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잎을 땋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늘 노란 바나나만 먹었지 잎으로 뭔가 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글쎄 동남아시아에서는 바나나 잎이 꽤나 유용하다고 해요. 음식을 호일처럼 감싸서 요리하고, 그릇도 만들고, 지붕과 울타리까지 짓는다고 하니 엄청나지요. 이런 바나나가 한국에서도 재배되는 걸 보면 저 멀리 있는 동남아시아가 훌쩍 가까워지는 느낌입니다. 실제 ‘동남아시아 국가연합’을 뜻하는 아세안ASEAN 사람 70만 명이 한국에 머물고 있어요. 여러모로 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아세안과의 문화적 교류에 힘쓰는 곳이 바로 부산에 있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운영하는 KF아세아문화원입니다. 지난 8월 20일부터 아세안의 섬유미술에 초점을 맞춘 흥미로운 기획 전시 «바나나 잎을 땋는 마음으로»를 열고 있는데요. 스스로 부산 사람이라고 말하는 «비애티튜드»의 특급 필자 김도훈 님이 친히 부산을 찾아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주셨어요. 읽는 재미가 넘실거리는 터라 강추하지 않을 수 없네요. 궁금하신 분은 아티클에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바나나 잎을 땋는 마음으로» 전시 포스터
부산에 갔다. 부산에 가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다. 나는 부산 사람이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산 사람이다. 지금은 창원이 되어버린 슬픈 항구 도시다. 지금은 서울에 산다. 그런데 나는 왜 부산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일컫는가. 마산은 중학교 2학년 시절까지 살았다. 중학교 3학년 시절부터 스물일곱까지 산 곳이 부산이다. 그 뒤로는 쭈욱 서울에 살았다. 살아온 세월로 따지자면 서울이 가장 길다. 태어난 곳으로 따지자면 마산이 고향인 게 맞다. 그런데도 나는 스스로를 부산 사람이라고 쓴다. 한창 머리가 커지기 시작한 청년 시절을 보낸 장소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NC도 아니고 두산도 아니고 여전히 꼴데를 응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아니, 롯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부산을 잘 모른다. 사실 나에게 부산은 벗어나고 싶은 도시였다. 서울에 비하면 문화적으로 딱히 즐길 거리도 없었다. 그래. 바다가 있다. 바다란 유용하면서 무용하다.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술 한잔하는 즐거움은 있다. 바다가 당신에게 문화를 끼얹지는 않는다. 내가 처음으로 본 뮤지컬은 부산문화회관에서 했던 ‹아가씨와 건달들›이었다. 드물게 부산에서 열리는 공연이었다. 아직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은 ‹아가씨와 건달들›이다. 문화에 배고프던 시절, 처음으로 본 공연은 영원히 최애로 남기 마련이다. 요즘은 부산도 많이 바뀌었다. 지금 부산 북항에는 오페라하우스가 건설 중이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힙한 건축 사무소인 노르웨이의 스뇌헤타Snøhetta가 설계했다. 서울 사람들은 ‘부산에 무슨 오페라하우스’가 필요하냐고 조잘댄다. 서울 것들이란. 여러분만 오페라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여러분이 낸 세금으로 짓는 것도 아니니 입을 닫으라. 또 글이 이렇게 진행되고 말았다. 부산에 대해 글을 쓰라면 오래전 서울을 선망하던 옹졸한 지방인의 자존심과 자긍심이 기어이 터져 나오고야 만다.
어쨌든 내가 부산에 간 이유는 있었다. 돼지국밥을 먹기 위해서다. 아니다. 전시를 보기 위해서다. 돼지국밥도 먹고 왔다는 사실을 밝히기는 해야 할 것이다. 부산역 앞 본전돼지국밥은 피해 갈 수가 없다. 서울 사람들은 돼지국밥을 시키지만 내가 권하는 건 수육 백반이다. 수육 백반을 시켜야 콤콤하게 삭은 부산식 김치가 따로 나온다. 아니 잠깐. 이 글은 돼지국밥에 대한 에세이가 아니다. 전시에 대한 에세이다. 아트 에세이다. 본전돼지국밥 수육 백반이 아트이긴 하다.
