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된 공간, 부식된 배의 흔적, 기이한 공간을 두고 우리는 어떤 생각을 품게 될까요? 이성은이 구현하는 세계는 모두 어딘가 부서지고 있습니다. 세트장처럼 보이는 동시에 디스토피아 같기도 한 장면은 전시 공간을 다 채울 정도로 압도적이거나 미니어처로 오밀조밀하게 들어서기도 하죠. 세트장 같은 설치에 매끄러운 영상으로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의 작품처럼 이성은은 요즘 반대되는 것이 충돌하는 연쇄극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어요. 중심부를 향한 열망,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굴곡진 삶으로 만난 창작이기에 상충하더라도 세상과 연결되는 작품을 만들고 싶은 거겠죠.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삶의 감각을 되돌려놓는 이성은의 작업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Un)folding Walls›, 2025, 이미지 전사 타일, 석고붕대, 종이죽, 112 × 125 × 93 cm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영상과 설치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이성은입니다. 저는 지방에서 자라 중심부를 향한 열망과 치열한 경쟁 시스템을 체감해야 했던, 이른바 ‘K-키즈’로 자랐어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극도로 효율적인 우리 사회의 질서 안에서 길을 잃고 부유하는 신체의 감각을 시각 언어로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적부터 또래와 어울리기보다 입체적인 것을 만들며 노는 걸 좋아했어요. 서울권 예고 진학에 실패해 인문계로 진학한 뒤 평면 작업이 저와 맞지 않음을 깨달았고, 부모님과 미술학원의 반대 속에서도 고집을 부려 조소를 택했죠.
원래 목표는 작가가 아니었어요. 미술 관련 분야에서 평범하게 일하며 적당히 안정적인 삶을 사는 쪽에 가까웠죠. 그런데 대학 진학 후 태어나 처음으로 1등을 해 보면서 미술에 재미를 느끼게 됐어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매사 희극적으로 어긋나던 굴곡진 과정을 거치며, 역설적으로 작업을 이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귀하게 느껴졌거든요. 그 마음으로 연구하고 몰두하다 보니 지금까지 창작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Wanderbound›, 2025, 2채널 비디오 루프, 혼합 매체, 11분 17초, 가변 설치 (비디오 크레딧: Steven He(Creative Collaborator), 선유림(배우_웨딩홀), 오유진(배우_대기실), 김다희(조연출))
‹Wanderbound›, 2025, 2채널 비디오 루프, 혼합 매체, 11분 17초, 가변 설치 (비디오 크레딧: Steven He(Creative Collaborator), 선유림(배우_웨딩홀), 오유진(배우_대기실), 김다희(조연출))
‹Wanderbound›, 2025, 2채널 비디오 루프, 혼합 매체, 11분 17초, 가변 설치 (비디오 크레딧: Steven He(Creative Collaborator), 선유림(배우_웨딩홀), 오유진(배우_대기실), 김다희(조연출))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현재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 있어요. 제 작업은 공정에 따라 세션이 명확히 나뉘기 때문에 공간도 분리해 씁니다. 집중이 필요한 영상 편집은 주로 집이나 카페에서 진행하고, 거대한 구조물을 제작할 때는 청주에 있는 지인 공장의 유휴 공간을 빌려 모듈식으로 작업해요. 창작스튜디오에서는 주로 미니어처 세트 제작이나 설치물의 텍스처를 구현하는 세밀한 작업에 집중하고 있죠.
이성은 작가의 작업 과정
이성은 작가의 작업 과정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영상 촬영과 설치 작업을 병행하다 보니 촬영 세트를 구현할 공간의 건축적 요소나 작품이 놓일 실제 전시 공간의 물리적 조건에서 가장 큰 영감을 받아요. 기둥이나 계단의 위치, 모양 같은 건축적 특징부터 전시장의 형태, 전시의 성격(개인전, 단체전)까지 모두 작업 재료가 되죠. 공간이 지닌 한계를 먼저 파악하고 역으로 창작의 동력으로 삼는 거예요.
개념적인 접근도 중요하지만, 최종 결과물이 공간과 밀접하게 결합한 물리적 작업인 만큼 공간을 치밀하게 고려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작업 전체를 수정해야 할 수도 있어서, 공간적 조건을 먼저 파악한 뒤 기획을 거기에 맞추죠. 최근에는 세트장의 물리적 제약에서 벗어나 표현의 폭을 더 넓히려고 영상 합성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보려 합니다.
이성은 작가의 작업 과정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개념적 리서치와 시각적 리서치를 철저히 분리해 진행해요. 스스로 상상력이 풍부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 도 입한 방법인데, 현실의 이야기를 판타지로 풀어내다 보니 현실의 맥락을 너무 의식하면 오히려 시각적 상상력이 막히더라고요.
