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Essay

이 재미를 모르는 슬픈 사람들에게

Writer: 김도훈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비애티튜드»에 언제나 흥미로운 글을 보내주는 김도훈 님의 이번 에세이는 다른 때보다 유달리 감칠맛이 납니다. SF 광인 인생 40년. SF 문학은 그의 삶과 미래의 방향타를 건든 일종의 거대한 흐름으로 작용했는데요. 언젠가부터 SF를 읽지 않는 사람에게 전도를 멈추었던 그의 가슴은 이 글을 쓰며 오랜만에 신실한 간증 욕구로 차올랐어요. SF가 지닌 놀라운 힘과 더불어 글 마지막에 남긴 ‘뼛속 깊이 문과인 당신을 위한 SF 문학 10선’을 꼭 빠짐없이 확인해 보세요.

나는 울었다. 몰래 울었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행정학원론』 책 뒤에 숨어서 울었다. 꺼이꺼이 울 수는 없었다. ‘행정학원론’ 강의 중이었다. 교수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고위 공무원이 되어 이런저런 중요한 행정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행정학과 출신이다. 행정학과는 5급 공무원 공개경쟁채용 시험, 그러니까 행정고시(行政考試)에 붙겠다는 욕망으로 가득한 친구들이 주로 들어간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남들 하는 정도로 하면 정년을 보장하며 연봉도 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들어간다. 아니다. 나는 지금 행정학을 멸시하려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행정학원론 첫 수업부터 교수가 말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있는 것이다. 교수는 대뜸 칠판에 ‘복지부동(伏地不動)’이라는 단어부터 썼다. ‘땅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사자성어는 공무원 집단의 무사안일을 비판하는데 자주 쓰인다. 교수는 말했다. “복지부동만 하지 않으면 된다.” 고시에 붙은 친구들이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여튼 나는 행정학원론 강의 중에 ‘복지부동’하고 소설을 읽고 있었다. 아서 C. 클라크Arthur Charles Clarke가 1973년 발표한 『라마와의 랑데부(Rendezvous with Rama)』. 이 전설적인 소설의 무대는 22세기다. 50km가 넘는 길이의 원통형 외계 구조물이 태양계에 진입하고 사람들은 이를 ‘라마Rama’로 부른다. 이야기는 의외로 간단하다. 선발된 승무원들이 라마 내부로 진입해 구조를 조사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인간이 밝혀내는 것은 없다. 인간이 지닌 물리학 지식으로는 동력조차 설명할 수 없다. 결국 라마는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받자, 태양계를 떠나버린다. 라마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벅차올랐다. 인간이 인간 외의 존재와 랑데부를 하는 순간, 인간이 느낄 어마어마한 경이로움이 활자로 새겨져 있었다.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도 나는 라마에 있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라마에 있었다. 인간의 미래가 여기에 있는데 행정학원론 따위가 뭔 소용이람.

『라마와의 랑데부(Rendezvous with Rama)』아서 C. 클라크 지음,
박상준 옮김, 고려원미디어

그렇다고 내가 F를 받은 건 아니다. 행정학원론 시험 문제는 전반적으로 행정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러니까 행정에 대한 철학을 묻는 한 줄짜리 질문이었다. 나는 구체적인 강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온갖 영화나 문학 속 주인공의 이야기를 끌어와서 단편 소설에 가까운 소리를 시험지에 늘어놓고 나왔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에게 미안하지만) A를 받았다. 사실 나는 이때 눈치챈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허황된 글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말이다. 맞다. 나는 허황된 글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내가 다닌 마산의 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소학교로 시작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다만 1980년대 초반 치고는 설비가 지나칠 정도로 좋았다. 꽤 큰 동물들이 사는 동물원도 있었다. 가장 좋은 건 도서관이었다. 당시 초등학교치고는 공간도 넓고, 책도 많았다. 나는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는데, 거기서 ‘아이디어회관 세계 SF 전집’을 발견했다.

