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세계 곳곳에서 역사적인 부고가 전해졌습니다. 전제군주 중 여왕으로서 최장수 통치를 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를 비롯해, 일본 헌정사상 최장기로 재임했던 총리 아베 신조,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러시아의 첫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역사상 두 번째로 자진 퇴임한 교황 베네딕토 16세, 중국의 본격적인 개방 시기를 이끈 국가주석 장쩌민,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등 굵직한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죠. 그 밖에도 수많은 별들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중 기억에 남는 22명의 이름을 두 편에 걸쳐 기록해봅니다. 이번 편에서는 역사로 기록될 11명의 별들을 떠나간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같은 시간대에 존재했던 동시대인으로서 2022년 떠나간 모든 이에게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디트리히 마테시츠Dietrich Mateschitz (오스트리아의 기업인)
향년 78세 (1944.05.20~2022.10.22)
: 벼락치기에 날개를 달아 준 레드불의 창업자
formula1.com
벼락치기로 밤새야 할 때, 혹은 운동이나 게임 중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할 때, 카페인 수혈은 큰 힘이 됩니다. 오스트리아의 기업인 디트리히 마테시츠은 태국 출장 중 우연히 맛본 피로해소제 ‘끄라팅 댕(붉은 물소)’의 엄청난 각성 효과에 반하게 돼요. 태국의 국민 피로해소제였던 이 제품을 좀 더 연구해 세계 시장 진출용으로 출시했으니,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레드불입니다. 한편 레드불이 피로해소제를 넘어 젊음과 에너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데에는 마테시츠의 독특한 마케팅이 한 몫 했답니다. 그는 클럽이나 페스티벌, 술집을 찾아다니며 젊은이에게 레드불을 홍보했어요. 또 레드불 주최로 익스트림 스포츠 대회를 열거나 스포츠 선수를 후원하는 등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했죠. ‘레드불=도전’이란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어요.
로빈 허먼Robin Cathy Herman (미국의 언론인)
향년 70세 (1951.11.24.~2022.02.01)
: NHL 로커룸에 들어간 최초의 여기자
the-sun.com ⓒAP
북미에서 인기 높은 프로 아이스하키 리그 NHL. 비록 규정에는 성별에 대한 제한이 없었지만, 체격이나 체력상의 이유로 사실상 모든 선수가 남자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선수들이 장비를 보관하고 옷을 갈아입는 로커룸은 금녀(禁女)의 구역이었지요. 그러나 1975년 미국의 언론인 로빈 허먼은 1년간 끈질기게 도전한 끝에 NHL 로커룸에 입성해 결국 인터뷰를 따냈답니다. 여기자로는 최초였죠. 허먼은 ‘최초’의 기록을 만든 여성이었습니다. 미국 아이비리그 중 보수적으로 유명한 프린스턴 대학교가 학부에 여학생 입학을 허락한 1969년, 그녀의 최초가 시작되었어요. 대학 신문부에 가입한 후에는 스포츠를 다루는 최초의 여성 편집자로 활동했죠. 그리고 1973년 «뉴욕타임스» 스포츠 부서에 여성 최초로 입사했답니다. 이런 열정을 바탕으로 결국 네 팀을 제외한 모든 NHL 팀의 로커룸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그녀의 이야기는 스포츠 분야에서 일하는 여기자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Let Them Wear Towels›에 영원히 기록되었습니다.
더글라스 트럼블Douglas Hunt Trumbull (미국의 시각특수효과 감독)
향년 79세 (1942.04.08.~2022.02.07)
: SF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시각특수효과의 새로운 장을 열다
celestis.com
SF 영화사에서 최고의 걸작 하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심지어 인류가 달에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상영됐지요.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는 ‹미지와의 조우›(1982), 복제 인간이 등장하는 ‹블레이드 러너›(1982) 등 경이로운 상상력과 영상미로 이름 높은 세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동일한 사람이 시각특수효과를 담당했다는 사실이죠! 더글라스 트럼블은 컴퓨터 그래픽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던 시절, 정교한 손길로 소품을 제작하고 조명과 카메라를 다방면으로 세팅해 완벽한 SF 세계를 창조하며 시각특수효과의 선구자로 불렸어요. 그는 미국 아카데미의 과학기술 명예상인 고든 E. 소여상과 미국촬영감독협회 평생 공로상을 받았고 SF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습니다.
