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Review

풍문으로만 들었던: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Writer: 전종현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1

Review

비애티튜드가 주목하는 요즘 ‘무엇’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난 2015년부터 관심의 더듬이가 파르르 떨렸지만 쉽게 인연을 맺지 못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매년 열리는 ‘전주국제영화제’입니다. 특히 그래픽 디자이너 100인이 참가하는 ‘100 Films 100 Posters’ 행사가 큰 역할을 했지요. 영화제가 열리는 시즌이 돌아오면 참여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린 포스터가 제 인스타그램을 도배했거든요. 그러던 중 올해는 기필코 직접 가봐야겠다, 마음을 굳게 먹고 지난 5월 드디어 그곳에 다녀왔습니다.

당일치기나 다름없는 1박 2일 일정이었는데요. 영화제의 특성을 미리 제대로 파악했다면 좀 더 길게 체류했을 텐데, 아쉬움이 마구 드네요. 영화제 뉴비로서 겪은 전주국제영화제의 첫인상, 돌아다니며 느낀 감상과 깨달음을 한 줌의 칭찬, 한 줌의 후회와 섞어 글로 버무려 보았습니다. 혹시 아나요, 제 실패를 양분 삼아 내년에는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는지요. 평소 전주국제영화제를 눈여겨보신 분이라면 BE(ATTITUDE) 웹 아티클에서 눈물 어린 노하우를 습득해 보세요.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무빙 포스터

드디어 가봤다. 지난 10년 동안 주기적으로 소셜미디어를 도배하던 ‘그곳’에. 이제는 조금만 움직여도 체력이 쭉쭉 증발하는 몸을 이끌고 마침내 방문에 성공했다. 서울에서 2시간 40분이 걸리는 곳, 머릿속으로는 이미 몇 번은 가본 듯한 소문 속 행사. 매년 전주에서 열리는 ‘전주국제영화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와는 통 인연이 없는 편이다. 주로 활동하는 영역이 시각 예술이다 보니 전시가 훨씬 편하기도 하거니와,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를 조용히 보면 잠 귀신이 찾아오는 탓에 평소보다 2~3배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20대 때는 교양을 키운다는 목적으로 찰리 채플린, 앨프리드 히치콕 등 클래식이라 불릴 만한 감독의 명작들을 틈나는 대로 찾아보곤 했지만, 내겐 언제나 모니터 속 ‘시작’과 ‘중지’라는 강력한 버튼이 있었다. 반면,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극장에서 유유히 흐르는 영화를 멀뚱멀뚱 바라볼 때는 잠의 여신이 굉장한 축복을 뿌려댔다. 서서히 퓨즈가 끊겼다가 정신을 다시 차리면 엔딩 크레딧이 장대하게 올라가는 마법 같은 시간 여행이라니.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3

구글 제미나이가 친절히 만들어준 스폰지밥 스타일의 ‘잠의 여신’과 정신 못 차리는 ‘나’의 모습.

열정으로 똘똘 뭉친 시네필cinephile과 발권 경쟁을 벌이는 영화제는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다.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 프레스 배지를 신청하고 어영부영 다녀오긴 했지만, 기사를 작성하지 못했다. 영화제를 소개하기엔 이미 경험이 풍부한 애호가들이 가득했고, 프리미어 딱지가 붙은 영화 리뷰를 쓰기엔 전문성이 부족했다.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북돋우며 감독과의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모종의 사정으로 기사 발행이 취소되면서 되려 ‘마상’까지 입었다. 에디터로서 영화를 다룰 때 트라우마가 생긴 계기였다.

 

그래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활약하는 ‘100 Films 100 Posters’ 관련 포스팅이 아무리 내 소셜미디어를 도배해도, 정작 그 현장인 전주국제영화제를 직접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 영화, 실험 영화, 독립 영화, 다큐멘터리 영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영화제의 강점은 인터뷰, 리뷰뿐 아니라 영화제 현장을 소개하는 일조차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전주국제영화제는 내게 일종의 ‘그림의 떡’이었달까.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5

구글 제미나이에 의뢰한 ‘그림의 떡’ 일러스트레이션.

