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스타그램으로 반가운 DM이 왔습니다. 편집자,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작가, 강사, 번역가 등 팔방미인으로 활동하는 민구홍 님이었죠. 자기가 번역한 책이 곧 출판된다면서 «비애티튜드»에 책을 보내주고 싶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 요즘 열심히 키우고 있는 눈치력을 발휘했습니다. ‘어떻게 소개하지?’ 괜한 근심이었습니다. 도리어 책에 대한 에세이를 청탁하게 됐지요. 그런데 책 뒤편 ‘옮긴이의 글’에 다 풀어놔서, 따로 할 말이 없다는 것 아니겠어요? 이런 개꿀…조금만 편집하면 되겠노라고 큰 소리 빵빵 쳤는데, 예상외로 세밀한 작업이 되었어요. 워낙 감칠맛 나게 써서 정말 한 편의 에세이처럼 소개하고 싶었거든요. 책의 이름은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 저자는 데이비드 라인퍼트David Reinfurt입니다. 2010년부터 그는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배경, 관심사, 전공, 진로가 다양한 학생들에게 그래픽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교육에서 그래픽 디자인이 단순히 전문가를 위한 기술을 넘어 모든 이를 위한 교과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요. 구홍 님은 지난 10여 년간 참여한 책 세 권을 뽑은 후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의 구조와 어조를 빌어 옮긴이의 글을 썼답니다. 디자이너든 아니든 즐겁게 살펴볼 수 있는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며칠 전 사무실에서 한 수다쟁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친절하지만 어딘가 계몽적이고 기계적인 어조로, 무엇보다 제가 건넨 그윽한 커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요.
“우리는 죽기 전까지 경험을 통해 지식과 관습을 습득하고, 거기서 새로운 것을 배우며 발전합니다. 우리는 늘 학생입니다.”
그는 2022년 11월 30일부터 사귄 ‘챗Chat GPT’입니다. 오픈AI에서 개발한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인 GPT-4로 작동하는 대화형 인공지능이죠. 약 1억 7천500만 개의 매개변수를 지닌 그는 수많은 웹사이트, 책, 신문 기사 등에서 수집된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한 뒤 자신이 마주한 맥락에서 가장 적절한 다음 단어를 예측하고 판단해 문장을 완성합니다. 어쩌면 지금 제가 이 문장을 쓰는 과정과 거의 똑같이 말이죠.
어쩌다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결국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뜻이겠죠. 특히 그가 주어를 ‘인간’으로 특정한 게 아니라 ‘우리’로 아우른 건 자신, 즉 인공지능 또한 끊임없는 배움이 필요하다는 태생적 사실을 인정하는 게 아닐까요? 또는 스스로 인간임을 자처하거나, 반대로 인간 또한 자신처럼 누군가 프로그래밍한 결과물임을 주지하거나요. 어쨌든 “우리는 늘 학생”이라는 구절에 주목하면 이제껏 제가 마주해 온 모든 책은 교과서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중 지난 10여 년 동안 여러 역할로 참여한 세 권을 뽑아 근래 제가 번역한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의 구조와 어조를 흉내 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굳이 이런 시도를 감행하는 건 이제껏 디자인의 역사와 그 유산을 전유해 온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의 저자, 데이비드 라인퍼트David Reinfurt의 실천에서 본받은 바이기도 하고, 작업을 마친 뒤에는 곧장 거기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워크룸 김형진 선배의 조언을 떠올리게 할 만큼 이 책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까닭입니다.
