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김도훈 작가는 과거에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결국 좋아하게 된 대상에 대한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어요. 취향의 변화도 있겠지만 세월이 지나며 깨달은 사실도 큰 영향을 주는데요. 자기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묘사한 대상의 정보를 읽다 보면 어느새 지적인 만족감이 차오른답니다. 이번 주인공은 할리우드의 전설이 된 여배우 메릴 스트립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신성모독에 가까운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문장 하나만으로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의 90%는 “어디서 니가 감히”라는 말을 내뱉고 있을 것이다. 메릴 스트립은 연기의 신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 누구도 배우이자 예술가로서 그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는다.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리 설명하자면 이 칼럼 시리즈는 내가 좋아하지 않았으나 결국 좋아하게 된 것이 주제다. 그러니 결국 이 글은 메릴 스트립을 좋아하게 됐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화를 내지 마시고 일단 들어보시라.
더스틴 호프먼과 메릴 스트립이 출연한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의 한 장면
내가 처음 본 메릴 스트립의 영화는 1980년대 MBC ‘주말의 명화’를 통해 본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였을 것이다. 가정에 무심한 남편(더스틴 호프먼)과 집을 나간 아내(메릴 스트립)가 아들의 양육권을 두고 싸운다는 이야기다. 지금 다시 돌아보자면 이 영화는 가히 시대적이다. 주부로 일하던 여성이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쟁취하는 과정을 그리는 여성주의적 영화인 동시에, 결국 스타인 더스틴 호프먼이 연기한 남편의 부성애에 더 초점을 맞추는, 여전히 조금은 가부장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시대의 진보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대적이라는 이야기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가 방영된 1980년대 말, 이미 메릴 스트립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기파 배우로 불렸다. 그 시절에는 ‘외모는 특출나지 않지만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배우’가 주로 연기파 배우에 속했다. 요즘은 이런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여러모로 편견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연기파 배우’로 불리던 이들은 대개 남자였다. 이를테면 1970년대 등장해 1980년대 전성기를 보낸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같은 배우들이다. 여성 배우에게는 여전히 육체적 매력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됐다. 여성은 아름답지 않으면 배우가 되기 힘들었다. 남성은 아름답지 않아도 배우가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도 딱히 다르진 않다.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도록 하자.
‘연기파 배우’로 불리며 1980년대 전성기를 보낸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메릴 스트립의 출세작이었다. 1970년대 초반 연극배우로 데뷔한 그는 1978년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 출연한 ‹디어 헌터›로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듬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파 배우로 불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는 메릴 스트립의 전성기였다. 1981년 ‹프랑스 중위의 여자›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그는 이듬해 ‹소피의 선택›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83년에는 전설적인 환경운동가 캐런 실크우드를 연기한 ‹실크우드›로 다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1985년 로버트 레드포드와 출연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 또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1988년에는 ‹어둠 속의 외침›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메릴 스트립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소피의 선택›(1982) 포스터
여기서 기나긴 리스트를 잠시 멈추자. 나는 그의 수상 경력을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이 지면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메릴 스트립은 이후에도 계속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 지금까지 노미네이트된 횟수는 총 21회로 오스카상 역사상 최대 후보 기록이다. 그중 세 번 수상했다. 그는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배우다. 거대 예산이 들어간 상업 영화에는 좀처럼 출연하지 않은 탓에 대중적인 흥행작은 드문 편이다. ‹디어 헌터›, ‹아웃 오브 아프리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맘마 미아!›(2008) 정도가 메릴 스트립의 드문 상업적 성공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진중한 영화에 출연해 완벽할 정도로 기술적인 연기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1970~80년대의 메릴 스트립은 확실히 ‘여배우’의 새로운 모델을 창조했다. 그는 상업적 성공작 없이도 여배우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일종의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메릴 스트립이 출연하여 상업적 성공을 거둔 ‹맘마 미아!›(2008)의 한 장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의 한 장면
그렇다면 메릴 스트립 이전에는 그런 배우가 없었다는 이야기일까? 나는 그렇다고 감히 주장할 참이다. 할리우드는 (충무로도 마찬가지지만) 남성 배우에게는 강요하지 않는 성적 매력을 여성 배우에게 강요해왔다. 당신이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할리우드 여성 배우들을 떠올려 보시라. 그레타 가르보, 오드리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잉그리드 버그먼, 소피아 로렌, 심지어 ‘연기의 신’으로 간주되던 캐서린 헵번까지, 모든 배우들은 육체적으로 아름답다. 그렇다면 남성 배우는? 물론 클라크 게이블, 게리 쿠퍼,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캐리 그랜트는 아름답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남성 배우 리스트에는 험프리 보가트와 제임스 스튜어트와 제임스 캐그니와 스펜서 트레이시의 이름도 있다. 그들이 아름다운 배우일까? 그럴 리가. 개성 있는 외모, 이를 이용한 캐릭터로 사랑받았던 배우들이다. 이상할 정도로 위대한 여성 배우 리스트에는 그들과 비슷한 성격의 배우가 드물다. 지나칠 정도로 드물다.