사실 지금 전주국제영화제에 대한 글을 쓰면서, 한 줌의 용기와 함께하고 있다. 그동안 외면하던 곳에 직접 발걸음하는 일도 낯선 도전이었기에, 영화제를 알뜰살뜰 잘 즐겼다고 당당히 말하기는 조금 곤란하다. 소문으로만 듣던 행사에 늦게나마 가봤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는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러니 5월 황금연휴에 맞춰 장중하게 펼쳐진 영화제 중 하루를 기록한 글이 혹여나 어수룩하게 보일지라도 이해와 양해를 슬쩍 구해본다.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6

© Harry Jun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7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관련 현수막 © Harry Jun

처음 겪은 전주국제영화제는 상상과 꽤나 다르게 전개됐다.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겠으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무지에서 비롯한 오만이었다. 이번 방문은 4월 30일 밤 서울에서 시작해 5월 2일 새벽 서울에서 끝났다. 4월 30일이 개막식이었으니, 결국 개막 2일 차인 5월 1일만 겪은 셈이다. 지금도 뼈저리게 후회하는 부분이 바로 당일치기에 가까운 스케줄이다. 영화제가 성대하면 하루만 경험해도 에센스를 뽑을 수 있다고 여긴 게 오판이었다.

영화제는 정밀하게 짠 각본과도 같다. 전체 기간을 염두에 두고 완급조절을 하며 수많은 영화를 상영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즉 사무국에서 의도한 영화제의 참맛을 느끼려면 장기 체류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예상하건대 적어도 3일 정도 머물러야 만족스러움이 차오를 것 같다. 이건 개인의 성향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혹시 전주국제영화제처럼 일주일 넘게 지속하는 장기 영화제를 경험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을 망설이지 말자. 나 또한 출발 전에 주변에 있는 시네필에게 상의하지 않은 어리석음에 가슴을 쳤다. 허둥지둥거리며 시간이 어디로 어떻게 증발하는지 당최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유경험자의 지고지순한 충언이다.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8

엄청난 공력이 들어간 상영 시간표.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9

엄청난 공력이 들어간 상영 시간표.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이번 영화제에서는 총 57개국 224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이 정보를 처음 알았을 때, (정말 무식하게도) 하루에 수없이 많은 영화를 볼 수 있는, 말 그대로 시네마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상영 시간표를 분석해 보니, 하루에 영화를 상영하는 주요 시간대는 아침, 오후, 저녁, 심야 정도로 나뉘었고, 여러 앵커 극장과 그에 소속된 다양한 상영관에서 해당일에 배정된 영화를 사이좋게 나누어 상영하는 형태였다. 결국 분신술을 쓰지 않는 한, 이론적으로는 하루 최대 4편 정도를 볼 수 있는 셈인데, 자기가 원하는 영화로만 스케줄을 채우는 건 꿈결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아주 열린 마음으로 상영작을 예매한 나조차도 결과적으로 2편에 그쳤으니, 보수적으로 잡아 하루에 2편만 제대로 보아도 충분히 성공이라 말할 수 있을 듯싶다.

나는 프레스 배지에 기대어 리뷰에 필요한 영화를 온라인 스크리닝 서비스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추후 감상할 수 있었다. 이는 일반 대중에게 해당하지 않는 매우 특수한 상황 아니던가. 그러니 영화제를 충분히 즐기고 싶은 사람은 겸허한 마음으로 철저한 사전 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무슨 영화를 상영하는지, 시간은 언제인지 알아보며 자신만의 스케줄을 짜고, 예매까지 성공해야 기본적인 준비가 끝난다.

참고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현장 예매 없이 사전 예매로만 진행했는데, 최종 좌석 점유율이 81.6%를 찍었다. 총 586회 차 상영 중 448회 차가 매진됐으니, 그 열기가 엄청나다. 7만 명 이상이 찾는 영화제에서 패닉이 오지 않으려면,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인파로 넘치는 영화의거리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상영관에도 사람이 가득하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사진 찍으러 대기 중인 사람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의외의 복병을 하나 더 꼽는다면 날씨랄까?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행사에서 날씨가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된통 당한 주인공이 바로 여기 있다. 영화제는 영화에 관한 행사를 집약한 축제이고, 축제란 결코 날씨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보도 자료 속 방문객의 밝고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싱그럽고 쨍쨍한 날씨가 차지하는 지분은 막강하다. 실제 내가 들린 5월 1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비가 주룩주룩 내린 탓에 영화의거리를 가득 메운 현수막이 바람에 후루룩 날리며 비가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어둡고 침침한 디스토피아를 연상시켰다. 그동안 오매불망 고대했던 영화제의 첫인상치곤 고약했달까. 무엇보다 날씨가 과하게 좋지 않으면 자칫 영화제에서 준비한 각종 행사에 심각한 차질이 생긴다는 게 진짜 문제다.

