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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열심히 또 열심히

Writer: 함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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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북 디자이너 함지은은 매일 책 생각뿐입니다. 책에 대해서라면 읽는 것, 보는 것, 갖는 것까지 꾸준히 좋아해 와서, 일생에 이렇게 애정을 쏟은 대상이 또 있을까 싶은데요. 그렇다고 책에만 갇혀 있진 않아요. 일하는 시간 이외에는 미술, 공연, 영화, 제품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좋은 것을 잔뜩 보면서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둡니다. 필요할 때 다 쓸모가 있거든요. 아름다우면서도 많은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결과물을 내기 위해 미적인 부분과 이야기를 충실히 다루는 부분의 균형을 고민하는 그는 ‘그냥 계속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해요. 열심히 하라는 말이 미련하게 들리는 시대에 타고난 감각과 재능을 믿고 호탕하게 작업하는 게 영리하고 효율적인 것 같지만, 최고를 이룬 거장의 이야기를 찾아보면 다들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강조한 점을 잘 알고 있거든요. 파블로 피카소나 폴 랜드가 그런 것처럼요. 아름다워서 책장에 한 권쯤 꽂아두고 싶은 책을 만든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함지은의 북 디자인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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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2021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북 디자이너 함지은입니다. 회화와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고 현재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디자인 팀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책에 대해서라면 읽는 것부터 보는 것, 갖는 것까지 꾸준히 좋아해 왔어요. 돌이켜보면 이렇게까지 애정을 쏟은 대상은 책 이외에 없는 듯싶어요. 이야기와 물성이 결합해 탄생한 매력적인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잘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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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다다오, 건축을 살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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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2021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열린책들 사옥은 파주출판도시에 있어요. 서울과 거리상 꽤 떨어져 있는 터라 ‘파주에서 생활하는 게 불편하지 않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자연이 지척에 있는 조용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만족한답니다.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일하는 시간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좋은 것을 많이 봐요. 미술이나 영화, 공연, 제품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잔뜩 봐요. 이런 게 서로 섞이기도 하고, 화학 작용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제 내면 어딘가에 쌓여 있다가, 영감이 필요한 순간마다 꺼내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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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 한국어판 30주년 특별판’ 세트, 2023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가장 먼저 디자인할 책의 원고를 읽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회의에 참여해 편집자, 마케터 등 책을 함께 만드는 담당자와 내용, 방향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요. 그러면서 메모와 스케치를 진행하고, 이런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진 후, 컴퓨터 화면으로 옮깁니다. 개인적으로 아날로그에 기반한 표현에도 관심이 많아요.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를 작업할 때는 앙리 마티스가 노년에 시도했던 작업 방식인 ‘컷아웃Cut-outs’처럼 가위로 종이를 오려서 이미지를 제작했어요. 컴퓨터 그래픽 툴을 활용하면 쉽게 그릴 수 있는 단순한 선이라도 실제 손으로 표현할 때의 미묘한 디테일과 밀도는 완전히 차이가 납니다. 회화를 전공해서인지 손을 쓰는 상황이 익숙해서, 태블릿이나 아이패드 같은 디지털 도구보다 연필과 펜을 드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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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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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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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2021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먼저 ‘열린책들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을 꼽고 싶어요. 『마음』, 『조지 오웰 산문선』 등 열 권의 책으로 구성했는데요. 고전 작품의 정수를 독자에게 쉽고 간결하게 전달하자는 기획으로 시작했어요. 간결한 타이포그래피와 작품을 상징하는 모노톤의 이미지만으로 구성해 ‘모두 덜어낸다’라는 콘셉트를 강조했습니다. 독자에게 가볍고 부담 없는 독서 경험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책을 모두 모아 놓으면 하나의 컬렉션으로 느낄 수 있도록 고려했어요. 표지에 래미네이팅laminating을 하지 않아서 평소보다 좀 더 손때가 묻을 수 있는데요. 대신 사각거리고 포근한 종이 질감이 손끝에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에 느낌이 자연스럽고, 본문 내지에 평량이 가벼운 종이를 사용해서 부드럽게 넘어갑니다. 기존에 선보였던 ‘열린책들 세계문학’이 오래도록 두고 볼 수 있도록 견고하게 기획됐다면, 모노 에디션은 간결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서 독자의 필요와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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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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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 2024

칠레 출신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사망 20주기를 맞아, 본래 다섯 권으로 구성된 대표작 『2666』을 한 권으로 묶었어요. 악의 기원과 본질을 파헤치는 소설인데 원고지 6573매에 달할 정도로 양이 방대하죠. 그 전설적인 위명에 걸맞게 소설 분야에서 보기 드문 커다란 판형을 사용하고 책 테두리에 은장을 더해 압도적인 느낌을 더했어요. 표지 드로잉은 딥펜과 잉크를 사용해 아날로그 방식으로 그렸고요. 얼마 전 ‘2024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10선에 선정됐고, ‘인스퍼 어워드’도 받아서 감회가 남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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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6』 볼라뇨 20주기 특별합본판, 2023

