살펴보자.
작가님을 소개할 때 ‘디지털 페인팅’이라는 단어가 함께 붙더군요.
요즘은 ‘그리기’라는 행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세상 같아요. 하지만 저는 디지털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어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시각적인 표현, 처음 접했을 때 흥미로움을 부르는 이미지가 작업과 밀접한 연관을 맺기 때문에, 그리는 행위를 통해 원하는 비주얼을 표현하는 과정이 무척 중요해요. 특히 제 작업은 물성 없는 파일 형태로 시작해 컴퓨터 혹은 주변 디바이스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에 기술적이고 표면적인 의미에서도 ‘디지털 페인팅’이라는 단어가 유효하죠.
보통 ‘디지털’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첨단 기술로 실험하는 게 생각나곤 해요.
디지털 페인팅을 두고 짧은 시간에, 손쉽고, 편리하게 작업을 완성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제 작업은 그런 편견과 거리가 멀어요. 예를 들어, 저는 전시에 초대를 받으면 전시장에 찾아가 작업이 걸릴 벽면에 어울리는 화폭을 상정한 후 포토샵으로 실제 크기를 잡고 해상도는 크기와 대비해 최대의 해상도로 설정해요. 그것에 맞게 표현의 밀도와 디테일을 추구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답니다. 디지털 페인팅의 세계에서는 우연의 효과가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현실에서는 연필로 드로잉하고 수채화나 유화로 채색하면 의도하지 않은 멋진 텍스쳐가 큰 활약을 하잖아요. 살짝 삐져나오면 그만의 멋이 있죠. 근데 디지털 세계는 굉장히 엄격해요. 1픽셀이라도 삐져나오면 눈에 거슬리는 흠으로 다가와요. 게다가 저는 브러시가 정직하게 구축하는 비주얼을 선호하는 편이라 종이나 물감의 질감을 인위적으로 부여하는 디지털 효과는 지양하는 편입니다. 드로잉 툴이나 프로그램이 전달하는 특유의 차갑고 날것의 톤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디지털에 늘 기술의 축복이 따르는 건 아니네요! 픽셀 하나하나까지 챙기는 게 힘겹진 않으세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시작해서 그런지 모든 작업을 드로잉으로 시작하는 게 굉장히 자연스러워요. 디지털 작업에서는 사진에 리터칭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동안 드로잉으로 쌓은 조형 감각이 깨질까 봐 러프 드로잉부터 일일이 그리는 편이에요. 디지털 페인팅을 위한 프로그램이 꽤 다양하지만 제가 포토샵을 선호하는 이유도 가장 스터디를 많이 한 프로그램이면서, 그 성격이 중립적이고 다방면적이기 때문인데요. 브러시, 보정 레이어, 필터 등을 직접 만들 수 있어서 자유도가 무척 높아요. 포토샵에는 작업을 편리하게 돕는 여러 기술이 존재하지만 불편함을 감수할 때만 생기는 ‘맛’을 놓칠 수 없어요. 프로젝트마다 그에 어울리는 최적의 브러시를 제작해서 맨바닥부터 시작하는 이유랍니다.
“연필보다 드로잉 패드가 더 익숙하지만, 완성된 파일은 만질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디지털 페인팅에서 작업의 완성을 결정짓는 척도는 무엇일까요?
개인적으로 작업을 완성했다고 느끼는 시점은 명확해요. ‘아, 이제 끝이다. 완성했음!’이라고 생각하면서 포토샵의 ‘세이브save’를 누르는 상황이죠. 제가 생각하는 완성의 유일한 조건은 스스로가 부여하는 인위적인 승인이고, 승인은 그저 하나의 시점일 뿐이에요. 여기서부터 애매한 문제가 생겨요. 작업은 분명 완성됐는데, 이걸 사람들과 완벽하게 공유할 방법이 없어요. 출력하면 일단 다운그레이드가 되죠. 디스플레이로 보는 게 완성작의 환경과 그나마 흡사한데요. 제 작업은 보통의 모니터 디스플레이 크기를 넘어가거든요. 실제 스케일을 전달할 수가 없어요. 그나마 인스타그램을 통해 작업 소식을 전하지만, 이건 아주 작은 크기의 섬네일이죠. 그래서 항상 고민해요. “어떻게 하면 원본에 가깝게 보여줄 수 있을까?” 그래서 인쇄는 늘 아카이벌 프린트를 고집하고, 더 나아가 디스플레이 뒤에서 빛을 비추는 모니터 환경과 기능적으로 유사한 라이트패널을 이용하려고 하죠. 물론 어떻게 하더라도 제가 저장한 ‘완성’ 파일을 똑같이 구현하는 건 불가능하겠죠. 그래서 전시장에 걸리는 라이트 패널 작업조차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생산한 복제품이 아닌가 생각을 하곤 해요.