개막 2일 차 비 오는 날의 흉흉한 영화의거리 © Harry Jun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14

개막 2일 차 비 오는 날의 흉흉한 영화의거리 © Harry Jun

영화제에서는 순수하게 영화 상영만 하지 않는다.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행사를 주최하고, 야외무대 또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비, 돌풍, 황사 등 자연재해는 심술 궂은 불청객이다. 이번에는 다행히 폭우가 쏟아지지 않아서 홀딱 젖는 일은 없었지만, 축축한 분위기 때문인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은 열정이 스르륵 사그라들었다. 미리 체크해놨던 야외 행사, 영화제의 중심부인 영화의거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움직일 동력이 증발했달까.

그런 와중에 전주국제영화제의 강점을 오히려 제대로 체감할 수 있었으니, 바로 최적화된 동선이었다. 앵커 시설이 영화의거리에 몰려있어 도보 이동이 무척 수월했고, 주변에 카페와 음식점 또한 많아서 사람들 사이에 당황한 기색이 크지 않았다. 만약 주요 극장 간 거리가 멀었다면 오가는 교통편을 이용하는 순간부터 악몽이 시작되었을지도? 가는 날이 장날이었는지, 나중에 올라온 보도 사진을 보니 날씨가 맑고 쨍쨍했다. 황금연휴 때 기획했던 각종 행사가 잘 이루어진 것 같아서, 내가 다 뿌듯할 정도였다.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15

네이버 지도로 보면 앵커 시설들이 정말 코앞이다.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16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17

다행히 날씨가 좋아진 후의 전주국제영화제 풍경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18

야외 이벤트와 공연도 성공적이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앞서 말한 장기 체류에 대해 첨언하자면, 도시의 인프라 또한 큰 역할을 담당한다. 방문객이 머물만한 숙소가 많아야 하고, 도시에서 즐길 수 있는 먹거리, 볼거리 또한 충분해야 전체적인 만족도가 높은 건 상식이다. 그런 면에서 전주국제영화제는 태생부터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 영화의거리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이동하면, 그 유명한 ‘전주한옥마을’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호텔 말고도 머물 수 있는 적당한 숙소, 이색적인 숙소가 충분하고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경험과 먹부림이 제대로 발휘된다는 뜻이니, 장기 체류에 대한 심적 저항이 낮아지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말은 1박 2일이지만 실제로는 단 하루만 머물렀던 나는 영화 보고 전시 보고 여기저기 움직이느라 식사다운 식사를 단 한 끼도 즐기지 못해서 더욱더 아쉬웠다. 예전 «씨네21»에서 전주국제영화제 출장을 앞둔 기자들 눈이 반짝인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갸우뚱했는데, 이제는 온전히 통감한다. 먹다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전주에서 맛 탐험을 하지 않고 영화만 보는 건 아무리 씨네필이라도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을까. 맛집 조사까지 끝내야 전주국제영화제를 즐길 기본적인 준비를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인스타그램에 끝없이 나오는 전주 먹거리 리스트… © Harry Jun

아, 맞다. 전주국제영화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결정적 계기인 ‘100 Films 100 Posters’를 실견한 소감을 빠뜨릴 수 없지. 그해의 상영작 중 100편을 뽑아 그래픽 디자이너 100명이 영화에 대한 포스터를 제작해 전시하는 행사는 2015년 시작해 올해로 11년 차를 맞으며 전주국제영화제의 상징적인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작년 10주년을 기념해 1000점의 포스터를 공개할 만큼 아카이빙의 힘 또한 놀랄 정도인데, 올해부터 ‘100 Films 100 Posters’의 운영 주체가 바뀌면서 행사가 비단 전시뿐 아니라 토크, 포럼, 워크숍, 부대 전시까지 여러 갈래로 확장됐다.

즉 ‘행사 속 행사’처럼 자율적으로 돌아가는 부분이 강화된 셈인데, 다다익선이란 측면에서는 환영할 만하지만, 막상 당사자 입장에서는 꽤나 고민거리다. 영화 관람과 ‘100 Films 100 Posters’ 관람 중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느냐에 따라 다른 이보다 포기할 게 많아지고, 셈법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19

‘100 Films 100 Posters’ 공식 포스터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예를 들어, 나는 개막 2일 차에 방문한 터라 전시 이외엔 선택지가 없었지만, 영화제 중반에 방문하는 이들은 전시를 제외하고도 포럼과 토크, 워크숍 등의 선택지가 다양하게 존재했다. 만일 자기가 정말 보고 싶은 영화의 상영 시간과 디자인 관련 행사가 겹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개인이 부여하는 가치에 따라 선택하기 나름이지만, 풍요 속의 빈곤이 생길 수 있다.

