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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코펜하겐에서 발견한 ‘나대로 괜찮다’는 감각

Writer: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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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인스타그램 피드 속 잘 정돈된 공간과 북유럽 디자인의 값비싼 가구들. ‘좋아요’와 ‘저장’을 누르며 감탄하지만, 내 일상과는 조금 멀게 느껴질 때가 있죠. 하지만 덴마크의 모던 가구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아르네 야콥센의 세븐 체어, 한스 베그너의 Y체어, 파울 헤닝센의 PH 조명처럼 모두 ‘좋은 디자인은 모두의 삶을 더 좋게 만든다’는 사회민주주의적 철학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결국 덴마크의 디자인과 공원, 도시의 일상은 하나의 철학으로 이어져요. 좋은 디자인이란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삶을 조금 더 반짝이게 만드는 것이라는 믿음이죠. 그 열린 관계의 감각은 홍보라 디렉터가 코펜하겐의 거리를 걸으며 느꼈던 ‘괜찮다’와 ‘안전하다’는 감각과 맞닿아 있어요. 홍보라 디렉터는 덴마크의 예술가들과 도시를 여행하고,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며 화려함보다 일상의 감각을, 소유보다 공유를 중시하는 태도를 배워왔다고 해요. 그는 어쩌면 이런 ‘공유의 미학’이야말로 ‘스칸디나비안 쿨’의 본질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닫힌 울타리 안의 안락함이 아니라 서로에게 열려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평온, 안전한 감각을 찾는 두 번째 단서를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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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PD, ‹Jitter II›, 2025, «Making Space», 서울도시건축전시관, 2025. 사진: 김다인

Safe Space는 예술을 매개로 도시와 일상 속에서 자유로운 사고와 대화를 열어주고, 사변적 단상과 사회적 질문을 탐색하며 나누는 안전 공간입니다.

코펜하겐에서 발견한 ‘나대로 그냥 괜찮다’는 감각

세계 곳곳에서 누군가의 하늘 위로 포탄이 떨어지는 지금, 따뜻한 이불 속에서도 안전하다는 감각을 느끼기 어렵다. 한강을 물들인 불꽃놀이조차 순간적으로 전쟁의 포탄과 겹쳐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문득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묘한 불편함이 밀려온다. 우리만 괜찮으면 되는 걸까. 언제부터 우리는 배타성 위에서 안전을 찾기 시작했을까. 서울이라는 도시 속에서 점점 짙어지는 폐쇄적인 게이티드 커뮤니티의 풍경을 보면, ‘나’와 ‘내 것’, ‘우리끼리’의 울타리가 커질수록 정말 안전해지는 걸까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혹시 높은 벽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건 아닐까.

시선을 달리하면, 닫힌 익스클루시브보다 열린 인클루시브 속에서 더 큰 평온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코펜하겐에서 마주한 장면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경험한 ‘나대로 그냥 괜찮다’는 감각의 단서를 덴마크의 퍼블릭 아트와 디자인 문화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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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디와 카트린 개인전 «Transformertower Longings 변압타워의 모험» 준비, 팩토리2, 서울, 2023. 사진: 김다인

북유럽과 나, 퍼블릭 아트

2005년 서울에 리서치차 온 두 명의 덴마크 예술가 아슐락 비벡(Aslak Vibæk)과 피터 도싱(Peter Døssing)을 만났다. 이름의 첫 글자를 딴 AVPD는 삼청동 시절의 팩토리에서 처음 만난 뒤 서촌으로 옮겨 그다음 해 개인전을 열었다. 그 후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의뢰로 북유럽 디자인 전시 <노르딕데이>(2012)를 기획하게 되면서 2011년 전시 리서치를 위해 헬싱키와 코펜하겐을 처음 방문했다. 그때부터 거의 매년 두 도시를 찾았다. 북유럽의 예술과 문화가 사람과 관계를 맺고 도시의 변화를 만들어 가는 방식을 지켜보며, 내 퍼블릭 아트 기획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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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디와 카트린의 2009년 개인전 «House in Your Head»에서 선보인 후 팩토리2의 얼굴로 영구 설치된 파사드

하나의 문이 열리자 마치 우드와이드웹(Wood Wide Web)처럼 서로 얽힌 세계가 펼쳐졌다. 예술가와 디자이너, 예술 정책, 지원 기관, 도시 계획이 하나의 유기적 네트워크로 이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팩토리2의 외관을 설계한 아티스트 듀오 란디와 카틀린(Randi og Katrine)의 장난기 가득한 아날로그 감성의 작업, 그 정반대의 미니멀리즘으로 건축적 실험을 이어온 AVPD의 세계가 특히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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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di & Katrine 프로필, 사진: Paul Skovbak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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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PD 프로필

