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는 «그리자유: 빛의 연회장»이란 이름의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다. 주인공은 스페인 마요르카 출신의 아티스트, 미구엘 바르셀로Miquel Barceló. 요즘 해양생물과 꽃, 뼈가 되어버린 생물로 대형 정물화를 그리는 연회 시리즈에 푹 빠진 작가는 따끈따끈한 신작을 서울로 보내왔다. 그냥 보아도 거대한 캔버스에서 넘쳐흐르는 기이한 생명력이 전이될 것이지만, 약간의 설명 후에 더욱더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다.
전시 제목에도 나오는 그리자유grisaille는 16세기 중엽부터 18세기까지 유행한 화법으로 단색조의 색을 사용해 명암과 농담으로만 그림의 세부 사항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특히 부조적인 회화에 최적화된 기법인데, 대리석 벽면을 깎거나, 파내고, 붙이는 방식으로 높낮이를 형성하는 부조 내부에 그림을 그리면 스르륵 스며들듯 조화로운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바르셀로는 이처럼 섬세하고 독특한 느낌을 지닌 그리자유를 독자적으로 해석해 스페인식 정물화인 보데곤bodegón에 접목했다. 정물화 하면 생각나는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그림들은 아주 정밀하고 화려하며 각 도상이 지닌 의미가 단단하기 그지없다. 보데곤은 훨씬 러프하고 자유분방한 태도로 정물을 대하면서 먹거리가 올라간 연회를 연상시키는 케이스가 많다. 바르셀로는 연회에 출현하는 먹거리 일부를 자신에게 익숙한 마요르카 주변의 해양생물과 뼈가 된 생물로 바꿔치기한다.
그는 아무래도 페어리 날개에 묻은 마법의 요정 가루를 손에 넣은 사람 같다. 그가 거대한 캔버스에 흩뿌린 신비한 가루는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거대한 정물화에 박제된 대상은 정지 상태를 풀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말없이 고요하던 풍경에는 내러티브가 흐른다. 그리고 마침내 시작하는 생명의 연회는 보는 이에게 원시적인 두근거림과 환희를 선사한다. 멈춘 듯 멈추지 않은 바르셀로의 그림은 오랜만에 회화가 지닌 힘을 상기시킨다. 흐릿한 형태를 붙잡은 구상적인 사물은 하나하나 요리조리 뜯어 보는 재미가 있다. 발견하고, 상상하고, 발견하고, 상상하는 일을 반복하며 한 폭의 캔버스에 수많은 이야기를 조합하게 만든다. 그리자유 특유의 표현 기법은 몽환적이며, 마치 폭죽처럼 타오르는 열정과 그 이후에 침잠하는 회한을 동시에 끌어낸다. 근래에 보는 맛이 잔뜩 있는 연회장이 아닐 수 없다. 모름지기 파티는 많은 사람이 즐겨야 제맛이니 조심스레 방문을 권해본다.
Exhibition
«그리자유: 빛의 연회장»
기간: 2023.03.09 – 2023.04.15
참여작가: 미구엘 바르셀로
Place
타데우스 로팍 서울: 서울시 용산구 독서당로 122-1 포트힐 빌딩 2층
Writer
전종현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학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했고,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프포스트코리아»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 «LUXURY» «AVENUEL» 등에 글을 기고한다. «비애티튜드»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Photogrpher
박도현(@dhyvnpark)은 홍익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한 사진 기술자이다. 주로 렌즈를 기반으로 한 이미지를 제작하며, ‘좋은 이미지’ 제작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