창작자도 세이브 버튼을 누를 때 작업을 한눈에 조망하지 못하잖아요. 결국 완성 혹은 원본은 세상에 존재한다기보다 작가님만 의식할 수 있는 특정한 순간에 가깝겠어요.
무척 동감하는 바에요. 제 작업의 원본은 항상 어딘가의 중간에 존재한답니다. 제가 만날 수도, 온전히 볼 수도 없고, 거기에 가깝게 만들 뿐이죠. 근데 그 애매모호한 상태가 되게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계속 고집스럽게 작업을 진행하는 원동력도 그런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 같고요. 아무도 완성을 알 수 없고, 오직 제 머릿속에 저만 아는 지점으로 있는 상황 말이죠.
2018년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유령팔»에서 ‘람한-디지털 시대의 기억의 사유화’라고 작가님을 소개했는데요. 추억과 기억을 작업의 주된 주제로 삼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친구끼리 모여 추억을 얘기할 때가 있잖아요. 옛날에 봤던 애니메이션을 화제로 삼으면 각자 떠올리는 장면이 모두 다르고, 좋았던 장면이나 무서워서 트라우마로 남은 장면이 동일하지 않아요. 어른이 돼서 해당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면 옛날의 ‘그’ 느낌은 존재하지 않고요. 같은 걸 보아도 기억은 다르게 남고, 마음에 남은 어떤 인상은 왜곡을 겪으며 완전히 새로운 기억으로 자리 잡곤 해요. 기억이 시간을 지나 풍화되며 전혀 다르게 남은 걸 활용해 저만의 표현과 질감으로 작업을 만드는 걸 보고 당시 담당 큐레이터님이 기억을 사유화한다고 표현하셨던 것 같아요. 더불어 이런 것도 있죠. 여행을 갔다 오면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여행에 대한 환상과 즐거움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머리에 남은 아름다운 장면들이 사실은 자기 것이 아닌 경우가 많아요.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기억은 부풀린 환상이 빚은 필터링된 이미지에 가깝다는 거죠.
실제 체험한 여행인데도 그렇게 기억한다면, ‘기억은 결국 추억이 된다’는 관점과 유사한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예 남의 기억을 자기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해요. 마치 누군가가 여행 간 사진을 볼 때 이미 그 감각이 느껴지는 것처럼요. 이런 현상은 요즘 굉장히 흔해졌어요. 영화 ‹화양연화›에서 감각적인 조명 아래 톡톡 튀는 색감의 아름다운 장면을 봤다고 가정할게요. 실제로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죠. 영화적인 장치로 구축한 가상의 세계니까요. 그런데 제 머리는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영화의 한 장면이 영화로 남는 게 아니라 제 기억의 일부로 편입되는 거죠. 직접 홍콩을 가지 않아도 홍콩에 대한 영화를 보고 영화 속 장면을 훔쳐서 홍콩에 대한 기억으로 삼는달까요. 지금처럼 사람들이 이미지를 통해 많은 것을 공유하고, 특히 SNS에서 습득한 이미지를 기반으로 작업한 결과물들을 보면 한마디로 내것네것의 경계가 없는 상황이 온 것 같아요. 여행에 대한 로망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다른 이와 공유하는 것처럼요. 미국인이 감독을 맡고 미국 문화권을 배경으로 찍은 미국 영화를 한국에 사는 7살 아이가 보고서, 그 영화에 대한 추억이 미국에 대한 추억으로 바뀌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세상이에요. 미디어가 도처에 퍼지면서 이제 사람들이 직접 느낀 것과 가상으로 느낀 것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 느낌이랄까요.
