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태도.’ 이번 인터뷰의 제목이 될 뻔한 문장이었어요. 너무 정답 같아서, 바꾸기로 했습니다. 제목을 수십 가지 적어보고 인터뷰 사진을 번갈아 보다가 문득 박목월 시인이 떠올랐습니다. 어린 정영선에게 시를 권했던 그 마음을 「산도화」를 읽으며 짐작해 보았어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이상적인 세계를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내는 시선. 정영선의 태도와 어딘가 닮아 있었어요. 스스로의 입지를 앞세우기보단 풍경을 생각하며 대지를 어루만져 온, 구순을 바라보는 조경가와 작은 여자아이가 겹쳐 보였습니다. 정영선의 집이자 작업실인 이 곳은 그가 걸어온 시간의 무게만큼 고요하고 정갈했습니다. 어린 시절 곁에 두었던 책과 아버지의 집기들, 두루마리처럼 말린 도면과 형형색색 파스텔, 좋아하는 그림, 소소한 기록과 다짐이 적힌 메모들까지. 모든 것에 있어야 할 자리가 있는 듯 그의 시간이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를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어요. 인터뷰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일이 아니다”였어요. 습관처럼 반복된 이 말은 단단한 직업윤리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렸습니다. 내 주변을 돌보고 아끼는 일, 기억과 약속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는 ‘나를 믿는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내일을 돌봐 온 사람을 만나고 나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았어요. 말보다 오래 남을 정영선의 태도를 BE(ATTITUDE) 비애티튜드에서 전합니다.
산도화
박목월
산은
구상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산도화
박목월
산은
구상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1장: 집의 지도
집이자 작업실인 이곳은 물 많은 천이 흘러내리는 깊지 않은 계곡에 앉아 있습니다. 남쪽 산에서 내려오는 경사지가 천과 만나는 끝자락의 땅. 북쪽으로는 골짜기 맞은편 집이 듬성듬성 보였습니다. 오는 내내 인적이 드문 동네였고요. 이런 땅에 사는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1941년생 조경가 정영선입니다. 조금 과장해 말하면 우리가 마주하는 한국의 풍경은 그가 손대지 않은 곳을 찾는 편이 빠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속 장면으로도 익숙한 선유도공원, 아산병원, 용산 아모레퍼시픽 본사, 제주 오설록, 오래전의 경주·제주의 국가관광단지, 대화 중 처음 듣게 된 1970년대 공원묘지, 고속도로주변 경관까지, 모르고 들으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해 오셨더라고요. “아무도 나한테 그렇게 고생했다고 상도 안 주더라”며 웃으셨지만, 그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조경가로서 정영선의 업이 너무나 방대하기에 지난 인터뷰이인 배형민 교수도 선뜻 함께했습니다.
인터뷰는 설 연휴가 지난 직후 휴일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2월 23일 월요일 조경가 정영선의 집 거실에서 진행했습니다. 지붕이 제법 높은 중목구조. 가로로 긴 땅을 따라 본채를 길게 놓고, 뒤로는 본채가 해를 받을 수 있도록 폭을 좁힌 2층 별채가 남쪽 경사지에 올라앉아 있습니다. 출입구에서 복도는 길게 뻗고, 천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집 전체를 덥혀요. 복도에 붙어 북쪽으로 부엌, 거실, 서재, 침실이 이어지는 구성. 단순하고, 살기 편한 집입니다. 게다가 시간의 켜를 무시할 수 없는지 세월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쌓여 있었습니다.
그의 흔적만큼이나 많은 것은 손자의 흔적이었습니다. 복도와 거실 입구에는 아이가 그려놓은 그림과 어제 만들어 두고 간 미니어처 초밥집이 있었고요. 평상에는 할머니가 받은 엽서 중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골라 늘어놓았는데 마르크 샤갈 그림엽서도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졌고, 선생님은 손자가 지닌 ‘조경가의 감각’을 자랑하셨어요. 정작 장래 희망은 요리사라지만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선생님은 곧바로 ‘업’의 현실을 툭 던지듯 말씀하셨습니다.
정영선: 지운이 아비(정영선의 아들, 전완석 서안조경 대표)가 봐준 건데, 취미 활동이야. 조경은… 돈도 못 벌고, 너무 고달프고, 시도 때도 없고, 봄이라고 뭐 하나, 여름이라고 뭐 하나, 겨울에도 이리 힘드니 누가 해? 아무도 안 하지.
류근수: 이번 겨울은 엄청 추웠는데, 어떻게 보내셨어요?
정영선: 추웠다고? 우리 집은 안 추웠는데? 집이 따뜻해서 침실에서 자질 않아. 거실이나 (지금 인터뷰하는 이곳을 가리키며) 아무 데서나 자요.(웃음)
집을 이렇게 상세히 나눠 설명했지만, 정작 선생님은 ‘공간의 쓰임’을 구획하지 않습니다. 침실을 제외하면 ‘여긴 뭘 하는 곳’ 같은 구분이 흐릿했죠. 땅과 집, 실내와 실외의 경계만 있을 뿐 선생님은 땅 전체의 공간 곳곳을 골고루 두루두루 편하게 쓰고 계셨습니다. 일과 삶이 자연스럽게 혼재하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정갈하고 아름다울 만큼 고요했습니다. 선생님은 인터뷰 내내 “이건 일이 아니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셨어요. 삶이 일이 아닌 걸까요? 일이 일이 아닌 걸까요? 혼란스러웠습니다.
2장: 윈터가든과 마당
날이 허락하는 날, 조경가 정영선은 거실에서 바로 나갈 수 있는 북향 윈터가든에서 주로 생활합니다. 책상 위에는 색연필과 손으로 직접 그린 도면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올해 말 완료되는 태화강 국가정원 철새공원 작업이라고 합니다.
정영선: 이거는 내가 개인적으로 받아서 하는 일이야. 내가 혼자서 해. 마지막에 시공도면만 직원이 도와줘요.
류근수: 하루에 일을 어떻게 시작하세요?
정영선: 제일 먼저 커피 마시고, 대충 청소하고, 그다음엔 밖에 나가고 싶으면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한꺼번에 다 못하니까, 오늘은 다리 앞에, 내일은 저 뒤에, 오며 가며 짬짬이 하는 거니까.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나는 저걸 일이라고 생각 안 했기 때문에, 한 번도 일이라고 생각 안 했기 때문에 다 일이지. 사실 갑자기 일이라 하니까 기가 꽉 차네. 저걸 일로 여기면 못 하지. 예를 들면 오늘 여기서 이만큼 풀 뽑을게, 하고 들어가서 뽑고, 이거 좀 이렇구나…뭐 이런 거지. 그게 무슨 일이야.
남쪽에서 천을 향해 내려오는 터라 집 앞뒤로 축대를 쌓아 땅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습니다. 물길도 직접 만들었고요. 서안조경 사무실이 있는 서초동까지 여기서 매일 출근했고, 남편이 돌아가신 뒤에는 아예 이 집으로 삶의 중심을 옮겼습니다. 지금도 일이 있으면 차로 나가면 그만이라고, 힘들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함께 나간 뒷정원 한편에는 손자가 만진 꼬마정원이 있었습니다. 어질러져 있었지만, 선생님은 그냥 두셨습니다.
