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선 작가는 평범한 재료에서 예술적인 잠재력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예컨대, 일회용 비닐봉지에 주로 쓰이는 폴리에틸렌을 활용해 작은 오브제부터 장대한 설치 작업까지 커버하죠. 빛, 공기, 공간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상호작용을 통해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미묘한 아름다움으로 변환할 때는 감탄이 절로 나와요.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이면에 존재하는 가치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별것 아닌 게 굉장한 것으로 바뀌는 가능성과 확장성에 안테나를 쫑긋 세우면서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기 확신과 열정, 유연함, 꾸준함을 바탕으로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작자를 꿈꾸는 김지선 작가. 층고 높은 작업실에 진심인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Dancing in the wind›, 2023, Hanji, polyethylene, «울림과 재생», 한지가헌, 2023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김지선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재료―먹을 수 있는 소재, 빛처럼 형태가 없는 원료, 비닐 등―이 지닌 예술적인 잠재력을 발견해 다양한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학부에서 공간 디자인을 전공한 후 자연스럽게 공간 디자인 관련 회사에 취직했어요. 개성이 강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회사였는데 저 또한 디자인에 대한 욕심이 많고 실무적인 부분을 배울 수 있어서 그 세계가 꽤 좋았답니다. 6년 정도 일하다가 큰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보니 번아웃이 심하게 와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유럽의 디자인, 환경, 문화가 궁금하기도 하고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스스로에게 쉼에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영국 런던으로 떠나 킹스턴대학교에서 프로덕트&퍼니처 디자인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학교 작업실에서 매일 살다시피 했어요.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실무를 해서 그런지, 실험적인 제품을 만들고 싶었죠. ‘기존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가구를 만들 수 없을까?’, ‘사람들이 식용 곤충에 대해 친숙해지고, 미래의 음식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제품은 무엇일까?’ 등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작업을 했어요. 이에 대한 해답을 ‹Foam chair›, ‹Future chocolate›로 풀어냈죠. 회사에서 일할 때는 디자이너로 생활했다면, 석사 학위를 받은 후로는 디자인부터 만드는 일까지 모두 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렉서스 크리에이티브 마스터스 어워드 2021’에서 위너로 당선되며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Foam chair›, 2019, Expanding foams, black plastic sheet
‹Foam chair›, 2019, Expanding foams, black plastic sheet
다른 분에게 소개할 때 늘 “독립문역 대성집에서 1분 거리에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려요. 상가 건물 2층에 14평 정도 되는 공간인데요. 층고가 4m 정도 되어서 독특한 느낌입니다. 예전에는 효창공원 쪽에 작업실이 있었어요. 주변 분위기와 동네가 좋아서 그쪽에서 작업실을 계속 찾으려고 했는데, 원하는 공간을 만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층고는 2.7m가 넘고, 볕이 잘 들고, 작품을 놓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흰 벽이 있는 공간이 제가 생각하던 작업실의 조건이었어요. 그렇게 발품을 팔다가 현재 머무는 곳을 접하고는, 바로 계약하고 싶다고 했어요. 쉽게 찾을 수 없는 공간이거든요. 큰 창을 통해 볕이 잘 들어서 만족스러운 곳입니다. 바닥도 노출된 터라 이런저런 실험 때문에 더러워질까 봐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길을 가다 보게 되는 나무껍질,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 누군가의 화단에 핀 처음 보는 꽃의 형태, 영화에서 본 컬러 조합, 다른 아티스트의 생각이 담긴 문장 등등.
작업실 풍경
작업실 풍경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작업의 성격에 따라 다른데요. 비닐을 열로 가공하는 폴리에틸렌 작업의 경우, 어떻게 하면 기존 작업과 다른 면모를 보여줄까, 고민을 많이 해요. 작년 치른 개인전에서 선보인 ‹Line series›의 경우, 설치작품이라는 특성상 전시 공간의 특성을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델픽을 아는 분들은 많지만, 3층 옥상에 전시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더라고요. 옥상에 오르면 북촌의 풍경과 하늘이 전시 공간과 아름답게 어우러져서, 이 공간을 많은 이에게 소개하고 싶었어요. 저에게는 작품이 공간과 잘 어우러지면서 관객과 소통하는 게 무척 중요해요. 그래서 관람객의 동선,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광의 흐름, 공간에 잘 어울리는 이상적인 작품 사이즈 등을 생각하고, 3D 툴을 이용해 그린 공간에 스케치를 시작해요. 종이로 작은 모형을 만들어 느낌을 확인해 보기도 하고, 진행 중인 작품을 작업실 벽면에 이리저리 붙여가며 제가 원하는 자연스러운 곡선의 느낌을 도출합니다.