정확한 지적이라고 봐요. 2000년대 초반 홍대 문화를 실제로 겪지 않은 사람이 그것에 대해 ‘그립다’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이런 기억과 추억의 왜곡은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저는 한눈에 봤을 때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럼 이런 질문이 생기겠죠. ‘그림으로 표현하고싶은 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건 뭘까?’ 제게는 그 기준이 추억에 가 있어요. 사람들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죠. 저 또한 그런 미감에 동의하는 편이고요. 그런 면에서 추억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도 드물다고 봐요. 저는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더 선호하는 걸 빠르게 캐치하는 것도 제 작업의 일부라 생각해요. 다수가 공감하는 주제와 그림이 필요하다면 감각적인 면에서 추억을 부르며 아름답다고 공감을 일으키는 작업을 구현하고 싶어요. 제가 포착한 아름다움에 대해 사람들의 동의를 받는 건 꽤 중요하게 다가와요. 그들의 반응에서 자극을 받아 다음 작업을 계속 이어나가는 원동력으로 기능하거든요. 다른 작가분들에 비해 좀 더 대중적인 이미지를 추구하고, 커머셜 작업도 병행할 수 있는 건 이런 특징에 기반을 둔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닌 전달력을 확인받으며 일러스트레이터와 디지털 페인터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림만 그리면서 먹고사는 게 일생일대의 꿈인지라, 저는 지금도 절박함을 강하게 느낀답니다. (웃음)
2016년부터 시작한 작업이 2018년 «유령팔» 전시를 기점으로 크게 전환했다고 들었어요.
전시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가지고 있던 분노가 엄청나게 컸어요.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판타지적인 느낌과 여성의 몸에 대한 묘사도 자주 했었죠. 하위문화에 편입되고 싶은 마음도 컸고요. 커머셜 작업에 지치기도 했고, 좋은 모임에 나가서 창작 활동을 병행할 때는 제가 알지 못하던 반항심을 발견하기도 했어요. 하하. 그런 상황에서 제 작업에 대해 많은 분이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 불안감도 많이 해소됐죠. ‹Cracked›의 경우, «It’s Nice That»에서 선정한 ‘2017년 Top 25 Illustration’에 뽑히며 제 그림이 남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다는 확신도 강해지고 자신감이 붙었고요. 반면 빠르게 확산하고 쉽게 읽히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에 대한 회의와 불안감이 마음 한쪽에 자리 잡게 된 면도 있었어요.
«PRISMOF» 매거진 05호에서 다룬 영화 ‹아가씨›를 주제로 한 아트워크
‹Cracked›
그러다 전시를 기획하시는 큐레이터분이 메일을 보내시니까 여러 가지 기분이 들었어요. ‘미술관에서 왜 내게 전시 제의를 하지?’ 생각이 들면서 완전 새로운 세계에 초대된 것에 대한 긴장과 더불어 동경과 욕심도 함께 들더라고요. 그래서 전시에 참여하면서 엄청 크게 그리고 싶다는 말을 드렸어요. 그리고 그에 걸맞은 작업을 계속 고민했죠. 일단 사람은 그만 그리자, 생각하고 지금 표현하고 싶은 게 뭘까 계속 생각해보니 임시 공간이 떠올랐어요. 당시 공간에 대한 간절함이 절실해서 객실이나 호텔 방처럼 임시적인 공간에 대한 관심이 컸어요. 좁은 자취방이 있었지만, 월세를 내야 하니 결국 제 공간이 아니었고, 언제든지 캐리어를 옆에 두고 짐을 싸서 본가와 지금의 남편인 남자친구 집을 오갔거든요. 혹시 다툼이 일어나면 다시 짐을 싸서 다른 곳으로 옮기며 떠돌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객실에 대한 이미지를 환상적으로 그려보자, 마음먹고 시작한 게 첫 번째 연작인 ‹룸타입Room type›이었죠. 이때 처음으로 라이트 패널을 작업에 도입하게 되었어요.
‹Room type 01›, ‹Room type 02›
‹룸타입›에서 러브호텔을 환상적인 객실로 표현했는데요. 왜 그런 공간을 소재로 삼으셨나요?
지금도 마찬가지긴 한데, 약간 싸구려 감성에서 느끼는 어떤 동질감이 있어요. 요즘 럭셔리한 공간을 떠올리면 되게 미니멀하고 아무것도 없는 분위기인데, 제가 좋아하는 건 그런 게 아니거든요. 게다가 추억과 연관된 것이라면 약간 촌스럽지만 그만큼 공감을 부르고, 묘하게 못생겼지만 그게 더 마음에 들어서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대상을 작업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냥 예쁘고 고급스러운 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가난했고, 절실했던 시점이었기에 그런 것에 더 끌리고 이야기를 더 많이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함께 전시한 작업 중 ‹외톨이Object›가 있던데요. 이건 무엇인가요?