«비애티튜드» 전종현 편집장이 말했다. “선배 본가가 부산이잖아.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던데, 혹시 글 써줄 수 있어?” 부산에서의 전시라니, 대체 어디라는 걸까. 부산에도 갤러리는 꽤 있다. 국제갤러리 부산점과 조현화랑은 유명하다. 부산시립미술관과 부산현대미술관도 있다. “전시장은 KF아세안문화원이야.” KF아세안문화원? 그곳이 대체 어디인가. 홈페이지를 찾았다. 한국과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 국가연합)을 잇는 공감과 동행의 문화 플랫폼을 목표로 2017년 9월 1일에 개원한 곳이란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운영하는 공간이고, 브루나이,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총 10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상설전과 함께 주기적으로 기획전이 열린다. 2017년이면 내가 부산에 살던 시절은 아니다. 부산 사는 지인에게 물었다. “너 혹시 KF아세안문화원이라고 알아?” 알 리가 없다. 부산 사는 사람들도 잘 모른다.
KF아세안문화원
KTX를 타고 2시간 반을 내려가 본전돼지국밥 수육 백반을 먹었다. 아, 이제 돼지국밥 이야기는 진짜 여기서 끝이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KF아세안문화원으로 향했다. 해운대구 백병원 근처에 있는 건물을 보자마자 잠깐 충격을 받았다. 생각보다 지나치게 큰 건물이다. 1층에 있는 전시장도 제법 근사하다. 이런 좋은 전시장을 부산 사람들도 잘 모른다. 원래 자기 지역에 있는 장소는 잘 모르는 법이다. 이를테면, 일본 사는 지인들이 서울에 올 때마다 깜짝 놀란다. 나도 모르는 온갖 장소들을 달달 외워 와서 데려가 달라고 하는 탓이다. 아니, 성수에 무슨 팝업 스토어가 있는지 나보다 도쿄 사람이 더 잘 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말이 된다. 나에게 서울은 생활의 공간이지, 관광의 공간은 아니다. 내가 도쿄 사는 친구에게 “새로 생긴 힙한 카페가 저기 메구로(目黒)에 있다던데?”라고 말해도 도쿄 친구들은 알 리가 없다. 도쿄는 넓고 사람들은 할 일이 많다.
KF아세안문화원 전경
지금 KF아세안문화원에서는 «바나나 잎을 땋는 마음으로»라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당연히 나는 바나나 잎을 땋아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는 바나나가 열리지 않는다. 아니다. 찾아보니 이것도 잘못된 정보다. 바나나는 이미 1980년대부터 제주도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수도권에서도 재배한다. 역시 기후변화는 무섭다. 바나나가 수도권에서 열릴 정도라면 이제 지구온난화는 막을 수 없는 변화다. 동해에서 오징어가 잡히지 않기 시작한 지도 꽤 됐다. 차가운 물에서 서식하는 어류라서 그렇다. 이래서 요즘 오징어가 비싸다. 말린 오징어도 비싸고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회도 비싸다. 또 글이 다른 곳으로 빠지려고 한다. 그렇다. 바나나 이야기다.
바나나는 열대 나무에서 자란다. 열대 식물은 거창할 정도로 잎이 넓다. 아세안 사람들은 오랫동안 바나나 잎으로 온갖 것을 만들어 왔다. 동남아시아 여행을 가 본 독자라면 넓은 바나나 잎으로 싼 찹쌀밥을 먹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태국의 가장 유명한 디저트 중 하나인 ‘망고 찹쌀밥’을 정말이지 사랑한다. 푸껫에서 딱 한 번 먹어본 이후로 나는 그 괴상한 맛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망고랑 밥을 섞어 먹다니 이 무슨 괴식인가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망고의 새콤함과 코코넛을 넣어 찐 찹쌀밥의 달콤함이 혀에서 뒤섞이는 순간, 아,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침샘의 고통을 느끼는 중이다. 돼지국밥 이야기를 하다가 오징어회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바나나 잎으로 싼 망고 찹쌀밥 이야기까지 하고 말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미식 에세이가 아니다. 아트 에세이다. 어쨌든 망고 찹쌀밥은 아트다.
