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오브서울Piece of Seoul’은 대중음악평론가 김윤하 님이 최근 새롭게 발매한 한국 대중음악 앨범 중 가장 인상 깊은 피스를 꼽고, 해당 뮤지션과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입니다. 피스오브서울에서 피스는 조각(piece)이면서 동시에 평화(peace)를 뜻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태어난 새로운 음악의 조각과 여기에서 길어 올린 마음의 평화를 뮤지션의 목소리로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여덟 번째 피스의 주인공은 올해 여름 갑자기 나타난 음악 집단, ‘박쥐단지’입니다. Cha, HWI, mesani, 김도언, 김아일, 김한주, 이이언, 제이클레프 등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여덟 명의 음악가가 모여 만든 컴필레이션 ‹Bat Apt.›은 발매 후 여러모로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쉽게 타협하지 않고 꼬장꼬장하게 묵묵히 제 음악을 만들어온 이들은 대체 어떻게 모이게 되었을까요. 각자 스케줄도 바쁜데 음반은 또 어찌 만들었고요. 한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깊고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박쥐단지의 첫 움직임 ‹Bat Apt.›과 그들의 이야기를 피스오브서울에서 확인해 보세요.
소셜미디어를 통해 컴필레이션 ‹Bat Apt.›의 발매 소식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이거지!” 하는 탄성이 나왔다. 사실 아직도 왜 그런 반응이 반사적으로 나왔는지는 완벽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막연한 추측으로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오랫동안 이런 모임을 기다려 온 마음 때문이라는 점이다. 아마 분명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닐 테다. 깨달은 김에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정말이지 이런 움직임과 이런 앨범을 기다려왔다.
2024년 7월 기준으로, 앞으로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식과 방향으로 기필코 몸집을 불려 나가고야 말 음악 모임 ‘박쥐단지’에 소속된 음악가는 다음과 같다. Cha, HWI, mesani, 김도언, 김아일, 김한주, 이이언, 제이클레프. 장르로 보나 연차로 보나 그에 따른 활동 범위로 보나, 딱히 뚜렷한 공통점으로 묶기에 쉽지 않은 조합이다. 그러나 찬찬히 이들의 이름을 다시 살펴보면 문득 깨닫게 된다. 지금 이곳엔, 쉽게 타협하지 않는 꼬장꼬장한 자세로 묵묵히 제 음악을 만들어 온 덕분에 다른 누구와도 대체불가능한 꼿꼿한 이들만 모여있다는 사실을. 20년 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싱어송라이터, 지금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밴드의 프론트퍼슨, 한국 전자음악계의 숨은 보석, 고막 이전에 가슴을 울리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래퍼 등 이토록 다채로운 이들이 모여 세상 그 무엇의 방해 없이 가장 깊은 내면에서 길어낸 소리로, ‹Bat Apt.›라는 앨범을 채웠다. 숫자, 인지도, 화제성이 전부라며 모두가 아우성치는 세상에, 한 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깊고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Bat Apt.› 앨범 커버
컴필레이션compilation은 레이블 단위로 이루어지거나 헌정(tribute)처럼 특별한 목적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이번 ‹Bat Apt.›를 주도한 박쥐단지는 독립 음악가들이 자유롭게 만든 집단이라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멤버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동참하게 되었나요?
HWI: 제가 마지막으로 합류한 멤버인 걸로 알고 있어요. 처음에 한주 씨가 제게 전화해서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있는데… 하실래요?”라고 물으시길래, 저는 단순히 음악가 친구들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응했어요. 그때만 해도 음악가 친구가 거의 없었거든요. 더불어 한주 씨가 말씀한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모두 평소 흠모하던 분들이라서 저로서는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요청이었습니다.