메릴 스트립은 어쩌면 할리우드 역사상(혹은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신이 빚은 듯한 외모와 성적 매력이 아니라 연기 그 자체로 위대한 배우 리스트에 오른 여성 배우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나는, 혹은 젊은 시절의 나는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기술적이라고, 지나칠 정도로 기술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4회 수상한, 아마도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일 캐서린 헵번도 메릴 스트립을 싫어했다. 2003년 작고한 그의 전기 『케이트를 기억하며』에는 그가 좋아한 배우와 싫어한 배우에 대한 아주 솔직한 평가가 들어있다. 그는 메릴 스트립을 두고 “지나치게 지적인 데다 테크닉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배우”라며 아예 ‘가장 싫은(Least favorite)’ 여성 배우라고 혹평했다. 캐서린 헵번을 존경하던 메릴 스트립에게는 아주 실망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할리우드 여성 배우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잉그리드 버그먼과 캐서린 헵번
그건 온당한 비판이었을까? 위대한 캐서린 헵번의 의견에 딱히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만, 그럼에도 헵번이 ‘할리우드의 과거’에 머무른 대가였다는 사실은 언급하고 넘어가야만 할 것 같다. 메릴 스트립은 이전의 여성 배우에게 당연히 요구되던 많은 것을 갖추지 않은 채 커리어를 시작했고, 결국에는 그 이상의 것을 성취해낸 배우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메릴 스트립이 지나치게 기술적으로만 연기하는 배우라는 편견을 벗어던지는 중이다. 왜냐고? 그가 기술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사실을 부인하진 않는다. 그는 여전히 기술적인 배우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기술적인 남성 배우들을 “자연스럽지 못하다”라느니, “지나치게 테크닉에 의존한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로버트 드니로는 딱히 자연스러운 배우가 아니다. 그가 출연한 1970~80년대 영화를 보면 놀랄 정도로 기술적이다. 최근 출연한 코미디 영화에서도 나는 딱히 자연스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여전히 그는 기술적이다. 메릴 스트립 또한 커리어 후반부에 출연한 코미디 영화들에서 여전히 기술적이라고 생각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맘마 미아!›, ‹줄리&줄리아›(2009), ‹철의 여인›>(2011)에서 그가 선보인 연기는 기막히게 기술적이다.
그러나 메릴 스트립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철저한 기술적 연기로부터 감정을 폭파시킬 줄 아는 배우다. 나는 그걸 지난 몇 년 사이에야 겨우 깨달았다. 남성 배우에게 들이대는 잣대를 여성 배우에게 동일하게 적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건, 그러니까 성격이 강한 남성 CEO는 뭔가 독특한 천재로 간주하면서, 같은 결의 여성 CEO는 ‘드세다’고 표현하는 우리의 깊은 편견과도 아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여간 남자들은 종종 이렇게 어리석다.
