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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현대미술 설명서: 30년 전 ‘그 전시’가 뭐길래

Writer: 박재용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얼마 전 ‘프리즈 서울Frieze Seoul’, 그 두 번째 행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작년 처음 시작할 때, 마치 올림픽 같은 대규모 국제행사를 유치한 듯 모두가 기뻐하던 (이상한) 광경이 눈에 선한데요. 현대미술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소중한 가이드, 박재용 님의 시선은 프리즈 서울을 넘어 멀고 먼 30년 전을 바라봤답니다. 그때 우리 조상님(?)은 미국에서 열린 ‘휘트니 비엔날레’를 한국에 들여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어나더 스케일’의 사고방식과 주체적인 태도로 급진적인 국제 미술 행사를 통째로 수입한 것인데요. 30년을 돌고 도는 묘한 데자뷔(Déjà Vu)에 관한 박재용 님의 단상을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전시에 출품한 작품 150여 점에서 그림은 10점도 채 되지 않았고, 참여 작가 82명 중에서도 회화 작가라 부를 만 한 사람은 8명뿐이었다. 게다가 그중 32명은 여성이었고, 유색 인종은 30명, 백인 남성은 1/3에 불과했다. 다수의 퀴어, 페미니스트 작가가 참여했으니 그야말로 ‘문화 다양성 잔치’라 할만했다. 더불어 꽤나 ‘젊은’ 전시이기도 했는데, 가장 어린 작가는 20살! 작가의 70%가 2030이었다. 82명 중 60명가량이 사실상 여기에서 미술계에 데뷔했다. 심지어 아티스트로 활동한 적도 없는 배관공이 캠코더로 촬영한 사건 현장의 기록 영상을 전시장에 놓으며,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는 이렇게 묘사했다. “미디어 아트를 공공 예술 형식으로 재정의하며, 다큐멘터리의 정의를 확장한다.” 요즘 종종 마주치는 국제 기획전이나 비엔날레의 풍경이 떠오르는 이 전시는 사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3년 3월 4일부터 6월 20일까지 열렸다. 최근 몇십 년의 미술사에서 잊을 만하면 소환돼 여전히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문제적 전시의 이름은 바로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 뉴욕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에서 주관하는 휘트니 비엔날레의 67번째 행사였다.

“김영삼 대통령 내일 세계화 회견”. 1995년 1월 5일 KBS 9시 뉴스.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브로슈어. 종일 진행한 작가와의 대화를 위해 점심 도시락 지참을 권하는 문구를 실었다. © 국립현대미술관

그해 휘트니 비엔날레를 관람한 많은 평론가는 영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일단 회화 작품의 부재가 여러 사람의 신경을 거슬렀다. 미술 전시에 그림이 없다니! “나는 이 전시가 싫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이가 있었는가 하면,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징징거림의 향연”이라는 말도 돌았다. 비엔날레가 열리기 직전인 1993년 1월 말, 빌 클린턴Bill Clinton이 제42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는데, 어떤 사람은 인종과 정체성이 다양한 비엔날레의 작가 구성을 두고 “문화 다양성(cultural diversity)”을 강조하며 인종과 성비를 맞춘 클린턴의 “진짜 미국처럼 보이는 내각(a government that looks like America)”처럼 보인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이런 비판에 화답할 준비라도 한 듯,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는 백인 여성 둘, 백인 남성 하나, 흑인 여성 한 명이 큐레이팅을 맡았다. 특이사항은 여러모로 더 있었다. (이 글을 작성하는 2023년에는 흔한 ‘공식’처럼 자리 잡은 느낌이지만) 이 전시는 미술관 외부에서 큐레이터를 초빙하는 모험(!)을 했고, 도록 필자로는 (탈식민주의 연구자로 널리 알려진) 호미 K. 바바Homi K. Bhabha 등 큐레이터가 아닌 학자, 연구자 등을 초빙하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고, 심지어 갓 관장으로 취임한 데이비드 A. 로스David A. Ross는 비엔날레 도록 첫 글에 ‘Know thyself (know your place)’이란 야심 찬 제목을 붙였다. 마치 주요 관람객인 미국인을 향해 ‘너 자신을 알고, 네가 처한 곳을 알라’고 말하듯 말이다.