전시만 하더라도, 시간 관계상 포스터 100장을 모아 놓은 메인 전시에만 집중한 나와 달리, 여유가 있다면 다른 전시에도 분명 관심이 갈 터. 총 네 곳의 전시장에서 산발적으로 열리는 5개의 전시는 그 거리가 꽤나 떨어져 있고, 그 규모 또한 관람 하나만을 위해 움직이기에는 애매한 느낌이었다. 전주시립인후도서관, 완판본문화관 등 해당 장소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겠지만, 작은 전시를 보기 위해 길게는 왕복 1시간 거리를 오가는 일은 영화제를 찾은 이에게 상영작보다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커 보였다.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20

전주시립인후도서관에서 열린 «포스터와 포스터» 전시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21

전주시립인후도서관에서 열린 «포스터와 포스터» 전시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22

완판본문화관에서 열린 «2026 미리보기: 극장 노스탤지어» 전시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23

완판본문화관에서 열린 «2026 미리보기: 극장 노스탤지어» 전시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메인 전시를 소개하는 포스터의 불명확한 정보 표기가 혼란을 가중시키는 면도 존재했다. 전시 장소로 팔복예술공장, 영화의거리, 문화공판장 작당을 표기했는데, 실제 확인해 보니 영화의거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시 형태가 아니었다. 거대한 현수막에 포스터를 줄줄이 인쇄해 허공에서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식은 거리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코레이션에 가까웠다.

100장의 포스터를 보여주는 행사의 근본 전시는 팔복예술공장과 문화공판장 작당, 두 곳에서 동시에 진행됐는데, 본진으로 추정되는 팔복예술공장 쪽이 궁금해서 택시까지 탔고 갔다가 다소 허무함을 느꼈다. 벽에 설치한 포스터가 시야에서 너무 벗어나 디테일을 확인하기 어려웠고, 종이가 들뜬 부분이 계속 눈에 거슬린 점이 주효했다. 예전부터 유지해 온 포맷이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두 눈으로 경험할 때 느끼는 아쉬움이 존재하더라. 추후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사진 속 문화공판장 작당의 디스플레이는 훨씬 직관적이고 휴먼 스케일에 적합했는데, 영화의거리와도 거리 면에서 훨씬 가까웠다. 내년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포스터 전시를 보러 간다면, 1순위로 문화공판장 작당을 추천하고 싶다.

팔복예술공장에서 열린 포스터 전시 전경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25

포스터의 디테일을 제대로 보기 힘든 디스플레이였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26

현장에서 포스터를 구매할 수 있는 게 메인 전시의 특징이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27

문화공판장 작당의 디스플레이는 딱 보기에도 휴먼 스케일에 합당했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28

문화공판장 작당에서의 포스터 전시 전경.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이번 여정을 준비하며 처음 안 사실 하나.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더불어 전주국제영화제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영화제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비주류 영화, 예술 영화, 독립 영화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상대적으로 규모가 더 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화하지 못하는 작품 또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이기에 예술 영화를 좋아하는 시네필과 창작자, 평론가에게 큰 사랑을 받는다고. 그동안 ‘100 Films 100 Posters’라는 디자인 행사를 꾸리는 독특한 영화제로만 생각한 무지함에 살짝 부끄러웠는데, 실제 관람한 영화가 예상보다 무척 좋았기에 민망함이 더해졌다. 내가 선택한 영화는 ‹백현진쑈 문명의 끝›, ‹3670›, ‹핑크문›까지 총 3편으로, 이 중 ‹3670›은 티켓 매진 때문에 추후 온라인 스크리닝으로 접했고, 나머지 두 편은 현장에서 관람했다.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29

실물로 출력한 5월 1일 영화 티켓 © Harry Jun

음악가, 화가, 연기자, 시인 등 다재다능하기로 유명한 예술가 백현진이 연극 연출에 도전한 ‹백현진쑈: 공개방송›의 공연 기록을 감독이자 예술가인 박경근이 해체하고 추가로 촬영한 장면을 집어넣어 어디까지가 진짜 공연인지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던 ‹백현진쑈 문명의 끝›은 여러 낯익은 인물의 등장과 기묘한 장면의 영상만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3670›은 극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플롯이 매우 특별했다. 친형제 같은 탈북자 커뮤니티와 동갑내기 게이 커뮤니티 사이를 오가는 27살 탈북 게이 청년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상처를 입고 이를 극복하는 방식을 흡입력 있게 보여준다. 특히 오프라인과 온라인에 기반해 움직이는 각기 다른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 영화제에서 과연 4관왕을 차지할 만했다. ‹핑크문›은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 불리는 윤석남 작가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고 마흔의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그가 40여 년간 쏟아냈던 에너지의 흔적을 반추하고, 지금도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작업에 몰두하는 열정에 매료됐다.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30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31

