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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무한히 새로운 의심

Writer: 박수지
, Photographer: 박수지
Infinite new doubt

‹토마› 전시 전경 ©박수지 ※ 본 사진은 서울시 보조금을 지원받아 제작하였습니다. 

‹토마› 전시 전경 ©박수지 ※ 본 사진은 서울시 보조금을 지원받아 제작하였습니다. 

토마, 2021, 박수지 오민 엮음, 조선령, 남수영, 신예슬, 최장현, 오민, 박수지 지음 © 작업실유령

토마, 2021, 박수지 오민 엮음, 조선령, 남수영, 신예슬, 최장현, 오민, 박수지 지음 © 작업실유령

‹Thomas›
‹Thomas›

Report

시각 예술계의 현재를 살펴봅니다

토마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으로 부활을 믿지 못한 에피소드 때문에 의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주 거론됩니다. 독립 큐레이터 박수지 님과 올해의 작가상 파이널리스트에 선정된 오민 작가가 서로 합심해서 예술을 둘러싼 끊임없는 의심을 다룬 전시 ‹토마THOMAS›를 토탈미술관에서 선보이고 있어요. 두 사람의 대화에서 시작된 의심에 대한 사고는 어떻게 전시로 발전하게 되었을까요? 박수지 님이 직접 보내오신 리포트 ‘무한히 새로운 의심’에서 궁금증을 해소해보세요. 자세한 내용은 아티클에 가득 담겨있답니다.

이스라엘 갈릴래아 출신의 한 사람이 그가 따르던 베들레헴 출신의 현자와 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의 믿음을 핍박해오던 이들로부터 현자가 죽임을 당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현자가 죽임을 당할 때 생겼던 상처가 있는지 직접 보겠다고 나섰다. 평소 어딘지 모르게 엉뚱하지만, 열성적이고 강직한 원래의 품성대로였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는 현자를 다시 마주했다.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더라도 앞에 있는 이는 그가 믿고 따르던 현자가 틀림없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그가 의심을 버리고 현자의 이름을 부르짖자, 현자가 말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요한복음서 20장 24-29절에 등장하는 ‘의심하며 믿는 자’ 사도 토마 –

1. 시작 = 대화+의심
«토마Thomas»의 시작은 2020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민은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열며 공연 ‹412356›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그 공연의 매니저였다. ‘폴리 아트Foley Art’의 수행과 음향을 연주로 상정해 ‘작곡’한 영상 작품과 퍼포머의 신체로 구현하는 폴리 아트가 공연장에서 동시에 상연되는 형식이었다. 공연을 끝낸 후 출국을 앞둔 오민의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서양 고전 음악 700년사를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호사스럽고 야심 찬 스터디를 위해 좋은 스피커와 피아노가 있는 곳을 빌렸다. 오로지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7시간을 내리 듣고, 공부했지만 당연히 700년이 7시간에 끝날 리 없었다. 그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고, 우리의 ‘의심과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양 고전 음악 700년사 나머지 공부를 이어 한 뒤, 매주 월요일 저녁 오민과 나는 일주일 새 읽고 본 것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와 내가 각각 갖고 있던 지금의 예술에 관한 의심이 서로를 자극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의심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았다. “지금의 기획자와 작가는 어떤 예술을 믿고 있는가?” “19세기 후반 본격화된 ‘순수예술’의 전개 이후 지속하는 예술의 속성이 있다면 무엇인가?” “지금 전시장을 가득 메운 정치적 올바름은 왜 의심받지 않는가?” “예술에서 지속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재료와 형식이란 무엇인가?” “예술작품에서 ‘대상화하지 않는 감각’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기획 전시에서 기획자-작가-관객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동시대 예술작품의 관객은 누구인가?” 이렇게 오민과 나는 ‘의심하며 믿는 자Doubting Thomas’를 소환했다.

2. 의심 = 생각+대화
의심을 오래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의심은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의심에 들어 있는 부정성은 때때로 우리를 못 견디게 만든다. 그러니 의심을 하더라도 이내 납득해버리거나 잊는다. 그러니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다’는 말은 분명 참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술의 일은 아니다. «토마»는 의심의 지난한 여정을 전면적으로 시작하되, 의심으로 명명된 질문과 비평을 의도적으로 본격화하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의심이란 무엇일까? 사랑, 쾌락, 믿음과 같은 충만하고 순수해야 할 것만 같은 상태에 ‘의심’이 달라붙는 일은 왠지 불경스럽다. 의심에는 의심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또 진정하게 여겨왔던 것을 역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심하는 주체는 늘 괴롭다. 예술에 의심이 달라붙는 순간, 그 의심은 곧장 예술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의심을 질문으로 치환해본다면, 의심은 이내 창작의 재료이자 비평이 된다. 그러니 더 나은 의심을 위해서는 자각, 인식, 반성의 과정이 앞서야 하는 게 아닐까. 충분한 시간을 들여 감지하고, 보고 들은 것을 나의 경험치로 인식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서부터 질문을 떠올리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의심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화살을 나에게 먼저 돌려보지 않는 의심, 즉 타인을 질책하기 위한 의심이란 대체로 어리석다.