‹외톨이›는 커다란 그림에서 따로 떨어져나온 기물이에요. ‹룸타입›은 가로세로 3m의 거대한 정사각형 크기였는데요. 이 작업에서 소외받는 물건들을 조망하고 서사를 부여해, 마치 칸 만화에서 무언가 클로즈업 샷으로 대상에게 감정, 감각적인 몰입을 유도하듯 가로세로 90cm 크기의 작업으로 꺼낸 거죠. 당시 제가 인스타그램에 작업을 올릴 때 부분부분을 크롭해 따로 올리는 방식으로 새로운 균형을 흥미롭게 실험하던 행위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외톨이› 연작
«유령팔» 전시 이후 미술 신에서 계속 호출을 받게 됐어요. 그러면서 연작 개념의 신작도 계속 발표하게 됐고요. ‹수베니어Souvenir›와 ‹케이스Case› 등이 대표적이죠.
제가 어떤 걸 하고 싶은지에 대한 방향성이 좁혀진 면이 큰 성과였어요. 무조건 유명해지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소개되고, 보여지면 좋겠다는 지점이 생겨났죠. 상업적인 일러스트레이션에만 너무 몰두하고 싶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졌죠. 미술 신에 알려지기 시작하니까 흥미로움과 불안감이 공존했는데요. 생각을 계속해보니 제가 그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랬던 거더라고요. 그래서 떠오르는 주제 중 한 장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지속하고 싶은 건 연작으로 이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수베니어›와 ‹케이스› 등으로 확장된 거죠.
‹Room type 03›
‹Souvenir_01_01_F›, ‹Souvenir_01_04_F›, ‹Souvenir_01_02_F›
‹Souvenir_01_01_F›, ‹Souvenir_01_04_F›
‹수베니어›의 경우, 사실 ‹룸타입›과 세계관이 연계돼있어요. 좀 더 줌인한 형태의 ‹룸타입›이랄까요. 여행지에서 느끼는 환상과 거짓 기억, 왜곡된 판타지에서 느낀 흥미를 기념품의 형태로 표현한 건데요. 그 대상은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접시와 티컵이에요. 여행지에 가면 늘 만나는 진부한 것들인데 이걸 모으며 느끼는 허무함과 부질없음, 그런데도 갖고 싶은 마음의 이중성을 내포하는 이미지가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입체적인 공산품이 평면 이미지에 무심히 박혀있는 상태도 흥미로웠죠. ‹케이스›는 작년 ‘부산비엔날레’를 위한 신작이었어요. 외국 소설가의 추리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는데, 저는 이야기 속에서 존재감 없이 죽는 여자를 주인공처럼 대하기도 하고, 복어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소설 속 장치를 표현하기 위해 유튜브에서 실제 복어 내장을 손질하는 끔찍한 광경을 변형해 화면에 그려놓았죠.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는 강박적인 부분에 훨씬 더 집중하고 싶었어요.
‹Case_01_01›, ‹Case_01_02›, ‹Case_01_03›. ‘2020 부산비엔날레’를 위한 커미션 작업
‹수베니어›부터 작업이 확 변한 게 느껴져요. 매트하고 리소그래픽적인 표현이 매끈하고 밝은 빛과 함께 강한 하이라이트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고, 서브컬처적 기이한 상황을 묘사를 통해 표현하던 경향이 몽환적이고 유기적인 분위기를 통해 시선을 바로 끌어당겨 자극을 고조시키는 쪽으로 바뀌었달까요.
일단 라이트 패널에 대한 고려가 크게 반영됐어요. 원작을 더욱더 온전히 구현하는 매체로 라이트 패널을 고르고 나니 더는 프린트가 1순위가 되지 않으면서 작업 방식도 CMYK가 아니라 RGB로 바뀌었어요. 그러니 색감 면에서도 확 튀게 되었죠. 심적인 이유도 있어요. 더 효과적으로 빛이 풍부하게 맺히는 질감을 좇다 보니 작화도 바뀐 거죠.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표현법을 추구하며 CG만의 매력에 빠졌고, 좀 더 매끈한 질감과 부드러운 그라데이션, 광택이 존재하는 표현법을 연구하고 그런 이미지를 추구하게 됐어요. 이런 변화의 근저에는 감정의 공감에서 감각의 공감으로 이전하는 게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죠. 감정에 국한한 작업만 고집하면 외로움과 우울을 얘기하다 끝날 것 같았거든요. 서사 없이 순수히 감각적으로만 대해도 사람들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부분이 많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튜브에 떠도는 ASMR 영상을 좋아하는데, 그렇게 감각의 말초까지 자극하면서도 공감을 끌어내는 감각적인 비주얼을 통해 작업 세계를 확장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죠.
