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생소한 예술의 흥미로운 부분을 잡아내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이야기꾼, 박재용 작가의 인공지능과 예술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요즘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이안 쳉의 전시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히토 슈타이얼의 전시가 화제인데요. 두 전시에 나온 작업을 비교하며 인공지능과 인공 멍청함(!)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 있어요. 인공 멍청함이라니, 듣기만 해도 궁금해지는 단어 아닌가요? 아래 아티클에서 직접 확인해보시죠!
지난 달의 글: AI가 당신을 대체할 이유
당신은 아티스트인가?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곧 당신을 대체할 것이다. 단, 필요조건이 있다. 당신의 창작물이 사실 어디선가 한 번쯤 봤을 법한 파생적(derivative) 작업에 불과해야 한다. 그렇다면, ‘레퍼런스’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머지않아 당신의 ‘창작물’보다 AI의 ‘산출물’이 더 빠르고 나은 결과물로 인식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손맛’이 담긴 ‘작품’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니 그저 그런 창작물이 당신의 무기라면, 선택지는 명확하다. 기존에 만들어진 것들을 머신러닝으로 대량 학습해 만들어낼 수 없는 창조적인 것을 개발하라. 그럴 수 없다면? 인간으로서의 ‘영향력’을 기르고 그저 그런 당신의 창작물에 ‘아우라’를 더하라.
아티스트보다 더 빨리 AI에 의해 대체될지 모르는 사람: 바로 당신
상상 속의 AI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창조성과 지성, 육체적 능력의 한계치를 가뿐히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로 다가오곤 한다. SF영화에 등장하는, 별안간 인류 멸망이 우주를 위한 해결책임을 깨닫는 슈퍼컴퓨터나 로봇 군대가 이를 대변한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존재를 실제보다 더 대단하게 생각하는 인간의 망상일 뿐이다. 우리 모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리 대단치 않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
특히 책상 머리에 앉아 일하는 경우, 삶의 대부분은 단순 서류 작업으로 잠식되어 있다. 그런데다가 머신비전과 머신러닝을 통해 인간이 처리하는 단순 업무를 학습한 뒤 인간을 대체하는 AI가 이미 개발되어 사용 중이다. 이른바 ‘로봇 업무 자동화(RPA)’이다. 그러니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사무직으로 취업을 한 당신은 2~3년간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한다. 당신이 회사의 컴퓨터에서 하는 모든 활동은 딥러닝으로 당신의 업무를 익힐 가상의 AI봇을 위한 학습 자료로 쓰인다. AI봇이 당신이 담당하던 서류 업무를 완벽히 ‘자동화’할 수 있게 되는 날, 당신은 해고 통보를 받는다. ‘감사합니다 OOO 님. 당신의 소중한 업무 데이터를 바탕으로 본 업무는 자동화될 예정입니다. 그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흔히 상상하는 바와 달리, 고도의 창의성을 요하는 직종이나 육체 노동보다, (대부분의 사람에 해당하는) 단순 사무직이 AI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더 높다. 위 동영상에서 보듯 이미 로봇 업무 자동화 시장은 매년 두 자리 숫자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머지 않은 미래에 로봇, AI, 기본소득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거나 법이 만들어진다면, 혹시 모른다. 몇 년 동안 AI의 학습을 위한 땔감 노릇을 한 당신에게 일종의 저작권료처럼 지속적인 수익 공유가 이뤄지거나, 기본소득이 지급될지도.