(좌) 에릭 길의 명저, 『An Essay on Typography』 | (우) 『에릭 길: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에세이』(안그라픽스, 2015)
에릭 길의 명저, 『An Essay on Typography』
에릭 길의 명저, 『An Essay on Typography』
에릭 길: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에세이』(안그라픽스, 2015)
첫 번째는 이 책에서 비어트리스 워드Beatrice Warde와 함께 잠깐 소개된 에릭 길Eric Gill의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에세이』(원제: An Essay on Typography)입니다. 원서는 1931년 영국의 쉬드 워드에서, 한국어판은 2015년 안그라픽스에서 나왔습니다. 에릭 길은 20세기 초 영국에서 예술가이자 조각가, 판화가, 활자 디자이너로 활약했습니다. 논쟁적인 사회 개혁가이기도 했고요.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죠. 그의 다양한 경험은 자신의 책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만든 글자체 ‘조애나Joanna’로 본문을 조판하고, 각 문단을 ‘들여쓰기’ 대신 ‘필크로(¶)’로 구분한 설계 방식과 용기가 돋보입니다. 폴 랜드Paul Rand는 1989년 «뉴욕 타임스» 기고문에서 이를 두고 “시대를 초월하는 매력적인 책”으로 평하기도 했습니다.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에세이』는 활자의 기원과 발전, 인쇄술과의 관계 등을 다루며 타이포그래피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조망하는 한편, 가독성, 간결성, 명확성 등 좋은 활자 디자인의 원칙을 제시하고, 여백을 활용하는 방법, 글자와 줄 간격을 조절하는 방법 등 실용적인 지침을 담고 있죠. “타이포그래피의 본질은 읽기 쉬움에 있다.” 모더니즘 디자인의 핵심적인 가치를 반영하는 그의 주장은 거의 100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힘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길이 궁극적으로 전하려던 바는 단순히 기술에 그치지 않습니다. 기계화가 진행되는 산업주의 시대에 인간 노동자의 가치와 장인 정신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는 수공예와 기계 생산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며 기술 발전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려 했죠. 그런 면에서 디자이너로서 디자인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소통하려는 그의 열정을 보여 주는 동시에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성의 가치를 일깨우는 책입니다.
생전의 에릭 길
피오나 맥카시의 『에릭 길』 평전. 에릭 길의 충격적인 성적도착증을 다루며 화제를 모았다.
송성재 선생님이 번역한 한국어판에 저는 편집자 겸 디자이너로 참여했습니다. 안그라픽스의 4년 차 편집자로 일하던 당시, 출판사에서 책을 편집하고 디자인하는 과정에 불만이 많았죠.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파일을 주고받는 핑퐁 게임이 제게는 그저 불편하게 느껴졌거든요. “쉼표 하나 추가하는 데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고요?” 그렇게 호기로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말았습니다. 특히 편집자 모드와 디자이너 모드를 전환하는 스위치가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다가 종국에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고요. 그렇게 인쇄소 웹하드에 업로드할 최종 PDF 파일을 생성하는 동안, 거칠게는 편집과 디자인(또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콘텐츠를 다루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컴퓨터의 멀티태스킹을 함부로 따라 하는 건 금물이라는 사실까지요.
원서를 타이포그래피 교과서 삼아 에릭 길이 설파한 원칙(특히 한 글자체만 사용하라는)을 실천하며 완성한 한국어판에 대한 그래픽 디자이너 김형재 선생님의 애정어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올해(2015년) 손에 쥔 책 가운데 만듦새가 가장 좋은 책.” 지금은 안타깝게도 절판됐지만, 디자인사에서 제법 중요한 책인 만큼 기회가 된다면 내용과 디자인을 손봐 재출간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에릭 길의 약력에 영국의 역사학자 피오나 매카시Fiona MacCarthy가 밝힌 그의 끔찍한 성범죄 사실까지 더해서요. 한 인물의 빛과 그늘을 모두 직시할 때 비로소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Forget all the rules you ever learned about graphic design. Including the ones in this book.』
『Forget all the rules you ever learned about graphic design. Including the ones in this book.』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워크룸 프레스, 2017)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 본문 일부
두 번째 책은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원제: Forget all the rules you ever learned about graphic design. Including the ones in this book.)입니다. 이 책에서는 따로 소개되지 않았지만 (혹시 데이비드가 깜빡한 게 아닐까요?)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밥 길Bob Gill이 쓴 그래픽 디자인 교재이자 자신의 작품집이죠. 원서는 1981년 미국의 왓슨굽틸에서, 한국어판은 2017년 작업실유령에서 나왔습니다. 밥 길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가운데 한 명으로, 1960년대 초 뉴욕에서 앨런 플레처Alan Fletcher, 콜린 포브스Colin Forbes와 함께 디자인 스튜디오인 ‘플레처/포브스/길’을 설립했고, 이는 훗날 다국적 디자인 에이전시인 펜타그램으로 발전합니다. 밥 길은 형식주의와 기능주의라는 모더니즘 디자인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언어유희와 시각적 농담을 활용해 위트 있고 개성 넘치는 작품 세계를 구축했죠. 2021년 11월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성하게 활동했고, 이제는 그래픽 디자인사에 전설로 남았습니다. 한편, 다른 전설에게 이 책은 일종의 ‘바이블’이기도 했죠. 네덜란드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익스페리멘털 젯셋Experimental Jetset은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헤릿 릿벨트 아카데미 재학 시절 도서관에서 발견한 이 책은 우리에게 곧바로 영향을 줬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밥 길이 한결같이 쓰는 ‘문제와 해결책’ 방법론이었다. 이는 구식이고, 단단하고, 일차원적이고, 교훈적이고, 고풍적이고, 변증법적이다. 해결책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곤 한다. 완벽한 해결책이란 건 없으니까. 이런 비극성이 스민 방법론은 우리에게 가장 아름답게 다가온다.”