류근수: 조경이 3대째 이어지는 거 아닌가요?
정영선: 걔가 조경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재미로 하는데, 어린이 방송에도 나왔어(한사코 손을 휘젓습니다. 강조하며, 손자에게는 그저 취미라고 합니다).
3장: 서재
집에는 유달리 글과 책이 많았습니다. 작업 책상도 여럿인데, 도면은 식탁에서, 책은 서재와 거실 어느 자리에서나 펼쳐집니다. 전에는 유형별로 정리했지만 이제는 그러기도 어렵다고, 태연하게 웃으셨습니다. TV를 보다가 소파에서 주무실 때도 많은데, 소파에서 떨어진 적은 없다고 너스레를 떠셨습니다. 저 방에까지 자러 가기가 귀찮아서 그렇다고요.
1968년에 출판된 세로쓰기 책도 있었고, 제본이 해진 노천명·박목월·김소월 시집, 『독일인의 사랑(Deutsche Liebe)』. “옛날에 좋아하셨던 책”이라며 웃으셨습니다.
오래 앉는 자리로 보이는 책상에는 선생님의 다짐글 같은 메모가 있습니다.
정영선: 그 옛날 책들 좀 봐. 이런 책 갖고 있는 건 아마 나밖에 없을 거야.
서재 한편에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글을 모아두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한 어릴 적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세세했고, 물려받은 가구와 소품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정영선: 많아. 여기도 있고, 저 위에도 많이 있고. 도자기도 아버지가 사주신 거 있고, 아버지가 사신 골동품이 다 있어.
류근수: 그 많은 기억을… 글로 남기셔야 하지 않나요?
정영선: 뭐 쓴다고 쓰면서 앉아 있지. 맨날 쓴다고 티만 내지 뭐. 출판하고 싶다는 데는 수십 군데지만 내가 안 하니까. 그러다 이번에 곧 나오는 게 있는 것 같아.
정영선: 기억이라는 거는 다 글로 다 남아 있어.
사실 글쓰기의 시작도 아버지 덕이었습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국어 시간에 동요를 썼더니 선생님이 1등이라며 출판사에 내겠다고 했고, 그때부터 쓰는 것마다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대구가 피란 문인들이 모여든 문학의 도시였던 덕도 있었지요. 그 시절 시까지 묶어 곧 시집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남긴 글 중에는 1950, 60년대 대학 시절,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의 에피소드도 있었습니다. 여학생을 위한 기숙사가 없어서 여교수와 여학생들이 거처를 따로 마련해 직접 지어먹던 식사에 관한 일지도 있었는데요, 저희가 믿지 않자 최근 동창회에 기증했다는 이야기도 이어졌습니다. 이렇듯 인터뷰 내내 귀를 의심하는 에피소드가 넘쳐났고, 저희의 상식으로는 미처 닿지 않은 순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4장: 서재 속 인연들
서재 곳곳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도 보였고요.
정영선: 토요일 오후 3시면 청와대에 모였어. 청와대 주변 지금 그 형태의 기본이 그때 다 나왔어. 은퇴 후 가실 봉화의 집에 가서 도면 보여드리면서 현장 설명하고…. 비싸면 안 된다고 얼마나 강조하시던지…. 그래서 물웅덩이 같은 건 대통령이 직접 다 만드셨어.
정영선: (고 이건희 회장의 책을 가리키며) 나한테 제일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에요. 회장님이 집무실 문을 걸어 잠그셨어. 사람들이 회장님께 보고하러 들어갈 때 긴장해서 청심환을 먹고, 다들 쩔쩔맸었는데…. 나는 언제라도 들어가도 됐어. 말이 통한다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가 통한다는 게 굉장히 중요하더라고. 현대그룹도 마찬가지였어. 현대가는 진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산들 뭐, 고속도로변 뭐 할 것 없이 무지무지 많아. 다 언급을 못 하지만, 이제는 고인이 된 분들, 참어른들… 어른들답더라고.
1998년 서안조경이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로 참여한 호암미술관 전통정원 ‘희원(熙園)’ 사진. 서안조경
2007년 서안조경이 기본계획, 기본설계 및 실시설계로 참여한 ‘현대자동차 연수원’ 프로젝트. 사진. 서안조경
류근수: 그 당시 여성 조경가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정영선: 클라이언트가 정말 중요해요. 내가 잘났다고 내 마음대로 되는 거 요만큼도 없어. 클라이언트가 잘해 주셔야 하고, 잘 지원해 줘야 되고, 이해해 줘야 되잖아요. 그런 면에서 나는 복을 많이 받았어요.
내일은 화성에 간다고 했습니다. 전시를 통해 ‘정영선의 조경’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누군가를 이번에는 선생님이 돕는 일이라고요. 저희는 그가 선생님께 도움을 받은 걸 거라고 했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돈만 받고 일하면 업자로만 남는다고… 관계를 거듭 강조했습니다.
정영선: (일정이 적힌 수첩을 뒤적이며) 이거는 내가 그냥 서비스해야 돼.
5장: 습지였던 땅
많은 훌륭하고 거대한 서사는 작은 우연에서 시작됩니다. 이 경우도 그랬습니다. 오랜 기간 함께 일하던 자연석 전문가가 이곳에서 돌을 캐 왔고, 조경가 정영선에게 소개하고 싶다며 “같이 한번 구경 가자”라고 제안했습니다. 물 따라 걷다가 올라가 보니 그곳은 온통 물웅덩이였습니다.
정영선: 아, 좋다. 내가 습지 하나 연구하려고 그랬는데… 이거 사야겠다 하고, 들렀다 샀지.
정영선: 습지로 사놓고는 바빠가지고 들여다볼 시간이 없고, 회사에서 필요한 돌하고 풀만 가지고 가고 그랬는데, 애들 아버지가 너무 오래 아프고 병원에서 회복 불가능하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막 부랴부랴 시작한 거예요. 편찮으신 어른을 모시려고 급하게 여기다 집을 지었어요.
막 부랴부랴, 그냥. 이 집 설계가 내 설계예요. 흙 갖다 들어부어 가지고, 여기가 습지니까 집을 지을 수가 없으니까, 흙을 막 갖다 부으면서 설계하면서 동시에 공사하면서….
저쪽 방에 있다가 여기 나와서 이쪽에 계시다가 이리 나와 식사하시고, 전부 원룸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 한다고 한 설계였는데, 근데 못 들어오고 가셨잖아. 딱 거의 다 돼 가는데 돌아가셨어요.
들어와 보지도 못하고 가셨어요. 기가 안 차대…(한동안 말이 없으셨습니다).
류근수: 목조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세요?
정영선: 내 월급, 그동안 모아놓은 돈, 집까지 다 정리하고 빈손 들고 여기 온 게 이거야. 목조로 하겠다는 게 기본 생각이었는데, 거래처가 자재를 가지고 있어서 싸기도 했어. 집 짓는 사람도 건축가가 아니라 조경가가 맡았고요.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마음은 급하고… 그러다 보니 집이 이렇게 됐지 뭐. 미안해….
