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 작가는 도예에 뼈를 묻은 작가입니다. 자신의 작업이 도예라는 장르, 흙이라는 물성을 가지고 작업한다는 사실에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죠. 도예 특유의 고된 제작 방식, 이를 인내하고 견디는 시간, 여기에서 오는 숭고함과 고요함이 공통으로 자리하고 있답니다. 그렇다고 한 우물 파기에만 매몰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는 멀티태스킹에 능하거든요. 지금까지 다양한 시리즈를 작업하면서 하나에서 막힌다 싶으면 다른 쪽으로 옮겨 작업을 지속하는 유연성을 갖췄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차곡차곡 쌓는 인내의 과정과 함께 때로는 즉흥적이고 즉각적으로 작업하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작업 태도는 그의 삶과 꼭 빼닮았습니다. 작업에서 작가의 삶이 드러날 때 가장 솔직하고 진정성이 빛난다는 그의 신념과도 일치하죠. 그는 꿈을 높고 크게 설정하라고 말해요. 상상하지 않으면 결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죠. 창작의 고됨을 버티는 데 필수입니다. 좋아하는 게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하다며 창작자와 학생을 북돋고, 어떤 것을 선택하기보다,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박종진 작가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살펴보세요.
‹Artistic Stratum_Y1B4›, 2024, 20 × 30 × 8 cm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박종진입니다. 작업을 하면서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도예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입시를 준비해 미술대학에 입학하게 됐어요. 유년 시절부터 무언가 만들기를 참 좋아했는데 그 부분을 충족할 만한 전공으로 도예를 선택했고, 지금까지 쭉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적층된 그리드-Layered Grid», KCDF갤러리, 2024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작업은 두 곳에서 이루어져요. 한 곳은 집에 있는 조그마한 방이고요. 다른 곳은 재직 중인 학교입니다. 작업 공간을 구축할 때는 다른 일과 작업을 병행할 수 있는 효율적인 공간이어야 한다는 점을 가장 중점적으로 봐요. 현재 아내와 육아를 함께하는 상황이라서 시간이 날 때마다 집안의 자그마한 공간을 붓으로 흙물을 바르는 1차 작업을 위한 곳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가마 소성이라든지 2차 그라인딩 가공은 학교의 작업 공간에서 진행합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영감의 원천은 일상과 자연입니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현상과 디자인적 요소, 색채 배열 등을 보았을 때 떠오르는 감흥을 기록하거나 기억해 두었다가 그때그때 끄집어내어 사용하곤 해요. 요즘 진행하는 작업에서 영감의 원천이 되는 자연적 지층 형상이라든가, 기타 자연의 요소, 원리, 색감 등은 즉흥적으로, 때로는 계획적으로 적용 중입니다.
«적층된 그리드-Layered Grid», KCDF갤러리, 2024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제 작업이 도예라는 장르에 있다는 생각을 무척 많이 해요. 흙이라는 물성을 가지고 작업한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잃지 않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런 물질에 대한 섬세한 시각, 물질에 대한 존중 같은 태도가 작업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이후로는 제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창작 과정에 대한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작업이 이루어지게 돼요. 작업을 진행할 때 계획을 아예 세우지 않을 수는 없으므로 어떤 기물을 제작하고 어떤 작업을 할 거라는 대략적인 계획과 이에 소요되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선정하고요. 색감, 패턴 같은 경우에는 작업에 따라 다르지만, 즉흥적으로 변모하는 패치 작업의 경우에는 작업에 앞서서 10분 정도 평면 위에 면을 구획하고, 이에 적용할 주요 색감과 배색을 지정해요. 그러고 나서 주변과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즉흥적으로 색을 적용하는 방식을 통해 작업을 수행합니다.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제 작업은 크게 ‹예술적 지층(Artistic Stratum)› 시리즈로 이루어져 있어요. 종이 한 장을 켜켜이 쌓아 적층선이 돋보이는 ‹스트라텀Stratum›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항아리나 기물의 형상으로 변주를 주었고, 점토와 유약질을 혼합한 물질을 소성하며 자연스럽게 녹아내리는 ‹붕괴된 형태(Collapsed form)› 시리즈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장 마지막으로 발전시킨 형식이 바로 ‹패치Patch› 시리즈입니다.