『개미』, 『뇌』, 『신』 등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대표작을 모은 ‘베르나르 베르베르 한국어판 30주년 특별판’ 세트는 늘 견장정으로 만들던 도서를 연장정으로 가볍게 만드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30년 전에 집필한 미래적인 이야기를 현대적인 이미지에 담는 걸 목표로 삼고 작업을 전개했어요. 표지에는 심플한 타이포그래피와 과감한 그래픽을 적용했고, 책을 포장하는 박스에도 특별함을 더했습니다. 상단의 절취선을 뜯으면, 작가의 센세이셔널한 데뷔작, 『개미』의 첫 문장이 보입니다. 첫 작품의 첫 문장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고, 특별판 세트를 관통하는 메시지로서도 매력적인 요소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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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 한국어판 30주년 특별판’ 세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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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 한국어판 30주년 특별판’ 세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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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 한국어판 30주년 특별판’ 세트, 2023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아름다우면서도 많은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결과물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멋지게 만들려다가 자칫 대중과 멀어질 수도 있고, 이야기를 충실히 담는 일에만 치중하면 미적인 부분보다 다른 부분에 더 집중하는 순간이 생기는데요. 이 두 가지 사이의 밸런스가 훌륭한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정답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최근 작업에는 모두 그런 고민이 담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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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 한국어판 30주년 특별판’ 세트, 2023

최근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한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은 컬러를 쓰지 않고 후가공을 전혀 하지 않는 등 처음부터 여러 가지 제한이 걸린 상태에서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게 큰 숙제였어요. 결과적으로 많은 독자가 “모두 덜어낸 간결함이 좋다”라고 평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업자 입장에서는 늘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좀 더 눈에 잘 띄는 것 같지만요. 아쉬운 부분이 생기면 잘 살핀 후 다음 작업을 할 때 개선하려고 노력합니다.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책이나 원고를 읽기도 하고, 그 외의 시간은 다양한 분야의 좋은 것을 보는 데 가장 많이 쓰고 있어요. 서점에도 자주 갑니다.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건강하게 오래 일하고 싶어요. 운동을 즐기지 않지만, 시간이 나면 산책을 하거나 몸을 움직이는 시간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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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컬렉션’,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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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컬렉션’, 2022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저는 안으로 파고드는 성향인데, 그 깊은 곳에는 욕심을 이겨 보려는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안 될 것 같아도 일단 시도해 보는 태도가 작업을 하거나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에 반영되는 느낌입니다. 디자인 업무의 특성상 주어진 시간이 적은 상황에서 급박하게 돌아갈 경우가 생기는데요. 결과물의 퀄리티를 높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진행하는 편이에요.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일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는 것에 좀 더 집중하려고 노력해요. 주어진 일을 대충 처리하거나, ‘이번에는 조금 덜 열심히 할까?’ 마음먹는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하거든요. 경력이 쌓이면 좀 더 멋진 슬럼프 극복 방법을 알게 될 줄 알았는데…아직은 ‘그냥 계속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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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컬렉션’, 2022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일을 계속하다 보니 감사하게도 강연이나 특강 등 북 디자인을 하고자 하는 분들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데요. 힘닿는 대로 뭐든 하자는 생각이라, 정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거절하지 않고 다 했어요. 올해 초에는 호흡이 긴 강의를 할 기회가 생겨서 주말 오전마다 시간을 내어 몇 달간 진행하다가 일과 병행하려니 한계에 봉착하더라고요. 결국 본업에 집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여러 번에 걸친 강의는 하지 않기로 했는데요. 그래서 제게 시간이 좀 더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소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열심히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나는 감각이 없나? 이 일을 계속 해도 되나?’ 같은 불안감으로 오랜 시간을 보낸 편이에요. 혹시 타고난 감각이나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고 해도, 주어진 일에 진심을 다하지 않았거나 중도에 포기했다면 지금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이런 생각에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최근 한 월간지에서 디자인 철학에 대한 질문을 주셔서 한 줄로 답하게 되었는데, 막상 생각해 보니까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멋진 철학이 제게 없는 것 같더라고요. 막막한 마음에 여러 디자이너나 작가의 말을 다시 찾아 읽으면서 파블로 피카소도, 폴 랜드도 하나같이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던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들도 열심히 했다는데, 제가 감각이나 재능에 기대길 바라면 될까 싶어서 오히려 위로받았어요.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세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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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세트, 2022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앞으로 오래 일하고 싶기 때문에 저도 그 노하우가 궁금하네요!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지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그 마음만 같다면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아름다워서 내 책장에 한 권쯤 꽂아두고 싶은 책’을 만든 사람으로 기억한다면 좋겠습니다.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어떤 형태로든, 나이가 많아질 때까지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어요. 건강하게 계속 일하는 모습이 저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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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고양이 백과사전』, 2022

Artist

함지은(@jieunhahm)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와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현재 출판사 열린책들 디자인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작업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죽음』은 2019년 «한겨레»에서 뽑은 ‘올해의 북 디자인’ 8선, 로베르토 볼라뇨의 『2666』은 대한출판문화협회와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선정한 ‘2024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BBDK – Best Book Design in Korea) 10선에 포함됐다.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세트, 『2666』으로 2022년부터 3년 연속 한솔제지 ‘인스퍼 어워드’를 받았다. jieunhah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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