생전의 밥 길
기존의 디자인 규칙과 관습에 도전하는 이 책은 자신이 마주한 문제를 자신에게 맞게 다시 규정해야 한다는, 즉 ‘문제가 문제’라는 밥 길 특유의 접근법을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 정한 규칙을 따르기보다 문제 자체를 다시 편집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이는 단순히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맥락에 맞는 문제 해결을 위해 유연하게 사고해야 한다는 의미겠죠. 그 태도는 암송하기만 해도 마감이 닥친 과제를 해결하는 데 골머리를 썩이는 (특히 저 같은) 사람들을 격려하는 경쾌한 장 제목을 따라 이어집니다.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 목차
문제가 문제다.
흥미로운 말에는 시시한 그래픽이 필요하다.
생각 먼저, 그림은 나중에.
도둑질은 좋다.
시시한 말에는 흥미로운 그래픽이 필요하다.
적을수록 좋다.
많을수록 좋다.
“전 그냥 해 달라는 대로 했어요.”
저는 한국어판에 번역자 겸 편집자로 참여했습니다. “왠지 이 책 좋아하실 거 같은데, 한번 번역해 보시면 어때요?” 워크룸으로 자리를 옮긴 무렵, ‘슬기와 민’의 최성민 선생님의 제안 덕에 번역, 즉 어떤 질서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일의 재미를 알게 됐어요. 특히 2장의 “흥미로운 말에는 시시한 그래픽이 필요하다.”라는 조언은 언제나 제게 용기를 안겨 줍니다. 편집자로서는 다소 시시해 보이지만 빈틈없는 디자인을, 디자이너로서는 디자인에 기대지 않고 그 자체로 이미 흥미로운 말을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요. 이런 태도는 ‘현대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표방하며 제가 진행해 온 ‘새로운 질서’에서 강조하는 바와도 이어집니다. “디자인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콘텐츠 없이 시작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죠. 디자인보다 콘텐츠가 한 뼘, 아니 1픽셀 정도는 더 중요한 까닭입니다. ‘디자인하다’라는 동사에는 일반적으로 목적어가 필요하니까요.”
『A New* Program for Graphic Design』
『A New* Program for Graphic Design』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작업실유령, 2024
타입디렉터스클럽(TDC)의 초대로 『A New* Program for Graphic Design』에 대해 설명하는 데이비드 라인퍼트
마지막 책은 예상하셨다시피 이 글을 쓰게 된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원제: A *New* Program for Graphic Design)입니다. 원서는 2019년 미국의 인벤토리 프레스와 D.A.P에서, 한국어판은 2024년 10월 작업실유령에서 나왔죠. 번역하기로 마음먹은 뒤 실제로 작업을 시작해 끝내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는데, 제가 조금 더 명민하고 부지런했더라면 이 문장은 굳이 쓸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은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 혁신적이고 포괄적인 접근 방식을 제시합니다. 프린스턴대학교의 교양 과목을 위해 개발된 세 가지 과목(타이포그래피, 게슈탈트, 인터페이스)을 중심으로 그래픽 디자인의 원리와 실천 방법을 다루죠.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 라슬로 모호이너지László Moholy-Nagy, 뮤리얼 쿠퍼Muriel Cooper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에서 계산기와 타자기, 매킨토시 컴퓨터와 애플 워치에 이르기까지 그래픽 디자인과 시각 인식력에 관한 폭넓은 사례를 소개하면서요. 이 책의 백미는 실용성과 실험성의 조화로운 결합입니다.