‹백현진쑈 문명의 끝› 스틸컷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32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33

‹3670› 스틸컷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34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35

‹핑크문› 스틸컷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특히 ‹핑크문›은 예정에 없던 깜짝 GV를 진행하며 윤석남 작가와 그의 조카이자 이번 다큐멘터리 연출을 맡은 감독이 무대 중앙에 앉아 관객과 질문을 주고받았는데, 많은 여성이 창작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진지하게 상의하는 장면이 인상에 남았다. GV가 끝난 후에도 작가를 둘러싸고 사인을 받으며 옹기종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마치 록스타를 보는 듯했다. 80세가 훌쩍 넘은 나이에 순전한 웃음으로 대중을 대하는 작가의 모습을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픈 욕망이 생겼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제가 잠시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비록 스마트폰으로 급하게 찍었지만, 한평생 치열하게 작업하고 삶을 개척한 예술가의 모습이 완연했다. 어쩌면 전주국제영화제가 오늘 하루 고생했다며 내게 허락한 깜짝선물일지도?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36

‹핑크문› 상영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 © Harry Jun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37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얻은 깜짝선물 1호, 윤석남 작가의 포트레이트 © Harry Jun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38

© Harry Jun

영화제가 더 많은 사람의 참여와 관심과 인기와 특색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일을 도모하더라도, 그 중심에는 결국 영화가 있다. 더 좋은 영화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 알려지지 않은 영화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 일정한 주제로 엮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영화의 힘을 믿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모이고 모여 옥석을 가리는 노력과 열정으로 영화제를 이끌어 간다. 그 집약체인 영화제 상영작 대부분이 실은 국내 극장이나 OTT를 통해 다시 서비스할 가능성이 희미하고, 그렇기에 지금 마주하는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은 매년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무르는 동기로 충분해 보인다.

‘인생을 바꾸는 예술’, ‘인생을 바꾸는 영화’라는 수식은 뻔하다. 그러나 조약돌을 호수에 던질 때 일어나는 파장처럼, 우리가 접한 무언가는 어떤 형태와 의미로든 결국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두운 극장에서 영화를 통해 내면으로 침잠하며 조금씩 성장할 수 있다면, 일주일 넘게 이어지는 전주국제영화제야말로 편견의 껍질을 부수고, 감정의 파고를 넘나드는 여정의 한복판으로 제격이다. 마음속 고요한 호수를 흔드는 퐁-당 혹은 풍-덩의 장으로.

덧.
전라북도에 위치한 전주는 지리적 위치가 약간 애매하다. 광주처럼 먼 것도 아니고 대전처럼 가깝지도 않다. KTX가 다니지만, 매일 운행하는 직행 편이 5회에 불과하다. 환승 편을 포함하면 당연히 훨씬 많아지지만, 열차 환승을 꺼리는 이에겐 1시간 50분이라는 소요 시간이 그리 매력적으로 와닿지 않을 테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우리 기억에서 어느덧 사라진 고속버스를 이용하면 예상외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고속버스는 차편이 훨씬 다양하고 시간대도 넓으며, 무엇보다 얼마 전 외국인 유튜버가 환호했던 전설의 프리미엄 버스가 존재한다. 소요 시간은 2시간 40분으로 KTX에 비해 50분이 더 길지만,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처럼 의자를 완전히 뒤로 젖힌 채 편하게 갈 수 있고, 개인별로 커튼을 칠 수 있어 사생활 보호도 가능하다. 요금마저 KTX보다 20% 저렴하다. 야밤에 움직이는 터라 할 수 없이 고속버스를 이용했던 나는 프리미엄 버스에서 꿀잠을 자며 그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자차로 가지 않는 분은 KTX 말고 프리미엄 버스를 이용해 보시라. 서울에서 출발한다면 센트럴시티와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먹거리 인프라도 즐길 수 있다.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39

Writer

전종현(@harry.jun)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하며,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등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과 편집위원을 지냈고, 2021년부터 2023년까지 기아글로벌디자인센터에서 발행한 «기아 디자인 매거진» 창간 작업과 콘텐츠를 총괄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겸 아트 칼럼니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 중이며, 동시대 한국의 기발한 창작자에 주목하는 «비애티튜드» 편집장을 맡고 있다.

Thank You for Subscription!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애티튜드»는 매주 금요일 아침 10시 1분, 창작자의 반짝이는 감각과 안목을 담은 소식을 메일함에 넣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