1970년대 발간한 아이디어회관 세계 SF 전집은 소년·소녀를 위한 한국 최초의 SF 시리즈였다. 모두 60권으로 이루어진 전집은 19세기 말 SF를 개척한 쥘 베른Jules Verne,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과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의 고전으로부터 20세기 초 출판 장르로서의 SF를 확립한 휴고 건즈백Hugo Gernsback, 앨프리드 엘튼 밴보트Alfred Elton van Vogt, E. E. 스미스Edward Elmer Smith와 에드거 라이스 버로우즈Edgar Rice Burroughs의 소설, 1950년대 이후 SF 황금기를 건설한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로버트 A. 하인라인Robert Anson Heinlein, 아서 C. 클라크의 대표작을 모두 포함한, 정말이지 놀라운 물건이다. 지금의 나는 그 전집이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SF를 번역한 일본에서 구한 일본어판의 중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때는 몰랐다. 1980년대는 그런 시대였다. 우리가 읽던 수많은 잡지 기사와 장르문학은 불법으로 일본어판을 중역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SF 불모지 한국에 사는 아이들에게 SF 고전을 소개한 출판사에 무한한 우주의 규모만큼 거대한 존경을 보내고 싶어질 따름이다.

『아이디어회관 세계 SF 전집』, 1970

아이디어회관 세계 SF 전집을 발견한 이후 내 인생은 바뀌었다. 과장법 아니냐고? 60권짜리 SF 중역본 전집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게 가능하냐고? 가능하다. 그게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문학, 나아가서는 예술이 지닌 힘을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소녀의 인생은 메리 셸리Mary Shelley,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와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ë를 발견하고 바뀌었을 것이다. 어떤 소년의 인생은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를 접하고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 소년은 아마도 노어노문학과를 선택한 뒤 모스크바에 유학을 가서 지금은 푸틴의 러시아 정책을 연구하는 머리 벗겨진 노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은? 뭐, 앞 문단에 따르자면 NASA 연구원을 거쳐 일론 머스크 밑에서 화성 탐사를 연구하는 스페이스X 직원이 되었어야 마땅하지만, 전형적인 문과인 내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행정학원론 수업 시간에 몰래 아서 C.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를 읽으며 눈물 훔치는 아주 비협조적인 대학생을 거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칼럼니스트 따위가 됐다. 하지만 이 또한 문학의 힘이 한 인간의 직업적 미래에 미미하게나마 어떤 효과를 발휘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인생의 전환’이라는 명제에 귀속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행정학원론 시간에 아서 C. 클라크의 걸작을 읽지 않고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나는 지금쯤 복지부동의 공무원으로서 훌륭한 이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90년대 중반은 SF 문학 애호가에게 꽤 즐거운 시절이었다. 이때 한국은 폭발적인 문화 해방기였다. SF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나경문화, 고려원, 현대정보문화사, 시공사 등의 출판사가 줄줄이 SF 걸작을 번역해서 소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미친 듯이 모든 번역본을 사 모았다. ‘빅 3’라고 불리는 세 명의 SF 작가인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 로버트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문학적 기적이었다. 물론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SF 문학에 딱히 관심이 없는 당신은 ‘지금 외계인의 지구 침공과 수천 년 미래의 우주 문명을 말하는 난삽한 외삽법적 예언에 무려 문학적 기적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살짝 짜증 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글을 읽는 SF 문학 애호가들은 이미 이런 소리를 인생 내내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을 것이다. 그러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면서 가장 정확한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그럴 땐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

왼쪽부터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Childhood s end』,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Foundation』, 로버트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The moon is
harsh mistress』

나는 어느 시점부터 SF 문학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SF 문학의 위대함을 설법하는 일을 멈추었다. 그들을 설득하는 일도 멈추었다. 순문학을 지나치게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장르문학 자체를 내심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장르문학 중에서도 SF 문학은 (그들 생각에) 문학적 카스트 제도에서 ‘달리트Dalit’, 그러니까 불가촉천민에 해당한다. 물론 그 심정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모든 SF 신도가 그들의 신전 가장 높은 곳에 모시고 있는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을 한번 생각해 보자. 갑자기 전 세계 모든 도시에 거대한 우주선이 나타나고, 외계인의 도움으로 인간이 새로운 진화 단계로 진입한다는 이야기를 순문학 애호가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하지만 내 생각에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베크Michel Houellebecq의 걸작 『소립자(Les Particules Élémentaires)』는 『유년기의 끝』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유년기의 끝』에 나오는 외계인의 존재를 멍청한 백인 남성의 섹스로 대체한 책이 『소립자』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은 또 어떤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저서 『로마제국 쇠망사』에 감명받아 써 내린 이 시리즈는 한 문명의 역사적 ‘사고실험’이라는 점에서 모든 교과서에 실릴 가치가 있다. 경제학자 우석훈은 『88만원 세대』에서 이렇게 밝혔다. 만약 『파운데이션』을 읽었다면 해당 책에서 한국 미래를 예측하는 챕터를 읽지 않아도 된다고. 나도 동의한다.

