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부터 우리가 마주한 전율을 언어로 환원하려 할 때 비평가는 필연적인 패배를 예감합니다. 자신이 음악에서 마주한 감정과 느낌을 오롯이 표현하고자 애쓰지만, 정작 입술을 떼는 순간 선명했던 감각은 언어라는 촘촘한 그물망에 포착되지 못한 채 흩어져 버리죠. 음악이 지닌 이 ‘형언불가능성(Ineffability)’ 앞에서 비평은 무력함에 빠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대한은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실마리 삼아 음악에 관한 글쓰기가 마주한 곤혹스러움을 토로합니다. 신비의 베일에 싸인 것만 같은 음악을 명료하고 엄밀하게 말하기 위한 분투 혹은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균열을 내는 음악 글쓰기의 기묘한 상황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비록 음악이 여전히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필연적인 실패를 계속 마주하기를 거부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BE(ATTITUDE)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어떤 음악은 듣는 순간 우리 마음을 단숨에 무너뜨린다. 이어폰 너머로 첫 음이 가슴에 박히는 찰나 혹은 공연장의 거대한 스피커가 내는 진동이 피부를 떨리게 하는 순간, 그 음악이 주는 강렬한 감정과 정체 모를 느낌에 관해 우리는 무언가 말을 내뱉고 싶어 안달이 나곤 한다. 자신이 느낀 전율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욕구 혹은 적어도 그 경험의 내용을 휘발되지 않도록 박제하고 싶다는 갈망이 우리를 언어의 입구로 등을 떠민다.문제는 정작 음악으로부터 마주한 감정과 느낌을 말하기 위해 입술을 떼는 순간, 많은 사람의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점이다. 물론 자신이 마주한 감정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수준의 음악적 지식을 갖춘 수많은 청자조차도 자신이 들은 음악에 관해 말하거나 글을 써보라는 요구를 받으면 구체적인 단어나 개념을 잘 떠올리지 못한다.
물론 이 같은 상황이 음악에 관한 지식이나 훈련이 부족한 청자에게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험이 풍부한 감상자나 비평가, 연구자조차 이 같은 상황을 꽤 자주 마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히려 풍부한 배경지식을 갖춘 청자는 너무 많은 개념이나 어휘가 떠올라 들은 음악으로부터 마주한 감정이나 느낌을 어떻게 언어화해야 할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기도 한다. 음악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의 상황과 정반대로 너무 많은 개념과 단어가 떠올라서 자신의 음악적 경험을 말하거나 글을 적지 못한다는 것이다.
음악이 낳는 이 어려움을 음악의 ‘형언불가능성’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음악은 그에 관한 경험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히 우리의 일상적인음악 경험을 비추어 보면 음악의 형언불가능성을 부인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바로 이런 점에서 종종 음악에 관한 말하기 혹은 글쓰기가 ‘패배가 확정된 싸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음악에 관해 말하거나 글을 쓰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언어가 부족해서든, 너무 많아서든 우리는 음악에 관한 말하기와 글쓰기에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코 붙잡을 수 없는 모래를 한 움큼 손에 올려놓고 어떻게든 꽉 쥐어보려고 애쓰는 것만 같다.
역설적으로 나는 『논리-철학 논고』(이하 『논고』)의 저명한 구절,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문장에서 타개책을 발견한다. 이 문장은 흔히 ‘잘 모르면 입을 다물어라.’라는 세속적 훈계로 오독되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요구한 침묵은 사실 논리적 정직함을 향한 선언에 가깝다.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영역은 단순히 표현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언표 불가능하기에, 침묵이야말로 그 대상을 대하는 유일하고도 정직한 방법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논고』에 따르면 명료하게 말할 수 있는 영역은 오직 수학과 자연과학뿐이다. 그 외의 모든 것, 특히 예술이나 윤리와 같은 가치론의 영역은 언어라는 그물망으로 붙잡을 수 없는 ‘형언불가능한’ 대상이다.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Ludwig Wittgenstein, 1921(2025 ed.), Penguin Classics
이런 논의를 토대로 음악에 관한 글쓰기를 비추어 보면 무척 곤혹스러운 상황이 벌어진다. 앞서 보았듯 음악에 관한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온전히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다시 말해 ‘형언불가능한’ 대상인 음악에 관해 말하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나 자신을 포함해 음악에 관해 글을 쓰거나 말하는 사람은 침묵해야 하는 것과 관련해 자꾸만 헛소리를 늘어놓는 사기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악에 관해 말하고 글로 적는 일이 전부 부질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새로이 가볼 수 있는(그리고 스스로 가고 있는) 길을 마주한다. 바로 음악이 정말 ‘말할 수 없는 것’인지를 재고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으로 자리 잡게 하는 길이다. 다시 말해 형언불가능성이라는 신비의 베일에 싸인 음악을 최대한 과학과 형식 논리의 언어로 환원하고, 음악을 둘러싼 여러 문제의 객관적인 해답을 찾아보는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물론 이 길이 추구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사소한 요소에 강박적으로 천착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며 포기하기보다는 음악을 엄밀하고 명료하게 논하고자 분투하는 작업이 분명 값진 일이라 믿는다.
게다가 ‘음악에 관한 글쓰기’가 처한 특수성에도 일말의 기대를 건다. 잠시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로 돌아가 보자. 그의 말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하면, 우리는 어떤 대상이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둘을 가르는 ‘경계’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여기까지 말할 수 있구나.’ 하고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이미 언어와 경험이라는 말할 수 있는 것에 해당하는 영역 내부에 존재한다. 우리 자체가 이미 말할 수 있는 대상이기에 경계를 넘어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발을 디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음악에 관한 글쓰기는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보기 위해 그 경계에서 균열을 내는 시도다. 그리고 내가 기대를 품는 지점도 바로 이 지점이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음악이라는 형언불가능한 대상을 나름의 언어로 번역해 내려고 애쓰는 분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