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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반은 열어놓고, 반은 닫아놓는

Writer: 안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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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안마노 디자이너는 현재 안그라픽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 중입니다. 어릴 적 화장실에 얀 치홀트의 저서가 놓인 환경에서 자라난 그에게 디자인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경로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그는 특히 글자, 그중에서도 한글에 끝없는 매력을 느낍니다. 한글의 새로운 표정을 찾아내는 일은 늘 힘들지만 언제나 큰 즐거움으로 다가와요. 특히 손 글씨에서 비롯한 운동감과 이질적인 형태는 그에게 끝없는 영감을 주는데요. 특유의 생경함을 그래픽으로 풀어내어 정돈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물을 마주할 때마다 큰 기쁨을 느낍니다. 더불어 포스터, 북 디자인부터 영상까지 다양한 스케일, 재료, 매체를 통해 실현되는 글자의 모습은 지속적인 창작욕을 불러일으키죠. 자신을 믿으면서도 너무 닫히지 않는 유연함을 귀히 여기고, 밀어서 안되면 당겨보라는 말에 따라 항상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노력하는 안마노 디자이너.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는 안그라픽스의 미래를 고민하는 그의 현재와 미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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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그물›, 2021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안마노입니다. 그래픽 디자이너이고, 글자와 포스터를 좋아합니다. 안그라픽스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으며, 안그라픽스 내부의 작은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마바사’를 이끌고 있기도 해요.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적부터 멋진 것들을 좋아했어요. 특히 그림이요. 그런 걸 그려내는 이들을 동경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도 그 길에 들어서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너무 당연하게도 디자이너셨던 아버지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네요. 🙂 학창 시절, 화장실에는 얀 치홀트Jan Tschichold의 『타이포그래픽 디자인(Typographische Gestaltung)』이 놓여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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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그물› 설치 전경, 타이포잔치 2021: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문화역서울284, 2021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안그라픽스 사무실입니다. 출판부 공간이라 책이 많아요. 최근 서재를 재단장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오래된 책을 정리하기도 했지요. 제 자리는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요. 벌써 책장이 모자라요. 책장에 꽂힌 책 제목만 봐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느낌입니다. 제 자리나 주변을 산뜻하게 꾸미는 편은 아니에요. 항상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 있지만, 이런 번잡함이 편안하기도 하네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일상에서 잔잔하게 얻게 되는데요. 최근에는 동아시아의 서예 작품에 빠졌어요. 붓글씨로 써내려 나간 글자들의 흐름은 그 자체로 멋진 풍경이자 그림입니다. 저 스스로 손 글씨에 서툴다 보니, 글씨를 잘 쓰는 분을 항상 동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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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PaTI) 현판, 2021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주제에 대해 찬찬히 고민하다 스케치에서 시작할 때도 있고, 바로 작업에 들어갈 때도 있어요. 리서치 과정에서 핀터레스트를 활용하기도 하고요. 어떤 톤앤매너를 차용하려는 것보다는 좋은 작업을 보면서 기를 받는 효과가 큰 것 같아요. 어느 단계부터는 저와 모니터 사이의 대화로 수렴됩니다. 바꾸고, 보고, 생각하고, 또 바꾸고, 보고, 고민하면서요. 작업이란 게 시작하기 전에는 마음이 참 설레면서도 항상 힘겨운 일인 것 같아요. 그래도 결과가 마음에 들면 힘겨움이 싹 사라져요.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크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먼저 한글을 중심으로 한 글자 작업입니다. 한글의 새로운 표정을 찾아내는 건 늘 힘들지만 동시에 즐거운 일이기도 해요. 특히 손 글씨에서 비롯한 운동감과 이질적인 형태에서 영감을 많이 받습니다. 생경함을 지향하며 그래픽적으로 풀어서 정돈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새로운 느낌을 잡아내게 되는데요. 이렇게 예상하지 못하던 형태를 찾을 때 무척이나 기쁩니다. 물론 제가 맡는 모든 프로젝트를 ‘기승전한글’로만 풀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한글을 주인공으로 삼는 게 자연스러운 때가 있고, 라틴 알파벳이나 다른 시각 요소에 자리를 내어줘야만 할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그 어느 쪽도 제게는 모두 소중한 프로젝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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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Films 100 Posters’ ‹탈날탈›,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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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Films 100 Posters’ ‹둥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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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Films 100 Posters’ ‹탈날탈›, 2019