또한 다양한 재료를 실험하는 일을 즐기다 보니, 나중에 이 재료로 무언가 만들어봐야지’ 생각한 것들은 사진을 찍어 저장해 놓기도 해요. 우리 주변에 수많은 요소가 존재하지만, 가끔 별것 아닌 게 굉장한 것으로 바뀔 가능성이 보일 때가 있어서요.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Vitality›는 작년 델픽에서의 개인전 때 선보인 작업인데요. 제가 상상한 봄의 형태, 빛, 활력 등 무형의 요소를 예술적인 직관으로 표현한 추상적인 설치작품입니다. 비정형에서 느껴지는 포근함과 흰색이 주는 가벼움은 봄이 지닌 시적인 느낌을 나타냅니다. 마치 자연 어디엔가 존재할 것 같은 신선하고 미묘한 느낌을 줘요. 전시 공간에 자연광이 들어오기 때문에 시간대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작품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답니다.
‹퓨처 피닉스Future Phoenix›는 나이키Nike의 ISPA 라인을 이용해 만든 작업입니다. ‘The future phoenix obtains new life by rising from the waste.’라는 문장에서 출발했는데요. 피닉스, 즉 불사조가 가진 불멸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퓨처 피닉스›는 미래에서 온 새의 형상 같기도 하고, 재에서 갓 태어나 날아오르는 불사조의 순간이 담긴 듯 신비롭기도 합니다. 나이키 ISPA를 구성하는 입체적인 요소를 파트별로 분해하고, 변형과 재조립을 거쳐 완성한 작업은 독특하면서도 유쾌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양한 재질의 조각은 창작자의 예술적 직관을 거쳐 마치 ‘골격’이 연상되는 건축적인 미학이 담긴 생명체로 섬세하게 재탄생했어요. 생동감 넘치는 비주얼과 다채로운 촉각적 자극을 통해서 지속가능한 재료에 대한 새로운 시각 및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Future Phoenix›를 만들기 위해 나이키 ISPA 라인을 파트별로 분해했다.
나이키 ISPA 라인을 분해한 후,변형 및 재조립해 만든 ‹Future Phoenix›의 구성 요소들
나이키 ISPA 라인을 분해한 후,변형 및 재조립해 만든 ‹Future Phoenix›의 구성 요소들
나이키 ISPA 라인을 분해한 후,변형 및 재조립해 만든 ‹Future Phoenix›의 구성 요소들
‹Dance of Aether›는 몬드리안 서울 이태원의 한식 다이닝 레스토랑 ‘덕분’에 설치한 오브제 작업이에요. 무형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무한한 무언가의 본질을 표현했어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에테르aether는 신들이 사는 천상의 공간을 채우는 신성하고 순수한 물질인데요. 섬세하게 흐르는 형태는 공간과 서로 상호작용하며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움직임을 불러일으킵니다. 유기적인 형태와 공중에서 춤추는 듯한 움직임은 관객에게 미묘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Dance of Aether›
최근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Vitality›, ‹Dance of Aether›에서는 빛, 공기, 건축 등 주변 환경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작품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작업에 몰두할 때면 마치 작품이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데요. 이런 섬세함이 느껴지도록 빛을 투과하는 흰색 및 투명 비닐을 사용했고 눈높이에서 작품을 볼 수 있게 설치했습니다.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작은 오브제부터 거대한 설치까지 작업의 스케일이 다양하다 보니 공간과 어우러질 때 생기는 시너지가 커지는 순간 강한 매력을 느낍니다. 델픽 3층 옥상에 있는 작은 전시 공간에 설치했던 ‹Line series›는 켜켜이 보이는 북촌의 한옥 지붕, 파란 가을 하늘이 작품을 독특하게 돋보이도록 도와줘서 만족스러웠어요. 가끔 대형 설치 작업을 진행할 때면 예기치 못한 변수나 설치를 담당하는 작업자분을 제어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솝 키클로스Aesop Kyklos’ 캠페인의 일환으로 이솝 삼청에 설치한 폐비닐 화병 오브제, 2022
‘이솝 키클로스Aesop Kyklos’ 캠페인의 일환으로 이솝 삼청에 설치한 폐비닐 화병 오브제, 2022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테이크아웃으로 커피 한잔 사서 작업실로 출근한 뒤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 체크하고 웜업을 해요. 아무리 바빠도 이 시간이 없으면 하루가 제대로 시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작업에 몰두하다가도 오후 3시쯤에는 밖으로 나가 동네 한 바퀴 돌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집니다. 머리가 복잡할 때도 무조건 나가서 30분 정도 걷다가 들어와요.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문제가 풀리고, 불안한 마음이 해소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저녁을 만들고 유튜브나 OTT를 보면서 먹어요. 