1980년대 메릴 스트립과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누린 미셸 파이퍼
메릴 스트립에 관한 이번 글은 다른 여성 배우의 이야기로 마무리해 볼까 한다. 1980년대 메릴 스트립과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누린 미셸 파이퍼다. 미셸 파이퍼는 1980년대 내내 ‘섹시한 여성의 몸에 갇힌 연기파 배우’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대단히 비뚤어진 평가다. 그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출연한 ‹위험한 관계›(1988), ‹사랑의 행로›(1989), ‹러브필드›(1992)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꾸준히 올랐지만, 계속해서 아름다운 금발의 외모로만 평가받았고, 마블의 ‹앤트맨› 시리즈에 출연하기까지 한때 거의 중요한 출연작이 없었다. 메릴 스트립과 미셸 파이퍼는 전혀 다른 편견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두 위대한 배우는 어쩌면 우리가 여성 배우를 바라보는 관점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는 살아있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제 파치노와 드니로의 자리에 스트립과 파이퍼를 올리자. 그렇다. 이건 기나긴 반성문이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los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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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나는 톰 크루즈Tom Cruise를 포기했었다. 세상은 톰 크루즈를 포기했었다. 2005년이었다. 톰 크루즈는 케이티 홈즈Katie Holmes와의 열애를 홍보하기 위해 ‹오프라 윈프리 쇼the Oprah Winfrey Show›에 출연했다. 그는 갑자기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라고 외치며 갓 수족관에서 꺼낸 방어처럼 소파 위를 방방 뛰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사랑에 빠지면 과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미친 짓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톰 크루즈의 행동은 사랑에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남자의 행동이라기에는 좀 기괴했다. 사실 톰 크루즈는 토크쇼에 자주 등장하던 사람도 아니었다. 사생활을 비교적 드러내지 않는 배우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남자가 소파에서 뛰고 있었다.
오프라 윈프리가 케이티 홈즈를 무대로 불렀다. 나는 그 순간 홈즈가 지은 표정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건 사랑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표정이라기보다 친하지 않은 아빠가 ‹전국노래자랑›에서 박현빈의 ‘샤방샤방’을 부르는 장면을 지켜보다 무대에 강제 소환된 딸의 표정에 더 가까웠다. 그때 소셜 미디어가 있었다면 이 사건은 더 난리가 났을 것이다. 2005년은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다. 소셜 미디어는 그다지 위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충분히 난리가 났다. 누군가 과할 정도로 흥분해서 날뛰는 걸 두고 ‘Jump The Couch’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즈음 톰 크루즈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라는 컬트 종교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을 ‘아는 것’과 사실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당시 막 떠오르던 유튜브에는 톰 크루즈의 사이언톨로지 관련 영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이언톨로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그의 눈빛은 실로 광적이었다. 만약 ‘종교적 자유에 대한 딴지’로 불편함을 느낀다면 당장 유튜브에서 그 영상을 검색해보기를 권유한다. 나는 그 영상을 보고 ‘마침내 톰 크루즈가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악역을 맡을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은 할리우드 스타의 괴상한 사생활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관대했다. 스타들이 호텔 방을 때려 부수고, 길거리에서 주먹질해도 ‘그 사람은 할리우드 스타니까’라는 한 마디면 용납받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 스타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슈퍼스타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톰 크루즈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슬프게도 사이언톨로지 홍보 영상과 ‹오프라 윈프리 쇼› 소파 영상은 당시 톰 크루즈 최고의 히트작이었다.