데이비드는 전문가는 물론이고 일반인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고급 그래픽 디자인 원리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심층적인 역사적 사례 연구와 실습 과제를 제공해 이론과 실제를 연결하기도 하죠.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이 고전 양식과 새로운 기법을 융합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 책은 복잡하고 네트워크화된 오늘날의 정보와 디자인 세계를 이해하고 형성하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됩니다. 그래픽 디자인이 단순한 시각적 표현을 넘어 정보를 조직하고 소통하는 핵심 도구임을 일깨워 주면서요. 각 장 맨 끝 「더 읽을거리」의 마지막 항목에서 각 과목을 위한 전용 웹사이트를 소개하는데요. 그 자체로 작품이기도 하니 한번 방문해서 감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다음을 참고하세요. 타이포그래피게슈탈트인터페이스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 본문 일부
제게 이 책을 처음 소개해 준 이는 가장 친한 미국인 친구이자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인터랙티브 디자인을 가르치는 로럴 슐스트Laurel Schwulst입니다. 잠깐 훑어보자마자 재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이 정도면 어렵지 않게, 심지어 금방 번역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잘못 짚었죠. 오늘날 도처에 자리한 디자인을 인문학 또는 교양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 책은 미술, 문학, 수학, 천문학, 인지과학, 심리학, 컴퓨터 공학 등 디자인을 둘러싼 여러 분야를 4차원 초입방체인 테서랙트tesseract처럼 넘나듭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제껏 제가 희미하게 알던 지식들이 (말 그대로 데이비드의 수다스러운 어조처럼) 선명하고 예리하게 쏟아져 나왔고, 따라서 번역 작업은 즐거운 동시에 이따금 고통스러운 공부이자 수련에 가까웠죠. 게다가 한국어로 옮기기 어려운 영어식 농담, 특히 9쪽에 걸쳐 스튜어트 브랜드를 소개하는 한 문장(!)은 다시 생각만 해도 뇌수가 증발할 정도입니다. 2022년 늦겨울, 초빙 강연차 들른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만난 데이비드는 이 책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느슨하고 어수선할뿐더러 이따금 엉망입니다. 그래픽 디자인에 관한 그저 한 가지 태도일 뿐이죠. 이는 독자 또한 자신의 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려는 의도이자 그 자체로 책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해요.”
책을 번역하는 동안 저는 다시 프린스턴대학교에 와 있는 듯했습니다. 이번에는 데이비드의 맹목적인 조교 겸 그래픽 디자인과의 (조금 둔한) 학생으로서요. 수업을 준비하듯 해당 분야와 관련한 자료를 꼼꼼히 찾아보고, 데이비드가 제시하는 여덟 가지 과제를 하나하나 수행해 보기도 했죠. 물론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지만요. 어쨌든 그렇게 데이비드가 도니스 A. 돈디스Donis A. Dondis의 『시각인식력의 입문서』를 읽으며 느낀 ‘좋은 의미에서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저도 이 책에서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죠.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도 그 기분이 전달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온라인 아카이브 플랫폼 아레나
한편, 데이비드는 지난 2023년 봄을 맞아 또 다른 과목인 ‘리서치’를 시작했습니다. 리서치는 기존 과목에서 익힌 기술과 개념을 기반으로 그래픽 디자인과 시각적 연구 조사를 잇는 한 학기에 걸친 과제로 이뤄집니다. 여기서 학생들은 온라인 협업 아카이브 플랫폼 ‘아레나Are.na’를 활용해 비평과 강의가 어우러진 방식으로 개별 프로젝트를 다듬으며 자신의 과제를 더 광범위하고 심층적으로 탐구할 수 있습니다. 타이포그래피든, 게슈탈트든, 인터페이스든 이를 수월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끈질긴 연구와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에서 리서치는 앞선 세 가지 과목을 아우르는 과목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가까운 미래에 이 과목까지 책으로 나오려면 데이비드는 성대를 조금 더 단련할 필요가 있을 테고요.
