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재 작가는 동물을 그립니다. 동물애호가냐고요? 아마 그럴지도요! 어릴 적부터 동물도감을 좋아했고, 동물행동학에 대한 규칙이 삶에 큰 위로를 주었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그가 표현하는 모습은 뭔가 이상합니다. 살아있는 듯, 아닌 듯, 잡히는 듯 아닌 듯 동물들이 얼음땡처럼 굳어있거든요. 그는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박제 표본을 작업의 소재로 써요. 생명이 다한 대상을 현실에 존재시키려는 인간의 마음을 담은 박제를 세밀하게 표현하고 유리에 반사하는 빛이나 어딘가 뒤틀린 원근 등을 가미해 현실적이고 동시에 이질적인 모습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그림 마지막에 유리 질감을 보여주는 리터칭을 끝낼 때야 비로소 작업을 완성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해요. 얼마 전에 열린 전시에서는 박제 사이로 긴장감을 환상적으로 표현하며 움직임을 가져오는 방식으로 흥미롭게 발전했답니다. 그는 이를 통해 가장 잡히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바로 관계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데요. 모든 대상의 흐름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한 상황이랄까요. 그는 직접 봐야만 하는 작업을 하고 모두의 취향이 아닌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데요. 결국 사람들의 화제를 이끌어내고 서로를 관계 맺는 매개로 존재하는 작품을 남기고 싶은 것 같습니다. 꼼꼼하고 진중하게 작업을 대하는 임희재 작가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Faux SC&WS›, 2023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작가 임희재입니다. 멈춰 있는 회화로 움직임을 붙잡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에 미술을 시작했다는 작가들이 많은데요. 저는 그런 소명감이 없었어요. 학창 시절 대부분 다른 공부를 하면서 지냈고, 미술과 가장 큰 접점이라 할 만한 것은 흙을 만지면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다녔던 도자기 공방이었어요. 동시대 미술을 제대로 접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학에 들어왔기에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한 계기는 회화입니다. ‘평소 익숙했던 도자보다 제게 더욱더 잘 맞고 작업 과정이 행복했다’라는 스토리가 아니라, 흙처럼 닿고 만지고 상호작용할 수 없는 차단된 상황이 너무나도 이해되지 않아서 집착하다 보니 오히려 흥미가 생긴 케이스입니다. 그때 느낀 어색함과 거리감이 회화에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대체 왜 안 되는 거지?’라는 오기가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된 거죠. 그렇기에 캔버스에 친숙해진 지금도 당시 발견한 방법을 유지하고 활용 중이에요.
‹Stuffed Chamois and Wild Sheeps›, 2021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현재 천안에 소재한 화이트블럭 레지던시에서 작업하고 있어요.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작업하는 생활은 처음인데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걸 느낀답니다. 작업실이 산속에 있어서 해가 일찍 지고 아침에는 새가 울어서 본의 아니게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예요. 작업실 구조는 통유리창이 정면에 있고 바로 앞에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페인터의 방은 풍광마저도 평면적이네’ 농담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창문 앞에 둥지를 튼 노랑할미새 부부의 감시를 받으며 작업하고 있어요. 구경꾼이 구경을 당하고 있네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저는 작업에 있어서 다방면으로 관심을 보이기보다, 계속 자문자답하며 주제를 심화하는 편이에요. 어떤 감각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그에 대해 왜 이야기하고 싶은지, 이런 감각은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인지 등등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이 개인전의 주제가 되곤 했습니다. 원하는 감각의 단서들은 제 작업의 일부에서 발견하기도 하고, 미술, 영화, 책, 음악처럼 다른 창작의 작품일 때도 있어요.
