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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책을 감각하기, 책으로부터 상상하기

Writer: 윤충근
, Photographer: 윤충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놀이하는 사물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놀이하는 사물»은 사물이 지닌 고유한 물성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놀이하며 탐구하는 제작자의 작업을 선보인다. 거대한 원형 전시실에 들어서면 곳곳에 놓인 반짝이는 은빛 구조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공간을 구획하는 곡선형 가벽 구조물과 작품을 떠받치는 낮은 좌대는 일상적인 재료를 특별한 사물로 밝게 비춘다. 은빛 구역을 거닐다보면 긴 테이블 위에 놓인 열두 권의 책을 발견할 수 있다. 가로 세로 약 30센티미터 정도의 정방형 책은 언뜻 일반적인 책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책의 옆면을 보거나 책 표지를 한 장씩 넘기다보면 특별한 점을 알아챌 수 있다. 책 표지나 내지 그 어디에도 글이나 그림, 사진 등이 없기 때문이다.

리소그래피 인쇄소를 운영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코우너스Corners’가 선보인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재료 묶기Materials binding›이다. 일반적으로 책이 글이나 이미지와 같은 내용을 담는 도구라면 ‹재료 묶기›는 책을 구성하는 재료 자체를 내용으로 삼는다. 촘촘하게 짜인 그물, 말랑말랑한 고무판, 투명한 비닐 등의 소재가 책의 내지로 쓰여 종이를 대체한다. 같은 크기의 서로 다른 재료를 하나로 묶었다는 점에서 ‹재료 묶기›의 책들은 동대문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원단 스와치를 크게 확대한 것 같기도 하고, 을지로에 있는 자재 상가 밖에 놓인 샘플을 보는 듯싶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놀이하는 사물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놀이하는 사물 책

열두 권의 책은 색상과 촉감 등에서 각각 공통점을 공유하는 서로 다른 재료를 엮어 만들었다. 작고 네모난 구멍이 촘촘하게 나 있는 검은 천 표지를 펼치면 벨벳, 메쉬, 방수포, 골판지, 고무판 등 두께나 질감이 다른 검은 재료가 이어진다. 솜 같이 폭신한 재질의 상아색 표지를 넘기면 솜털 느낌의 흰 천과 도톰한 하늘색과 회색 천, 연두색의 포근한 천이 펼쳐진다. 이외에도 인공적인 자연물로 이루어진 책, 투명한 재료로만 이루어진 책도 있다. 각각의 제본 방식에는 재료의 특성이 녹아 있다. 반짝이는 재료를 엮은 책은 일반적인 종이 질감과 가장 유사하다는 점에서 스프링 제본을, 그물 형태로 짜인 재료를 엮은 책은 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나사로 제본했다. 누빔이 된 표지와 천으로 이루어진 책은 실로 제본해 재료감을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책의 내용인 재료들은 자신을 가리키는 것 외에도 다른 감각을 자극한다. 책의 페이지는 재료와 관련한 개인적 기억을 소환하기도 하고 책을 마주하는 관람객의 시점과 결합해 상상의 공간을 구성하기도 한다. 허리 높이의 경사면에 놓인 책은 페이지가 보는 이의 시선을 마주하며 초록색 인조 잔디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잔디밭 위에 서서 땅을 내려다보는 듯한 상황을 연출한다. 나무 재질 페이지로 넘기면 이번에는 나무 장판이 깔린 실내의 바닥을 마주하게 된다. 차례로 페이지를 넘기는 과정에서 관람객은 이전 페이지와 다음 페이지 사이를 연결하며 일종의 서사를 만들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놀이하는 사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놀이하는 사물

지난 9월 열린 전시 «BBDWK 세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종이라는 물성을 통해 다른 감각을 환기하는 경험을 선보였다. 독일 북아트 재단과 라이프치히 도서전이 공동 운영하는 국제 책 디자인 공모전 ‘2021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과 해당 공모전의 한국 예선 역할을 하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의 수상작을 선보인 전시에서는 각 공모전의 수상작 10종을 포함한 여러 책을 직접 만져볼 수 있었다. 특히 책을 해체해 낱장의 페이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디스플레이가 화제가 됐다.

‘2021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수상작 중 하나인 『대화에서 춤의 기억 찾기Memory Searching of Dances in Talks』는 책의 내용과 물성이 결합하며 극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중국 전통 무용을 탐색하는 이 책에는 로브의 소재인 크레이프 원단이 쓰였다. 두께가 얇아 나풀거리는 재질의 원단은 책 군데군데 쓰이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따금씩 흩날린다. 이때 눈앞에서 움직이는 천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 춤을 추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다른 수상작 중 하나인 『Revelo No. 1. Chroniques de chantier. Transformation de la Gare, CH-1800 Vevey』도 종이라는 물성을 통해 공간적 경험을 환기한다. 스위스 브베Vevey의 기차역을 개보수하는 과정을 기록한 이 책은 신문지를 묶어 만들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신문을 넘겨보는 듯한데 이때 아주 잠깐, 마치 기차역에 와 있는 듯한 상상을 하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놀이하는 사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놀이하는 사물

책의 물성에서 비롯한 확장된 감각을 기술의 발달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까. 2000년대 초반 초등학교에서 PC를 학습하기 이전의 일상을 떠올려보면 모래를 만지고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경험이 지배적이다. 2010년 이후,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모바일 기기가 생성하는 디지털 감각이 이를 대체했고 2020년 이후 최근까지는 가상현실과 증강현실과 연관된 감각을 비교적 쉽게 일상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중 절반가량은 전통적인 오프라인 매체를 바탕으로 삼았지만, 서서히 디지털 경험의 양이 이를 앞지르고 있다. 더불어 종이에서 스크린을 넘어 가상현실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확장하는 경험은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감각을 관통하며 연결한다. 손으로는 종이를 감각하지만 움직이는 이미지나 3차원의 공간을 떠올리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2010년대 초반 전자책이 등장하며 ‘종이책의 위기’라는 표현이 유행할 때가 있었다. 이제는 이 같은 표현 자체가 위기이지 싶다. 종이책은 버젓이 서점의 매대를 채운 채 팔리고 있고 해마다 열리는 북페어는 성행 중이다. 제작자나 소비자 모두 종이책에 대한 열망은 오히려 더 간절해진 듯하다. 하지만 이는 종이책이라는 감각을 먼저 익히고, 전자책을 나중에 학습한 이들에 한정한 이야기가 아닐까. 태어나고 자라면서 스마트폰과 스크린을 주된 매체로 경험한 디지털 네이티브라면 책에 대한 감각과 기억이 기존 세대와는 다를 것이다. 물론 같은 또래에서도 기술에 대한 경험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빠른 속도로 기술이 발전하는 현 상황에서 앞으로 개개인이 책이라는 매체를 경험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질지, 그로부터 상상할 수 있는 감각은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지 내심 궁금해지는 걸 참기 어려운 속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놀이하는 사물

Exhibition

«놀이하는사물»

날짜 : 2021.6.10-2022.2.27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경기도 과천시 광명로 313

@mmcakorea

Writer

윤충근은 스튜디오 ‘충근’을 운영하며 평면·공간·시간 위에 시각 요소를 적절하고 아름답게 배치하는 일을 한다. 실천적 공동체 ‘새로운 질서 그 후…’로 활동하며 11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전시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1»을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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