바나나 잎으로 싼 찹쌀밥
아세안 국가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바나나 잎으로 온갖 생활용품을 만들어 왔다. 바나나 잎은 밥을 싸는 그릇뿐 아니라, 비를 피하는 지붕, 혹은 삶을 보다 미학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공예품의 재료로 아세안 사람의 삶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런 면에서 KF아세안문화원이 기획한 전시 제목이 ‘바나나 잎을 땋는 마음으로’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번 전시는 오랜 세월 자생 식물을 원료로 직조 문화를 향유하고 전수한 아세안 지역의 ‘섬유미술’을 소개한다. 섬유미술이라는 단어가 낯설다고? 미대로 유명한 홍대에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가 있다. 섬유미술과 패션 디자인이란 용어를 결합한 데에서 유추할 수 있듯, 섬유미술은 섬유를 활용한 순수미술부터 직물로 만드는 옷까지 그 경계가 광활하다.
나는 옷을 좋아한다. 패션에 살짝 미쳐있는 인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에게 패션은 아트다. 마르탱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 헬무트 랑Helmut Lang, 라프 시몬스Raf Simons 같은 전설적인 디자이너의 옷을 마치 아트 피스 구입하듯 수집한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바나나 잎을 땋는 마음으로»에 참여한 총 아홉 팀의 작품 또한 굳이 찾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이거 다 고료 받고 쓰는 글이라서 그렇다’라며 피식대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아니, 잠시만. 지금 세상에 돈 안 받고 글 쓰는 게 가당키나 하나? ‘재능기부’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이 창궐하던 시대는 이미 끝난 지 오래다.
이제 전시에 집중해 보자. 메인을 차지하고 있는 상징적인 작품은 필리핀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제럴딘 하비에르Geraldine Javier의 ‹두 명의 프리다›(2021)이다. 아크릴릭, 실, 오간자 실크로 2m가 넘는 여러 장의 천을 직조했다. 에어컨 바람을 타고 살랑이는 천의 움직임을 보자마자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렇다. ‘저 아름다운 천으로 드레스를 만든다면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하는 여배우들이 서로 갖겠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멀리서 보면 그냥 아름다운 천 다발이지만, 가까이서 한 올 한 올이 직조하는 섬세한 문양을 발견하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오게 된다. 꽃과 나무와 원숭이들 사이에 심장을 드러낸 멕시코 출신의 예술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형상이 조용히 새겨져 있다.
칼로의 대표작인 ‹두 명의 프리다›(1939)를 오마주한 이 작품의 소재는 분명 ‘고통’이리라. 칼로는 오랜 연인이었던 예술가 디에고 리베라와 고통스러운 이혼을 경험한 직후 ‹두 명의 프리다›를 그렸다. 건강한 심장을 가진 자신과 파괴된 심장을 가진 또 다른 자신이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은 20세기 회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다. 예술가는 개인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예술로 형상화하는 버릇이 있다. 칼로의 그림은 종종 나에게는 일종의 살풀이처럼 느껴진다. 하비에르는 그가 사랑하는 예술가 칼로의 가장 고통스러운 작품을 가히 아세안적인, 혹은 아시아적인 위로로 품어낸다. 나는 당신이 아라리오갤러리에서도 여러 번 전시를 가진 바 있는 하비에르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길 권한다. 그의 작품은 남성중심적인 신화를 여성의 시선으로 해체하고 재조립한다. 이런. 얼치기 미술평론가가 참여한 전시 도록에나 등장할 것 같은 표현이다. 나 또한 ‘얼치기’ 영화평론가이니 부디 용서하길 부탁드린다.