‘100 Films 100 Posters’ ‹둥지›, 2020

‘100 Films 100 Posters’ ‹말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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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나모의 ‹호수의 호수› 공연 포스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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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기념관 포스터 프로젝트 ‹모두 모심›, 2024

북 디자인도 빼놓을 수 없네요. 공예적인 면모와 협업적인 면모를 동시에 지녔다는 점에 큰 매력을 느끼거든요. 여기에서 글자는 아주 기능적인 점부터 표현적인 면까지 다양해서 디자이너가 다룰 때 꽤나 역동적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다시개벽»은 1920년 창간한 잡지 «개벽»의 ‘창조적 복원’을 표방하며 발간한 인문 학술지에요. 2020년부터 2023년까지 4년간 총 12호를 발행했습니다. 저는 내지에서 근대 인쇄물의 조판이 지닌 인상이나 시각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고 노력했는데요. 매호 펼침면의 가운데 부분마다 다른 문양을 넣어서 책이 열리는 곳을 독자가 항상 의식하도록 유도했어요. 책 읽기에 방해된다는 불만을 듣기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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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개벽» 1-12호, 2020-2023, 의뢰: 모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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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개벽» 3호 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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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개벽» 8호 내지

『신묘한 우리 멋』(안그라픽스, 2021)은 안그라픽스 출판부에서 일하는 북 디자이너 김민영 님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표지의 레터링은 처음부터 특정한 인상을 목표로 시작하지 않았어요. 약간 휘갈겨 쓴 뼈대로부터 한 글자 한 글자 살을 붙이다 보니 지금의 형태가 나왔습니다. 제목과 내용이 가진 힘에 자연스럽게 제 손과 몸을 맡겼던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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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한 우리 멋』 레터링과 표지, 2021

『나의 경험 나의 시도』(안그라픽스, 2024)는 최정호 선생님이 잡지 «꾸밈»에 연재했던 한글의 글자 원리에 관한 글을 엮은 책입니다. 선구자의 목소리는 그 분량과 관계없이 여전히 강렬하더군요. 그래서 글과 내용을 최대한 담백하게 지면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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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험 나의 시도』 표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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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험 나의 시도』 내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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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험 나의 시도』 내지, 2024

글자를 작업하며 얻는 묘미 중 하나는 종이를 벗어나는 상황에 부딪힐 때일 거예요. 다양한 스케일, 재료, 매체를 통해 실현되는 글자를 볼 때 마냥 즐거움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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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터넷 런던Outernet London에서 상영한 한영 수교 140주년 기념 영상 ‹안녕하세요 Hello›, 2023, 영상 협업: 이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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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아일랜드› 인트로 영상을 위한 레터링, 2022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글자, 특히 한글이 어디까지 변형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살펴보는 게 제게는 항상 중요한 주제로 다가옵니다. 더불어 세상에 나온 작업이 너무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남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숨어 있던 한글의 새로운 표정을 찾아냈을 때 무척이나 만족스러워요. 하지만 ‘더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항상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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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소리로 지은 집» 전시 그래픽, 2024, 대구간송미술관 © Kim Yongk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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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예슬 작가의 ‹훈민정음 합창단: 그 이야기› 영상 디자인, 2024, «훈민정음 해례본: 소리로 지은 집», 대구간송미술관, 2024, 영상 협업: 이수성