2000년대 중반은 톰 크루즈의 할리우드 경력 자체가 기울기 시작하던 시기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와 함께 만든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2002)와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2005)이 유일한 성공작이었다. ‹바닐라 스카이Vanilla Sky›(2001), ‹라스트 사무라이The Last Samurai›(2003), ‹콜래트럴Collateral›(2004)이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었다. 남은 한 방은 당시 가장 떠오르던 신인 감독 J.J. 에이브럼스J.J. Abrams와 손을 잡은 ‹미션 임파서블 3 Mission: Impossible III›였다. 톰 크루즈는 속편에 참여하지 않기로 유명한 배우였다. 하지만 그는 가라앉고 있는 경력이 다시 상승하길 바랐다. 자신의 유일하고도 성공적인 프랜차이즈가 될 가능성을 갖춘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로. 하지만 ‹미션 임파서블 3›는 실패했다. 오랫동안 파트너십을 유지하던 파라마운트가 흥행 실패 이후 톰 크루즈와의 장기 계약을 취소했다. 모두가 ‘그는 끝났다’고 떠들었다.
모두를 숨죽이게 했던 ‹미션 임파서블›의 그 유명한 명장면.
‹미션 임파서블 3›가 그렇게 나쁜 영화였던가? 그렇지는 않다. 나는 우위썬吳宇森이 연출한 ‹미션 임파서블 2 Mission: Impossible II›가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De Palma라는 저주받은 천재가 자신의 모든 영화적 마술을 투입한 ‹미션 임파서블›이 지닌 스파이 영화로서의 즐거움을 철저하게 파괴한 자아도취적 졸작이라고 생각한다. J.J. 에이브럼스는 오히려 이 시리즈의 정체성을 다시 궤도에 올린 업적을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미션 임파서블 3›의 흥행 실패, 혹은 만족스럽지 않은 흥행은 어떤 면에서 톰 크루즈의 업보였다. 사이언톨로지와 소파 사건으로 1980년대부터 완벽하게 관리한 그의 스타 이미지는 거의 완벽하게 훼손됐다. ‹미션 임파서블 3›에 굳이 아내 캐릭터가 등장하며 키스로 마무리한, 도무지 시리즈와는 어울리지 않는 설정도 톰 크루즈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불평이 터져 나왔다. 당시 톰 크루즈는 사생활과 영화 사이의 간극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많은 스타는 사생활을 자신의 어떤 매력 지점으로 사용한다. 2000년대 가장 거대한 스타였던 브래드 피트Brad Pitt와 조니 뎁Johnny Depp은 연인과의 사생활 자체가 스타 아우라의 일부였다. 그들은 지속적인 성공작이 없어도 스타로서 기울어지지 않는 인기를 누렸다. 왜 톰 크루즈에게는 그게 적용이 되지 않았던 걸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톰 크루즈는 거의 무성영화 시절의 스타에 가까운 최후의 고전적인 스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생활과 가십이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 만들어낸 영웅의 이미지로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통과한 배우였다. ‹위험한 청춘Risky Business›(1983)과 ‹아웃사이더The outsiders›(1983)로 당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배우의 반열에 오르자마자 그는 ‹탑건Top Gun›(1986)으로 스타가 됐다. 아니, 곧바로 슈퍼스타가 됐다. 그리고 그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할리우드의 슈퍼스타 반열에 오르게 해준 ‹탑건›(1986)에서의 톰 크루즈.
그는 다작하지 않는 대신 일찌감치 하나의 전략을 세웠다. 블록버스터에 출연한 다음에는 자신에게 오스카상을 줄 수 있는 진지한 영화에 출연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를 반복하는 것이다. ‹탑건› 이후 그는 더스틴 호프만Dustin Hoffman과 ‹레인 맨Rain Man›(1988)을 찍었다. ‹레인 맨›으로 오스카상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연기력에서도 상찬받은 그는 이후 ‹탑건›의 토니 스콧Tony Scott과 함께 레이싱 블록버스터 ‹폭풍의 질주Days of Thunder›(1990)와 올리버 스톤Oliver Stone의 베트남전 영화 ‹7월 4일생Born on the 4th of July›(1990)을 동시에 찍었다. ‹폭풍의 질주›는 흥행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7월 4일생›으로 그는 꿈꾸던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92년에는 ‹어 퓨 굿 맨A Few Good Men›(1992)과 ‹파 앤드 어웨이Far And Away›(1992), 1993년에는 ‹야망의 함정The Firm›과 ‹뱀파이어와의 인터뷰Interview With The Vampire: The Vampire Chronicles›, 1996년에는 ‹미션 임파서블›과 ‹제리 맥과이어Jerry Maguire›를 내놓은 것도 ‘블록버스터와 작가 영화의 반복’이라는 패턴에 꽤 부드럽게 들어맞는다. 한마디로 그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완벽하게 커리어를 설계하는 스타였다.