조경가 정영선은 서울아산병원 신관 조경 설계를 맡으면서, 오랜 기간 입원했던 남편을 떠올리며 환자·보호자들이 마음껏 울고 쉴 수 있는 울창한 나무 그늘을 만들고자 했다. 사진. 아산병원
6장: 경산의 바위와 아버지의 꽃
류근수: 조경가가 되신 출발점은 어디였나요?
조경가 정영선의 작업은 서울대 농과대학, 환경대학원, 박목월의 시심, 기독교의 신앙심이 바탕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이야기는 의외로 할아버지의 농원에서 시작됩니다.
정영선: 경산에 농원이 있었어요. 내가 조경가가 된 가장 기본적인 발단은 우리 할아버지가 가꾸신 칠암농원이에요. 집채만 한 바위가 7개 있는 과수원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생활하시는 바깥채와 할머니가 머무시는 안채가 기역자 모양으로 놓여 있고, 집보다 더 높은 바위가 7개 있어서 칠암농원이라고 불렀죠. 광산에서 내려오는 물길 따라 언덕으로 내려가는 과수원이 있고, 사과가 맛있기로 유명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이었던 것 같아요. 용산 과일시장에서 우연히 ‘칠암농원 사과’를 발견하고 어릴 적 생각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버지는 그 농원 계단 옆, 바위 앞에 한두 송이씩 백합을 심으셨어요. 대구에서 퇴근길에 한 톨, 한 포기, 한 송이, 한 그루씩 사다가 계단을 다 올라 앞마당을 만나는 자리에는 무궁화를 가장 좋은 자리에 하나 놓았습니다.
그게 너무 좋았어요.
정영선: 아버지는 꽃 가꾸는 게 밥보다 중요한 사람이어서 두부 열 모 값으로 나무 하나, 꽃 하나 사 오니 맨날 엄마하고 부딪치고…. 이사를 여러 번 다녔어도 아버지는 가는 데마다 정원을 만드셨어요. 학교에 계실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학생들 시키면 선생님이 공부 외 다른 일을 시키는 게 어려우니 내가 물을 지고 갔어요. 지금처럼 수돗물이 아니라 우물에서 펌프질해서 퍼 올려 이고 지고 날라야 하는데, 이 작은 체구로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힘들어. 계성학교 남학생들이 “정 선생 딸 물 지고 간다”라며 막 박수를 치고…, 말도 마세요. 웃지 못하게 살았어. 아버지가 뭘 심으면 옆에서 같이 심고, 아버지 몰래 내가 뭔가 더 갖다 심어 놓고…. 류근수 : 지금 손자가 할머니하고 그렇게 하는 게 선생님과 아버님의 관계랑 같네요. 정영선 : 그런가? 꿈보다 해몽이 좋네.
학교에 들어갈 때 아버지가 직접 손으로 책상을 만들어 주셨어요. 마당 앞에 옥잠화를 심었는데, 이 꽃이 필 때면 내가 학교에 간다고… 아버지가 자연스레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변화를 그런 식으로 가르쳤어요. 지금도 옥잠화를 제일 좋아해요.
아버지에게 배운 것은 학교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수원 농과대학에 입학해 처음 캠퍼스를 밟던 날, 눈앞에 펼쳐진 건 채소밭뿐이었습니다. 나무도 꽃도 없는 벌판. 참을 수 없어 교수실로 찾아갔습니다.
정영선: 농학과라면 화훼도 가르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채소만 가르치는 학교가 어딨어요? 조교한테 따졌더니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할게요, 내가 할게요. 그래서 다 떠맡아가 한 거야. 대학교 1학년 때 그 넓은 데 다니면서 꽃 모종 사다 오고, 그렇게 해서 농대 만드는 게 나야.
아버지에게서 이 모든 것의 시작이 있었습니다.
7장: 다시 봄, 집으로
인터뷰를 마칠 무렵, 선생님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겨울 마당은 아무래도 삭막합니다. 선생님이 아낀다는 은빛의 자작나무도, 산수유도, 이름을 잊은 자생 나무도 잠들어 있는 듯했습니다. 풍경 너머, 이웃집 비닐하우스가 눈에 들어옵니다.
정영선: 지금 오늘은 너무 삭막하네. 꽃 피고 나면 완전히 달라져요. 봄에 놀러 오세요. 일하러 오지 말고.
올해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봄이 오면 나무를 가져다 건너편 비닐하우스를 가릴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후배에게 당부하는 말도 잊지 않았고요.
정영선: 우리나라는 산천 자체가 워낙 아름다워요. 산도 나무도 그냥 두면 안 돼요. 돌보고 가꾸어야 해요. 그런데 지금 주변을 보세요. 비닐하우스가 들어차고 필지는 힘없이 쪼개져서 땅의 기운을 다 죽여놨잖아요. 나무도 풀도 심고 나서 끝이 아닌데… 돈을 주고 왜 저러나 싶어 가슴이 아파요.
겨울 마당은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미 봄을 보고 있었습니다. 심을 나무, 가릴 자리, 달라질 풍경. 조경가에게 봄은 약속이 아니라 계획이니까요. 4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려던 참에 선생님께 컨디션은 괜찮으신지, 탈진하시는 건 아닌지 농담 차 여쭸습니다.
정영선: 말도 안 돼. 일단은 건강하고 봐야 돼. 어느 분야든지 자기가 건강한 상태에서 일을 하고, 하다가 안 하려면 시작하지를 말아야지. 그렇잖아.
류근수: 비결이 있으세요?
정영선: 잘 먹고 잘 사는 거지. 열심히 운동하고….
건축계를 오래 살펴온 배형민 교수가 물었습니다. 건축가 중심의 관행 속에서 드러내지 못한 일이 많았을 거라고 짐작하며 말이죠. 이토록 많은 일을 하며 스트레스도 컸을 텐데, 그걸 어떻게 넘겼는지 모두가 궁금했습니다.
정영선: 내가 진짜 찔찔 울 정도로 스트레스 받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가끔 가다가 현장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때가 있기는 있지만, 스스로 잘 극복해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힘들어도 힘들다는 내색 안 하고 살기로 스스로 약속했으니까. 내가 일할 때 그게 힘들어 보이면 큰일이지….
정영선: (정원에서 배웅하며) 일하러 오지 말고 놀러 와요. 봄이 오면 나무를 바로바로 가지고 올 거야. 뭐 심을 거냐고? 기대하세요.
땅에 묻은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자연을 돌보아 온 사람은 압니다. 내년 봄을 기다립니다.
