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은 포름알데히드 속에 고정되고, 어떤 죽음은 공기 중에 천천히 흩어집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나란히 열리고 있는 «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는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묘하게 서로를 비추는 두 거울처럼 느껴집니다. 한쪽은 죽음을 박제하고, 다른 쪽은 소멸을 허용하죠. 그런데 정말 두 전시 모두 죽음을 ‘직면’하고 있는 걸까요? 김지혜는 두 전시를 가로지르며 ‘왜 어떤 죽음은 전시되고, 어떤 죽음은 애도만 가능한가? 그리고 그 배치를 결정하는 것은 누구의 권력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허스트의 냉소와 오만함이 스스로 실패하는 지점, 삭는 미술이 열어두는 가능성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증상앤더시티는 ‘도시’ 속 우리가 겪는 ‘증상’을 분석한다기보다 증상 속 우리의 향유가 얽혀 있는 틈새를 비추며, 나만의 예술, 나만의 삶의 방식으로 생을 직조해 내는 고유한 모습을 포착하고자 한다. 아티스트·아트세러피스트로 정체화하는 저자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증상을 예술, 정신분석, 심리학, 미술치료라는 반사경을 통해 비스듬히 바라본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집약된 공간으로서 도시가 개인의 증상을 형성하는 주체로 작동한다는 점 역시 내포한다.
“움직임은 일종의 삶을 암시한다. 그것들이 멈추는 순간 곧 부패하기 시작하고 악취가 나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의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전시 속 그의 말이다. 삶과 죽음을 대립시키는 이 진술을 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또 다른 전시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에 대응하는 두 층위로 나누어 보려 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죽음인가, 부패하는 것이 죽음인가? 허스트의 전시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부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전시에서는 유리장 안 포름알데히드 속에 움직임을 멈춘 상어가 보존되어 있고, 삭는 전시에서는 공기 중에 과일이 썩고 있다. 전시는 각각 죽음과 소멸을 말한다. 죽음을 고정하거나 소멸의 과정을 드러내며, 죽음을 구성하는 시간을 통제하거나 작동시킨다.
허스트가 ‘우리 시대의 많은 것을 말해 주는 증상적인 예술가’로 자리 잡은 시기는 이미 우리 시대가 아니다.
미술 시장과 권력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되었을 그의 전시를 둘러싼 논쟁마저 전시의 일부가 되어 흥행을 뒷받침한다. 이런 현대미술의 증상은 반복되어, 그 자체로 현대미술이 되어 왔다.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라는 전시 제목이 함의하는 허스트의 냉소와 오만함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애도가능성grievability, 즉, 어떤 죽음은 처음부터 죽음으로 등록되지 않는다는 개념을 소환하게 한다. 이는 인간의 삶까지만을 경계로 설정하지 않는다. 어떤 죽음이 전시되고, 어떤 죽음은 애도가 가능한가? 왜 모든 생명은 동일한 정치적 가치를 갖지 않으며, 어떤 죽음은 인간종을 위해 도구화되는가? 어떤 죽음을 어떻게 기리고, 어떤 소멸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이 배치가 곧 권력이 된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독해하며 생물학적 죽음과 상징적·사회적 죽음이라는 두 죽음을 비교한다. 안티고네의 오빠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가 되어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지만 왕의 명령으로 매장이 금지되었다. 안티고네는 국가의 법을 어기고 오빠의 장례를 치른다는 자기 욕망의 윤리를 지킨 대가로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동굴에 갇혀 상징적으로는 죽은 상태가 된다. 폐위되고 반역자로 몰려 죽은 단종과 그 시신을 수습하지 말라는 세조의 명을 어겼던 엄흥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연상된다. 이 두 죽음 사이Entre-deux-morts 공간, 첫 죽음은 완료되었지만, 두 번째 죽음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안티고네가 욕망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기에 빛나던 숭고한 공간을 허스트는 포름알데히드로 메워버린다. 그곳엔 정지된 죽음과 애도 불가능성만이 남는다.