거기서 문제가 비롯된다. 완벽한 스타는 지루하다. 세상은 더는 완벽한 스타를 원하지 않는다. 2000년대부터 세상은 인간적인 허점까지 드러내는 친근한 스타를 더 원하기 시작했다. 인간적인 입체성을 철저하게 숨기고 완벽한 스크린 스타로 존재하는 건 점점 힘든 일이 되었다. 거기에서 톰 크루즈의 추락은 시작됐다. 그의 사생활 중 우리가 아는 건 사이언톨로지와 극적으로 실패한 몇 번의 결혼 생활뿐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인생 자체가 일종의 연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인터뷰는 언제나 팬 서비스에 충실했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충실한 팬 서비스에 가까워졌다. 마음을 드러내기보다 슈퍼스타 톰 크루즈만 존재했다. 그런 경직된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 보겠다고 나선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의 소동은 오히려 지옥문을 열었다.
2010년대에도 톰 크루즈의 부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톰 크루즈의 가장 멋진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나잇 앤 데이Knight & Day›(2010), ‹오블리비언Oblivion›(2013),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2014), ‹아메리칸 메이드American Made›(2017)는 기대보다 미지근한 흥행을 기록했다. ‹미션 임파서블›만한 프랜차이즈를 만들겠다고 나선 ‹잭 리처Jack Reacher› 시리즈는 톰 크루즈의 스타성이 휘발됐다는 슬픈 증거가 됐다.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마블에 필적하는 다크 유니버스를 만들겠다며 톰 크루즈와 손잡고 내놓은 ‹미이라The Mummy›(2017)의 대실패는 치명적이었다. 그가 국제 시장에서 힘을 발휘한 유일한 작품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였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 네이션Mission: Impossible – Rogue Nation›(2015)과 ‹미션 임파서블: 폴 아웃Mission: Impossible – Fallout›(2018)은 흥행에서 성공을 기록했지만, 사람들은 늙고 퇴색한 스타의 마지막 생명줄이라고 조소했다.
1980년대부터 스타였던 남자가 2010년대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유일한 성공적 프랜차이즈에 매달리는 모습은 어떤 면에서 조금 필사적으로 보였다. 생각해보시라. 우리는 더는 청룽成龙의 액션 영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직접 액션을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들었다. 톰 크루즈는 청룽과 거의 같은 시기에 영화를 시작한 배우다. 그가 직접 비행기 옆에 매달리는 ‹미션 임파서블: 로그 네이션›의 스턴트 장면을 공개했을 때 세상은 감탄하는 동시에 탄식했다. 그건 마지막 프랜차이즈에 가까스로 매달려야만 하는 톰 크루즈라는 스타의 현재를 그대로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톰 크루즈가 국제 시장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작품 ‹미션 임파서블: 로그 네이션›(2015)의 한 장면. 여기서 그는 스턴트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맨몸으로 비행기에 매달리는 장면을 연출했다.