정영선
1941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정영선은 한국 1세대 조경가이자 조경설계사무소 ‘서안’을 이끌어 온 대표적인 조경가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1기로 한국 조경 설계 분야의 기반을 만들어 왔다. 예술의전당, 선유도공원, 광화문광장,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서울식물원, 서울아산병원 등 도시의 주요 장소를 설계하며 자연의 시간과 사람의 삶이 만나는 공간을 만들어 왔다. 조경계 최고 권위상인 제프리 젤리코상을 수상하며 한국 조경을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조경설계 서안
서안은 정영선이 설립한 조경설계사무소로, 1987년부터 도시 공원과 공공 공간, 정원 설계까지 다양한 조경 작업을 해 왔다. ‘서안(瑞安)’이라는 이름에는 편안하고 상서로운 터를 만든다는 뜻이 담겨 있으며, 땅과 장소의 성격을 읽는 설계를 바탕으로 활동해 왔다. 현재는 전완석 대표가 이끌고 있다.
대화의 순간
“이른 봄소풍 같았던 양평에서의 찰나를 가공하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이 기록을 남깁니다”
Interviewer 류근수
건축가로 정영선의 소개로 조성룡도시건축사사무소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선유도공원, SOMA미술관, 의재미술관 작업에서 서안과 협업했고, 훗날 포르투에서 알바루 시자가설계한 아모레퍼시픽 R&D센터 사업에서 참여하며 서안과 다시 협업한 인연이 있다.
Photographer 이근영
사진가로 사진과 글, 영상을 통해 쉽게 말해지지 않는 마음을 기록하고, 이야기로 남긴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작은 순간도 다정하게 바라보고, 그 너머의 의미에 귀 기울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수면의 고양이』, 『우리, 헤어질 줄 몰랐지』를 쓰고 찍었다.
ATTITUDE를 기획하며 가장 먼저 떠올린 인물은 배형민 교수였습니다. 큐레이터, 건축비평가, 역사학자.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여러 가지 수식어가 따라붙죠. 미술·디자인·건축을 오가는 이들이라면 전시와 책, 강연을 통해 한 번쯤마주쳤을 이름입니다. 하지만 그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직함보다 태도입니다. ‘선배’와 ‘어른’이라는 말이 동시에 어울리는 인물이자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일과 관련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대화 상대. 그의 이화동 작업실은 웃음과 이야기, 새로운 인연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요. 배형민 교수의 일은 늘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비애티튜드이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집단인 오운(o-un) 구성원 모두가 이 기획과 첫 인물 선정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역시 감이 좋은 사람들이라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고요. 이번 인터뷰에서 배형민 교수는 이 문장으로 그 이유를 분명히 했어요. “나의 가장 큰 행복은 개인 생활과 일, 내가 일하는 곳과 노는 곳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주 4.5일 근무가 시작되는 지금, 워라밸과 조금 다른 방향에서 자신의 일을 업으로 여기며 몰두하고 있는 당신을 위해 비애티튜드의 새로운 아티클 ATTITUDE를 소개합니다.
프롤로그: 시티 보이의 귀환
1958년 6.25전쟁 후 지어진 이화동 국민주택 단지. 동네를 감싸고 성곽이 낙산을 올라탑니다. 이번 편에 만날 배형민의 작업실은 성곽에 기대어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배형민은 미국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건축 역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대학교에서 30년간 건축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말대로 “죽은 자료”를 연구하던 그가 “살아있는 것”과 교감하며 글을 쓰는 비평가가 됐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드는 사람이 됐습니다. 전시 기획자,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자,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총감독으로요. 그의 길은 한국 도시재생의 역사와 묘하게 겹칩니다. MIT Press가 그의 책을 출판한 것과 낙산공원 개원(2002),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것과 「도시재생특별법」 제정(2014),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총감독이 된 것과 도시재생 뉴딜 시작(2017) 등이죠. 그리고 2018년, 그는 이화동에 작업실을 마련했습니다. 허름한 집이었습니다. 2020년 리노베이션했다고 합니다. 올해 정년퇴임한 그는 이제 스스로를 재생할 때입니다. “여기 오는 길이 내 삶에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예요. 동대문역까지 성곽을 따라 올라오고 내려가는 것이요. 나는 시티 보이city boy이거든요.” 그가 걸어온 먼 길을 인터뷰어 류근수는 건축가답게 충신동에서 단면으로 잘라 올라왔습니다.
배형민 교수의 이화동 작업실에서 마주한 동대문 성곽과 그 너머 창신동 일대
1부: 기율 – 역사가로 훈련받다
류근수:
선생님은 어떻게 비평가가 되셨어요? 여전히 낯선 직업인데…. 보통 건축과를 나오면 건축설계를 하지 않나요?
배형민:
건축설계라는 일과 늘 가까이 있지만, 나는 한 번도 건축가가 되고 싶은 적이 없었어요. 설계를 더는 하지 않고 역사와 이론을 하겠다고 결정한 이후 설계에는 로망이 일절 없었어요.
류근수:
건축학을 전공하면 스스로를 건축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 건축 문화잖아요.
배형민:
역사와 이론을 하시는 분에게는 그런 로망이 굉장히 깊게 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도시계획 박사인 김진애 선생도 한국에 돌아오셔서 “나는 건축가”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자세한 상황을 아는 사람이 보면 갸우뚱하죠. 건축가가 멋있긴 멋있나 보다 하고….
그런데 나는 철저하게 그게 구분돼야만 각각 다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건축가를 존경하는 마음은 엄청나요. 훌륭한 건축가를 진심 존경해요. 그런데 글 쓰는 사람인 비평가가 제 역할을 하려면 건축가 로망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분야에서든 자기 자리를 찾는 건 어렵습니다. 자기 자리를 분명히 하는 것은 문화적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그는 1970년대 학번으로 한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미국에서 바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건축 너머 비평 너머』의 글은 수동형와 사동형이 없어 분명하고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영어와 한국어, 두 문화를 잘 다루는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배형민:
어렸을 때 외국에서 자랐어요.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한 5~6년. 아버님이 의사이셨지만 방랑벽이 있으셔서…. 나는 4개국 5개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국… 그래서 초등학교 동창이 별로 없어요.
언어학자인 아내는 내가 네이티브 언어인 영어로 생각한다고 항상 얘기해요. 내가 한글을 깨친 게 초등학교 4학년 때예요. 부모님이 하시는 우리나라 말은 알아듣지만, 근데 대답은 영어로 하고…. 그런 상황이었어요. 한국 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반에서 거의 꼴찌였는데, 졸업할 때쯤 반에서 한 10등 안에 들었어요. 진보상 같은 것을 받았어요.
저는 스스로 우리나라의 척박한 문화 환경을 견뎌냈다는 것이 내 힘이라고 생각해요. 외국에서 어린 시절은 유순한 환경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왔더니 벌로 때리는 거예요. 엄청난 문화 충격 속에 그냥 버텨내야 했죠. 그런 적응력이 어려운 관료 시스템 안에서 일할 때 인내심이 됐죠. 열린 생각을 하는데, 그걸 실제로 실현하려면 이 한국의 현실, 말도 안 되는 상황 안에서 풀어나가야 하잖아요.