Screenshot

AVPD, ‹Timelight II›, 2021, daylight neon tubes, stainless steel modules, dimmers, cables, computer, light sensor, custom-made daylight software, 157.6 × 384 × 7.5 cm

두 팀은 미감과 접근 방식은 상이하지만, 둘 모두 갤러리 내부를 넘어 도시와 건축, 지역 개발 단계까지 예술가의 역할을 확장하고 있었다. 덴마크에서는 이런 확장이 낯설지 않다. 예술가와 제작자인 페브리케이터, 조경가, 건축가, 과학자, 시민이 함께 공공 공간을 예술 실험의 무대로 삼는다. 그들의 협업은 벽이 아니라 열린 경계 위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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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디와 카트린, ‹Pinecone Pavilion›, 2019, 사진: randiogkatrine.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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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디와 카트린, ‹Pinecone Pavilion› 내부,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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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PD, ‹Vertical Time›, 2018, customised mirror-polished stainless steel fixtures, daylight neon tubes, control system, 3610 × 200 × 100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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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PD, ‹Jitter›, 2021, Kvadrat curtain fabrics, rail systems, 4725 × 4725 × 5750 mm

스칸디나비안 쿨, AVPD의 공간 실험

내게 스칸디나비안 쿨을 가장 생생히 체화해 준 이들이 바로 AVPD다. 한창 쿨한 것에 경도되어 있던 시절에 만나 그들과 함께 전시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일과 놂, 계획과 우연이 겹치는 순간들을 경험했다. 덴마크를 방문할 때면 그들의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과 함께 그들의 작업이 퍼블릭 아트와 메타 건축 중심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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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PD, ‹Transition (Movement)›, 2013, KVADRAT-Zulu fabric, motorised rail system, controller devices, sensors, context adaptive 사진: Casper Sejer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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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PD, ‹Light Sphere› 설치 전경, 2016, steel tube, customised analogue wind kinetic system, LED-light system, total height 8m, wing height 3m, Odense, Denmark

덴마크 오덴세의 야외 수영장에서 본 AVPD의 작품 Light Sphere는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바람에 따라 우아하게 움직이는 구조물은 공간 전체를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변화시켰다. 그 경험은 2021년 내가 진행한 〈오늘의 날씨〉 프로젝트로 이어져, Light Sphere를 광명 버전으로 재해석해 영구 설치했다.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AVPD, ‹Light Sphere› 설치 전경(영상), 2016, steel tube, customised analogue wind kinetic system, LED-light system, total height 8m, wing height 3m, Odense, Denmark. 영상: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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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PD, ‹Light Sphere› 설치 전경, 2016, steel tube, customised analogue wind kinetic system, LED-light system, total height 8m, wing height 3m, Odense, Den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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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PD, ‹Light Sphere›, 2021, aluminum, stainless steel, LED light, total height 8000mm (pipe: 5000mm, wing width: 1530mm), «오늘의 날씨-광명», 광명. 사진: 텍스쳐온텍스쳐

올해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서 AVPD와 함께 구현한 참여형 설치작품 지터(Jitter) II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빨강, 노랑, 하양의 반투명 천이 레일을 따라 유영하듯 움직이며, 벽이 되고 다시 길이 되며 공간의 층위를 바꾼다. 관객은 그 안을 걸으며 서로를 반투명으로 마주하고, 천 너머로 스치는 시선 속에서 미묘한 관계성을 체험한다. 그 경험은 단순한 시각적 사건이 아니라 공간과 타인, 나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시간이다(전시는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11월 17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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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PD, ‹Jitter II›, 2025, «Making Space», 서울도시건축전시관, 2025. 사진: 김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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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PD, «Making Space», 서울도시건축전시관, 2025. 제5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도시전, 덴마크 외교부·문화부 후원 디자이너: 워크룸 이경수

이 작업의 흥미로운 점은 견고한 재료 대신 부드러운 직물만으로 건축적 공간을 구현했다는 데 있다. 덴마크 텍스타일 브랜드 KVADRAT와 협력으로 전시장의 11미터 높이의 천장에 맞는 작품 설치가 가능했던 이번 협업은 단순한 기업 후원이 아니라 창작자의 예술적 비전을 함께 짓는 동반자 관계였다. 예술가와 기업이 수직적 권위 없이 서로의 지혜를 나누는 과정 그 자체가 하나의 고유한 협업이자 창작이었다. 