자, 나는 지금까지 톰 크루즈의 추락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다시 불멸의 궤도에 오른 놀라운 스타라고 상찬하며 이 글을 마무리할 생각이다. ‹탑건: 매버릭Top Gun: Maverick›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던 블록버스터였다. 미국의 많은 유튜버는 이 영화가 2022년 최고의 실패작이 될 거라고 조소했다. 지금은 마블Marvel의 시대다. 마블의 시대에는 스타가 없다. 당신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의 이름으로 반박하고 싶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시라. 그는 마블 영화 최후의 슈퍼스타였다. ‹아이언맨Iron Man›은 마블의 첫 번째 블록버스터였다. 마블은 막 시작하는 신진 영화사였다. 그들에게는 스타가 필요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1990년대부터 스타였던 남자다. 그의 아우라는 마블 프랜차이즈의 어떤 성격 자체를 창조해냈다. 그러나 다음은? 크리스 헴스워스Chris Hemsworth나 크리스 에반스Chris Evans는 스타다. 그러나 슈퍼스타인가? 그렇지는 않다. 마블 영화는 스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블 영화 속 배우들은 일종의 체스 말이다. 마블은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 배우를 과감히 해고하고 다른 배우로 대체하기로 유명하다. 그들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죽이기로 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그가 지나치게 비싸졌기 때문이라는 풍문은 충분히 논리적으로 일리가 있다.
할리우드 최후의 고전적 슈퍼스타들은 마블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 브래드 피트, 리어나도 디캐프리오Leonardo DiCaprio,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가 마블 세계에 들어가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톰 크루즈도 마찬가지다. 그가 마블 영화에 출연한다는 여러 소문이 있었지만, 그는 마블과 손잡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마블의 세계는 자신이 지금까지 구축한 스타 이미지의 배반이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탑건: 매버릭›이 그 증거다. 톰 크루즈는 자신이 36년 전에 연기한 캐릭터 ‘매버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이 매버릭이라는 인물이 2020년대에 더는 영웅이 될 수 없는 낡아빠진 퇴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세상은 이미 무인 전투기의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탁월한 능력이 있는 인간 조종사의 시대는 끝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고전적인 블록버스터의 시대는 끝이 났다. 고전적인 슈퍼스타의 시대도 끝이 났다. 그러나 매버릭은 36년 전에 그랬듯이 여전히 반항한다. 기계적 히어로의 세상에서도 여전히 인간 조종사의 오랜 경력과 재능은 필요하다고 설법한다. 슈퍼스타가 사라진 마블의 세상에서도 여전히 고전적인 슈퍼스타의 아우라는 건재하다고 선언한다.
톰 크루즈는 마침내 자신이 36년 전에 연기한 캐릭터 ‘매버릭’으로 돌아왔다.
톰 크루즈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찍으면서 깨달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의 힘을 여전히 믿는다. «할리우드 리포터The Hollywood Reporter»는 “CG 위조품의 무감각한 폭격에 대항해 본능적인 아날로그 액션을 끌어올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점”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완벽하게 동의한다. ‹탑건: 매버릭›의 마지막 공중전 장면은 관객의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는 고전적인 ‘시네마’가 주는 쾌락의 어떤 절정이자 정점이다. 나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시사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모두 손뼉을 쳤다. 이런 일은 정말 드물게 일어난다. 그 박수는 고전적인 영화적 쾌감에 바치는 찬사인 동시에 톰 크루즈라는 오랜 스타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존경이었다.
톰 크루즈는 36년 전으로부터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나는, 우리는 한때 그를 포기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같은 의무감으로, 같은 방식으로, 같은 관객을 위해 40년간 영화를 만들었다. 톰 크루즈가 영화를 더 이상 찍지 않는 날이 온다면 그날은 ‘최후의 슈퍼스타 시대의 종말’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나는 확신한다. 그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영화를 만들 것이다. 그는 더는 배우가 아니다. 영화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loser21
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이와 감독은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재구성하는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와 영상들을 제작합니다. 이번 비주얼 포트폴리오에서는 감독님의 여러 작업 중에서도 사라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풍경›을 집중 조명합니다. 김설진 안무가와 공동 연출을 한 작품 ‹풍경›은 영화와 공연의 두 가지 형태로 기획되었는데요. 자세한 작업기를 아래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영화와 영상 작업을 하는 이와입니다.