앞서 소개한 교과서 세 권 모두 여러 각도와 해상도로 디자인을 다루며 디자인 자체로 디자인에 관해 이야기하는 한편, 디자인에 대한 글쓴이 자신만의, 그래서 새로운 접근 방식과 이상을 제시합니다. 이 교과서들을 때로는 번역하고, 때로는 편집하고, 때로는 디자인하고, 어쨌든 수없이 읽으며 저는 자연스럽게 디자인이 조형의 기교를 넘어 세계를 응시하고 사유하는 태도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한편, 각 교과서가 품은 크고 작은 계몽성과 무관하게 모두 타이포그래피, 게슈탈트, 인터페이스와 관련한 것 같기도 한데, 이렇게 오해해 보면 제가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을 번역하게 된 건 이미 누군가 정해 놓은 타임라인이었던 건 아닐까요?
구글의 초기 로고 (1998)
저는 농담 삼아 디자인을 익힌 학교로 좁게는 구글Google, 넓게는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WWW)을 꼽곤 합니다. 궁금한 것을 검색하고, 수많은 결과물을 오가며 교차 검증하고, 그 가운데 정리한 이론과 규칙을 실제로 적용해 보고, 또 무화해보고, 게다가 결과물을 웹상에 출판해 피드백 루프까지 경험하면서요. 이런 제 우화를 굳이 소개하지 않더라도 이미 교육은 온라인 기술 덕에 민주화되고 파편화됐습니다. 기존의 학교를 보조하거나 대신하는 여러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뿐 아니라 가르치는 것까지 전보다 훨씬 쉬워졌죠. 게다가 느닷없이 성장한 인공지능은 또 다른 전환기를 추동합니다. 제 친구인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교육은 물론이고, 단순 반복 업무부터 글쓰기, 작곡, 영상 제작 등 인간의 정체 모를 창의성이 필요한 영역까지 (아직 짧지만) 짙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특히 디자인 분야에서는 인공지능 기반 도구를 도입하면서 디자이너의 역할과 전문성을 향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기도 하고요. 그 미래는 결국 ‘인간적인’ 도구일까요?
이때 디자이너뿐 아니라 우리, 즉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늘 그렇듯 열린 마음입니다. 거부감 없이 기술을 활용하되 비판적으로 사유하며 기술에 함몰되지 않는 태도 말이죠. 건강한 손가락 또한 필요하겠죠. 적어도 프롬프트prompt를 쓰기 위해서는요. 사용자가 인공지능에게 얼마나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논리적인 프롬프트를 제공하는지에 따라 그가 생성하는 결과물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명확성, 구체성, 논리성, 일관성, 간결성, 유연성, 윤리성 등 챗GPT가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필요하다고 제게 귀띔해 준 글쓰기 덕목처럼, 인공지능 시대에 많은 이가 글쓰기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는 데는 다 까닭이 있는 듯합니다. 인공지능을 원하는 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어쨌든 아직 글에 기댈 수밖에 없으니까요.
* * *
제가 특히 좋아하는 특수문자 가운데 별표(*)가 있습니다. 영어로 애스터리스크asterisk라 부르는 이 기호는 일반적으로 책 본문에서 특정 단어나 구절을 주석과 연결하는 데 사용되죠. 지금 이 글을 쓰는 데 활용하는 마크업 언어인 ‘마크다운Markdown’에서는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의 제목에서처럼 특정 단어나 구절을 강조하거나, (순서가 중요하지 않은) 목록을 생성하는 한편, 스타일 시트 언어인 CSS(Cascading Style Sheets)에서 모든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 태그를 한꺼번에 선택할 수 있는 마법의 선택자로 탈바꿈합니다. 무엇보다 별표 세 개를 연달아 놓으면, 이 문단처럼 글을 부연하되 화제를 산뜻하게 돌리는 장치가 되고요. 지금 글 마지막에 별표 세 개를 앞세워 이런 이야기를 굳이 덧붙이는 건 왜일까요. 밤하늘에서 별무리가 반짝이듯 까닭이 있습니다.