1937년 휘트니 미술관의 연례 ‘미국 미술’ 전시로 시작해 1973년부터 격년으로 열리는 비엔날레 형식으로 전환한 휘트니 비엔날레가 (미국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렇게나 ‘미국적이었던’ 순간은 없었다. 사실 휘트니 비엔날레는 그 역사가 거의 60년에 이른 1993년까지도 ‘미국의 미술’을 보여준다는 목적에 대해 그다지 깊은 고민을 거의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술을 주도하는 주체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의 찬란한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생각해 보자. 유럽 미술에 대한 미국 미술의 승리를 보여주는 증거 혹은 미술의 최종 진화 단계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겨지던 추상표현주의 미술은 백인 남성을 제외한 아티스트에게 도무지 낄 자리를 주지 않았다. 백인 남성이라는 정체성에 들어맞지 않는 아티스트는 심지어 추상적인 작품을 그리더라도 흑인 정체성이나 여성과는 관련 없이 (백인 남성에게는 누구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은) 보편성에 호소하는 작품이라고 항변해야만 했다. 이처럼 다양한 인종과 정체성으로 부글부글 끓어 넘칠 것 같지만 백인, 남성의 목소리만 울려 퍼지는 미국을 사람들은 ‘용광로(melting pot)’라고 불렀다.

«Guerilla Girls Review the Whitney» (1987, The Clocktower, New York) 전시 출품작.
1973년부터 1987년까지 비엔날레에 참여한 작가의 젠더 불균형을 도표로 시각화했다.

1992년 일어난 LA 폭동은 이런 ‘용광로’에서 쇳물이 넘치며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보여줬다. ‘문화 다양성’을 의제로 삼은 클린턴 정부는 이런 맥락에서 임기를 시작했고 (클린턴은 연임에 성공하며 총 8년간 재임했다), 전에 본 적 없던 (그래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 역시 당대 사회 분위기를 바탕으로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정체성의 작가들을 보여주기 위해 꽤 노력했고, 설치와 영상 등 새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역시나 자주 보이지 않던 형식의 작품을 많이 포함했다. 심지어 ‘미술’이라고 불러야 할지 토론이 필요한 대상까지 작품으로 제시했다. 시카고에서 배관공으로 일하던 죠지 홀리데이George Holliday가 한밤중에 들린 소란스러운 헬리콥터 소리로 잠에서 깨어 홈비디오를 찍듯 창밖 광경을 촬영한 10분 길이의 영상을 ‹로드니 킹 구타 사건의 비디오 테이프(George Holliday’s Video Tape of Rodney King Beating)›(1991)이라는 제목의 ‘미디어 아트’로 감상할 수 있었다. 이는 (비엔날레에 “그림이 없다”고 불평한 평론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현대미술을 보는 관람객이 앞으로 수없이 마주할 ‘동시대적’ 미술 전시의 방향과 형식을 예고하는 듯한 제스처였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의 K타운에서 일어난 폭동을 회고하는 2019년의 MBC 뉴스. 1991년 과속으로 적발된 아프리카계 미국 시민 로드니킹을 LA 경찰 소속 백인 경찰관 네 명이 집단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이듬해 무죄를 선고 받자 촉발한 이 폭동으로 63명이 목숨을 잃고 2400여 명이 다쳤으며, 1만 2000명이 넘는 시민이 체포되었다.

수면 아래서 끓어오르던 작가들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선보이며 ‘가장 많이 비난받았고 동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시로 남은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는 (전시가 열린 미국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반전이 있다. 폐막 직후인 1993년 7월 31일부터 9월 8일까지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현 과천관)에서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이제 80년이 넘은 휘트니 비엔날레 사상 해외로 전시를 옮겨 다시 치른 적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미국미술을 보여준다는 목적에서 시작한) 휘트니 비엔날레를 머나먼 한국 땅으로 가져와 선보인 걸까?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전시 포스터. 가족 구성원 4명이 나체 상태로 손잡고 있는 찰스 레이Charles Ray의 ‹패밀리 로맨스Family Romance› 작품 이미지에서 성기와 유방을 절묘하게 가렸다.