작업 ‹풍경›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요.
‹풍경›은 오래된 병원에 머물고, 사라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단편 영화예요. 영화 ‹풍경›이 만들어지고, 공연 ‹풍경›이 만들어졌는데요. 이 두 작품은 처음부터 두 가지 형태로 기획되었어요. 서로 같은 듯 다른 이야기와 인물을 담고 있지만, 시간과 기다림이라는 동일한 키워드를 가지고 있답니다.
‹풍경›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김설진 안무가와 공동 연출을 통해 만들었어요.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몇 가지 이야기를 필름화시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제법 긴 시간 동안 다양한 대화와 자료를 주고받으며 캐릭터와 장소 등을 정했죠.
작업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언제부턴가 영화, 영상 작업을 하면서 사진과 음악 작업을 같이하는 프로세스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하나의 이야기가 작품 하나로만 나오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는 창작자를 만나 여러 장르의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이번에도 손지민 포토그래퍼와 함께 사진 작업을 진행했어요. 저는 언제나 대략적인 시놉시스를 작가에게 이야기하고, 작가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며 작업하는 걸 원해요. 이번에도 그렇게 많은 사진 결과물이 나왔고, 이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고민하고 있어요.
배경이 폐병원인데요. 로케이션으로 삼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병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설정 아래 몇 가지 가능성을 보며 장소를 찾았어요. 전문적인 대학병원, 큰 유리창의 개인실이 있는 요양병원 등 몇몇 후보가 있었지만, 결국 시간의 흐름이 가장 잘 보일 수 있는 오래된 병원으로 로케이션을 정하게 되었어요.
영화에서 무용과 음악이 무척 인상 깊어요. 구상하면서 유의하신 점이 있나요?
움직임을 위한 영화보다는, 영화와 이야기를 위한 움직임으로 보이질 바랐어요. 인물들이 겪는 다양한 상황을 대사가 아닌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안무가와 다양한 작업을 통해 만들어왔던 경험이 있었죠. 이번에도 적극적으로 시도해보려고 노력했답니다. 누군가의 과장된 몸짓은 격정적인 클래식을 지휘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로비에서 고개를 상하좌우로 흔드는 사람들은 간병인의 히스테릭한 집착과 우울함을 보여주기도 해요. 이런 동작과 음악은 대부분 콘티 없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곤 했는데요. 저희는 그 과정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영화와 공연을 함께 보는 관람자에게 줄 수 있는 팁이 있을까요?
관람 순서나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큰 주제를 가지고 영화와 공연이라는 다른 방식의 작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탄생했다는 점을 관심 있게 봐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영화에서는 불가능한 게 공연에서는 가능하기도 했었고, 공연에서는 어려운 게 영화에서는 쉽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게 재미있는 지점일 수 있겠네요.
작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조금 쉬워지면 좋겠다’라는 말처럼 작업의 친절도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듣는 편인데요. 저도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이번에는 그런 점에서 불친절한 부분이 없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답니다. 다만 지금 하고 있는 표현 방식이 제일 좋은 방법이고 수단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고 있어요.
요즘 스스로에게 만들어주고 싶은 스테레오타입은 무엇인가요?
산책을 하고,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는 걸 좋아하다 보니 한가한 창작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흔히 이런 부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밤낮이 없고, 누군가의 요구에 갑작스러운 일을 하는 등 자기 시간을 잘 쓰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영화에 관심이 없고 싶기도 하고, 누구보다 더 열심히 영화를 만들고 싶지만 어서 빨리 다른 일을 하고 싶기도 해요. 순간의 시간에 만족하고 즐거울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작업 중 찾아오는 어려운 순간은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긴 시간 공들여 찍고 편집하는 시간이 찾아오면 언제나 이상한 기분을 느껴요. 후회가 드는 컷과 장면이 있지만, 단 하나의 의미 있는 장면이 그 감정을 상쇄하기도 합니다. 그 장면이 작품의 불안정함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지만 다음 작업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해주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못한 건 가볍게 반성하고, 잘한 건 계속 들여다봅니다. 잘한 것을 더 잘하기 위해서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창작자에게 버티는 노하우를 공유해주세요.
