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과 농구공, 접시와 거미줄, 종이배와 우유. 이지수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익숙한 사물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낯선 조합을 만들어냅니다. 마네킹 팔과 자전거 휠부터 레진과 직소까지, 온갖 매체를 얽어내는 그의 작업실은 새로운 존재를 연성해 내는 연금술 공방을 닮아 있죠. 하지만 이 분주한 실험의 이면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낯선 이의 침입이라는 서늘한 기억에서 출발한 그의 작업은, 타자의 이름이나 외피를 빌려 자신을 숨기는 ‘얄팍한 위장막’을 세우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계란은 농구공이 될 수 없고, 접시가 거미줄이 될 수는 없듯이 이 정교한 모의는 늘 기분 좋은 실패로 귀결됩니다. 다른 무언가가 되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은 틈새를 만들어요.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틈새야말로 온전한 자신으로 머물기 위해 발견한 가장 안전한 안식처일지도 모릅니다. 불완전하지만 기분 좋은 이지수의 위장술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Citrus by the Window›, 2025, 캔버스에 유화, 제스모나이트, 수성 페인트, 자작나무, 162.2×130.3cm(frame:168×136.2×6.3cm)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이지수라고 합니다. 그림 그리면서 이것저것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만들면서 뭐가 됐던 시각물을 만들어내는 게 재밌다는 두루뭉술한 목표를 가진 채로 20살이 되었어요.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도 자주 바뀌었던 때라 고민이 많았는데 일단은 제가 서양화전공을 하고 있으니 졸업 전까지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최대한 집중해 보자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작업을 하고 친구들과 함께 전시를 열다 보니 갤러리와 기획자로부터 연락이 왔고, 그러다보니 졸업 이후까지 작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어떤 커다란 계기로부터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좋아하는 것의 갈래가 많은 저에게는 작가라는 이 상태가 가장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현재는 향동동에 작업실을 마련해 놨어요. 벌써 2년이 조금 넘었네요. 매체를 이렇게 저렇게 조금씩 시도 하다 보니 잡스러운 물건이 많은 편이에요. 페인팅 재료부터 레진, 직소, 마네킹 팔, 자전거 휠까지… 친구가 작업실에 와보고는 연금술 공방 같다고 하더라고요. 짐이 좀 있어서 쉬는 공간은 따로 안 만들어 놨어요. 잘 늘어지는 편이기도 해서요. 간혹 너무 힘들면 루팡이(반려견) 방석에 같이 앉아서 쉬곤 합니다.
‹Morning Dew 1›, 2025, 종이 판넬에 유화, 아크릴, 레진, 75×75cm
‹Morning Dew 4›, 2025, 종이 판넬에 유화, 아크릴, 레진, 75×75cm
‹Morning Dew 2›, 2025, 종이 판넬에 유화, 아크릴, 레진, 75×75cm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휴대폰 앨범을 정리하면서 자주 얻는 것 같아요. 제가 찍은 것들의 궤적을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편인데요. 수많은 사진 중에 다다른 이유로 제 눈에 걸리는 사진들이 몇몇 있어요. 그런 사진은 앨범의 ‘Favorites’ 폴더에넣어두고 오래 봐요. 이 이미지 조각들이 작업 곳곳에 드러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직접 찍은 이미지 중에서 영감을 건져 올리다 보니 종종 여행을 가거나 어딘가 갈 때에는 안 가본 루트로 가보려고 해요.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첫 아이디어를 과하게 신뢰하지 않으려고 해요. 머릿속에 있던 걸 현실에서 실행했을 때 항상 예상치 못한 부분이 생겨서 어그러지거든요. 그래서 작업을 할 때 계획에 시간을 과하게 쓰지 않아요. 일단 하고, 그다음에 생각해요. 짧은 계획 – 행동 – 결과에 대한 피드백 – 짧은 계획 … 이런 식으로 작은 단위를 반복해서 최종 결과물을 만드는 편입니다.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근 3년간의 작업은 낯선 사람이 제 집을 들어오려고 시도했던 개인적인 경험에서부터 출발한 것들이에요. 개인전 때부터 최근까지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다른 사람의 이름이나 물건들을 빌리고 모방하여 저와 제 공간을 위장했던 ‘얄팍한 위장막’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요, 제가 가장 편안할 수 있는 공간에서조차 ‘나’로 온전히 있기 힘든 그 아이러니한 상황이 저에게 강렬하게 다가왔었습니다. 