그런 경향을 ‘시각적 ASMR’이라고 표현한 게 흥미로웠어요.
하하. 시각적 ASMR은 시각적인 자극을 주는 장치와 방법을 한 화면에 집약하는 걸로 생각하면 이해가 편할 것 같아요. 효과가 검증된 걸 모으고, 더 집요하게 보여주는 거죠. 질감을 표현할 때도 1차로 회색 하이라이트 표현을 한 다음 2차로 그 위에 하얀 점을 덧칠해 평평한 레이어에 볼록 튀어나온 듯한 착시를 준다거나, 집요하게 한 부분을 파고들어서 디테일의 끝판왕까지 가면서 나머지 부분은 흐릿하게 처리해서 집중 효과를 높이는 것 등이에요.
‹kiss›
‹Case_01_04(기억정렬)›. ‘2020 부산비엔날레’를 위한 커미션 작업
이런 표현적인 효과를 모아 감각적인 감각을 극대화하는 거죠. 저는 그게 시각적인 ‘팅글’이라고 생각해요. ASMR 영상을 보면 질감적으로 자극이 되는 소리로 청각적인 쾌감을 유도하잖아요. 시각물에도 유사한 쾌락이 존재하는 거죠. 눈이 간질간질하고, 기분이 좋아지고, 흥미로워서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의미에서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싶다는 표현을 하게 됐어요. 시각적으로 자잘한 디테일이 보이고, 즉각적으로 어필이 되고, 추상적이지만 뭔가 감각적인 운동성이 보이는 제 작업에는 이런 의도가 중첩돼있어요. 작년 작업에 자주 등장한 형광 초록도 색에 대한 스터디의 결과 중 하나랍니다.
올해 작업을 보면 또 다른 변화의 기운이 포착되던데요.
아, 이렇게 변화를 느끼는 분이 계실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기쁨) 변하고 있는 거 맞아요. 그렇다고 뭔가 딱딱 경계를 정하고 움직이는 건 아니고, 표현 가능한 스펙트럼에서 계속 실험하고 있어요. 이렇게도 해보고, 조합을 바꿔도 보고, 중요도도 옮기면서 결과물이 어떻게 바뀌는지 체크하는 중이죠.
작가 활동뿐 아니라 커머셜 작업도 국내외를 넘나들며 활발히 하고 계신데요. 혹시 기억에 남는 클라이언트를 꼽을 수 있을까요?
커머셜 작업과 개인 작업의 병행이 제 밸런스를 잡아준다고 생각을 하는지라, 커머셜 작업 또한 중시하는데요. 특히 클라이언트의 다양한 피드백이 표현의 폭을 넓혀준다고 믿기 때문에 수정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요. 그래도 수정 없이 쭉쭉 진행한 프로젝트가 결과 면에서도 좋더라고요. 대표적인 예가 패션 브랜드 ‘오프닝 세레모니’에요. 여기 디렉터인 케롤 림과 움베르토 레온은 저와 작업을 같이 한 경험이 있었어요. 신뢰가 쌓여서인지 타이트한 일정 속에서도 제 작업에 대한 수정 요청을 하지 않은 케이스죠. 서로 너무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는데, 특히 옷으로 구현됐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어요. 여러 작업 중 영화 ‹화양연화›를 모티브로 그린 작업이 제일 좋아요.
패션 브랜드 ‘오프닝 세레모니’를 위한 아트워크
양조위와 장만옥이 택시 뒷좌석에 앉은 장면과 양조위가 영화 말미에 동남아 사원의 나무 구멍에 자기 비밀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섞었어요. 특히 후자는 너무나 아름답고 가슴이 아파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인데, 그래서 양조위 얼굴을 지운 후 구멍을 내버렸죠. 하하. 다른 클라이언트로는 애플이 떠올라요. 애플 뮤직 플레이리스트를 위한 작업으로 ‹in my room›이 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서 이후 애플 본사와 애플 코리아와도 계속 인연을 맺게 됐어요.
