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민주는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한글 서체 디자이너입니다. 지금까지 ‹설 산스›, ‹둥켈산스›, ‹뉴트로닉 한글›, ‹함렡› 등의 서체를 발표했어요. 고생길 훤한 타국에서 지치지 않고 꾸준히 한글 서체를 발표하는 에너지의 원천이 궁금했는데요.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결국 나밖에 없다”는, 무척 뭉클한 답변이 돌아왔답니다. 세상에 필요한 글자체를 만들고 싶은 함민주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글자체 디자이너 함민주입니다. 한국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인하우스 서체 디자이너로 6년 정도 일했어요. 2015년 네덜란드에서 타입미디어(Type and Media) 석사 과정을 마친 후 베를린에 정착해 지금껏 작업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최근에 서점에서 많이 보이는 ‹둥켈산스›를 디자인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대학교 1학년 때 ‘한글 디자인’ 수업이 있었는데요. 운 좋게도 이용제 선생님과 한재준 선생님이 수업을 맡으셨어요. 두 분이 이끄는 수업이 너무 좋아서 몇 번씩 반복하며 청강했죠. 제가 만든 글자체를 활용해 다른 디자이너가 작업한다는 사실이 짜릿했거든요. (웃음) 서울여대 한글 타이포그래피 동아리 ‘한글아씨’에서 활동하며 동기들과 서체 공부도 하고, 전시를 열기도 했는데요.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할수록 라틴 서체에 비해 한글 서체의 종류가 다양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어요. 그래서 한글 서체 디자인을 업으로 삼아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서체 ‹둥켈 산스›, 2018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작년 12월까지는 독일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에 위치한 공동 스튜디오에서 작업했어요. 잡지 «그래픽»이 베를린 스튜디오 관련 이슈에서 다루기도 했답니다. 근데 최근 베를린 교외로 집을 옮기면서 통근이 불편해지자 주로 집에서 작업하고 있어요. 근처에 호수가 있어서 산책하기도 좋고, 한적한 동네라서 만족하며 지내는 중이에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작업마다 다르죠. 최근 서점에서 많이 보이는 ‹둥켈산스›는 원래 기존에 작업하던 ‹함렡›을 변형해서 완성한 서체예요. ‹함렡›은 옛날 영화 포스터에서 보이는 서체에서 영감받아 제작한 케이스인데요. 굵고 강한 이미지의 글자체를 만들고 싶어서 ‹함렡›의 스케치를 변형하고, 두껍게 그려내 ‹둥켈산스›를 완성했죠.
필요한 글자체의 콘셉트를 생각하고 구체적인 글자 형태를 스케치해요. 한글을 기본적으로 구성하는 2780자를 모두 그린 뒤에는 오탈자나 문제가 없는지 검수를 진행합니다. 꽤나 긴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죠. 굵기가 다양한 글자체는 검수에 드는 시간이 배가 돼요. 1만 피스 이상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가는 기분이 들 정도죠. (웃음)
서체 ‹둥켈 산스›, 2018
작가님의 최근 작업들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뉴트로닉 한글›을 마무리하는 중입니다. 총 10가지 굵기를 갖춘 슈퍼 패밀리 스타일로 글자의 폭도 다양하게 제작하고 있어요. 독일 서체 디자이너 마르크 프룀베르크Mark Frömberg와 함께 ‘하이퍼 타입Hyper Type’ 파운드리에서 발표하는 글자체 가족인데요. 저는 한글을 담당하고, 마크가 라틴과 숫자, 기호, 심볼 등을 그렸어요. 젊고 신선한 느낌의 고딕(민부리) 서체입니다. 사용자가 폭과 굵기 등을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어서 다이내믹한 타이포그래피에 활용하기 적당한 글자체예요.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를 구독하는 분이라면 편하게 사용하실 수 있답니다.
서체 ‹뉴트로닉 한글›, 2020
서체 ‹뉴트로닉 한글 컴프레스드›, 2023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작가 정신으로 작업하려고 노력해요. 제가 만든 글자체를 사용자가 알아봐 주실 때 큰 만족감을 느끼는데요. 계속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동력이 된답니다. 저만의 해석과 느낌으로 그려낸, 세상에 필요한 글자체를 꾸준히 만들고 싶어요.
