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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온 힘을 다해 소중한 마음을 지키는 사람

Writer: 엄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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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엄유정 작가는 익숙한 곳이든 낯선 곳이든, 우연히 마주친 대상을 기억하고 작업의 소재로 삼곤 해요. 특히 그에게 관찰은 매우 의미 있는 행위입니다. 관찰을 통해 그려낸 대상들 간의 ‘닮음’과 ‘다름’을 따라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형태를 찾기 때문이죠. 작업을 시작할 때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만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엄유정 작가. 좋은 그림으로 좋은 전시를 만들고 싶은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Snow Shapes›, 2023, Gouache and Acrylic on paper, 36 x 48cm © 엄유정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그림 그리는 사람, 엄유정입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미술을 배우면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어요. 6, 7살 때 처음으로 미술을 시작했죠. 선생님이 칭찬하니까 잘 그린다고 착각하면서 계속 그림을 그린 것 같기도 해요.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자연스럽게 회화과에 진학했어요.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늘 화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Three shapes» A lounge gallery, 2023 © 엄유정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을 작업실로 쓰고 있어요. 공간의 절반은 짐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나머지 공간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작은 작업은 집에서 할 때도 있지만, 큰 그림은 작업실에서 진행합니다.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며칠씩 반복하며 그림을 완성해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주변 환경에서 겪는 시각적인 경험이 모두 영감이 돼요. 익숙하거나 낯선 장소를 찾아갈 때 우연히 만나는 대상을 기억하고, 나중에 작업 소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전에 보았던 무언가를 다시 떠올리고 인물 형상으로 내면화하며 새롭게 작업할 때도 있습니다.

«Araucaria», Cheongju artist residency program, 2019 © 엄유정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작업 초반에는 어떠한 대상을 바라보고 만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작업실로 돌아와 바로 작업을 시작할 때도 있지만,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그동안 기록했던 이미지 자료를 찾아보며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해요. 그다음엔 대상마다 가장 적절한 그리기 방법을 고민해 봅니다. 선적인 특성이 두드러진 대상은 건재료나 선을 강조하기도 하고, 면이나 색이 강한 대상은 두께감, 그리는 방법 등을 바꿔보면서 작업을 이어가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지난 2~3년은 주로 부피감 있는 대상의 닮은 꼴을 따라가며, 대상의 ‘닮음’과 ‘다름’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2022년 여름에는 스코틀랜드의 한 레지던시에 머물면서 관찰한 수풀을 그렸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강릉과 안산의 바위와 눈 쌓인 나무들을 그렸습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 세 가지 형태 안에 연결되는 지점을 찾고 형상을 마주하는 개인전 «Three Shapes»를 준비하게 되었어요.

«Three shapes» A lounge gallery, 2023 © 엄유정

«Three shapes» A lounge gallery, 2023 © 엄유정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지난 2022년 여름, 우연히 스코틀랜드 북부 해변에서 중간에 구멍이 뚫린 바위산을 발견했어요.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서 숙소로 돌아와 기억 속 풍경을 종이에 옮겼죠. 몇 달 뒤 한국에 돌아와 파일을 뒤적거리고 있었는데요. 마침 구멍 뚫린 바위산 사진을 발견한 거예요. 생각해 보니 2019년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인데, 그 모습이 스코틀랜드의 바위산과 똑같았어요. 그때부터 ‘나는 왜 여러 장소에서 닮은 점을 찾아다니는 걸까? 닮았고 또 다르다는 경험은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어쩌면 제가 관찰하고 싶은 세계가 그 세계의 공간에서 서로 닮고 다른 모습으로 연결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런 대상이 결국 제가 찾고자 하는 여정의 안내자 같은 형상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이번에 준비한 개인전은 지난 몇 년간 관찰한 눈과 돌, 그리고 수풀 사이에서 발견한 ‘어떤 형상’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 모양이 무엇인지, 눈부터 바위까지 천천히 이어보려고 했어요.