송예슬 작가의 ‹훈민정음 합창단: 그 이야기› 영상 디자인, 2024, «훈민정음 해례본: 소리로 지은 집», 대구간송미술관, 2024, 영상 협업: 이수성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제 일상이 아주 특이하진 않아요. 파주에 있는 일터와 집을 오가고, 중간중간 다양한 현장이나 회의를 다니며 생활에 리듬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서울 근교에 등산을 갑니다. 요새 못 간 지 석 달이 넘어가네요. 저는 특히 북한산을 무척 좋아해요. 이토록 다양한 인상을 지닌 산이 가까이 있어서 기쁩니다.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2025년은 안그라픽스 창립 40주년이 되는 해에요. 이런 창작 집단을 맡아서인지, 창작 집단이 지속하는 방법과 필요한 규칙들에 대해서 고민이 커요. 최근 몇 년 동안 읽은 책들이 주로 경제·경영 분야에 집중됐는데요. 이제는 너무 사업 논리에만 함몰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중입니다. 경제성과 크리에이티브가 균형을 이루는 절묘한 임계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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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완간 30주년 기념 로고, 2024, 의뢰: 토지학회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솔직히 말해 제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물에 묻어나는지 잘 모르겠어요. 디자이너로서 행하는 모든 작업은 관계망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항상 의사 결정과 논의를 통하게 돼요. 그래서 결정 구조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항상 고민하며 작업에 임하게 되고요. 제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있고, 다른 이의 결정을 위해 그 앞단을 수행하는 때도 있죠. 결국 결과가 어떤 과정상에 놓인다는 걸 항상 인지하며 작업하게 됩니다.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너무 깊은 실망감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결국 흘러가고 고유의 페이스를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고, 상황에 달린 것도 있더라고요.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제가 이끄는 집단의 장래입니다. 🙂

제주국제패션아트전 «LOCAL-RISING JEJU» 모션 포스터, 2021, 의뢰: 패션문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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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국제패션아트전 «LOCAL-RISING JEJU» 포스터, 2021, 의뢰: 패션문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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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국제패션아트전 «LOCAL-RISING JEJU» 도록, 2021, 의뢰: 패션문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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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국제패션아트전 «LOCAL-RISING JEJU» 도록, 2021, 의뢰: 패션문화협회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호기심과 유연함. 상상력을 받쳐 주는 활력은 결국 더 좋은 것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믿으면서도 너무 닫히지 않은 유연함은 항상 중요하고요. 반은 열어놓고 반은 닫아놓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제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밀어서 안 되면 당겨보라’입니다. 일본의 그래픽 디자이너 후쿠다 시게오(福田繁雄)의 저서에 나오는 구절인데요. 항상 제 마음에 담아두고 있어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되뇌게 됩니다. 항상 조금이라도 움직여 보려는 시도와 노력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문자 나타남›, 2023,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개관 기념 로비 상영, 영상 협업: 신재호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오랫동안 꾸준히 작업한 창작자.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시국이 시국인지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시민 모두가 서로 존중하고, 서로를 하늘처럼 ‘모시는’ 미래였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사회의 주인이 됨을 알고, 이를 누리고, 지켜나가는 사회. 무엇보다 이전의 잘못을 깨닫고, 더 발전된 미래를 만들어 나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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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안마노(@an__mano)는 홍익대학교와 스위스 바젤디자인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다. 정지된 이미지와 움직이는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주제로 실험적 표현을 탐구한다. 타이포잔치: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스위스 벨트포매트 그래픽 디자인 페스티벌’, ‘시와 타이포그라피 잔치’, ‘안양 공공예술프로젝트’, TDC China 등에 참여했고, 도쿄 TDC, 레드닷 어워드, 서울국제실험영화제, 아시아퍼시픽 디자인(APD) 등에 작업이 소개된 바 있다. 홍익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PaTI)에서 디자인을 가르쳤고, 현재 안그라픽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면서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마바사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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