‹in my room›. 애플 뮤직 플레이리스트를 위한 아트워크
애플은 피드백을 주고받는 소통 방식이 무척이나 합리적이고 잘 정돈된 케이스에요. 스트레스는 적고 결과물의 질은 높아지도록 시스템을 굉장히 잘 구축한 사례로 꼽고 싶네요. 그리고 작업을 진행하며 엄청난 시련과 함께 강한 만족감을 동시에 선사한 ‘오클루Oklou’의 애니메이션 MV도 기억에 아주 강하게 남습니다. (웃음)
오클루의 ‹I didn’t give up on you›를 위한 애니메이션 MV
공교롭게 모두 국외 클라이언트네요.
앗. 정말 그러네요. 외국 클라이언트와 국내 클라이언트는 정말 다른 것 같아요. 특히 피드백 면에서요. 외국 분들은 칭찬을 정말 적극적으로 엄청나게 해주세요. 진짜 장난 아니에요. 문화적 차이인가 싶을 정도로요.
Oh. It is interesting, but…
아니에요! but도 안 해요. ‘좀 걱정되는 부분이 있는데 혹시 내가 틀렸다면 말해줄래?” 이 정도로 피드백이 와요. 이런 피드백 앞에 긍정적인 말을 엄청나게 하는 게 외국 클라이언트의 특징이라면, 국내분들은 정말 피드백이 없어요. 외국은 ‘힘내!Cheer Up!’하는 분위기가 있거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외국 클라이언트와 함께 일하는 게 즐거워요. 아, «뉴요커The New Yorker»와 했던 작업도 기억나네요.
«뉴요커» 매거진을 위한 아트워크
이처럼 메트로폴리탄적으로 해외 클라이언트의 사랑을 받는 비법이 뭘까요?
저도 유추할 뿐이지만, 외국 분들은 눈에 바로 들어오는 캐치한 성향에 민감한 것 같아요. 음악에서도 멜로디나 벌스가 한 번에 딱 들리고 따라부르기 쉬운 노래가 유행하는 것처럼 제 작업도 그런 성격이 크게 작용한다고 봐요. 한 눈에 봐도 궁금하고, 신기하고, 호기심을 부르는 비주얼로 다가갔으면 좋겠다고 기본 세팅을 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흥미를 유발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일러스트레이터가 가진 기본적인 직업 정신과도 연결된 특권이란 생각도 들어요. 이미지가 텍스트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시대에 제 작업이 요즘 세대에게 공감을 주는 뭔가로 존재하고, 저 또한 그런 것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으니 기쁠 따름이죠.
드디어 첫 번째 파트 질문이 끝났습니다. 기분이 어떠세요?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깊게 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뻐요. 하하.
아티스트 프로젝트 02: 람한
Part 1. 작업 세계에 대한 이야기 <디지털 페인터, 그 이름은 람한>
Artist
람한(한지혜)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서울을 기반으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디지털 페인터다. 디지털 페인팅을 주요 매체로 사용하며 현재와 과거의 팝·서브 컬처와 미디어에 주입된 체험적 판타지를 그린다. 대중매체 안에서 복제되고 열화되어 진위가 모호한 유사 기억을 잘라 붙여 왜곡된 제3의 장면을 소환하고, 그것을 수용자의 체험으로 치환시키는 행위에 흥미를 느낀다. 국내외 다양한 클라이언트와 협업해 아트워크를 생산하면서, 동시에 작가로 전시에 참여하는 걸 병행 중이다.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디뮤지엄, 시청각, 우정국, 갤러리 휘슬, 스티브 터너 갤러리, 리처드 헬러 갤러리 등에서 작업을 선보였고 2020 부산비엔날레의 초대 작가였다. 2022년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Editor
전종현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학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했고,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프포스트코리아»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 «WWD 코리아» «LUXURY» 등 다양한 매체에 디자인, 건축, 공간, 라이프스타일 관련 글을 기고한다. «비애티튜드»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Photographer
김영훈은 2006년부터 사진 커리어를 시작해 2008년 미국 뉴욕의 스쿨오브비주얼아트(SVA)에 사진 전공 최우수 장학생으로 입학해 4년간 공부와 전시를 병행하며 2012년 Honor Student로 졸업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2013년 솔트 스튜디오를 열고 비주얼 아트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NYLON» 포토 디렉터를 지냈으며, 현재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IKEA 등 다양한 글로벌 기업의 제품과 라이프스타일을 사진이라는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