‹Four Antelopes in the Cabinet›, 2021
«둥지짓기», 2023, 온수공간
«둥지짓기», 2023, 온수공간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성격이라서 작업 내용과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을 나누는 편입니다. 내용 면에서는 평소 작업에 닿아 있는 단어나 문장이 떠오르면 메모를 틈틈이 해놔요. 이때는 동떨어진 조각에 가깝죠. 휴대폰에 조금씩 단어를 쌓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의 이야기가 짜맞춰질 때가 있는데요. 이런 이야기가 적절한 소재와 만나면 다음 작업에 활용합니다.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 또한 큰 그림을 우선적으로 계획하지 않고, 태피스트리처럼 가장자리부터 요소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짜이면서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을 선호해요. 덕분에 완성되기 전까지는 미궁을 헤매는 기분입니다. 화면에 하나의 유리막이 생길 때 비로소 완성이라고 여기고 끝맺습니다.
‹Study for SC&WS 500›, 2023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얼마 전 WWNN에서 끝난 전시에 선보인 작업이 최근 일어난 변화를 설명하기 좋을 것 같네요. 저의 기존 작업은 일종의 수필처럼 사진 이미지를 유추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정직하게 옮기면서 이를 통해 해당 장면이 가공된 풍경이라는 점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방식을 취했어요. 문득문득 상처럼 등장하는 유리의 반사된 빛이나, 어딘가 뒤틀린 원근 등의 변형을 통해 현실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물감이 느껴지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반면, 이번에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디스토피아’라는 주제를 전달받고 SF 소설의 현실감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생겼어요. 캐나다의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에 따르면, “너무나도 픽션이기 때문에 외려 현실에 가까워지는 이야기들”이죠. 결과적으로, 앞서 말한 변형의 도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그림의 색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 평소보다 환상적으로 표현됐어요. 픽션의 개념에 영향을 받아서 나뭇가지가 벌새를 노리는 뱀 머리의 형상으로 드러나는 등 요소 간에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는 시도도 꾀했답니다. 정물, 그러니까 박제 사이로 긴장감을 가미하며 화면에 움직임을 가져왔어요.
‹Tree of Stuffed Humming birds›, 2024
작업을 통해 작가님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잡히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관계’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림에는 56마리의 벌새, 7개의 벌새 둥지가 등장하는데요. 지금까지 그린 작업 중 가장 많은 요소가 출현하는 만큼 개별적인 관계로 화면이 촘촘히 이어져 있어요. 그러면서도 그 중 우열을 나누기보단 모두에게 동시에 집중해서 개별적이면서도 서로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걸 목표로 잡았습니다. 평소에는 유리판 전체에 걸쳐 큰 흐름의 움직임이 보였다면, 이번에는 파도가 모인 바다처럼 벌새, 나뭇가지, 둥지, 배경 사이의 흐름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며 만들어내는 울렁거림에 가까워요. 좋아하는 영화 제목을 빌리자면,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한 상황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The Vanishing Horizon Episode.02», 2024, WWNN
최근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하는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조각과 조각이 이어지며 한순간 화면에 역동이 생겨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제가 작업을 설명하는 말과 작업의 결과가 지금까지 어떤 경우보다 가장 닿아있다는 게 참 만족스러워요. 다른 작업은 유리 질감을 내기 위해서 화면 전반에 걸쳐 리터칭하는 과정이 마지막에 필요했는데, 이번에는 완벽한 퍼즐처럼 한 번에 완성됐답니다. 아쉬운 점은 언제 어떤 형태로 완성될 것인지 저조차도 예상하기 어려웠다는 거예요. 희극과 비극, 장점과 단점은 늘 붙어있는 것 같아요.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하루에 많은 종류의 일을 못 하는 성격이라 실제 나열하면 무척 단조로운 편인데요. 일단 아침에 일어나서 작업실 베란다에 나가 새들 밥과 물을 채워주고, 저도 식사와 커피를 합니다. 그림이 마르기 전에 이어서 작업해야 하니까, 어제 물감이 굳기 전에 바로 작업을 시작하고, 지쳐서 쉬는 시간에는 집안일을 하거나, 작가 노트 혹은 이메일을 쓰고 책을 읽어요. 모든 일정이 끝나면 내일 작업을 위해 붓을 빨고 잠자리에 듭니다. 마음이 여유로운 밤에는 혼자, 또는 다른 작가님과 술 한잔하기도 해요.