그는 서울대 건축과 79학번. 졸업 후 같은 학교 환경대학원에서 강홍빈 박사로부터 배운 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추천으로 MIT에서 공부했습니다. 강홍빈은 MIT 건축, 역사, 이론 박사 과정의 첫 입학생으로, 1990년부터 10여 년 동안 서울시정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입니다. 배형민이 1985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에서 훈련받은 것은 ‘역사가’로서였습니다.
배형민:
MIT 박사과정은 ‘건축과 예술의 역사, 이론, 비평 History, Theory and Criticism of Art and Architecture’인데, 이 프로그램은 건축 역사를 건축과 안에서 가르치는 최초의 프로그램이었어요. 외국에서는 건축 역사가 대개 미술사 안에 있었어요. 유럽식 전통이죠. MIT 프로그램이 최초로 건축과 안에 있었고, 최초로 현대 건축이 주된 영역이었던 프로그램이에요.
박사를 마치고 MIT Press와 출판 계약이 이뤄졌습니다. 2002년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The Portfolio and theDiagram』 출간 후 귀국하면 당연히 전공을 살려 학교에서 연구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현실은 달랐습니다.
배형민:
그 책이 연구 실적으로 인정을 못 받을 뻔했어요. 그 당시 대학 연구 업적 평가 기준에서 학술서라는 항목이 없었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학술서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미국에서는 MIT Press 같은 권위가 있는 학술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면 테뉴어(tenure, 정년 보장)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 한국에는 아예 그 항목조차도 없었던 거예요. 지금도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학술 출판사가 없어요. 내가 싸우고 싸워서 50점을 인정받았어요. 그때는 국내 논문 하나 쓰면 100점 맞는 거였는데….
류근수:
지금도 그런 일이 있나요?
배형민:
요즘도 있죠. 한국의 관료 체제는 갈수록 더 경직되어 가고 있어요. 가을에 뉴욕에서 일련의 강연을 했는데 내가 강연하는 사진을 꼭 남겨 달라고 했어요. 미국 교수들이 왜 사진이 필요하냐고 묻더라구요. 학교에 증명해야 한다고, 실제로 강연 했다는 걸. 그런 이야기를 하면 미국 대학교수는 깜짝 놀라죠.
*2002년 MIT Press에서 출간된
The Portfolio and the Diagram: Architecture, Discourse, and Modernity in America
(배형민)는 미국 근대 건축을 건축가와 건물이 아니라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이라는 담론 장치를 통해 읽어냈다.
한국인 건축·연구자로서는 최초로, 그리고 지금도 유일하게 MIT Press에서 단행본을 낸 상징성까지 지닌 연구서다.
방대한 아카이브와 치밀한 이론 분석을 결합해, 보자르식 포트폴리오에서 20세기 다이어그램 담론으로의 전환을
추적하는 이 책은 건축·시각문화 연구자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독서로 평가된다.
*2002년 MIT Press에서 출간된
The Portfolio and the Diagram: Architecture, Discourse, and Modernity in America
(배형민)는 미국 근대 건축을 건축가와 건물이 아니라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이라는 담론 장치를 통해 읽어냈다.
한국인 건축·연구자로서는 최초로, 그리고 지금도 유일하게 MIT Press에서 단행본을 낸 상징성까지 지닌 연구서다.
방대한 아카이브와 치밀한 이론 분석을 결합해, 보자르식 포트폴리오에서 20세기 다이어그램 담론으로의 전환을
추적하는 이 책은 건축·시각문화 연구자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독서로 평가된다.
어느 일이나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건축계만큼 인맥이 중요한 곳도 없습니다.(한창 인맥을 만들 30대를 해외에서 보낸 류근수도 공감하는 말입니다.)
배형민: 박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한국 건축계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거예요. 건축과를 나왔지만 환경 대학원에서는 도시설계와 조경을 공부했으니… 한국의 인맥은 당시 건축보다는 도시 쪽이었어요, 도시, 조경. 귀국하고 교수직에 지원하면서 많이 거부당했어요. 한국 건축계에 인맥이 있었으면 정보도 있고, “너는 거기 내지도 마!” 뭐 이런 조언도 받았을 텐데, 나는 그런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어 순진하게 여러 대학에 지원했죠. 이화여대가 건축과를 처음 만들면서 교수를 뽑을 때 최종 총장 면접에 나와 임석재 교수가 올라갔어요.
둘 다 비슷한 공부를 했는데, 이대 면접에서 학위를 하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냐고 묻더라구요. 그리고 설계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거예요. 홍익대학교의 교수 채용 과정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나의 지성과 건축적 소양을 의심하는 분위기여서 채용이 안 될 걸 알았죠.
근데 시립대가 나를 안았어요. 시립대 건축과가 굉장히 좋아요. 30년을 몸담을 수 있어 정말 행복했어요.
류근수:
책에서 ‘기율基律(디시플린 discipline)’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하시는데, 이게 선생님의 시그니처 같아요.
배형민:
그건 끝까지 저의 화두로 남을 거예요. 어쩌면 한국에서 전문성을 체계적으로 갖추기 시작한 제 세대부터 생긴 질문이기도 하고, 지금 변하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이슈예요. 건축의 역할이 무엇이고, 건축이 그 역할을 하려면 어떤 방법과 역량을 가져야 하는지, 그건 지금의 핵심 과제이기도 합니다.
기율에 관심을 가졌던 건 한국에서 건축을 제대로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어린 학생의 당혹스러움에서 시작했어요. MIT에서 공부하면서 건축에 기율이 있다는 것, 그게 건축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이라는 걸 지도 교수의 관점과 연결해서 알게 됐죠.
지금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이 기율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도서출판 마티의 편집장을 지냈던 박정현이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을 재출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어요. 한국의 젊은 건축가가 그 책의 주제에 관심을 가진다는 거예요.
배형민:
젊은 건축가들은 집을 지을 기회가 많지 않은데, 그러면 집 짓는 게 아니라면 도대체 건축을 어떻게 정의해야 돼요? 근데 나름대로 “내가 남들이 못 하는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거는 중요하고 값진 것이죠. 그걸 뭐라고 부를까요? 사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줄 아는 능력, 그게 기율이에요.
내가 요즘 기후변화 시대에 건축의 기율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광주 폴리에서 했던 일이 그런 거고요. 나는 모더니스트로 자랐기 때문에 모던한 규범은 여전히 감각적으로 좋아해요. 미스 반 데어 로에 Mies Van der Rohe, 알바루 시자 Alvaro Siza를 여전히 좋아하죠.
그런데 그런 모던의 미학이 실제 건축의 새로운 생산과 소비, 폐기의 시스템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이 지금 탐구 주제예요.
제5차 광주폴리 ‹순환폴리› 프로젝트 웹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 외딴 섬은 아니다. 사람은 모두 대지의 한 조각이며 이 땅의 한 부분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를 여는 존 던의 말이다. 생명이 사라지고 또 태어날 때 그를 위한 종소리는 우리 모두를 위해 울린다. 모든 생명체와 사물이 연결되어 있듯이 집도 외딴 섬이 아니다. 기후변화의 시대, ‹순활폴리›는 우리가 의식주의 고리로 엮인 공동체임을 확인한다.