일상에서 관찰한 서사가 거시적 맥락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는지 분석하고 나면 그 내용을 의도적으로 잊습니다. 이후 사진 작업이나 회화 작업, 판타지 영화의 장면 등 파편적인 이미지를 수집해 영상의 구조를 짜요. 이렇게 무작위로 모인 이미지가 연결되는 과정에서 초기 개념적 리서치 내용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데, 그때 이질적인 인물의 행동이나 강박적인 연출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Falls›, 2024, 단채널 비디오 루프, 혼합 재료, 11분 53초, 가변 크기 (비디오 크레딧: Jennifer Lee Kaas(배우), Steven He(촬영감독), Samuel Dominguez(서브 카메라))
‹Falls›, 2024, 단채널 비디오 루프, 혼합 재료, 11분 53초, 가변 크기 (비디오 크레딧: Jennifer Lee Kaas(배우), Steven He(촬영감독), Samuel Dominguez(서브 카메라))
작년 팩션에서 선보인 2채널 영상 설치 ‹Wanderbound›는 리디아 데이비스의 초단편 소설 『열세 번째 여자와 다른 이야기들』에서 모티프를 얻었어요. 열두 명의 여자가 사는 마을의 ‘열세 번째 여자’. 누구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이치에서조차 벗어난 채 살아가는 설정이 흥미로웠죠. 이 설정에서 영감받아 12개의 의자가 놓인 지하 대기실을 구현했습니다. 영상은 대기실 의자에 앉으려는 여성과 반대편 폐허가 된 웨딩홀에서 인공 언덕을 쌓는 또 다른 여성의 행위가 맞물리면서,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을 교차해 보여줘요.
이 서사의 실질적인 출발점은 영국 유학 시절 일하던 한식당 사장님의 이주사였어요. 한국, 필리핀, 영국을 넘나들던 사장님의 이주 동력에는 엄마로서의 삶과 사업가로서의 삶이 있었고, 그 이면에는 거시적 맥락의 견고한 국가적 설계가 있었죠. ‹Wanderbound›는 그걸 판타지적으로 확장한 작업이에요. 웨딩홀 영상은 실제 스케일의 세트를, 대기실 영상은 미니어처 세트를 활용해 서로 다른 두 공간을 시각화했습니다. 영상 속 두 여성은 결혼, 이주, 시민권이라는 제도적 경로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찾으려 하지만 끊임없이 미끄러지죠. 두 영상은 거울처럼 마주 보게 설치되어 있어서, 관객은 두 세계를 동시에 보려다가도 결국 어느 한쪽 공간에만 머물게 돼요.
또 다른 작업은 2023년부터 2024년까지 진행한 영상 설치 ‹Falls›입니다. 이 작업은 사실 제가 꾼 꿈에서 시작됐어요. 꿈에서 화장실을 청소하다가 화장실이 물에 잠겨 버렸는데, 그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영상으로 만들었죠. 영상 속 여성은 강박적으로 청소를 반복하지만 공간은 결코 깨끗해지지 않아요. 결국 욕조에서 흘러넘친 물에 잠기고, 영상은 다시 첫 장면으로 루핑(looping)돼요. 이렇게 인물은 물리적인 화장실 안에서는 물론 서사 구조 안에서도 무한히 갇힙니다. 전시 현장에는 영상 속 세트를 닮은 벽을 미로처럼 배치하고 영상과 병치했어요. 관객이 직접 전시장을 헤매고 부딪히며 사회 구조에서 밀려난 존재의 감각을 물리적으로 체험하게 만든 거죠.
‹Locopentimento›, 2025, 이미지 전사 타일, 철파이프, MDF, 종이죽, 페인트, 215 × 305 × 450 cm, 200 × 250 × 240 cm
‹Locopentimento›, 2025, 이미지 전사 타일, 철파이프, MDF, 종이죽, 페인트, 215 × 305 × 450 cm, 200 × 250 × 240 cm
‹Locopentimento›, 2025, 이미지 전사 타일, 철파이프, MDF, 종이죽, 페인트, 215 × 305 × 450 cm, 200 × 250 × 240 cm
최근 작업에서 만족스러웠던 점과 불만족스러웠던 점이 궁금합니다.
작년에 ‹Locopentimento›와 ‹Wanderbound›를 동시에 제작했어요. 평소 드로잉 대신 3D 모델링으로 사전 설계를 진행하는데, 두 작품 모두 대규모 작업임에도 촉박한 일정 속에서 초기 계획대로 오차 없이 시각화 된 점은 만족스러워요. 다만 철저히 계산된 수치 안에서 결과물이 도출되다 보니, 무의식이나 디스토피아, 혼돈 같은 시각적 지향점과 상충하는 ‘통제의 흔적’이 보였던 게 아쉬움으로 남죠. 계획적으로 작업하는 성향을 고려해 앞으로는 각각의 작품에 온전히 시간을 쏟아 우연의 층위를 쌓고 작업의 밀도를 한층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려 합니다.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제 작업은 노동 집약적이고 프로젝트 단위로 몰입하는 시기가 뚜렷해서, 그 외의 일상에서는 미술과 무관한 활동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영상 편집 외주를 하거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기도 하죠.