«Cabinet of Curiosity», 2022, 이유진갤러리
‹Study for SC&WS Q›, 2023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뮤지컬 공연 실황을 몰래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리는 ‘뮤지컬 부틀렉Musical Bootleg’에 관심이 가고 있어요. 속칭 ‘슬라임 튜토리얼Slime Tutorial’이라고도 부르는데요. 뜬금없이 슬라임이 등장하는 이유는 저작권에 걸려서 삭제당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유튜브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제목으로 업로드하는 생존 방식 때문이에요. 당연히 불법이지만, 부틀렉 촬영자와 시청자는 결과물 자체의 화질이 떨어지고, 촬영자 앞에 앉은 관객 머리가 계속 시야에 걸치는 등 뮤지컬의 ‘라이브’한 상황과는 거리가 멀어서, 결코 공연장을 방문하는 경험을 대체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이 또한 지금 작업하는 박제 표본처럼 살아있는 생생함 그 자체를 붙잡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저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작가인지라, 다른 무엇보다 제가 삶과 관계를 보는 방식을 작업이 잘 대변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한 친구가 ‘네 작업은 임희재라는 동물이 보는 시선을 캔버스에 옮겨 놓은 것 같아’라고 말했는데,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르네요.
‹Stuffed Bison›, 2021
‹Study for Stuffed Antelopes›, 2022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지금 생각하면 ‘아, 그게 슬럼프였구나!’ 싶을 때가 있는데요. 슬럼프에 대해 자가 진단하는 일이 오히려 작업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서인지, 슬럼프가 왔을 때 극복하려고 노력한 기억은 없어요. 무의식적인 해결 방법으로는 잘 풀리지 않는 상황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차라리 다음 작업 계획을 세우거나 여행을 떠나는 식으로 스스로를 환기하는 편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제가 전형적인 회피형 같은데요. 그때마다 찾아온 변화가 지금의 저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어서, 그 시기를 슬럼프라고 단언하고 싶지 않아요.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운동을 못 하다 보니 컨디션의 차이가 느껴져서 고민입니다.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며 저를 돌보는 습관을 만드는 게 요즘 가장 큰 숙제예요.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계속해서 어려워하는 마음. 작업 중 생기는 질문에 뭉툭하게 답하거나 대충 넘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Cabinet of Curiosity», 2022, 이유진갤러리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창작자가 발전하는 흐름은 어쩔 수 없이 본인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가끔은 객관적인 눈보다 창작자 본인의 주관적인 눈이 더 냉철하고 매섭다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 결과가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다음 활동을 하면서 의미가 생길 거라고 믿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직접 봐야만 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 그리고 모두의 취향이 아닌 사람. 그래서 어떤 점이 좋은지 이야기를 꺼내고 싶게 만드는 사람.
‹Faux SC&WS›, 2023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저는 스스로 계속 새롭게 도전하며 성장하는 모습이길 바라거든요. 그래서 미래에도 지금과는 또 다른 목표와 희망을 지니면 좋겠습니다!
Artist
임희재(@im_heejae)는 살아있는 것을 붙잡으려는 욕망에 대해 다루는 페인터다. 주요 개인전으로 «둥지짓기»(온수공간, 2023), «Cabinet of Curiosity»(이유진갤러리, 2022) 등이 있고, «The Vanishing Horizon : Episode.02»(WWNN, 2024), «부풀어오르는 세계»(드로잉룸, 2020), «COCOON 2020»(스페이스K, 2020), «그림과 그림»(누크갤러리, 2017)을 비롯한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 레지던시에 입주해 작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