― 배형민 제5차 광주폴리 총감독 ‹순환폴리› 소개문 중 일부
2부: 인연 – 비평가로 쓰다
류근수: 비평은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쉽게 생각하듯이 “아, 나 저 건물 비평할 거야” 해서 글을 쓰고, 그렇게 커리어를 시작하는 게 아니잖아요.
배형민: 비평이라는 걸 처음 시도해 본 게 1990년대 후반이에요. 조병수 선생의 평창동 ‘ㄱ 자 집’을 비평한 거였는데, 조병수 선생하고는 옛날부터 알고 지냈는데도 글 쓰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조 선생이 하버드 다닐 때 저는 옆에서 MIT 다니고 있었거든요.
실제로 원고 청탁을 받고 하기로 했는데, 중간에 “나 도저히 못 쓰겠다” 하고 펜을 놓은 적도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잡지사에서 젊은 건축가, 젊은 비평가에게 글을 요청해서 몇 주 만에 원고 내라는 건 내가 보기에는 말이 안되죠. 처음 보는 건물, 처음 만나는 건축가에 대해 갑자기 좋은 글을 쓸 수 없어요.
류근수: 선생님이 저 건물 한번 비평해 보고 싶다고 건축가에게 직접 연락하신 경우는 있었나요?
배형민: 그런 적은 없어요. 내가 논문이나 책을 쓸 때 자발적으로 특정한 건물이나 건축가에 대해 연구하지요. 그런데 “비평”은 대개 매체의 요청으로 이루어져요. 관례적으로 비평은 학자 아니면 저널리스트가 하지요. 다만, 문학, 미술, 공연, 영화, 분야마다 비평의 위상과 역할이 무척 다르지요.
그가 비평가로 바로 서게 된 전환점은 2007년 승효상의 작업을 다룬 『감각의 단면』을 쓰면서였습니다. 정가가 3만 8,000원입니다. 2쇄까지 나갔습니다. 한국에서 막 ‘재생’을 말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배형민: 『감각의 단면』을 쓰면서 뭔가 달라졌어요. 조병수 선생의 평창동 집을 쓰고는 펜을 거의 놨었는데, 그다음 승효상 선생과 교감하면서 읽을만한 글이 쉽게 나왔어요. 그렇게 비싼 책이 2쇄까지 나간 거는 대단하죠. 고무적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건축 비평서가 그렇게 팔린 적이 없었거든요.
그 당시 글을 영어로 썼어요. 『감각의 단면』도 영어가 원문인 거예요. 그러다 보면 국문이 너무 어색하고, 번역체가 되고, 나도 우리나라 말 쓰는 게 늘지 않고….
그런데 한 몇 년 전부터 챗GPT가 국문을 영문으로 너무 잘 옮기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어를 원문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챗GPT 돌리면 영문 구조는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요. 내가 조금만 수정하면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국영문을 모두 내 손에서 내보낼 수 있어요.
이번 『건축 너머 비평 너머』는 번역 느낌이 없어져 내 글솜씨가 늘었다는 뿌듯함이 있어요. 나이 들면서 이렇게 느는 게 있다는 것이 기분이 괜찮은 거예요.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을, 정말 모두(인터뷰 자리에 있었던 이들)에게 추천해요.
류근수: 그동안 비평의 대상을 어떻게 선택하셨나요?
배형민: 저는 사람과의 인연을 되게 중요하게 생각해요. 인생 철학인 것 같아요. 여기『건축 너머 비평 너머』에 ‘텍토닉 카르마 Tectonic Karma’라는 장이 있어요. 조남호 소장과 나의 어떤 인연이 쌓여가고 이어지는 그런 내용인데, 그 인연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람도, 건축도 외딴 섬이 아니에요.
여러 사람의 결정과 판단, 실천으로 어떤 고리가 만들어지고, 그 고리가 이어질 만하니까 이어지는 거예요. 사람과 만나는 일은 굉장히 많아요. 근데 이어지지 않는 만남에 이유가 있고, 이어지는 데에도 이유가 있어요.
류근수: 혹시 따르시는 종교가 있으세요?
배형민: 원래는 집안에 종교가 없는데, 있다고 한다면 나는 불교인 것 같아요. 부탄 여행을 하면서 불교는 스스로 신자임을 선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불교의 카르마는 운명과 다른 게 나의 어떤 결정으로 바꿀 수 있어요. 변화의 가능성이 인연 안에는 항상 있는 거죠.
류근수: 이 공간을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배형민: 최홍규 관장(쇳대박물관, 최가철물점)이 소개해 주셨어요. 여기 낙산성곽 아래 쪽에 벽화 마을 도시재생 이슈가 있었고, 건축계에서도 다 조금 알고 있었어요. 시립대에 함께 있는 이충기 교수가 먼저 아래쪽에 자기 공간을 만들고 있었고, 역시 시립대 선배 교수님이신 송인호 교수는 서울 성곽 전문가니까 이 동네에 관심이 많으셨고….
최 관장이 처음에는 다른 공간을 소개해 줬어요. 저쪽 더 아래인데, 이보다 훨씬 커요. 한 40평으로, 2배 정도 되고 꼭대기라 경치가 정말 끝내줘요. 근데 결국 이 공간을 선택했어요.
2018년에 집을 샀고, 리노베이션을 실제로 한건 2020년 코로나19 확산 시기였어요. 이충기 교수가 저를 도와줬는데 굉장히 애쓰셨어요. 오랫동안 로망이 있었어요. MIT에서 공부할 때 지도 교수가 집으로 초대하셨던 게 가장 인상 깊었거든요. 보스턴 항구에 있는 옛날 창고를 개조한 집이었는데, 건축·미술계에서 유명한 분들이 그 집에 모여서 같이 얘기하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던 거예요. 나도 그게 너무 하고 싶은 거죠. 사람을 만날 때 집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 내가 그런 만남의 자리를 주관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자리에서 인연이 만들어지는거죠…. 나는 일을 하더라도 그게… 뭐랄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되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예요. 어떤 프로페셔널한 관계를 넘어 개인적인 관계까지 가는 게… 항상 기대하는 바예요. 그것을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류근수: 여기까지 어떻게 오세요?
배형민: 지정 주차 공간이 있어서 차를 갖고 올 수도 있지만, 동대문역까지 쭉 걸어 올라오고 내려가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시티 보이 city boy이거든요. 양평 같은 전원주택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걸 옛날부터 알았어요. 차 몰고 멀리 가는 것… 나는 운전하는 거 되게 안 좋아해요.
류근수: 이 공간에서 탄생한 전시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배형민: 탄생이라기보다 뭐, 그 과정에 다 있죠. 여기서 회의도 하고, 특히 편하게 얘기를 나누죠…. 광주 폴리도 여기서 많은 이야기를 하며 만들어졌어요.