또한 작업이 미술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에 머물기를 원치 않아서, 미술계 밖 사람들과 교류하는 걸 중요하게 여깁니다. 서로 다른 시각을 나누면서 제가 몰랐던 다양한 삶의 맥락을 발견하고 이해해 보려 해요.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1910~20년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초기 영화 형태인 ‘연쇄극’을 연구하고 있어요. 무대 위 배우의 연기와 스크린 속 영상이 교차하는, 연극과 영화의 하이브리드 양식이죠. 영상 설치를 다루는 제 입장에서 ‘신체의 현존’과 ‘이미지의 가상성’이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Stove by a Whale›, 2024, 혼합 매체, 가변 크기 (협업: Steven He)
‹Stove by a Whale›, 2024, 혼합 매체, 가변 크기 (협업: Steven He)
‹Stove by a Whale›, 2024, 혼합 매체, 가변 크기 (협업: Steven He)
‹Stove by a Whale›, 2024, 혼합 매체, 가변 크기 (협업: Steven He)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제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시시포스’에 가까워요. 우리는 매일 아침 돌덩이를 밀어 올리듯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죠. 이 무한한 굴레의 감각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시시포스, 그가 만들어 낼 연대의 가능성이 제 작업의 핵심이기도 해요.
저는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기보단 사용하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언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것을 전하기 위해 미술이라는 수단을 택한 거죠. 평소에도 말할 때 주어나 목적어를 생략하고 파편적으로 툭툭 던지는 편인데, 이런 제 특유의 소통 방식이 작업에도 드러나는 것 같아요.
결국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낼 때 비로소 타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고, 이것이 제 작업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이야기 속에서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건조해지지 않도록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는 걸 가장 중요한 기조로 삼고 있어요.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평소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편이라 슬럼프를 잘 느끼지 못해요. 굳이 꼽자면 작업이 막힐 때 감정이 조금 흔들리는데, 그럴 땐 전개 속도가 빠른 논문을 찾아 읽습니다. 논문은 책보다 전개가 빠르고 논리적이면서도 결론 자체는 생각보다 명료하지 않은 경우가 많거든요. 이를 열린 결말로 긍정하며 읽으면 제 나름의 기준에 맞춰 필요한 부분만 취사선택할 수 있어요. 그렇게 수십 편의 논문을 읽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막혔던 작업의 실마리가 풀리곤 합니다.
‹Floatage›, 2024, 2채널 비디오 루프, 유리, 물, 9분 6초, 가변 크기 (비디오 크레딧: Steven He(촬영 감독))
‹Floatage›, 2024, 2채널 비디오 루프, 유리, 물, 9분 6초, 가변 크기 (비디오 크레딧: Steven He(촬영 감독))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작년까지는 풀타임 직장 생활을 병행했어요. 지속 가능한 창작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정규직으로 일해 보기도했지만, 경제적 안정을 얻은 대신 물리적인 작업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지더라고요. 최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생계유지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창작 활동을 어떻게 현명하게 병행해 나갈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작업 자체에 매몰되어 사회와 단절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미술계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담론과 용어가 현실세계에서 얼마나 유효할지 늘 의문이 들거든요. 제가 목격한 사회를 시각 언어로 번역하고 유통하는 과정에서 실제 삶의 감각과 괴리가 발생한다면, 그건 창작자로서의 실패라 생각해요.
미술에만 갇혀 단순히 관찰자에 머물기보다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삶을 살아내고, 그 과정에서 획득한 감각을 다시 미술의 영역으로 순환시키는 것. 이게 제 창작의 궁극적인 목표예요. 최근 기획자로 참여 중인 유튜브 팟캐스트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도 이런 순환을 더 넓히려는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범위를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과 지역 사회까지 확장하고 싶어요.
유튜브 채널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무언가를 진정으로 좋아한다면 수많은 현실적 장애나 그만두어야 할 이유 앞에서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지금까지는 그런 이유로 작업을 이어왔죠.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한데요. 창작하고 싶다면 지속하되, 비슷한 이유로 창작을 그만두게 되더라도 그것을 꼭 실패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누군가의 기억에 남기 위한 특정한 형태를 정해본 적은 없어요. 다만 그때그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발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객이 각자의 시선으로 자유롭게 받아들이기를 바라요.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앞서 말씀드렸듯 제 삶은 이미 시시포스와 같아서, 거창하고 이상적인 미래를 상상하기는 어려워요. 다만 체력과 시간을 지혜롭게 안배해 작업과 일상을 균형 있게 분리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제가 그리는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미래입니다.
Artist
이성은(@seongeun1ee)은 중심부를 향한 열망이 삶의 궤적을 결정짓는 지방 도시에서 자라며 주변부의 감각을 체화했다. 극단적인 효율과 성공을 좇는 사회 구조 속에서 조용히 잊히는 개인의 서사에 주목하며, 주류의 이상화된 이미지에 닿지 못한 이들이 느끼는 소외와 방향 상실의 감각을 영상과 설치 작업으로 탐구한다.
현재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청주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 개인전으로는 «Wanderbound»(팩션, 2025), «Naumachia»(캡션서울, 2024), «Survival Diary»(레인보우큐브, 2021)가 있으며, 2인전 «Stove by a Whale»(런던 Staffordshire St Gallery, 2024), 단체전 «넥스트 코드: 사건의 무대»(대전시립미술관, 2025)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