허스트가 제시하는 죽은 상어, 나비, 해골은 죽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반복함으로써 점차 무디게 만드는 것이 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후기 반복강박을 쾌락 원칙을 넘어서는 멈출 수 없는 충동으로 보았다. 해소되지 않기에 반복은 지속되며, 동일한 구조를 재생산한다. 그가 죽음을 상기시키는 장치로 전시한 상어와 해골은 그저 형식이 되고, 그가 말하고자 했을 메멘토 모리의 메시지는 약화되어 결국 무력화되는 모순에 놓였다. 죽음은 보이지만,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허스트는 연작으로 작업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반복이라는 ‘끝없음’이 어떻게 죽음을 이론적으로 피하게 해 주고 죽음의 공포를 마비시키는지 직접 언급하기도 한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골 작품인 ‹신의 사랑을 위하여›는 죽음을 물신으로 뒤덮어 부인하고자 하는 페티시즘의 형태로, 죽음은 애도의 대상이 아니라 끝없이 반복되어 소비되는 다이아몬드라는 영원의 이미지로 고착된다. 허스트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에게 죽은 예술가를 위한 미술관인 테이트에서는 전시하지 않겠다고 단언한 후 세월이 지나 회고전을 열며 스스로 살아 있는 유물이 된 것을 즐기는 듯하다. 허스트의 영속화 집념은 자신의 스튜디오를 미술관 안으로 삽입해 박제하려는 욕망에서도 나타난다. 예술가의 현재 시간을 미술관이라는 역사적 공간에 구겨 넣는다.
David Bowie, Damien Hirst and Julian Schnabel. 사진 Roxanne Lowit. 출처. artnet
허스트는 사후 200년간 작품이 생산되도록 노트 200권을 채우는 계획을 진행 중이다. 죽은 뒤에도 작품을 제작할 권리를 판매하겠다는 것은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닌 ‘불멸을 기획’하는 것이다. “죽음을 외면하려고 애쓰며 사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더 큰 활력과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꽃이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꽃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 것”이라는 그의 말은 안타깝게도 그가 하는 모든 사회 실험에 가까운 행위가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려는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꽃은 시들기에 더 아름답다는 미적 판단은 별도로 치부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쩌면 시신 안치소에서 시신과 찍은 자신의 사진 ‹죽은 사람의 머리와 함께›에서처럼 웃고 있는 것으로 가장했지만, 속으로 공포에 질려 있던 16세 시절의 외상을 반복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전시 포스터에 사용된 작품)에서 죽음의 물리적 실체인 상어는 보존의 실패로 부패되었고, 새로 포획·제작되어야 했다. 이 실패는 다른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동물은 알아서 잘 살아가고 있었다. 인간 생의 무상함을 사유하는 데 다른 종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음에도 왜 어떤 종의 죽음은 메멘토 모리를 위한 소재로 지정되었는가. 허스트가 ‹희생제물›을 만들고자 할 때 동물은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작가의 불멸을 (명성과 자본까지) 생산하는 도구가 되어 생명이 배반당했다. 아쉴 음벰베 Achille Mbembe는 『죽음정치』에서 “주권은 누가 살아도 되고, 누가 죽어야 하는지를 지정하는 권력”이라고 하였다. 이 힘은 인종, 식민성, 종의 위계와 분리되지 않는다. 왜 어떤 파리의 죽음, 어떤 상어의 죽음은 이용될 수 있었나. 이 모든 죽음의 층위와 위계를 만드는 (특히 백인 남성의) 저자성이란 무엇인가.
허스트의 등장 이후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비인간종 간 공생이 중요한 포스트휴먼 시대는 이미 도래했고 전지구의 관객은 더는 (여전히) 참지 않는다. 허스트가 유리상자 안에 파리의 죽음 생태계를 만든 작품 ‹천 년›에서 소머리만 제거 된 ‹백 년›이 독일 전시에서 동물권 단체의 항의와 시립 동물병원의 경고로 철거되거나 허스트의 베니스 전시 때 전시장 입구는 구조된 동물의 배설물 40kg으로 더럽혀졌다. 국내에서도 지난 4월 3일, 실제 동물의 죽음을 인간 중심의 미적, 개념적 장치로 도구화하는 작가와 그에 권위와 정당성을 부여한 미술관에 문제를 제기하는 성명이 나왔다.