『파운데이션』시리즈,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황금가지

나는 이 글을 통해 SF 문학을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다. 솔직히 어떤 면에서 마니아의 경계 안에 SF 문학이 머무르는 게 더 낫다고도 생각한다. 그래야 내가 ‘이 재미를 모르는 슬픈 사람들’이라며 여러분을 계속해서 불쌍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을 불쌍해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테지만, 오덕의 기쁨은 원래 마음속 깊은 곳에만 머물러야 아름다운 법이다. 다만 나는 이 글을 ‘SF 문학 추천 10선’으로 마무리할 생각이다.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에 무게를 둔 ‘하드 SF’보다는 사회과학적 상상력에 보다 무게를 둔 ‘소프트 SF’를 중심으로 채운 리스트다. 비교적 읽어내기 쉬운 순서다. 40년을 SF 광인으로 살아온 너무나도 문과적인 인간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너, 내 동료가 돼라.”

뼛속 깊이 문과인 당신을 위한 SF 문학 10선

『여름으로 가는 문』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 김창규 옮김 | 아작
SF 거장 ‘빅 3’중 가장 재미있는 문장을 썼던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영화 〈빽 투 더 퓨쳐Back To The Future〉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즐거운 시간 여행물. 

『화성 연대기』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SF와 판타지 사이에서 거의 시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을 직조하는 거장의, 아마도 SF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단편 모음집.

『유년기의 끝』

아서 C. 클라크 지음 | 정영목 옮김 | 시공사

‘외계인과 인류 문명의 접촉’이라는, SF 문학의 가장 고전적인 서브 장르를 시작한 동시에 완성한 걸작.

『영원한 전쟁』

조 홀드먼 지음 | 김상훈 옮김 | 황금가지

베트남 전쟁을 비롯해 1960년대 이후 모든 현대전의 참혹한 아이러니를 품은, ‘전쟁 SF 문학’은 물론 모든 ‘전쟁 문학’의 절정.

『이상한 존』

올라프 스태플든 지음 | 김창규 옮김 | 오멜라스

『엑스맨』을 비롯한 모든 ‘탄압받는 초능력자’물의 문학적 기원. 1934년 출간했지만 메시지는 전혀 낡지 않았다.

『빼앗긴 자들』

어슐러 K. 르귄 지음 |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 두 행성의 차이를 통해 제도, 종교, 페미니즘 등 인류 역사의 모든 체제를 품어내는 놀라운 사고실험.

『파괴된 사나이』

앨프리드 베스터 지음 | 김선형 옮김 | 시공사

‘불꽃놀이’라고 불리는 현란한 문체로 미친 듯 달려가는 SF 범죄물의 찬란한 고전.

『유빅』

필립 K. 딕 지음 |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

할리우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 필립 K. 딕의 최고 걸작. 비범한 상상력, 절묘한 풍자, 종교적인 주제가 화산처럼 폭발한다.

『바벨 17』

새뮤얼 딜레이니 지음 |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

영화 〈스타워즈Star Wars〉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 장르와 ‘언어학, 기호학적 사고실험’의 융합. 맞다. 그런 게 가능하다. 

『쿼런틴』

그렉 이건 지음 | 김상훈 옮김 | 허블

양자역학을 소재로 필립 K. 딕 스타일의 첩보 SF 소설을 쓰는 일이 가능하다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 걸작은 조금 어려우니 앞의 아홉 작품을 모두 읽고 나서 도전하시라.

Writer

김도훈(@closer21)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결과(4)

Thank You for Subscription!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애티튜드»는 매주 금요일 아침 10시 1분, 창작자의 반짝이는 감각과 안목을 담은 소식을 메일함에 넣어드립니다.

결과(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