‹Bush Shape›, 2023, gouache and acrylic on canvas, 194 x 130cm © 엄유정

최근 진행한 작업에서 작가님이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대상을 조금씩 더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이를 대상 자체로 인식하는 동시에 숨겨진 또 다른 구조와 리듬을 전하고 싶었어요. 모호한 지점을 그리는 일에 특히 흥미를 느끼는 편인데요. 그림은 언제나 어렵기에 매 순간 수많은 시도를 거치며 어렵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조금이나마 그리는 일을 어렵지 않게 느낄 날을 고대하지만, 그런 날은 아마 없을 것 같아요.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저는 천천히 생각하는 편이라, 결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래서 보통 천천히 다음 전시를 준비하며 하루를 보내요. 전시를 보는 건 한순간이지만, 이를 준비하기까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시행착오를 오래 거쳐야 하죠. 어떤 전시는 잡히지 않는 생각을 붙잡는 데에만 몇 년이 걸릴 때도 있어요. 이럴 땐 그냥 생각을 넣어두거나, 작업과 이어보면서 느리게 묵히는 시간을 갖기도 해요. 이번에 진행하는 개인전도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어요. 평소에는 주로 관심 가는 대상을 오래 바라보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작업실 혹은 집에 있지만, 밖으로 나갈 때에는 많은 사람을 만나거나 많은 장소에 가는 것보다 조용한 곳에 있는 걸 선호하는 편입니다. 작업실에 가지 않을 때는 집에서 메일 확인을 하고, 종종 지원서를 쓰기도 하고, 간간히 맡은 일을 처리해요.

«Feuilles», Sosho, 2021 © 엄유정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작업의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어요. 앞으로 어떻게 더 나아갈 것인지, 무엇을 남기고 어디에 더 힘을 실을지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이번 개인전의 작업을 조금 더 다양한 방법으로 확장해 보고 싶기도 해요.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저에게 소중한 것들을 자주 떠올려요. 제 그림도 그중 하나죠. 물론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모두 다음 작업을 위한 긴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림을 그릴 때 한참 헤매고 바닥까지 좌절하고 나면, 다음 작업이 잘 풀리는 경우가 있어요. 헤맬 때 고통스럽던 작업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바라보면 고민하던 지점들 사이에서 좋은 면이 보이기도 하죠. 그림의 시간은 고정되지 않고 살아있다고 느끼는데요. 제 삶과 그림은 살아있는 형태로 함께 걸어가는 것 같아요.

«Feuilles», Sosho, 2021 © 엄유정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가능한 될 때까지 해보는 편이에요. ‘이제 정말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도, 작업실로 돌아오면 다시 할 부분이 보이더라고요. 덕분에 오히려 끝없이 해볼 수 있는 게 그림이지 않나 싶어요. 그림에는 무한한 완성의 길이 있다고 느껴서, 이쪽 길에서 제가 헤쳐나오지 못한다면 다른 길을 시도해 보곤 합니다. 때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그림도 있지만,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날 그림이 마음에 들 때가 있어요. 그렇게 저도 모르는 새에 슬럼프를 극복하는 것 같아요. 보통은 스케치북 한두 권을 쓰면 마음에 드는 그림이 한두 장 완성되는데요. 그림을 만나기까지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묵묵히 많이 그려보는 게 저의 슬럼프 극복법인 것 같아요.

«Hand tied Flowers» Seongnam Cube Art Museum, 2022 © 엄유정

«Hand tied Flowers» Seongnam Cube Art Museum, 2022 © 엄유정

최근 들어 작가님에게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온전히 그림을 그리는 데에 더욱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몸도 시간도 유한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요. 집중하고 싶은 것에 더욱더 시간을 쏟고 싶습니다. 체력을 기르고 한정적인 에너지를 잘 운용해 더 좋은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어요.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결국 창작자라면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흔들리거나 불안한 날도 많지만, 자신에게 닿아있고 좋다고 생각하는 걸 밀어붙이고 해나가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 저도 앞으로 그러기를 바라요.

«Night Waves» Hakgojae project space, 2021 © 엄유정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언제나 그럴 수는 없겠지만, 저의 경우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가능한 무언가를 많이 보러 다니지 않으려 해요. 다음 작업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걸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예민해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제 소중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대수롭지 않은 것을 알게 모르게 애쓰고 노력해야만 해요. 내가 아끼는 것들이라면, 계속 바라보고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마음이란 너무 쉽게 사라져 버리기도 하니까요.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저보다는 그림이 좋은 그림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현재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조금 더 나은 환경으로 가는 것. 좋은 그림으로 좋은 전시를 만드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 저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

«Feuilles», Sosho, 2021 © 엄유정

Artist

엄유정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회화 매체를 기반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일상적인 대상을 오랜 시간 관찰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여러 형상을 회화와 드로잉 형태로 풀어낸다. «밤 긋기»(2021, 학고재디자인 스페이스 갤러리, 서울), «FEUILLES»(2021, 소쇼, 서울), «Þögult andartak»(2013, 리스투스, 아이슬란드)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어떤 삶, 어떤 순간»(2022, 금호미술관, 서울), «소란한 여름, 햇살에 기대어 서서»(2022, 우민아트센터, 청주),«IN_D_E_X 인덱스 (2018,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등 여러 단체전에 참여했다. 2022년 스코틀랜드 글렌피딕 아티스트 레지던시, 2013년 아이슬란드 리스투스 아티스트 레지던시 대상자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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