김아일: 한주와 도언이가 이이언 님과 크루를 시작했는데, 채팅방에서 무료 가상 악기 등을 추천받고 있다고 해서 부담 없이 합류한 게 첫 시작이었어요. 이후 구성원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히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컴필레이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사실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자리를 통해 개인적으로 작업한 곡을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설레기도 했고요. 평소 친분이 있던 이이언 님, 김한주 님, 김도언 님, 제이클레프 님뿐만 아니라, HWI 님, Mesani 님, Cha 님 등 멋진 음악가들과 새로운 관계를 다지게 되어서 무척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Mesani: 저는 박쥐단지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꽤 초기 멤버였는데요. 번개처럼 연락이 뻗어나가 모인 분들을 보니 단 한 분도 빠짐없이 제가 오래전부터 존경하던 분들이었어요. 이런 여정에 함께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는 게 제 삶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더욱더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김한주: 저는 이이언 님의 제안으로 모임에 가입하게 됐는데요. 사실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기존에 진행하던 프로젝트와 건강하게 병행할 수 있을지, 제가 모임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모두에게 폐 끼칠 일 없도록 잘할 수 있을지…거창한 생각의 연속이었어요. 저와 동시에 제안받은 김도언 님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도언 님과 상의하고, 이이언 님을 포함해 박쥐단지의 초기 구성원이었던 Cha 님, Mesani 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과감히 가입하기로 했답니다. 결과적으로 즐거운 일이 된 것 같아요.
박쥐단지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임팩트가 강렬하고 직관적이라 좋더라고요. 그만큼 이름에서 파생한 이미지적인 부분 또한 상당히 중요했을 것 같은데요. 박쥐단지의 로고, ‹Bat Apt.›의 커버 등을 디자인하는 데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HWI: 저희 집단의 특성상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어요. 먼저 구성원이 8명이나 되고, 각자 개인 활동을 활발히 하므로 한날한시 같은 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거든요. 팀명이 박쥐단지니까 단체 프로필 촬영을 박쥐처럼 동굴에서 찍자는 이야기가 나왔다가…결국 예산과 스케줄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어서 다음 기회로 촬영을 미루게 되었어요. 그래서 디지털 그래픽 작업을 하는 분에게 비주얼을 맡기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죠.
‹Bat Apt.› 앨범이 박쥐단지의 이름을 걸고 발표하는 첫 번째 프로젝트인 만큼, 박쥐단지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집단의 구성원이 누구인지 알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멤버별로 박쥐 캐릭터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여러 작업자를 물색하다가, 일러스트레이터 TOIKA 님께 작업을 부탁드리게 되었어요. 발랄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는 카툰 스타일의 일러스트레이션이 박쥐라는 동물이 풍기는 분위기와 비슷하다고 느꼈거든요. 게다가 애니메이션 작업까지 능숙하셔서, 비주얼라이저 역할까지 부탁드리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로고 디자이너로 이규찬 님을 섭외한 건 도언 님의 추천이었어요. 저도 예전부터 규찬 님 작업을 봐왔던 터라, 로고 디자인에 적합한 분이라고 생각했고요. 예전 2021년 공연자로 참석했던 ‘파주자유음악잔치’의 그래픽 디자인을 맡은 분이 규찬 님이셨거든요. 포스터도 예뻤지만, 로고와 타이포그래피 또한 인상적이라 기억에 남았어요. 로고처럼 함축적인 시각물을 만드는 데 뛰어난 분이라고 생각해서 바로 섭외에 들어갔죠.
박쥐단지 멤버별 캐릭터.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Mesani, 김도언, HWI, 이이언, 김한주, Cha, 제이클레프, 김아일
멤버별 캐릭터를 활용한 아트워크
박쥐단지 로고
김한주: TOIKA 님은 실리카겔의 뮤직비디오나 라이브클립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신 분이에요. 규찬 님은 제 오래된 친구이자 동료인데요. 그래서 섭외가 결정됐다는 멤버들의 이야기를 듣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답니다.
HWI: 참, 혹시 이번 인터뷰를 통해 박쥐단지에 관심이 생긴 패션 매거진 에디터님이 계시다면, 동굴 로케이션으로 저희를 촬영해 보실 생각 없으실까요? 그때는 꼭 시간을 맞춰보도록 하겠습니다. (웃음)
꼭 연락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이이언 님이 총대를 메고 사람을 모아지 않았을까 막연히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더라고요. 박쥐단지의 첫 움직임을 기억하고 계신 분이 있으실까요?