그 열린 관계의 감각은 내가 코펜하겐 거리를 걸으며 느낀 ‘괜찮다’와 ‘안전하다’는 감각과 닿아 있다. 그것은 타인을 배제한 안락함이 아니라 서로에게 열려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평온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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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디와 카트린, ‹Kofoeds Cigar›, 2021, 사진: Torben Peter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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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디와 카트린, ‹Kofoeds Cigar› 내부, 2021, 사진: Torben Petersen

덴마크 모던 디자인과 티볼리공원: 일상이 빛나도록

북유럽의 미학은 언제나 이중적이다. 따뜻하고 동화적인 정서와 시크한 미니멀리즘이 공존한다. 그 상반된 감각이 만들어 내는 섬세한 균형이 바로 덴마크 디자인의 본질이다. 그 안에는 화려함보다 일상의 감각, 소유보다 공유를 중시하는 태도가 깃들어 있다. 어쩌면 이런 공유의 미학이야말로 스칸디나비안 쿨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덴마크의 모던 가구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도서관이나 학교, 시청, 병원 등 누구나 드나드는 공공 공간에 놓이도록 설계됐다. 아르네 야콥센의 세븐 체어, 한스 베그너의 Y체어, 파울 헤닝센의 PH 조명, 그리고 야콥센의 시청 벽시계까지 모두 ‘좋은 디자인은 모두의 삶을 더 좋게 만든다’는 사회민주주의적 철학에서 태어났다.

덴마크 모던 디자인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소유와 배타가 아니라 공유와 접근성에 있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일부 시장에서는 이들 가구가 고급 문화로 포장되어 소비되곤 한다.
덴마크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들 가구는 지위를 과시하는 장치가 아니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공공의 미학이다. 코펜하겐의 거리를 걷다 보면, 같은 의자와 조명이 집과 학교, 카페, 관공서에 반복적으로 놓여 있다. 위계 없이 일상과 공공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디자인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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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볼리 공원 전경, 코펜하겐, 사진: Michelle Berg, 출처: www.tivoli.dk

이런 철학은 코펜하겐 중앙역 옆의 티볼리공원에서도 이어진다. 1843년 국왕의 인가로 세워진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원지다. 설립자 게오르크 카르스텐센은 “국민에게 즐거움을 주면 정치에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다소 기묘하고 불순한 논리로 왕을 설득했다지만, 결과적으로는 정원·건축·음악·예술이 어우러진 가장 사랑받는 시민 문화 공간이 되었다. 도심 한가운데 있어 누구나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구조로, 접근성 자체가 덴마크식 공공디자인의 핵심이다.

지금도 운영 중인 1914년의 목재 롤러코스터 Rutschebanen (룻쉐베엔)은 손의 감각과 나무의 질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기계적 완벽함보다 인간적인 스릴을 품은 그 구조물은 덴마크 디자인이 지향하는 ‘인간 중심의 미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덴마크의 디자인과 공원, 도시의 일상은 하나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좋은 디자인이란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삶을 조금 더 반짝이게 만드는 것, 그렇기에 덴마크의 공공디자인은 단순한 기물이 아니라 도시를 안전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느슨하지만 단단하게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인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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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볼리 공원 여름 전경, 2022, 코펜하겐, 사진: Nicolas Tobias, 출처: www.tivoli.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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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볼리 공원 목재 롤러코스터 ‹Rutschebanen› 전경, 2022, 코펜하겐

사진: Nicolas Tobias, 출처: www.tivoli.dk

‘괜찮다’는 감각

그래서일까. 나는 코펜하겐의 도심을 걸을 때마다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외국인이자 키가 작은 동양인이고, 중년의 여성이지만 이 도시 속에서 내 존재가 배제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마치 도시가 조용히 “너, 그대로 괜찮다”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높은 물가에 매번 놀라고, 가는 길이 멀고 복잡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 어딘가에는 여전히 ‘괜찮다’는 감각이 살아 있음을 믿고 싶다. 전시와 프로젝트, 연구라는 여러 가지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나는 자꾸 그쪽으로 마음과 몸을 이끈다. ‘안전하다’는 감각에는 어쩌면 다시 그곳을 향하게 만드는 은근한 중독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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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홍보라(@borabola5)는 경복궁 서쪽에서 작고 뾰족한 예술 공간이자 기획 사무소인 팩토리2를 운영하는 디렉터이자 예술기획자로, 도시·사람·예술의 역동적 관계를 기반으로 퍼블릭 아트와 국내외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장르 간 경계를 선이 아니라 넓은 지대로 확장하고자 연구, 기획, 제작, 교육 등 예술과 문화 전반에 걸쳐 경계 없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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