‹Artistic Stratum›, 2024, 12 × 10 × 20 cm
‹Artistic Stratum_Jar›, 2024, 34 × 34 × 34 cm
‹Artistic Stratum›, 2024, 12 × 10 × 20 cm
‹Artistic Stratum_Jar›, 2024, 34 × 34 × 34 cm
‹Collapsed Form_WGBRBY›, 2024, 26 × 20 × 18 cm
‹Artistic Stratum_Patch›, 2023, 30 × 24 × 38 cm
‹패치› 시리즈는 즉흥적이고 다양한 두께감으로 접은 표면을 활용해 마치 조각보처럼 쌓아나가는 방식이 특징이에요. KCDF 중견작가지원 공모에 선정되어 지난 6월 치룬 개인전에서는 ‹패치› 시리즈를 평면 작업으로 변형한 버전을 선보이기도 했어요. 전시에 출품했던 개별 피스가 지난 11월 리빙케어 브랜드 ‘아오삭’과의 협업을 통해 캐셔로 재탄생되면서 새로운 입체화 방법을 강구할 수 있었습니다.
‹Artistic Stratum_Patch_Wall›, 2023, 각각 75 × 90 × 4 cm
‹Artistic Stratum_Patch_P4_1B4›, 2024, 30 × 30 cm
아오삭과 협업해 캐셔로 재탄생한 ‹패치› 작업
올해 경기도자비엔날레 국제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예술적 지층_역설적인 것들›도 말할 수 있겠네요. 적층을 띠로 두르는 방식과 색감 등은 기존 형식과 큰 차이점은 없었는데요. 150cm 높이의 대형 기물로 구현했다는 게 특별해요. 사람의 눈높이에서 얇게 압축된 지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거든요. 무엇보다 작품이 놓이는 공간에 대한 확장 가능성을 엿본 건 큰 수확입니다.
‹예술적 지층_역설적인 것들›, 2024
최근 작업을 통해 작가님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공간과의 조화를 많이 고민하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단일 오브제로서, 조형 작품으로서 일상 공간과 주거 공간에 침투하는 경우는 커봐야 40~50cm 정도의 스케일이었는데요. 요즘에는 좀 더 집 안을 벗어난 공공 공간이라든가, 여러 형태를 띤 공간에 작품을 접목하는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있어요. 자연스럽게 이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에 대해서도 생각이 깊어지네요.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스케일이 작은 작업을 했을 때보다 상상 이상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어요. 작업의 크기가 커지는 것만으로도 전달할 수 있는 부분, 사람의 눈높이에서 질감을 그대로 바라보는 장면 등이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에너지를 발산하더군요. 작업이 커지면서 소요되는 시간이나, 예기치 못한 변형 등을 아직 완벽히 통제하는 데 어려운 점이 있다는 건 아쉽습니다. 앞으로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보완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예술적 지층_역설적인 것들›, 2024
«적층된 그리드-Layered Grid», KCDF갤러리, 2024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전임교원이 된 지 올해로 4년 차가 되었어요. 그래서 저의 주된 일상 공간은 학교이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의 비중이 높습니다. 집에서는 5살 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시간을 꾸준하게 가지면서 아이가 잠들면 비로소 작업을 시작하고요. 어떻게 보면 작업이 우선순위에서 밀려있는 상황인데요. 그래서인지 작업에 몰두할 때면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생각을 비워내는 느낌이에요. 마치 휴식처럼요.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작업의 확장 가능성입니다. 올해 개인전을 열면서 다양한 분들이 좋은 제안과 의견을 많이 주셨어요. 제가 추구하던 도예라는 장르 안에서 가지는 제 작업의 의미가 제 정체성이고, 작업할 때 여전히 가장 중요한 부분임은 분명하지만, 제 작업을 보는 사람들, 해석하는 사람들의 의견과 의지도 분명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게 요즘 계속 고민거리입니다. 작업이 다양한 프로젝트와 연계되고 확장되면서 또 따른 국면으로 흘러가는 걸 보면, 이런 시대적 흐름을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닐지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요즘 컬래버레이션이나 영역의 확장에 관심이 많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
«자가처방_한국도예», 경기도자미술관, 2024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작가는 작업에서 그의 삶이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삶과 작품이 분리되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즉 작품 자체에서 작가의 삶이 그대로 드러날 때 가장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작업이 아닐까 싶은 거죠. 그래서 제 작업에서 나타나는 한 줄 한 줄 쌓아나가는 제작 방식, 이를 인내하고 견디는 시간, 여기에서 오는 숭고함과 고요함 등은 제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번뇌와 고통, 고민의 시간을 해결하는 방식과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차곡차곡 쌓는 인내의 과정뿐 아니라 때로는 즉흥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즉각적인 반응을 통해 융통성을 발휘하는 부분도 존재해요. 결국 제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을 대하는 태도가 ‹패치› 시리즈 등에서 드러나는 약간의 즉흥성과 균형감을 유지하려는 방법론과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작가로서 제 작업이 저와 무척 닮았다는 얘기를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Artistic Stratum_Patch›, 2023, 21 × 16 × 28 cm