한 5년 정도 쓰고 있는데… 요즘은 잘 못 오는 상황이에요. 연로한 아버님이 아파트에 같이 계시고, 요양사가 낮에만 계시니까 저녁 식사와 아침 식사를 해드려야 되거든요. 그전에는 일주일에 한 2, 3일은 이화동에 있었어요. 저녁에 여기서 자고, 외부와 열린 공간이어서 도시, 텃 밭, 꽃을 관찰할 수 있고, 바로 옆에 성곽이 있어서 일하고 글을 쓰기에는 너무 좋은 공간이죠. 학교 연구실과 집에는 물건과 책이 너무 많아요. 여기는 나와 아내가 좋아하는 것 몇 개만 두자는 것이 원칙입니다.
늘 남의 작업을 비평하던 그가 ‘대상’을 고쳐 쓴 행위는 그의 비평적 지향점인 ‘건축 너머’를 삶으로 실천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부: 협업 – 전시 기획자로 만들다
배형민:
나는 내가 굉장히 유순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건축가의 길을 선택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유순해서 현장을 다스리지 못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전시 기획을 하니까 내게도 강한 성질이 있다는 걸 새로 알게 된 거예요. 뭔가 크게 잘못 되어 갈 때 사람에게 소리 지르고, 싸우고…. 그걸 하더라구요. 그리고 나서 반성하고 미안하다고 하고. 화를 삭인 다음에 잠도 잘 잔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대형 비엔날레 같은 전시를 기획하다 보면 근본적인 갈등이 생겨요.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를 진행할 때 공동 총감독이었던 알레한드로 자에라 폴로 Alejandro Zaera Polo와 겪은 갈등이라든지…. 갈등을 할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물러서지 않아요. 그전에는 그런 성깔이 있는 줄 몰랐어요.
류근수: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광주 폴리 등에서 선생님이 자기가 이런 모습을 처음 봤다고 계속 말씀하시지만,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느낀 선생님은 합리적이고 부드러운, 선생님 특유의 대화 방식, 웃음으로 화를 내시고 풀어내실 것 같은데요.
배형민:
아이구 나는 그런 통큰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유가 있어서 화를 내는 거지요. 무슨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어떤 일에서 원칙과 대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죠. 왜 내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계속 설득하는데도 그 방향으로 안 가니까… 광주 폴리는 너무 어려웠어요. 그렇게 어려울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있어요. 그런데 비전은 맞으니까 후회는 없어요. 고생을 하면 보상이 따라와요. 같이 참여했던 사람 모두 너무 힘들게 일했지만, 동지애가 생겼어요. 우리가 만든 프로젝트, 우리가 이걸 하는 이유가 있다는 걸 다 같이 공감했어요. 끝나고 나서 나쁜 감정이 남아 있는 관계는 없었어요.
2008년 처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큐레이터가 됐을 때만 해도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커미셔너 승효상, 큐레이터 최문규와 함께한 그 경험은 신선했지만, 다시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합니다.
배형민: 2014년 커미셔너 조민석 소장과 같이 큐레이팅을 했지요. 그때 황금사자상을 받았죠. 한국관이 황금사자상 받은 건 처음이었어요. 그게… 나를 큐레이터로 인정받게 한 계기였던 것 같아요.
2014 베니스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시 포스터, 디자인 슬기와 민
2014 베니스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시 포스터, 디자인 슬기와 민
2017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포스터, 디자인 슬기와 민
제5차 광주 폴리 ‹순환폴리› 포스터, 디자인 예성 INC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건축 행사에서 대상을 받은 그해 한국에서는 「도시재생특별법」이 시행됐고 3년 후인 2017년 그는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공동 총감독이 됩니다. 알레한드로 자에라 폴로 간 근본적 갈등, 그 와중에 발견한 자신의 ‘성질’. 그해 정부는 도시재생뉴딜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문규와 같이 『의심이 힘이다』(2019)를 쓰며 비평가이자 큐레이터로서 입지를 다졌습니다. 그가 비평가에서 기획가로 변하는 과정에서 이화동 주변의 도시 공간도 변해 갔습니다.
배형민:
그때부터는… 만드는 사람이 된 거죠. 역사가도 아니고, 비평가도 아니고 뭔가를 기획하고 실현하는.
류근수:
스스로 부정하셨지만 선생님도 넓은 의미에서 건축가예요.
배형민:
아니, 건축적이라고…. 내가 이런 기획력이 있다는 것을 나이 들어서 안 거예요. 이제 나는 어디 가서도 “나는 훌륭한 큐레이터다”라고 얘기해요. 근데 그건 상대적인 경험에서 나와요. 전시 기획의 재미는 협업에 있어요. 사람 간 교감,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그 상상 이상의 결과가 여러 사람과의 협업으로 만들어져요. 기후미술관도 ‘홍박사’라는 훌륭하고 젊은 디자이너가 그래픽 디자인을 풀어냈는데… 저의 역할은 첫 발상을 하는 거죠. “전시 디자인과 설치를 최소의 쓰레기와 에너지로 하자.” 그런데 그게 뭐가 될지는 나의 생각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분야마다의 전문가가 이루어내는 거죠. 홍박사가 정말 진지하고 창의적인 작업을 해서 놀라운 결과물이 나왔어요. 그래서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Red Dot Design Award 본상을 수상했고요. 상을 받아 기분 좋기도 했지만 협업의 만족감이 최고의 보상이죠. 최성민 디자이너와 «한반도 오감도 Crow’s Eye View»할 때도 전시 그래픽이 저렇게 나올 거라고는 내 머리로는 상상도 못했죠.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만든 전시와 책… 그러니까 그런 협업이 나는 너무 즐거운 거예요. 큐레이팅이 힘들지만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죠.
«기후미술관: 우리 집의 생애» 전시 철수 영상
류근수:
그전에 익숙하셨던 논문과 다른가요?
배형민:
아, 그럼요. 전혀 달라요. 역사 논문은 대개 살아있지 않은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하고, 그게 문서라든지 유적과 대화를 하는 것이니까 내 머릿속에 있는 꿈과 그 텍스트 간 교감이죠. 비평은 살아있는 현장이고, 활발하게 작업을 하는 건축가와 작가니까 훨씬 더 생생하고…. 현장을 보고, 건축주 얘기도 듣고, 다양한 교류를 하니까 내가 혼자서 비평 글을 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획은 기획자의 얘기를 듣고, 스케치를 그린 사람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내가 혼자서 프로젝트를 상상하는 게 아니라 “이거 어떻게 만들어 낸 거죠?”라고 질문을 받으면 만든 사람이 좋아해요. 사실 어떤 작가든지 진지하게 누가 관심을 가져주면 진짜 고마워해요. 며칠 전 오랜만에 조병수 선생 만나러 온그라운드(건축가 조병수가 운영하는 서촌 카페)에 갔는데, 최근에 하신 페인팅 작업이 많더라구요. 이런 저런 질문을 했는데 이미 유명한 건축가이지만 저의 관심을 좋아하시는 거예요. 저는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것인데 그걸 아시는거죠.