베티 데이비스Betty Davis (미국의 가수)
향년 77세 (1944.07.26~2022.02.09)
: 재즈의 전설 마일스 데이비스를 탄생시킨 70년대의 마돈나
Miles Davis, ‹Filles de Kilimanjaro›, 1969
재즈 역사에서 GOAT를 뽑는다면 트럼펫 주자 마일스 데이비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즉흥적인 비밥과 차분한 쿨 재즈, 여러 장르를 합친 퓨전 재즈 등 다양한 스타일을 주도하며 재즈의 판도를 여러 번 뒤집었죠. 그가 다른 장르의 뮤지션과 교류하며 퓨전 재즈라는 장르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 아내 베티 데이비스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어요. 그녀는 관능적인 가사와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인 미국의 가수이자 모델이었는데요. 마일스의 말처럼 ‘1970년대의 마돈나’였던 그녀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당시 보수적인 대중에게 새로운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베티가 마일스에게 여러 뮤지션을 소개하며 그의 음악 인생에 큰 전환점을 제공한 후 퓨전 재즈의 태동을 알린 앨범 ‹Bitches Brew›가 탄생했습니다. 마일스에게 영감을 준 베티의 얼굴은 마일스의 또 다른 앨범 ‹Filles de Kilimanjaro› 커버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게일 할보르센Gail S. Halvorsen (미국의 공군 조종사)
향년 101세 (1920.10.10 2022.02.16)
: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폭격기 조종사
미국 공군 조종사 게일 할보르센은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폭격기를 조종했습니다. 폭격기가 낭만적이라니, 웬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생각하실 텐데요.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베를린의 아이들을 위해 껌이나 사탕, 초콜릿 같은 간식을 작은 낙하산에 매달아 땅에 떨어뜨렸어요. 이 ‘달콤한 폭격’은 결국 미 공군의 공식 작전으로 승인받았죠. 그는 베를린 시민에게 20톤이 넘는 간식과 함께 인류애적 희망을 선물한 주인공이 되었답니다.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를 설립해 아동 교육과 청년 파일럿 양성 등 인도주의적인 활동에 몰두했어요.
당뉘 칼손Dagny Valborg Carlsson (스웨덴의 블로거)
향년 109세 (1912.05.08~2022.03.24)
: 세계 최고령 파워 블로거
bojan.123minsida.se
스웨덴에 살던 당뉘 칼손 할머니가 컴퓨터를 처음 배운 건 99살이었어요. 그리고 100세가 되자 블로그를 시작해 특유의 터프한 유머로 그녀의 일상을 남겼죠. 최고령 블로거로 명성을 얻은 그는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파워 블로거로 인생의 2막을 열었답니다. 칼슨 할머니의 블로그에는 주로 가족이나 지인과 보내는 시간, 컴퓨터와 아이패드 같은 전자제품 사용기, 자기 모습을 어딘가 어설프게 합성한 이미지, 산책과 운전을 하며 느낀 감정이 가득했어요. 그의 삶은 2016년 ‹인생은 백 살부터›라는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졌는데요.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늙음은 상관없다!’는 깊은 울림을 준답니다.
패트릭 드마쉘리에Patrick Demarchelier (프랑스의 사진작가)
향년 78세 (1943.08.21~2022.03.31)
: ‘모두의 왕세자빈’ 다이애나를 탄생시킨 프랑스 사진작가
Patrick Demarchelier, ‹Princess Diana›
프랑스의 사진작가 패트릭 드마쉘리에는 디올, 루이 비통, 셀린느, 샤넬 등 수많은 럭셔리 브랜드와 일한 베테랑 사진작가입니다. 그의 화려한 경력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바로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빈의 개인 사진작가라는 타이틀이에요. 지금도 영국 왕실 하면 떠오르는 얼굴인 다이애나가 그에게 직접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수많은 톱모델과 협업하며 피사체의 매력을 돋보이는 데 능숙했던 드마쉘리에는 왕관을 쓰고 진주 목걸이를 걸친 채 활짝 웃는 다이애나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그가 찍은 사진은 다이애나 특유의 친근한 이미지와 로열패밀리의 아우라를 동시에 보여주죠. 다이애나가 왕실을 넘어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드마쉘리에의 노력이 숨어 있었습니다.