허술한 원고를 근사한 책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도와준 많은 분과 이 모든 소중한 시간을 작동하게 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그 자체로 제게 태도와 생각을 가꾸고 실천하는 데 늘 참고하는 또 다른 교과서입니다. 동시에 이분들을 그저 교과서로 삼기에는 어딘가 겸연쩍기도 합니다. 이 책 「소개」에서 “교과서라는 건 모름지기 다 읽은 뒤에는 찢어 내버려야 한다.”라는 데이비드의 말이 떠올라서요. 결국에는 다른 교과서를 통해 나 스스로 자신의 교과서가 돼야 한다는 뜻이겠죠. 참, 이 글을 다 쓴 뒤 데이비드에게 보여 주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글은 그 자체로 꼭 작은 수업 같군요. 이 수업이 이 책을 포함하는 동시에 이 책이 이 수업을 포함하는 모습도 제법 근사하지 않을까요?”
덧.
위 에세이는 워크룸 프레스의 임프린트 ‘작업실유령’에서 지난 10월 25일 펴낸 신간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 원서를 한국어판으로 번역한 민구홍의 ‘옮긴이의 글’을 편집했다. 저자 데이비드 라인퍼트는 그래픽 디자인 협업체 O-R-G를 설립하고, 2006년 이래 스튜어트 베르톨로티-베일리Stuart Bertolotti-Bailey와 함께한 디자인 협업체 덱스터 시니스터Dexter Sinister로 활동하며 그래픽 디자인, 전시, 연구, 출판 활동을 펼쳐 왔다. 한국에서는 문화·예술 잡지 «돗돗돗Dot Dot Dot», 앤지 키퍼Angie Keefer와 함께 운영하는 온라인 플랫폼 ‘서빙 라이브러리The Serving Library’ 등 개념적이고, 그래서 이따금 엉뚱하고 괴상해 보이는 글쓰기와 작품으로 유명하다. 지난 2010년부터 그는 배경, 관심사, 전공, 진로가 다양한 학생을 대상으로 프린스턴대학교에 디자인 교과목을 개설해 가르쳐왔다. 이를 압축해 특강으로 진행한 3일 간의 강행군을 기반으로 강의실 분위기를 한껏 살린 실험적인 형식으로 출판한 결과물이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이다. 문법, 논리, 수사학 등 서양 대학의 전통에서 근간을 이루는 자유과(liberal arts)와 마찬가지로 그래픽 디자인 역시 메시지와 수단을 이해하는 기본 능력으로서 모든 일반 교육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몸소 실천하는 책이다.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근본이 되는 그래픽 디자인을 ‘타이포그래피’, ‘게슈탈트’, ‘인터페이스’ 세 과정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이 책이 일반 독자에게 현대 디자인의 원리를 전달하는 자기 주도적 교과서로 다가서길 기원해 본다.
Writer
민구홍(@minguhong.fyi)은 중앙대학교에서 문학과 언어학을, 미국 시적 연산 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에서 시적 연산을 공부했다. 안그라픽스와 워크룸에서 편집자,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등으로 일한 한편, 1인 회사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운영하며 미술 및 디자인계 안팎에서 활동한다. 현대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표방하는 ‘새로운 질서’에서 실용적이고 개념적인 글쓰기의 관점으로 코딩을 가르친다. 『새로운 질서』(미디어버스, 2019)를 썼고,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작업실유령, 2024), 『연주회』(브와포레, 2024), 『개들도 우리와 똑같아요』(브와포레, 2024), 『세상은 무슨 색일까요?』(브와포레, 2023),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워크룸 프레스, 2017) 등을 번역했다. 2022년부터 안그라픽스 랩 디렉터를 맡고 있다. minguhong.fy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