‹Artistic Stratum_Patch›, 2022, 30 × 24 × 34 cm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한두 번 정도 경험하긴 했지만, 제가 슬럼프를 강하게 느끼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아요. 하나의 일에 몰입하기보다는, 다양하게 일을 펼치고 해결하는 방식의 삶을 살고 있어서요. 멀티태스킹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 가지 일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요. 그래서 저는 하나가 막히면 다른 하나를 뚫는 방식으로 슬럼프를 극복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느 시리즈를 지속하다 보면 반복적인 작업 때문에 지루함을 느낄 수 있는데요. 그럴 때 다른 시리즈에 눈길을 돌리며 상황을 극복하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다양하게 시도하며 제 한계를 깨고, 성장을 촉진하고 싶은 마음도 도움이 돼요.
«적층된 그리드-Layered Grid», KCDF갤러리, 2024
«적층된 그리드-Layered Grid», KCDF갤러리, 2024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내년 3월에 둘째가 태어납니다. 삶의 큰 축복이죠. 신생아를 돌보면서 내년 전시 일정을 소화하는 일이 조금 걱정이긴 합니다.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창작에서는 목표 의식이 중요하다고 봐요. 제가 추구하는 삶의 지향점, 작업을 통한 성취, 순수한 창작 의지를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상상하지 않으면 결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기에, 이상을 높고 크게 설정하는 것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지나서 마침내 빛을 만나는 창작 과정의 고됨을 버티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런 경험이 쌓여서 고뇌의 시간을 버티는 양분이 되고요. 한편으로는 좋은 작업을 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작업이라는 행위 자체를 뛰어넘어 세상을 더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작업에 대한 노력이요. 창작자가 자기 분야에서 신명 나게 활동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믿어요.
«적층된 그리드-Layered Grid», KCDF갤러리, 2024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이 선택이 과연 맞는 걸까, 내가 작업을 할 만한 역량이 있는 걸까, 고민하는 창작자와 학생을 많이 보게 되는데요. 제가 이들에게 가장 먼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좋아하는 게 있다는 그 자체가 특별하다고요. 더불어 어떤 길을 선택하는 것보다, 그 선택을 해결하는 책임감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창작에는 수많은 영향이 개입합니다. 오롯이 자신의 선택이 아닐 때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상황을 파악하고 집중해서 좋은 방향으로 책임지고 마무리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성실하게 다작한 창작자.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노년에도 작업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창작 활동을 지속하면 좋겠습니다.
Artist
박종진(@jongjinpark_ceramics)은 도예 분야에서 활동하는 현장 연구자다. 국민대학교 도자공예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카디프 메트로폴리탄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국민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건국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에서 강의했고, 2021년부터 서울여자대학교 아트앤디자인스쿨 공예전공 조교수로 근무 중이다. 미국 디자인 마이애미/Design Miami/, 영국 콜렉트COLLECT, 뉴욕 살롱 아트+디자인Salon Art + Design, PAD 파리 등 세계 유수의 아트페어에 참가했고 수많은 국내외 전시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최근 KCDF 중견작가지원 공모에 선정되어 개인전을 치렀다. 광주백자공모전, 청주공예비엔날레 국제공모전, 경기도자비엔날레 국제공모전 등에서 주요 상을 받았고, 아더에러, 컨버스, 템버린즈, 렉서스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