피터 무어Peter Moore(미국의 패션 디자이너)
향년 78세 (1944.02.21~2022.04.29)
: 아디다스의 삼선 로고를 만든 나이키 덩크의 디자이너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 피터 무어는 스포츠웨어 브랜드의 양대 산맥인 나이키와 아디다스 모두의 사랑을 받았어요. 나이키의 전설적인 농구화 ‘에어 조던 1’과 보급형 모델인 ‘덩크’, 그리고 자회사 조던의 ‘점프맨’ 로고는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죠. 이후 아디다스로 이직한 그는 세 개의 선이 누워 있는 ‘삼선’ 로고까지 디자인했어요. 흥미로운 일화, 한 가지! 그가 아디다스로 가기 전에 나이키와 협업하던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 역시 아디다스와 일하는 것을 고민했다고 해요. 만약 그때 피터 무어가 마이클 조던을 설득해 함께 아디다스로 갈아탔다면,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몰라요.
이제 세계는 바야흐로 대우주 시대를 꿈꾸고 있습니다. 화성 진출부터 민간인 우주선 여행까지 말이죠. 근데 사람이 우주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우주에 갔다 오면 몸이 심하게 상한다는 연구도 있어서 새삼 겁도 나는데요. 러시아의 우주인 발레리 폴랴코프는 우주 친화적 육체로 유명했답니다. 그는 무중력 상태에서 인간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1994년 우주로 떠났어요. 우주에 머문 시간은 무려 437일. 그동안 지구를 7075바퀴나 돌았죠. 우주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문 지구인이 된 그는 체력이 또 얼마나 좋았던지, 1년 넘게 지구 주위를 둥둥 떠다니다가 지구로 귀환했을 때 착륙선 문을 직접 열고 걸어 나와 술과 담배를 흡입했다고 해요. 새삼 대단! 폴랴코프 덕분에 인류는 우주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로비 콜트레인Robbie Coltrane (영국의 배우)
향년 72세 (1950.03.30~2022.10.14)
: 재즈를 사랑한 호그와트의 숲지기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2001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활동한 색소폰 주자 존 콜트레인은 재즈 천재 중 한 명인데요. 고전 재즈 명반을 여럿 녹음한 그를 존경하며 활동명을 ‘콜트레인’으로 정한 영국 배우가 있습니다. 바로 로비 콜트레인인데요. 우리에게는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숲을 지키는 거인 ‘해그리드’로 매우 친숙해요. 연극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코미디, 액션, 코미디, 판타지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답니다. 해그리드 역으로 유명해지기 전에는 ‹007› 시리즈에서 마피아 보스 역할을 맡으며 인지도를 얻었죠. 그는 영국 아카데미 TV 어워드에서 3년 연속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재능 있는 배우였습니다.
마야 루이스 피카소Maya Ruiz Picasso (스페인의 문화인)
향년 87세 (1935.09.05~2022.12.20)
: 태어나보니 아빠가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Maya with her Doll›, 1938 ⓒpablopicasso.org
현대 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는 생전에 11명의 연인을 둘 정도로 여성 편력이 심했는데요. 그런 그가 꾸준히 사랑한 소녀가 있었으니, 바로 첫 번째 딸 마야 루이스-피카소입니다. 마야와 그녀의 어머니 마리-테레즈 발테르Marie-Thérèse Walter는 피카소의 작품에 모델로 자주 등장했는데요. 특히 딸바보였던 피카소는 ‹인형을 든 마야›를 비롯해 어린 마야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14점이나 남겼죠. 피카소가 스케치북에 밑그림을 그려주면 어린 마야는 거기에 색칠하며 시간을 함께 보냈어요. 피카소의 뮤즈였던 마야는 피카소 사후 그의 작품을 보존하고 연구하기 시작해요. 그녀는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한 ‹게르니카›를 그린 장소에 예술교육재단을 설립하며 아버지의 작품을 보존하고 대중에게 알리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