Mesani: 처음 종환이(Cha) 형과 이이언 형이 마음을 맞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다음으로 이런 단체를 만들어 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제게 물어보셔서,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수락했습니다. 당시 저는 남쪽 바닷가 어딘가에 살고 있었는데요. 그 얘기를 듣고 바로 비행기로 날라왔어요. 그리고 그 길로 종환이 형과 함께 이이언 형을 찾아가서 예술가로서의 도원결의를 했던 게 기억납니다. (웃음)
여덟 명의 멤버를 확정하고 이번 첫 번째 앨범이 나오기까지 최종적으로 2~3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들었어요. 그사이에 어떤 사건 사고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프로젝트가 엎어질 위기라든가 말이죠.
이이언: 엎어질 위기는 없었지만, 초반 1년은 모임으로서 거의 아무런 진행이 없었어요. 리더라는 개념이 특별히 없는 수평적이고 평등한 모임이길 바라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아무도 나서서 무언가를 끌어가지 않았거든요. 결국 모두가 리더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형식적인 거수투표를 통해 제가 리더로 뽑혔습니다. 어찌 보면 아무도 맡지 않아 제가 리더가 됐다고 볼 수 있겠네요. (웃음)
이이언: 박쥐단지의 초기 실체와 체계를 함께 만들려면 멤버가 너무 많아도 어려울 것 같아서 멤버 충원은 잠정적으로 멈춘 상태인데요. 이제 박쥐단지가 나름의 모습을 갖추고 출발을 선언했으니, 다시 새로운 멤버를 찾으려고 계획 중입니다. 결론은 유동적입니다!
멤버들이 워낙 다채롭게 활동하다 보니, 박쥐단지의 구성원이 한자리에 모두 모이는 일도 힘들었다고 들었어요. 앨범 작업은 어떻게 진행했나요?
김아일: 온라인에서 진행 상황을 주고받으면서 대부분의 작업을 진행했어요. 공동 작업한 노래 ‘BAT APT.’는 가사 작업에 꽤나 어려움이 있어서 이이언 님께 다섯 번 정도 포기 전화를 드렸다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말씀드리지 못했던 기억도 나네요. 9/8 박자라는 독특한 리듬 구조에 지레 겁을 먹은 이유도 있었어요. 결과적으로는 마감에 깃든 초인적인 힘으로 가사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작업 초기에 ‘이런 내용을 써도 괜찮을까?’ 걱정하며 상상으로만 놔둔 내용을 기반으로 가사 작업을 시작했는데, 막상 생각보다 재미있는 상상으로 이어져서 즐겁게 작업을 마무리한 게 기억납니다.
방금 말씀하신 ‘BAT APT.’는 앨범에서 유일한 협업곡이에요. 이이언 님이 뼈대를 만들고, 김아일 님 제이클레프 님이 목소리를 더했는데요. 정규작보다 비교적 자유롭게 진행한 작업인 만큼, 또 다른 재미와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처음 작업할 때 제이클레프 님이 당황했다고 들었어요.
제이클레프: 이이언 님이 같이 만들 음악으로 선택지를 몇 개 주셨어요. 그 중 아일 님과 저, 이언 님 모두 함께 고른 게 ‘BAT APT.’였죠. 작업 초반에는 제 목소리로 시퀀싱한 신서사이저보다 복잡한 라인을 짜보려고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서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9/8 박자에 잘 어울리면서 신서사이저에도 어울리고, 종속적이지 않은 멜로디를 만드는 데까지 꽤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작업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쯤, 노래와 곡이 서로 잘 어울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되는 듯한 순간을 만났어요. 그게 무척 재미있었죠.
결국 그 순간을 만나려고 많은 음악가가 먼 길을 돌고 도는 것 아닐까 싶어요. 힙합, R&B, 밴드 등 다양한 형태와 장르에서 활약하는 멤버들이 함께 모여 들려주는 음악이 시(詩) 같은 감상을 전하는 전자음악이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앨범 전반에 걸친 프로듀싱이나 디렉션에 대해 여쭤봐도 될까요?
김아일: 박쥐단지의 이번 앨범은 상당 부분 전자음악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전자음악 그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앨범에 수록한 트랙을 하나하나 들여다볼 때 말씀하신 다양한 형태와 장르, 작업자 고유의 개성을 반영한 점이 잘 묻어 나오는 게 이번 프로젝트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일정을 소화하면서 박쥐단지를 위해 스스로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해낸 큰 이유이기도 해요.