계란과 농구공, 접시와 거미줄, 종이배와 우유 등은 단어들의 나열만 놓고 상상했을 땐 동떨어져 보여있는 사물 같아 보이지만, 저의 작업에서는 크기와 패턴, 색의 왜곡이나 시점의 변화를 거쳐 외피의 교집합을 가진 두 사물로 등장합니다. 회화 조각의 형태로 함께 놓인 두 사물은 언뜻 비슷해 보이게 세팅되어있지만 결국 본질적으로 ‘~가 되기’에 실패해요. 물론 ‘~가 되기’가 목표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요. 근래의 작업에서 사용한 이런 조형 언어는 금방 ‘~가 아님’이 들통날 수밖에 없음에도 계속 시도할 수밖에 없었던 저의 상황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예측 불가한 것이 가득한 시간을 컨트롤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저는 항상 짧은 단위로 움직이려고 해요. 하루를 잘 보내는 것을 목표로 두고 그 하루가 모여서 좋은 한 주가, 한 달이, 또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면서 삶을 살려고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저는 작은 행동의 단위가 모여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작업을 진행하는데요. 이 과정 자체가 제 삶의 태도와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일단은 그냥 작업실에 가요. 그냥 앉아서 창문 보고 멍 때리기도 했다가, 바닥 청소라도 했다가, 릴스도 보고,드로잉 북에 낙서하듯이 그냥 끄적이기도 해요. 아무것도 시작 못 하고 그냥 집에 갈 때도 많아요. 그래도 일단 작업실에 몸을 옮겨놓아서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라도 보내면 어느 순간 벗어나 있더라구요. 작업실이라는 공간이 결국 다시 뭔갈 만들어내게끔 하는 것 같아요.
‹Eggshell (Milk)›, 2024, 나무 판넬에 유화, 레진, 20×20cm
‹Swan (Milk)›, 2024, 나무 판넬에 유화, 레진, 20×20cm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작업실이 너무 추워요. 나무 판넬을 페인팅 지지체로 자주 사용하다 보니 급격한 온도 변화를 최대한 피해야 해서 난방기기를 틀기가 굉장히 조심스러워요.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네요…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자신과 작업에 솔직해지기를 매번 시도하지만 잘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좋아하는 것이어도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좋아하기 때문에 더 힘들어지기도 하고요. 반대로 이 사실 자체를 인지하고 있으면 길게 이어갈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이 잠깐 어려워지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 자체가 내가 상당히 이걸 애정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그럼에도 혼자 있다 보면 흔들리는 순간이 다가오는데요. 이럴 때는 주변에 좋은 동료를 두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좋은 동료는 직업을 막론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큰 애정을 가지고 꾸준함을 이어가는 사람인데요. 그런 사람이 주변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돼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저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거든요.
‹Two Dots Behind the Door›, 2024, 나무 판넬에 유화, 제스모나이트, 금속 구, 169×80.3cm
‹Leaf (coffee)›, 2024, 나무 판넬에 유화, 레진, 33.2×24.2cm
‹Steamed Shrimp (wine)›, 2024, 나무 판넬에 유화, 레진, 34.7×27.4cm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기억된다는 일이 되게 감사한 일이면서 동시에 무섭게 다가와서 제일 어려운 질문이었어요.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할 줄 아는 창작자로 기억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건강하고 행복한 미래! 모두 건강하고 행복합시다.
Artist
이지수(@hi.jisoolee)는 일상의 위장과 모방의 행위를 회화와 조각의 형태로 풀어내는 작가이다. 개인전 «Doorstep»(상히읗, 2025)를 열었고, «Far, Fare, Farewell»(그블루, 2025), «파티퀘스트»(L.A.D, 2023), «와일드 번치»(디스위켄드룸, 2022) 외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