개인적으로, 어떤 방식의 피드백이든 열심히 받으려고 노력해요. 친한 친구, 모르는 사람 또는 어떤 기관에 새로운 작업을 보여주고 주절주절 제가 가진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열 명, 백 명, 천 명이 관심 없다고 해도 한 명의 관객은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관객은 어쩌면 스스로일 수도 있어요.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 있다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에 긍정적일 수 있지 않을까요. 좋아하는 걸 그저 계속해나가면 되겠습니다.
Artist
감독 이와는 이미지를 수집하고 재구성하는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와 영상을 만들고 있다. 연출과 촬영을 함께 했던 단편영화 ‹그녀에게›는 캐나다 몬트리올 누보시네마영화제, ‹들리지 않은 편지›와 ‹대만 이야기›는 이탈리아 몬테카티니 국제단편영화제 등에 초청됐다. 촬영 감독으로 참여한 장편영화 ‹갱›은 부산국제영화제, 단편영화 ‹진동, Vibration›은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미국 샌디에고 아시안영화제에 초청됐다. 국립현대무용단의 ‹볼레로 만들기›, ‹시간의 흔적› 등 영화와 댄스 필름과 더불어, 다양한 장르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Place
아티스트의 영감을 북돋는 장소를 직접 다녀왔습니다
일을 마치고 연희동에 영화를 보러 갔다(홍상수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독백은 보통 이렇게 시작하곤 한다). 삼청동과 인사동뿐만 아니라 가을의 연희동 또한 영화감독 홍상수와 제법 어울리는 공간이다. 그가 올해 발표한 신작 제목은 «당신얼굴 앞에서»였는데, 이 영화의 상영관을 찾던 중 알게 된 공간이 바로 연희동에 위치한 예술영화관 ‘라이카시네마’였다. ‘카메라 브랜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는데 알고 보니 그 라이카Leica가 아니라 최초로 우주로 나아간 개, 라이카Laika를 기리기 위한 이름이라 한다. 한글 표기만 같을 뿐, 로마자 철자는 다르다.
영화를 본 지 오래 지나고 나면 비록 영화의 줄거리는 어렴풋하게 남더라도 누구랑 봤는지, 어디서 봤는지에 대한 기억은 또렷이 남는다. 또한 영화의 장르에 따라 관람하기에 어울리는 장소가 있다. 마치 비슷한 시기에 영화관에 개봉한 SF 대작 «듄»을 보기 위해서는 용산 IMAX로 가야 하듯이, 이 홍상수 영화에는 이곳 라이카시네마가 제법 잘 어울린다. 상영관은 하나인데 좌석 또한 많지 않은 덕분에 그 시간대에 함께한 관람객들끼리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묶여 있다는 묘한 유대감을 준다. 영화를 마치고 상영관을 나서면서 하마터면 그들에게 ‘살펴들 들어가시라’고 인사를 건넬 뻔했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빠져나오면, 영화 속 삶과 현생을 이어주는 듯한 신비로운 형태의 계단을 마주칠 수 있다. 블록버스터나 공포 영화를 보고 나온 후의 영화관 밖 풍경은 너무나 가만해서 안심과 권태를 동시에 주곤 하는데, 홍상수 영화를 보고나서 보게 된 라이카시네마 바깥의 연희동은 현생이 마치 영화의 연장선처럼 느껴지게 한다. 수북이 떨어진 플라타너스 잎을 발로 차며 연희동 골목을 빠져나갈 때, 다시 한 번 뒤돌아 영화관 건물을 바라보게 만드는 여운이 있다.
Place
라이카시네마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8길 18 지하 1층
@laikacin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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