서체 ‹블레이즈페이스 한글›을 사용한 세종문화예술회관의 디자인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에 참여했다.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를 마시고, 호수 한 바퀴를 걷거나 뜁니다. 오는 길에 장을 보기도 하고요. 점심은 그때그때 먹고 싶은 걸 만들어서 먹어요. 한국 요리도 자주 해 먹는 편입니다. 직접 요리하는 시간을 가지니까 작업에 열중하던 머리를 식히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집에서 혼자 근무하다 보니 이전처럼 공유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친구들과 외식하는 재미가 없어져서 아쉽기도 한데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점심 약속을 잡는 편입니다. 여름에는 가능하면 자전거로 이동하고, 일이 끝나면 호수에서 수영해요.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앞서 말한 마르크 프룀베르크와 함께 라틴 문자와 한글을 전문으로 다루는 하이퍼 타입 파운드리 운영을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어요. 2021년 하이퍼 타입이란 이름으로 처음 협업하며 구글 폰트를 통해 발표한 주인공이 ‹함렡›인데요. 앞으로 저와 마르크의 눈으로 해석한 신선하고 다양한 글자체를 하이퍼 타입에서 판매할 계획입니다. 많이 이용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하나에 꽂히면 열정적으로 에너지를 쏟아 내는 스타일이에요. 요리할 때도, 테라스 텃밭을 가꿀 때도 정성 들여 일하죠. 한글 서체를 디자인할 때도 온 힘을 다해 작업합니다. 그래서 제가 발표하는 글자체들은 작업 당시 제가 푹 빠져 작업한 서체들이에요.
서체 ‹블레이즈페이스 한글›, 2019
서체 ‹블레이즈페이스 한글›, 2019
서체 ‹둥켈 산스›, 2018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슬럼프가 오지 않도록 평소에 기분 관리를 열심히 해요. 아침마다 유산균을 꼭 챙기고, 겨울에는 비타민 D를 잊지 않고 먹어요. 아이폰 메모장에 제가 기뻤던 순간, 누군가에게 들었던 칭찬, 힘이 된 사건을 저장해 두고 가끔 읽어보기도 해요. 슬럼프나 번아웃은 자괴감이 들 때,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쉽게 찾아오는 것 같은데요. 스스로를 더 칭찬하고 사랑하는 게 최선의 극복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매일매일 작은 단위의 성취를 만드는 게 큰 도움이 됩니다. 프리랜서일수록 더욱더 나 자신을 잘 관리하는 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최근 들어 작가님에게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일과 삶의 균형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일에 몰입하다 보면 제대로 쉬지 못할 때가 많은데요. 장시간 앉아서 일하다 보니 최근에 허리 통증이 생겼어요. 아무래도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일에 집착하는 것 같긴 해요. 매년 프로젝트 유무에 따라 수입이 들락날락하니까요. 그래서 최근 제 글자체 라이브러리를 확장해 미래를 위한 안전망을 튼튼하게 설계하고 있어요.
‘나’를 지키는 데에도 책임감이 필요해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거든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할 수 있도록 나를 계속 돌봐야 해요. 더불어 경제적인 면을 챙기는 것도 스스로 해야 합니다. 환경 또는 타의 때문에 좋아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려면요. 그래서 경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자산 관리도 꼼꼼히 하려고 해요.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꾸준히 새로운 글자체를 발표하는 디자이너, 다음에 발표할 글자체가 기대되는 디자이너.
현재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지금 하는 일, 혹은 비슷한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건강하고 즐거운 환경에서요. 물론 제가 책임지고 지금부터 조금씩 환경을 만들어 가야겠죠. 제게 남은 시간을 제가 하고 싶은 작업에 고스란히 쓰고 싶어요.
Artist
함민주는 현재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립 서체 디자이너다.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서체 디자이너로 6년여간 근무한 후 라틴 서체 디자인에 대한 배움의 열망으로 2015년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예술학교(KABK)에서 타입미디어(Type and Media)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 후 독일 베를린에서 독립 서체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국내외 기업들과 다국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 최대 서체 회사인 모노타입Monotype과 함께 아드리안 프루티거Adrian Frutiger의 ‹노이에 프루티거Neue Frutiger›에 어울리는 한글 서체 ‘설 산스Seol Sans’를 만들었고, 라틴 서체 ‹테디Teddy›로 TDC에서 ‘Certificate of Typographic Excellence’를 수상했다. 개인 프로젝트로 작업한 ‘둥켈산스Dunkel Sans’는 2019년 제11회 ‘그란샨Granshan’ 공모전에서 한글 부문 1등 상을 받았다. 그는 같은 해 열린 ‘타이포잔치: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에 큐레이터로 참가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설 산스›(2017), ‹둥켈산스›(2018), ‹블레이즈페이스 한글›(2019), ‹뉴트로닉 한글›(2020), ‹함렡›(202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