Hito Steyerl, Hell Yeah We Fuck Die, 2016, film still, continuous loop, part of her Art Gallery of Ontario survey exhibition This is the future
인공 멍청함: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의 경우
그런데 이렇게 ‘똑똑한’ AI만이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는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히토 슈타이얼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아닌 ‘인공 멍청함artificial stupidity’에 관해 말한다. 편견이 섞인 데이터에 기반해 부주의하게 설계된 AI 알고리즘이나 SNS에서 우리를 귀찮게 하는 ‘스팸 봇’ 계정들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멍청함을 뽐낸다. 가상 연인 노릇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챗봇이 혐오의 언어를 학습해 혐오 재생산에 나선다거나, 백인의 얼굴을 학습한 이미지 인식 알고리즘이 유색 인종을 동물로 인식하는 것, 타인의 프로필 사진을 도용한 계정으로 단기간 고수익 비법을 알려준다는 스팸 계정들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지능의 결과물이라기보다, 인공적이고 의도적인 멍청함에 더 가까운 모습이라 하겠다.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막한 «히토 슈타이얼-데이터의 바다»(4.29~9.18)에서 마주하게 되는 몇 가지 모습들은 과연 인공지능이라고 불러야 할지 인공 멍청함이라고 불러야 할지 주저하게 되는 살풍경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일련의 구조물과 영상으로 이뤄진 ‹Hell Yeah We Fuck Die›(2016)에서는 재난 구조용 로봇을 훈련시키는 가상의 환경을 볼 수 있다. 일종의 ‘메타버스’라고도 할 수 있는 가상의 지형을 걷고 있는 로봇들은 끊임없이 무언가에 의해 저지당하거나 두들겨 맞는다. 왜? 처음부터 방해물을 피하거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논리를 인간이 고안해서 입력하는 ‘연역적’ 방법 대신, 인간보다 월등하게 빠른 속도로 반복해서 학습하고 대응 방법을 개선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무한히 넘어지고 두들겨 맞으면서 조금씩 나은 방법을 찾아내는 ‘귀납적’ 방법으로 학습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상 공간에 존재하는 시뮬레이션상의 로봇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잔인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한 속도와 시간에 비해 사실상 무한한 시간을 가진 AI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예를 들어, 2016년 이세돌과 대국을 펼친 알파고는 인간 기준으로는 4000년이 넘게 걸릴 만큼 바둑 대국을 치른 상태로 대결에 임했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을 검은 상자 속에 가둔 뒤 4000년 동안 혼자서 바둑만 두게 한다고 생각해보자. 어쩌면 슈타이얼의 작품에서 보이는 가상의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좌절하는 보행형 로봇의 뼈대들이 겪고 있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일지 모른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그의 작품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로봇 뼈대들의 모습이 실시간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녹화된 동영상이라는 것이다.
이안 쳉,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Life After BOB: The Chalice Study)› 트레일러 영상
인공지능을 통한 ‘세계 기르기’: 이안 쳉Ian Cheng의 경우
히토 슈타이얼이 인공지능 대신 인공 멍청함에 주목한다면, 이안 쳉은 인공지능을 통한 영생을 꿈꾼다. 이때 영원한 삶을 이어가는 것은 작가 자신이 아닌 작품, 더 정확히는 작품의 형태를 통해 작가가 길러내고 있는 ‘세계’다. 이안 쳉의 전시는 마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의 히토 슈타이얼 개인전과 같은 시기에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안 쳉: 세계건설»(3.2~7.3)이라는 전시 제목은 다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세계건설’은 ‘Worlding’을 번역한 단어인데, 번역된 한국어만 보면 마치 이안 쳉의 작업이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난 2018년 이안 쳉은 자신이 작업을 통해 꿈꾸는 바를 한 권의 책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사절을 위한 세계 기르기 안내서: 현재를 선택하고, 과거를 스토리텔링하고, 미래를 시뮬레이션하고, 변화를 살려 무한한 게임을 만드는 부자연스러운 기술을 탐색하는 방법』이라는 다소 긴 제목의 이 책에서 설명하는 ‘worlding’이란 상상의 문턱을 넘어 살아나는 ‘세계’, 창조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스스로 번성할 수 있는 ‘세계’를 기르는 일이다. (모든 육아의 궁극적 목표가 양육 대상을 자립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worlding’에 대한 보다 적절한 번역은 ‘세계건설’이 아니라 ‘세계 기르기’라고 생각한다.)
『사절을 위한 세계 기르기 안내서: 현재를 선택하고, 과거를 스토리텔링하고, 미래를 시뮬레이션하고, 변화를 살려 무한한 게임을 만드는 부자연스러운 기술을 탐색하는 방법』 (이안 쳉, 2018)
전시장에 놓인 영상 작업들의 캡션에선 길이를 알려주는 몇 분 몇 초라는 말 대신 ‘무한한 길이’라는 표현이 눈에 밟힌다.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영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에 의해 무한히 생성되는 모습을 화면에 비추기 때문에 길이가 ‘무한’한 것이다. 극장처럼 꾸며 둔 공간에서 볼 수 있는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2021)는 ‘라이브 애니메이션’으로, 이야기 구조가 짜여진 채 내용이 전개되는 것 같지만 각 장면에서 이뤄지는 선택에 따라 이어지는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라이브’이다. 심지어 이 작품은 간단한 회원 가입 후 내용을 수정할 수 있는 별도의 위키백과 웹사이트(링크)와 연동되며, 위키백과의 내용 변화가 애니메이션에도 실시간으로 반영된다. 인터넷과 전기 공급이 끊기지 않는 한, 그의 작업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매번 조금씩 다른 조합으로 흘러가는 세계를 무한히 살아갈 것이다.