지금 쓰는 글에 전시에 나온 모든 작품을 다룰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글은 미리보기에 가깝다. 미리보기에 모든 것을 담아내면 안 된다. 영화 리뷰에 결말을 스포일러한다고 생각해 보라. 더불어 백과사전처럼 모두 세세히 소개한다면 누구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할 거라는 공포감 또한 엄습한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마음에 쏙 들었던 몇몇 작품만 더 이야기해 보자. 싱가포르에서 활동하는 티파니 로이Tiffany Loy의 ‹공간에서의 선 II›(2021)는 반구형의 투명한 유리 돔 안에 섬유로 만든 해양생물처럼 고요히 놓여 있다. 로이는 물에 녹는 성질을 지닌 수용성 원단에 자수를 놓은 후 대차게 물에 넣어버렸다. 유일하게 녹지 않은 자수만 해변에서 말라 죽어 비틀어진 말미잘처럼 3차원 형태로 살아남았다. 섬유로 만든 미술은 본질적으로 2차원에 가깝다. 로이의 작품은 사라짐으로써 도리어 2차원에서 3차원으로 확장된 세계를 알려준다.
베트남 호찌민에서 태어나 현재 뉴욕에서 활동하는 키스 카인 쯔엉Keith Khanh Truong의 ‹가짜 섬유 샘플들›(2023-2024)은 보다 크고 화려한 전시물에 조금 가려져 있지만 제대로 살펴보면 꽤 흥미로운 시도다. 뉴욕에서 독립 출판사를 설립해 운영 중인 쯔엉은 베트남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대 풀로 엮어 만든 꽃무늬 매트를 디지털로 변형하고, 컬러 리소그래피로 출력한 후 재봉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다시 엮었다. 과연 이것은 섬유미술인가 출판미술인가. «바나나 잎을 땋는 마음으로»를 구성하는 많은 작품들이 그렇다. 언뜻 보기에는 각 나라에 전승된 오랜 전통에서 탄생한 공예품처럼 다가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현재 아세안 국가의 아트신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현대적인 방식으로 전통을 재구성했다. 즉, 아주 모던하다는 소리다. 이를테면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으로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활동 중인 마르코스 쿠에Marcos Kueh의 ‹신의 눈 아래 직조 걸개›(2023)가 그러하다. 세로 4m가 넘는 이 화려한 태피스트리tapestry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익숙한 옥황상제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아, 이것은 지금의 예술이구나’ 깨닫게 된다.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쟁이로 일했던 작가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산물이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대체 여기에 왜 한국 작가가 초대받은 걸까. 신예선의 ‹바나나 잎을 정성스럽게 땋을 거야!›(2024)는 사실상 이 전시의 가장 스펙터클한 볼거리다. 전시장 내부가 아니라 KF아세안문화원 로비 계단의 높은 기둥에 거대하게 배배 꼬여 있는 이 작품은 입이 쩌억 벌어질 만큼 압도적이다. 인간의 다리 형상을 띤 초현실적인 하얀 넝쿨은 인간이 설치한 게 아니라 스스로 걸어서 KF아세안문화원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자기 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한국 작가냐고? 아니다. 그는 한국 작가가 아니다. 제주도 작가다.
나에게 제주도라는 섬은 다른 아세안 국가의 트로피컬한 섬들처럼 이국적인 장소다. 나는 처음 제주도에 갔을 때 이곳저곳에 서 있는 돌하르방을 보며 생각했다. 한때 탐라(耽羅)라고 불리던 이곳은 한반도의 일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스터섬의 석상과 닮은 돌하르방은 어쩌면 제주도가 지금은 사라진 거대한 태평양 문명의 일원이었다는 증거 아닐까. 그런 제주에서 활동하는 신예선의 작품은 다른 아세안 국가에서 온 예술가의 작품들과 훌륭하게 접합된다. 이 거대한 볼거리는 한 달 남짓 남은 전시 기간이 끝나는 순간 다시 제주로 돌아갈 예정이다. 나는 수많은 다리를 가진 이 하얀 넝쿨이 어느 날 밤 스스로 걷고 헤엄쳐서 제주로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 장면을 캔버스에 그린다면 스페인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의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1946)과 똑 닮은 모습일 것이다.