배형민:
내 또래 건축가 중 몇몇은 학생 시절부터 봐 왔는데 지금의 모습은 상상도 못 했어요. 조병수 선생이 지금 그런 위치에 있을 줄 상상도 못했고, 최욱 선생이 한국에 처음 와서 한옥 작업 하고 있을 때 지금의 최욱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죠. 리움이 개관했을 때 조민석을 처음 봤는데, 이 젊은 사람이 지금은 세계적인 건축가잖아요. 시간이 지나 이제 비평가로 봤을 때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의지가 있었고, 그걸 실행했고, 쭉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 거장이 된 거예요.
류근수: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배형민:
훌륭한 건축가가 되는 길을 젊은 사람이 너무 멀리 바라보면 안되요.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 뭔가’를 찾아 해 보는 방법밖에 없어요. 잘 모르는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에 민감하면 힘들어요. 인스타그램 같은 데서 반응이 즉각적이잖아요. 주변에 신경 쓰다 보면 아무 일도 못해요. 확실히 시간이 필요한 일이 있어요. 오늘 같은 인터뷰는 한 1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여러 가지 좋은 경험이 쌓이면, 그게 결국에는 굉장히 좋은 결과나 작업이 되고 글이 될 수 있는 거죠.
배형민:
『건축 너머 비평 너머』는 30년의 결산이에요. 정년퇴임에 맞춰 출간했죠. 이번 책은 내가 한국말로 쓴 원고로는 제일 잘 나왔어요. 한밤의빛 김서연 편집장 덕분이에요. 돌배개에서부터 이어 온 인연이죠. 글 쓰는 작업이 너무 좋았어요. 아무리 원고 마감 스트레스가 있어도 전시 기획에서 빈번한 “예산 2,000만 원 펑크”를 해결하는 것 보다는 훨씬 점잖고 즐거워요.
에필로그: 5년 후를 상상하지 못하는 삶
이후 이 대화의 녹취록을 읽어보며 그가 연구하고, 쓰고, 만들고, 재생해 온 30년을 한국 도시재생의 역사와 겹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습니다. 확인했더니 실제로 그랬습니다.
배형민: 나의 커리어를 돌이켜 볼 때 좋은 것은 5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는 순간이고, 그 순간이 항상 즐거웠어요. 그리고 대개는 전보다 더 좋았어요. “내가 5년 전에 이런 걸 하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라는 즐거움…(웃음).
2010년에 내가 큐레이터인지 아닌지도 몰랐는데, 5년 후에 한국의 가장 큰 건축비엔날레 총감독이 된 거예요. 2008년 처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최문규랑 같이 했을 때 “내가 베니스비엔날레의 큐레이터야” 자랑스러웠어요. 이런 걸 5년 전엔 상상도 못 했는데 즐겁게 잘하고…. 아,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2012년에는 작가로 참여하고, 2014년에는 황금사자상을 타고, 그 후에는 제자들이 큐레이터를 하기도 하고, 놀라운 경험이 이어졌어요.
근데 그게 항상 즐거운 경험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에요. 부모님을 돌보고 있는 지난 몇 년을 생각하면, 5년 전엔 상상도 못 했던 거예요. 근데 해야 하는 일이죠.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얘기하면 불교의 가르침이에요. 석가모니가 여러 가지 고통과 기쁨이 항상 같이 있다고 한 말씀을 떠올리면 인간적인 고민이 무엇인지 조금 알게 된 것 같아요.
류근수: 퇴직 이후의 삶을 어떻게 그리고 계세요? 건축가는 죽을 때까지 건축가잖아요.
배형민: 그건 지금 뭐라고 대답을 하기가…. 현재 진행형이죠. 한 3~4년후에 물어보시면 “아, 그때 그 퇴직의 순간이 이런 거였어”라고 오히려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은 하던 일의 연속성이 있어서 특별히 생활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요.
배형민: 이 일의 가장 큰 즐거움이 뭐냐 하면, 현장을 보러 가는 거예요. 좋은 건축은 대개 멋진 곳에 있어요. 나는 일 때문에 그런 좋은 곳에 가는 거야. 그럴 수 있는 직업이 이 세상에 많지 않아요. 건축가보다 부담이 적어요. 건축가는 현장에 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과제를 풀어야 하는데, 나는 현장에 갈 때 탐색과 학습을 하러 가는 거예요. 좋은 건물이 완성되어 있거나 짓고 있고, 나는 이해관계도 없고 어려운 숙제도 없어요. 현장을 보고 좋은 원고 쓰면 돼. 상상해 보세요. 알바루 시자 Alvaro Siza가 설계한 포르탈 Portal 와이너리가 비평과 역사 작업을 하는 현장인거에요. 건축 비평과 역사라는 일을 하며 누릴 수 있는 특혜입니다. 물론 어려운 현장도 있지요. 재난의 현장도 있어요. 하지만 이 일을 권하고 싶어요. 할 수만 있으면. 나의 가장 큰 행복은 나의 개인 생활과 나의 일, 내가 일을 하고 있는 곳과 내가 노는 곳이 전혀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경계에서 건축을 넘나들다
낙산성곽 아래 작업실. 1958년 국민주택이 들어선 이곳에 2002년 낙산공원이 만들어지고, 2018년 그가 왔습니다. 허름한 집을 2020년 리노베이션했습니다. 재생입니다. 죽은 것을 연구하던 역사가가 살아있는 것을 쓰는 비평가가 되고, 만드는 큐레이터가 되고, 마침내 자신의 공간을 재생한 것처럼 한국의 건축 비평도, 도시재생도 그와 함께 자랐습니다. 저녁이 되면서 작은 욕조 너머 낸 창으로 내일을 기약하는 오늘의 마지막 볕이 성벽을 받고 부서집니다. 매일 새로이 태어나는 에너지가 그의 일, 그의 삶과 섞이는 곳, 그 경계에서 배형민은 건축을 넘나듭니다.
배형민
큐레이터, 건축비평가, 역사가이며, MIT에서 건축역사·이론·비평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30년간 서울시립대학교에서 현대건축을 가르쳤다. The Portfolio and the Diagram (2002), 『감각의 단면』(2007), 『의심이 힘이다』(2019), 『건축 너머 비평 너머』(2025)등의 저서를 냈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공동 총감독(2017), 베니스비엔날레 국제 건축전 한국관 큐레이터(2014, 황금사자상 수상)를 역임했다.
대화의 순간
“2층과 연결된 계단에 걸터앉아 두 분이 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간을 끊임없이 채우고, 터져 나온 웃음이 소품처럼 곳곳에 내려 앉는 것을 느끼고, 사진을 편집하며 종종 그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Interviewer 류근수
건축가로 파리, 포르투, 서울에서 JM Wilmotte, A Siza, M Fuksas, 조성룡 등의 작업에 참여했다. 프랑스건축학교 ENSAPLV에서 환태평양대도시MAP를 연구했고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에서 건축유형학을 가르쳤다. 『알바루 시자와의 대화』(2014)를 옮겼고 지금은 김중업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Photographer 이근영
사진가로 사진과 글, 영상을 통해 쉽게 말해지지 않는 마음을 기록하고, 이야기로 남긴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작은 순간도 다정하게 바라보고, 그 너머의 의미에 귀 기울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수면의 고양이』, 『우리, 헤어질 줄 몰랐지』를 쓰고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