이안 쳉,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 2021, real-time live animation, 컬러, 사운드, 48분 © 이안 쳉
현재: 시뮬레이션으로서의 삶
히토 슈타이얼이 우리가 누군가의 시뮬레이션을 수행하듯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차원에서 자못 진지하게 (때로는 고약한 농담을 섞어) 묻는다면, 이안 쳉은 애초에 인간의 의식 자체가 두뇌 속 뉴런이 만들어내는 시뮬레이션이 아닌지 반문한다. 그렇다면 그가 AI와 게임엔진을 통해 만들어낸 시뮬레이션으로서의 세계도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를 바 없는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히토 슈타이얼에게 이러한 시뮬레이션이 언제나 보다 큰 자본주의와 기술 독점 등의 문제와 결부된다면, 이안 쳉에게 있어 시뮬레이션의 세계는 개인의 자유를 열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도구다.
히토 슈타이얼, ‹야성적 충동›, 2022, 단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24분, 라이브 컴퓨터 시뮬레이션, 가변 시간, 국립현대미술관 제작 지원 © 국립현대미술관
미래: 웹 3.0, NFT, 야성적 충동
히토 슈타이얼과 이안 쳉의 전시를 아주 간략히 소개한 내용을 통해 두 작가가 웹 3.0과 NFT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할 거라는 점을 그리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세계 기르기’에 진심인 이안 쳉은 웹 3.0과 NFT가 거대한 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는 개인이 그 어느 때보다 손쉽게 하나의 ‘세계’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는 수단이라고 여긴다. 이런 일이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이뤄진다면, 창작자가 세상을 떠난 뒤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라도 그가 만든 ‘세계’는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탈중앙화’되어 ‘분산’되어 지속될 것이다. 반면 이제는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가 아니라 ‘권력과 전력을 소비하는 이미지(power image)’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히토 슈타이얼은 좀 다른 입장을 취한다. 그는 실시간 시뮬레이션에 바탕을 두는 작업조차 전력 낭비를 피하려 녹화된 영상을 편집해서 활용한다.
이안 쳉이 바라보는 미래가 기술을 통해 구현된 자율적인 ‘세계들’로 이뤄졌다면, 히토 슈타이얼이 바라보는 미래는 이상주의로 포장된 예측 기술들로 인해 과거와 현재에 붙잡혀 있는 시간이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야성적 충동›(2022)은 실제와 가상을 뒤섞은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와 설치로 이뤄진다. 경제 위기로 도시의 삶을 버린 양치기가 등장하는 리얼리티 TV, 박테리아로 구동되는 블록체인에 연동된 ‘치즈코인’ 등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이성과 이상보다는 감정과 탐욕, 야망, 두려움에 휩싸여 ‘야성적’ 결정을 내리는 자본주의 시장을 냉소적으로 비춘다.
인공지능인가 인공 멍청함인가
때마침 동시에 열리고 있는 «히토 슈타이얼-데이터의 바다»와 «이안 쳉: 세계건설»을 관람할 당신은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언제나 그렇듯, 선택은 전시를 관람하는 자의 몫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 두 전시를 관람한 뒤 #전시스타그램 이나 #미술스타그램 등의 해쉬태그를 붙여 인스타그램에 이미지부터 올릴 요량이라면 주의하자. 그건 이안 쳉이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새로운 세계 기르기에도 부합하지 않고, 오히려 히토 슈타이얼이 말하는 인공 멍청함의 강화에 힘을 보태는 일이니까.
이안 쳉,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 (영상 스틸), 2021, 라이브 애니메이션, 컬러, 사운드, 48분 © 이안 쳉, 글래드스톤 갤러리, 필라 코리아스 런던 제공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 공동 제작 지원: 더 쉐드(뉴욕), 루마 재단, 라이트 아트 스페이스(베를린). 인터렉티브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리움미술관(서울) 제작 지원
Writer
박재용(@publicly.jaeyong)은 현대미술서가 ‘서울리딩룸(@seoulreadingroom)’을 운영하며, 공간 ‘영콤마영(@0_comma_0)’에서 문제해결가(solutions architect)를 맡고 있다. 전시기획자로 일하기도 하며, 다양한 글과 말을 번역, 통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