일련의 과정이 지나면 의심을 풍요롭게 하는 실천으로 부정, 저항, 반동이 발휘된다. 이때 주된 경향을 거스르는 의심을 내비치기 위해서는 숙고도 필요하지만 나름의 용기도 필요하다. 그러나 의심한다는 것은 의심으로 인해 비관적인 장면만 눈에 들어오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절망감에 체념을 보태지는 않겠다는 선언이다. 한편 의심은 지금의 세계가 흘러가는 속도나 시류에 괘념치 않을 때나 가능해진다. 의심은 항상 오래된 과거를 몇 번이고 재방문하며, 지금의 판단을 가늠하는 과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로는 아직 겪어보지 않은 미래의 시간까지 당겨서 고려한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오가는 동안 의심은 언제나 근원적인 열망에 매혹된다. 그러니 의심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한 상태에 대한 강력한 믿음과 애착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의심은 예술과 관계 맺는 태도이자, 실천이 된다. 그런데, 지금의 예술에 의심이 필요하다는 선언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3. 대화 = 의심+의심
«토마»는 전시와 책 그리고 네 번의 대화로 구성되었다. 이 구성에서 작가-큐레이터-비평가라는 각각의 역할은 서로 분명히 나뉘는 동시에, 서로의 역할을 넘나든다. 오민과 나는 모든 기획의 과정을 함께 했다. 본래 큐레토리얼은 큐레이터의 작가성(authorship)으로 독립할 수 없는 종류의 실천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내가 지난 일 년간 쌓은 질문은 목소리도, 형상도 없이 글로만 존재하는 가상의 비평가 ‘토마Thomas’가 되었다. 왜 비평가였는가? 이때의 비평은 예술 창작으로서, 예술 기획으로서, 예술 실천으로서 소환되는 재료이자 형식이기 때문이다. 전시에는 오민의 작품 ‹폴리포니의 폴리포니›(2021)와 ‹412356›(2020)를 상영했다. 여기서의 작품은 큐레이터, 비평가와는 나눌 수 없는 작가의 고유한 몫이다. 예술의 재료, 형식, 구성, 감각에 관한 한 누군가 그 독립된 세계에  개입할 수 없다. 단, 질문하고 해석하는 일은 가능하다. 최근 오민은 자신의 작품을 영상으로 일컫는 대신 ‘시간 기반 설치’로 부르기로 했는데, 이런 종류의 결심에는 당연히 비평적 입장이 담기기 마련이다. 감각 재료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는 오민에게 있어, 이미지 위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영상이라는 말은 무언가 어긋나 있었을 테다. 즉, 의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토마»에는 ‘초대자’로 불리는 이들이 함께했다. 이들은 미술비평가, 음악비평가, 미학자, 예술연구자였고, 그들의 비평적 입장은 전시와 책과 대화로 확장되었다. «토마»의 전시 기간에 일어났던 네 번의 대화는 산파술이 난무하며, 끝없는 대화로 진리를 좇는 소피스트를 오마주한 시간이기도 했다. 각각의 대화는 ‘초대자’와 함께 했지만, 그들이 말하고 참여자는 듣는 구조는 아니었다. 참여자의 의지에 따라 5분 동안 이야기하고 끝내버릴 수도, 영원히 이야기할 수도 있는 질문을 화두에 올려 꼬박 세 시간씩 쉬지 않고 대화했다. 이를테면 ‘차이는 존재하는 것인가 인식되는 것인가?’라던가 ‘소리는 어떻게 의미를 발생시키는가?’와 같은 질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참여자를 짜릿하게 만들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예술에 관한 정립된 규범을 0으로 만든 채, 나의 판단을 지연시키고 보류해가며 대화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일종의 고양감이 되었다. 둘의 세계에서 시작된 대화가, ‘초대자’와의 대화를 거쳐,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어지는 과정은 왠지 모를 흥분을 안겨주었다. 말은 생각이다. 대화는 도무지 눈에 보이지 않는 ‘주고받는 추상’ 그 자체의 과정이다. 때문에 서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은 무엇이어야 하며, 이때 예술에 필요한 의심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대화의 시간은, 개인에게 갇혀있던 세계를 위태로울 만큼 팽창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쾌락이 틀림없다.

‹Thomas› 

Exhibition

«토마Thomas»

날짜 : 2021.11.01-2021.11.15

장소 : 토탈미술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 32 8, @totalmuseum

Writer

박수지는 독립 큐레이터다. 큐레토리얼 에이전시 뤄뤼AGENCY RARY를 운영하며, 기획자 플랫폼 ‘웨스WESS’를 공동 운영한다. 학부는 경제학을, 석사는 미학을 전공했다. 부산의 독립 문화 공간 ‘아지트’ 큐레이터를 시작으로, 미술 문화 비평지 «비아트» 편집팀장, ‘제주비엔날레 2017’ 큐레토리얼팀 코디네이터, 통의동 보안여관 큐레이터로 일했다. «토마» (공동기획), «7인의 지식인», «줌 백 카메라», «어리석다 할 것인가 사내답다 할 것인가», «유쾌한 뭉툭», «우정의 외면» 등을 기획했다. 이전에는 현대 미술의 정치적, 미학적 알레고리로서 우정, 사랑, 종교, 퀴어의 실천적 성질에 관심이 많았다. 이 관심은 수행성과 정동 개념으로 이어져, 이를 전시와 비평으로 연계하고자 했다. 최근에는 예술 외부의 질문에 기대지 않는 추상의 가능성, 예술의 속성 그 자체로서의 추상성에 대해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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