김한주: 전반적으로 전체 앨범을 통일하는 조성과 89 BPM이라는 속도만 정해두고, 각자의 방식에 맡겼어요. 다들 ‘이웃집 박쥐’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경향성을 띠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Bat Apt.› 앨범 디자인
박쥐로서의 자아와 BPM, 기억하겠습니다. (웃음) 박쥐단지는 구성원 모두 상당히 진지한 태도로 음악에 임한다고 들었어요. 실제 개인 작업의 경우 ‘구도자’적인 느낌이 들 정도의 앨범이 대부분인데요. 컴필레이션에 수록한 곡을 작업하며 음악적, 장르적, 또는 태도적인 측면에서 평소 작업과 조금 다르게 고민하고 접근한 부분이 궁금합니다.
HWI: 저는 특정 장르의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차용해서 작업한 게 이번이 처음이에요. 덥스텝Dubstep 프로듀서 Benga의 ‹Diary of an Afro Warrior›라는 앨범이 초기 덥스텝의 대표작이라는 설명을 보고 찾아 들은 적이 있는데, 제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사운드가 나오더라고요. 그 후로 언젠가는 꼭 덥스텝을 만들어 보겠다고 마음먹었는데요. 그 앨범에 매료됐던 경험을 단초로 이번 곡 ‘La-ga-da-di-do’를 작업했습니다.
김한주: 저는 조금 성숙한 음악을 만들고픈 마음이 있었어요. 음악적인 성숙보다는, 음악을 만드는 과정을 좀 더 이성적으로 거치고 싶었죠. 이번 앨범에 수록한 제 트랙 ‘Life of…’는 기타, 베이스, 보컬 등에서 녹음한 첫 번째 테이크나 두 번째 테이크를 바로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직관적으로 마음에 드는 지점을 포착하면 후회 없이 바로 진행하는 과정을 거쳤달까요. 집요함이나 치기, 조급함이 감각을 무디게 하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그런 의미에서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작업에서 의도한 성숙함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것 같아요.
이이언: 저의 경우, 좀 더 창작자로서 느끼는 즐거움에 초점을 맞췄어요. ‘이런 거 나만 재미있는 거 아닐까?’ 싶은 음악적인 포인트를 군데군데 배치하니 신나더라고요. 소수의 누군가는 제가 숨긴 것을 모두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저는 ‘음악의 의미는 그런 데 있지 않지만, 어쨌든 그대들을 사랑한다’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각자의 트랙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나, 나만의 킬링 파트를 꼽아본다면요?
Mesani: 제 노래 ‘Caveman’은 한 마리의 박쥐가 세상을 관찰하는 내용이에요. 자극을 갈망하는 늑대인간과 인조적인 4기통 바이크 엔진 소리를 밤새 날아다니며 보고 듣고 또 경계하는 이야기인데요. 제가 연출한 일종의 극에서 상정한 가상의 장면이 청취자에게 비슷하게 펼쳐지길 원했어요. 그래서 노래, 즉 극 안에서 장소가 바뀌며 사운드도 함께 바뀌는 느낌을 그대로 받을 수 있도록 신경 썼습니다. 특히 곡 후반부에 여명이 다가오면서 박쥐가 조용한 동굴로 되돌아온 후 거꾸로 매달려 잠들기 전 외로운 흥얼거림을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요. 그 부분을 잘 들어보면, 앨범에서 최소한의 통일감을 부여하기 위해 공유한 89 BPM 속도와 E♭ 키의 제약에서 잠시 벗어나 있습니다. 템포도 살짝 다르고 보컬의 피치도 일부러 미묘하게 어긋나게 불렀거든요. 불안하고 외로운 느낌을 자아내도록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극의 완성을 위한 잠깐의 일탈이랄까요.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킬링 파트입니다.
HWI: 할 수 있는 만큼 편곡을 진행했다고 믹싱 작업에 들어갔는데, 하면 할수록 음악이 채워지기는커녕 오히려 텅텅 비더라고요. 아마 각각의 소리가 제자리를 찾다 보니 그랬던 거겠죠? 여튼, 이런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다양한 샘플을 레이어링했는데요. 특히 훅hook 파트에 나오는 작고 귀엽고 자글거리는 소리 샘플을 발견해 보길 권합니다. 여러분의 양쪽 귓바퀴 끝에 그 소리를 몰래 매달아 놨답니다.