90년대에는 센세이셔널했을 작품들이 동시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인류세를 논하는 미술관의 다른 전시에서도 확인된다.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는 소위 불후의 명작들의 수장고인 미술관이 스스로 분해되는 작품의 전시를 통해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미술의 형식을 탐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로 식물과 미생물이 썩고 발효하는 과정이 전시되고, 공생의 공동체도 그려보게 한다. 죽음의 주권을 허스트라는 저자성이 탈취한 앞의 전시와는 달리 이 전시는 소멸의 행위자성을 비인간종에게 부여하고 있다.
다만, 에드가 칼렐Edgar Calel의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 속 과일이 부패하자 미술관이 관리의 주체로 기능하는 지점이 생겼다. 칼렐은 돌로 제단을 만들어 과일과 야채를 올리고 과테말라 토착민 공동체의 영성과 의례를 보여준다. 앞선 테이트 모던의 전시에서 미술관은 칼렐의 작품이 소유의 대상이 아님을 인정하고 작품의 ‘보호자’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전시를 재방문했을 때, 한 달 반 전에 봤던 과일은 시간을 역행하듯 주름이 펴져 있었고, 미술관은 부패가 심한 과일을 주기적으로 교체한다고 설명했다.
폐기를 위임받은 미술관은 관리의 주체가 되었고, 삭는 미술에서조차 소멸의 시간이 정지되었다. 죽음의 물리적 실체를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정작 부패가 진행되자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여 자연을 소거하고자 하는 허스트의 증상은 실은 현대미술의 숙명일까.
반면 유코 모리의 ‹분해› 속 에너지를 추동하는 전극이 꽂힌 썩어가는 과일은 한 달 반 전 전시를 보았을 때보다 삭아있었다. 허스트가 만든 유폐의 상자 속 죽음의 시스템이 아니라 소멸에서 생성까지 이어지는 에너지의 순환 시스템이야말로 죽음과 죽음 이후를 사유하게 하였다.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RBSC)의 소멸이 아닌 발효, 더 나아가 사회적 발효의 개념은 미술관의 작품 소장이라는 기능과 그에 따른 오래된 권위의 발효까지 사유를 확장하게 한다.
에드가 칼렐,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 중 일부, 사진 김지혜
에드가 칼렐,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 중 일부, 사진 김지혜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가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시도라면, 허스트의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는 특정 시대에 특정 저자의 것으로 한계 지어진 진실을 박제하려고 반복한다. 그리고 이 반복강박은 허스트의 시도에서처럼 실패하기 때문에 반복된다. 허스트는 타자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고착된 공간에 가두고자 하였다. 허스트의 메멘토 모리는 죽음의 필연성을 수용하는 성찰적 장치가 아니라 죽음의 위계를 생성하고 죽음마저 소유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전유의 증상이 되었다.
하지만 메멘토 모리는 자신의 죽음은 끝내 알 수 없는 인간이 타자의 죽음과 소멸로 향하는 시간을 목격하며 사유하는 윤리적 응답이어야 하지 않을까. 허스트의 전시에서는 결국 시간을 공간에 가두는 기획, 즉 죽음이라는 시간을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정치에 가두려는 시도의 불가능성만 남는다. 진실은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김지혜 박사는 아티스트이자 미술치료사로, ‘아트애즈테라피(artastherapy.kr)’를 운영하며 예술 치료 연구와 실천을 병행하고 있다. 예술, 정신분석, 심리학, 미술치료의 관점을 교차하고, 창작과 치유의 경계를 확장하려고 한다.
최근 연구 주제는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다문화 사회정의 미술치료와 반응작업 미술치료가 있다. 앞으로 미술과 음악, 문학, 무용동작 등을 통합하는 예술치료를 시도하고, 사회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공공미술, 전시, 교육 등으로 영역을 넓혀 가고자 한다. 저서로는 『치유로서의 미술』(글로벌콘텐츠, 202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