전시를 모두 둘러본 뒤 필리핀 영화감독 카를로 엔시토 카투Carlo Enciso Catu의 ‹푸소: 필리핀 사람들의 심장›(2024)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KF아세안문화원이 제작 지원한 이 짧은 단편 영화는 필리핀 세부 지역의 전통 공예인 ‘푸소pusó’를 소개한다. 코코넛 잎을 손으로 하나하나 엮으며 팔면체 형태의 주머니로 접는 푸소는 세부인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문화다. 관람객은 영화를 보면서 코코넛 잎 대신 다양한 색상의 리본으로 푸소 접기를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푸소 접기에 성공했냐고? 나는 정말이지 공예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발견하고야 말았다.
사실 나는 미대에 가려다 부모님의 반대로 실패한 예술가다. 좀 민망하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꽤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 재능을 알아본 중학교 미술 선생은 내 어머니에게 “이 아이는 보는 눈이 있습니다. 미술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간곡하게 전했다. 내 어머니의 꿈은 달랐다. 큰아들은 검사, 작은 아들은 의사가 목표인, 가히 1980년대 야망의 여성이었다. 작은 아들은 의사가 됐다. 미술을 포기한 큰아들은 결국 예술적 허영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대학 내내 영화나 보다가 영화평론가 따위가 됐다. 뭐, 자식 농사는 반타작만 해도 성공이라고 했다.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실패한 타작이다. 어쩌겠는가. 인생이란 건 원래 (부모)뜻대로 풀리지는 않는 법이다. 그래도 그놈의 검사가 되지 않은 건 정말이지 다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에서 검사라는 존재는. 아니다. 그만하자. 이 글은 정치 에세이가 아니다. 아트 에세이다.
만약 당신이 이 아트 에세이를 읽고 부산으로 향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한 가지 팁이 더 있다. 해운대가 지척이니 전시를 보고 해변에서 망중한을 즐겨도 좋을 것이다. 해변에 앉아서 여유로움을 즐기려면 입이 심심할 것이다. 부산에서 가장 잘 알려진 빵집 중 하나인 ‘옵스OPS’가 KF아세안문화원 지척에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내려가는 서울 사람들이 그토록 칭송해 온 명란바게트로 유명한 곳이다. 다 떨어지기 전에 빨리 구입하길 권한다. 참, «바나나 잎을 땋는 마음으로»는 11월 3일까지 계속된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10월 2일 ~11일)에도 열린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아트 영화를 한 편 보고, 옵스의 명란바게트를 구입해 가방에 넣은 뒤, KF아세안문화원으로 가시라. 전시장에 앉아서 푸소를 직조하다 보면 금방 배가 고파질 것이다. 자, 여기서 이 글은 멈추어야 한다. 이것은 부산 관광 에세이가 아니다. 식도락 에세이도 아니다. 아트 에세이다.
Exhibition
«바나나 잎을 땋는 마음으로»
기간: 2024.08.20 – 2024.11.03
평일 10시~18시, 주말 10시~19시 (월요일 휴관)
무료 입장
Place
KF아세안문화원: 부산 해운대구 좌동로 162
Writer
김도훈(@closer21)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다. 영화주간지 «씨네21» 기자, 남성지 «GEEK» 피처 디렉터,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으로 일했다.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에스콰이어»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유튜브 영화 채널 ‹무비건조›에 출연 중이다. 낯설고 비범한 인물들을 탐구한 『낯선 사람』(2023)과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2019)를 썼다. 최근 『패션 만드는 사람』(공저)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