김아일: 제 곡 ‘Hymn For Pareidolia’ 후반부에는 피치pitch를 변형한 보컬이 나오는데요. 어떤 부분은 샘플링이고, 어떤 부분은 제 목소리로 만들었어요. 서로 다른 두 목소리를 동일하게 느낄 수 있도록 작업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더라고요. 그 부분을 감안해서 재미있게 들어주시면 감사합니다.
김한주: 제 트랙에 깔린 베이스 톤은 유일하게 제 소유가 아닌 악기로 녹음했어요. ‘펜더 커스텀숍Fender Custom Shop’의 피노 팔라디노Pino Palladino 에디션을 필로스플래닛Philos’ planet 신재민 대표님의 레코딩 세팅 아래 진행했어요. 믹싱 때도 달리 건드릴 게 없어서 녹음한 소스 거의 그대로 사용했는데,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이이언: ‘Love Doesn’t End Well’의 앞쪽 버스 파트의 스테레오 필드를 뿌옇고 두툼하게 채우는 코드 신서사이저 사운드로 만들기 위해 무척 공을 들였습니다. 소리를 얇게 펴서 바른 추상화처럼 어떤 평면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으로 작업했어요.
Cha: 제 곡 ‘love poem’을 들어보시면 2분 20초경, 20초 정도의 긴 공백이 있어요. 곡을 작업하면서 ‘이제 어느 정도 거의 다 왔구나’라고 느끼는 바로 그 부분의 완벽한 타이밍을 찾기 위해 노래를 온전히 듣는 데에만 3개월 정도 몰두한 기억이 나네요. 석 달 동안 정말 여러 형태의 숨을 마시고 뱉으며 분명 어디선가 ‘그 순간’을 만날 거라는 믿음 하나로 헤드셋 하나만 든 채 여기저기 걸어 다녔어요. 어디를 그렇게 다녔는지, 5월 어느 날에는 만보기(萬步機) 수치가 무려 1만 8279보를 기록하더라고요! (웃음) 이런 공백에 대한 고민은 지금껏 작업하며 저도 처음 겪는 종류라서, 온전히 감각하는 데 더욱더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왠지는 몰라도 제가 마시고 뱉는 숨에 분명히 열쇠가 있을 거라는 느낌이 계속 들더라고요. 그렇게 한참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드디어 딱 필요한 숨을 온전히 만났습니다. 그제서야 수정하고 싶은 마음 없이 편안하게 곡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이번에는 자기 트랙을 제외하고, ‘이거 정말 좋다’라고 느낀 트랙에 대한 의견을 받아볼까요?
HWI: 첫인상이 가장 강렬했던 곡은 이이언 님의 ‘Love Doesn’t End Well’이었어요. 이이언 님이 프로듀싱한 ‘BAT APT.’도 마찬가지였고요, 공간계 이펙터를 거의 쓰지 않고 일부러 평평하게 사운드를 디자인했거든요. 그 선택이 굉장히 과감하게 다가왔어요. 칩튠chiptune을 연상시키는 ‘뿅뿅’ 신서사이저와 대비되는 강렬한 훅 편곡도 멋졌고요.
Mesani: 좀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마스터링에 들어가기 전 최종 믹스본 형태로 공유된 트랙들을 순서대로 들으면서 중간중간 계속 눈시울을 붉히다가 마지막에 결국 울어버렸습니다. (웃음). ‘모두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구나’라는 감정이 심장의 밑바닥부터 온몸에 요동쳤거든요. 그만큼 모든 트랙이 정말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으니… 제게 다소 짙게 다가왔던 트랙으로 ‘BAT APT.’ 와 ‘La-ga-da-di-do’를 꼽고 싶습니다. 우선 ‘BAT APT.’는 박쥐단지 내부에 세운 기념비 같은 트랙으로 다가왔어요. 이이언 형이 연출한 어려운 변박에 어색함 없이 착 달라붙는 김아일 님과 제이클레프 님의 목소리가 무척 귀여운 방식으로 표현됐어요. 이게 제 첫 번째 눈물 포인트였고요. (웃음) 다섯 번째 곡인 ‘La-ga-da-di-do’를 듣고 ‘HWI 님께서 이번에 칼춤을 추셨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3/4 박자에 BPM도 그리 빠르지 않아서 사뭇 생소하게 다가올 법한 덥스텝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반가웠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장난꾸러기 신 헤르메스Hermes가 떠오르는 곡이었어요.