직업 특성상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사람들이 요즘 어떤 것에 관심이 많은지 유튜브를 통해 알 수 있어요. 그리 특별한 건 없지만 루틴이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편입니다.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AI로 시놉시스를 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페트병을 재료 삼아 작업을 진행했는데요. AI를 활용한 작업의 가능성을 보았기에 어떤 방법으로 확장할 수 있을지 생각 중이에요. 또한 저에게 생기를 주는 일상 속 요소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발레를 시작한 지 1년 반 정도 되었는데요. 처음에는 건강 때문에 시작했지만, 이제 발레의 매력에 빠져서 전혀 관심 없던 발레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고, 엠넷에서 방영한 남자 무용수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테이지 파이터›는 생방송으로 시청했어요. 저 같은 비전문가가 보기에도 무용수 각자의 춤선이 어찌나 다르고 멋있던지…
‹Blooming›, 2023, Polyethylene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트렌드나 남이 잡아 놓는 기준을 쫓지 않고, 제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해요. 본질을 보고, 현상 이면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려고 노력하죠. 겉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이면에 존재하는 가치나 숨은 가능성을 찾으려는 태도는 제가 재료나 사물을 보고 확장성을 상상할 때 나타나는 것 같아요.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슬럼프를 나무위키에 검색해 보니 ‘노력을 해도 성적 부진이 나오거나, 평소보다 실력이 안 좋게 느껴지는 경우’라고 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이번 작업은 예전 작업보다 미학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다’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누가 강요한 건 아니지만) 매번 다른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어서 그런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지속적으로 정체되는 기분이 들 때 슬럼프가 오지 않을까 해요.
‹Dancing in the wind›, 2023, Hanji, polyethylene, «울림과 재생», 한지가헌, 2023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대형 설치 작업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현장에서 완성할 수 있는데요. 생각한 만큼 마음대로 안 될 때 꽤나 힘들어요. 사람마다 일하는 스타일, 속도, 숙련도가 다르다 보니, 가끔 답답할 때도 있죠.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기도 해서, 신체 컨디션과 정신적인 스트레스 관리에 신경이 쓰입니다.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 유연함, 꾸준함,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Wavy blue›, 2022, «The Wave: 순환의 물결», 삼성디지털프라자 삼성 대치본점, 2022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노하우는 아니지만, 가끔 ‘모든 일에는 때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몇 년 전에는 그렇게 원했는데도 안 되던 일이 나중에 가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스스로 버틸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필요한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창작자.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천장에 레일 시스템이 있는 층고 4m, 50평 정도의 공간에서 경제적 고민 없이 원하는 재료, 기술을 사용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Artist
김지선(@lalala_sun)은 실험적인 소재를 중점적으로 탐구하는 작가다. 식용할 수 있는 소재부터 빛과 같은 무형의 원료, 비닐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재료가 지닌 예술적인 잠재력을 발견하며 다양한 작업으로 펼치고 있다. 오브제부터 설치 작업까지 다양한 스케일을 아우르며 사물, 사람, 공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렉서스 크리에이티브 마스터스 어워드 2021’에서 위너로 선정됐으며, 이솝, 무신사, 삼성전자, 나이키 등 국내외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