김한주: 전 Cha 님의 ‘love poem’을 꼽겠습니다. 음악을 듣다 보면 음악가가 어떤 고민이나 스트레스를 겪으며 완성에 도달했는지 떠오르곤 하는데요. ‘love poem’은 어떤 결정 사이에서 Cha 님이 했을 법한 고민이 아름답게 번역돼 저에게까지 수월하게 전달된 좋은 곡이라고 생각해요. 후반 뮤트 구간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소리를 고르고 연주하고 배치하는 일련의 과정에 담긴 정성이 느껴졌어요.
김아일: 저 또한 종환 님의 ‘love poem’이 가장 좋았습니다. 강렬한 감상이 있지만 혼자 간직하고 싶어서, 곡의 훌륭함에 관한 설명은 한주의 말로 대신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이언: 저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HWI님은 굳이 분야나 계열을 나눈다면 저와 같은 분야(?)의 음악가라고 생각해요. ‘La-ga-da-di-do’를 들으면서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직이라서 알아챌 수 있는 경외감의 포인트를 무수히 만났습니다. 정말 감탄하며 듣게 되는 곡이에요. 반대로 김아일의 ‘Hymn For Pareidolia’는 저와 다른 분야의, 제가 만들어낼 수 없는 어떤 무드를 창출하는 곡이라서 너무나도 멋졌습니다.
Cha: 저는 스스로 사랑이 많은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편안한 마음을 느껴본 적이 거의 한 번도 없거든요. 일어나자마자 저를 혼내고, 무언가 해야 하는데 아직 못다 한 마음을 느끼며 조급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 더 많은 사랑을 네게 줄게’ 말하면서 스스로를 달래곤 해요. 그런 저에게 도언의 곡 ‘2003’의 가사와 목소리, 멜로디가 마음 깊이 들어왔어요. 요즘도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다그칠 때가 많은데, ‘2003’을 자연스레 흥얼거리게 되더군요. 이런 게 음악이 전하는 위로가 아닐까 싶어요. 김도언에게 이 자리를 빌려 그런 음악을 만들어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 곡이 더 있어요. 얼마 전 이이언 형, mesani, 이선 누나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다가 이번 ‹Bat Apt.› 앨범 중 가장 취향인 곡을 소신 발언하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전곡이 다 좋은데, 그래도 꼭 한 곡만 골라야 한다면 8번 트랙! ‘Hymn For Pareidolia’입니다’라고 대답한 기억이 나요. 곡 후반부에 퍼지는 디테일한 목소리를 처음 듣고 소름이 돋았어요. 찍소리도 안 나오는 기분 있잖아요. 그때 제 표정을 아일 형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을 정도예요.
자기 곡보다 남의 곡 얘기할 때 더 열띤 것만으로도 박쥐단지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훈훈합니다. (웃음) 비록 음악가는 아니지만, 저는 박쥐단지가 앨범을 발표하며 ‘더 아름답고 흥미로운 음악을 더 많이 알리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는 목적에 크게 공감했어요. 특히 제가 하는 일의 특성 때문인지, ‘더 많이 알린다’라는 표현이 와닿더라고요. 아무리 좋은 음악을 만들어도 누군가 듣거나 알아주지 않으면 창작자로서 더 나아갈 동력이 사라지거나 때로는 의미마저 퇴색하잖아요. 음악가가 창작뿐 아니라 자기 음악을 스스로 알리는 것, 나아가 그렇게 ‘아는 사람’이 많은 상황이 자연스레 권력화되는 현실에 대한 고민까지 박쥐단지 프로젝트의 뿌리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까요?
김한주: 말씀하신 권력화에 관한 박쥐단지 구성원이 지닌 의견은 다양할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게 박쥐단지 프로젝트의 성향이나 뿌리까지 닿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흔히 대중성 혹은 상업성이란 단어가 예술성과 대치되는 것처럼 종용하곤 하잖아요. 그런 관계에 대한 정의나 연구가 박쥐단지 프로젝트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개인적으로 박쥐단지의 시도가 유의미하다고 느끼는 가장 큰 부분 중 하나는 대중음악계에서 저희만이 점유하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데요. 굉장히 좋은 전망대이자, 실험실이 되어줄 것 같습니다. 질문해 주신 내용 또한 지속적으로 답변을 만들어보도록 할게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박쥐단지에 ‘모임’이라는 단어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혼자보다 함께라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HWI: 일단, 외롭지 않아서 좋습니다. 사실 작년 초에 우울함이 극에 달했던 적이 있었는데, 우울의 원인이 고립감이라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됐어요. 그때부터 저 자신을 살리려고 주변 음악가와 교류하기 시작했는데요. 필연적으로 홀로 있는 시간이 길 수밖에 없는 프리랜스 창작자에게 가장 필요하지만 쉽게 무시하는 게 바로 집단에 대한 소속감인 것 같아요. 내향적인 사람이든, 인간에 대한 혐오가 깊은 사이든, 그 어떤 사람이든 간에 최소한의 사회적 교류가 우리 삶을 지켜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박쥐단지는 제게 일종의 민간 복지서비스나 다름없습니다!
Mesani: 예술인이 어떤 집단에 애정을 가지면서 소속감까지 느낄 수 있는 건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20대 중후반에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전에는 온갖 일을 했던 지라 어디서든 일자리에 관한 소속감을 느끼기 힘들었거든요. 그런 면에서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같은 집단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외로움을 비롯해 부정적인 감정이 과하게 몸을 부풀리며 엄습해 올 때, 의지할 수 있는 완충재가 되어주는 것 같아요.
김아일: 나름의 기준으로 엄선했다지만, 박쥐단지도 어찌 보면 우연히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에요. 이렇게 서로 모인 것만으로 외로움을 덜거나 의지가 될 수 있다니, 인연이라는 게 새삼 참으로 신기하고 또 이런 마음에 일조할 수 있다는 점에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박쥐단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각 구성원의 업무 처리 방식을 굉장히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데요. 각자 업무를 대하는 태도와 처리 방식이 완전히 다르고, 익숙한 일만 맡아서 할 수 없는 환경이다 보니 처음 처리하는 일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업무의 강도는 어떻게 설정하고 어떤 순서로 진행해야 하는지 등등 하나 걸러 하나가 모두 넘어야 할 산이더라고요. 지금까지 다른 이와 함께 이런 업무를 처리할 기회가 적었구나, 싶기도 하고요. 이런 모든 면모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커다란 동기부여로도 작용하고요.
마지막으로, 박쥐단지라는 집단을 강하게 결속하는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이언: 음악.
김한주: 저도 음악이요.
김아일: 인정.
HWI: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들을 해치우며 피어난 전우애?
Mesani: 저도 전우애!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이지 않을까요?
Artist
박쥐단지(@bat_apt)는 한 마디 흔한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예술가 커뮤니티, 뮤지션 콜렉티브, 협업 플랫폼 등 다양한 표현으로 대중에 소개되는 이들은, 음악을 너무 사랑해 결국 음악을 하게 되고만 ‘음악 너드’ 모임이라는 표현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 거기에 서로의 음악을 존중하는 따뜻한 마음을 더하면 조금 더 완벽할 지도. ‹Bat Apt.›라는 컴필레이션을 발표하며 첫 움직임을 보인 박쥐단지는 앨범 발매를 기준으로 Cha, HWI, mesani, 김도언, 김아일, 김한주, 이이언, 제이클레프 등 총 여덟 명으로 구성됐다. 2024년 여름 한국 대중음악계의 가장 흥미로운 움직임 중 하나로 주목받는 박쥐단지는 앞으로 추가 멤버 영입은 물론, 음반 발매나 공연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로 가지를 뻗어나갈 예정이다.
Writer
김윤하(@romanflare)는 K팝에서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관해 쓰고 이야기하는 대중음악평론가다. 다양한 온오프라인 매체에 글을 기고하거나 출연하면서, 가끔은 작가 겸 기획자, 음악 콘텐츠 프로듀서로 일한다. 2023년 TVING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K-POP GENERATION›에 스토리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현재 «한국일보» «국민일보» «시사IN» «채널예스»에 칼럼을 연재하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사랑과 음악이 끝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