“나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기존의 것을 물어뜯고 소화할 수 있는 강한 이빨을 주고 싶다. 우리도 젊은 시절에는 노인네 말을 잘 안 들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폐해가 선생이 학파를 만들고 조수를 만들면 그 조수가 또 조수를 만들고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좋은 의미의 하극상이 없다. 그렇게 되면 예술에서는 발전이 없게 된다.” – «경향신문» 1993년 8월 25일 자 「나의 삶 나의 생각」 – 백남준 비디오 아티스트 “예술엔 「건전한 하극상」 필요„

휘트니 비엔날레의 한국행은 백남준(1932-2006)의 주선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진짜 한국의 젊은 아티스트에게 “강한 이빨”을 주고 싶었던 것인지, 백남준은 총 전시 예산 65만 달러(지금 화폐 가치로 약 10억 원) 중 15만 달러를 자기가 직접 부담했다. 그럼에도 예산 확보는 쉽지 않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상위 기관인 당시 문화체육부에서 ‘전시 수입’에는 예산 지원을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에, 예산 대부분은 포스터에서 이름이 보이는 협찬사의 도움에 크게 기댔다. 이런 대규모 기업 후원은 1993년 당시 매우 드문 일이었다. (놀랍게도 수십 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우리는 좀 더 전폭적인 기업의 미술관 전시 지원을 목격하는 중이다.) 한편, 65만 달러의 예산 중 전시를 한국으로 옮기는 데 쓰인 돈은 실제 30만 달러였다. 나머지 35만 달러는 휘트니 미술관에 지급하는 일종의 사례비로 쓰였다.

통역사로 보이는 직원과 데이비드 로스 휘트니 미술관장,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의 모습. 벽에는 김영삼 대통령 사진과 국정 과제를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았다.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한 민간인 출신 첫 번째 대통령 시대가 열렸지만, 아직 권위주의 시대의 문화가 남아있는 걸 엿볼 수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연구센터

휘트니 미술관은 전시의 원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으로 직원을 급파했다. 안전 장비 없이 비계 위에 서 있는 한국인 남성 노동자, 1990년대 옷차림의 여성 큐레이터, 휘트니 미술관 백인 남성 직원의 뒷모습이 만드는 앙상블이 절묘하다. ©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연구센터

미국의 관람객과 평론가마저 혼란에 빠트린 논란의 전시는 어떻게 한국에 ‘직수입’될 수 있었을까? 그저 백남준이라는 걸출한 작가 한 명이 본인의 명성과 친분을 활용해 추진하기에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은 규모가 너무나 큰 전시였고, 오너가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립 미술관이 아니라 한국에서 가장 큰 공공 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시를 구성한 주체 간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덕분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무엇보다,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은 휘트니 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두 기관에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관장 두 명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 꽤나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휘트니 미술관장 데이비드 로스는 사상 최초로 휘트니 비엔날레를 수출하며 본국에서 치른 비엔날레 예산의 절반을 단번에 확보했다. 한국과의 인연은 그가 7년 뒤 아트선재센터에서 기획한 전시 «코리아메리카코리아»(2000)로 이어지기도 했다.
  •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취임한 임영방은 참여 작가가 거의 900명에 달해 학연, 지연, 인맥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게 불가능한 «현대미술초대전»을 폐지하는 등 미술관 쇄신에 힘을 쏟았다. 이런 와중에 오랜 군사독재정권의 종식을 선선하며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화’를 원했고, 대전에서는 1993 대전 엑스포가 열렸다. (대전 엑스포의 관람객 수는 조직위 추산 약 1400만명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짧은 기간에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국제적인 프로젝트 아니었을까.

재닌 안토니Janine Antoni의 퍼포먼스 ‹사람의 보살핌(Loving Care)›(1992)를 관람하는 오프닝 방문객들.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퍼포먼스 관람객의 모습은 그리 다를 바 없는 것 같지만, 두 손을 모으고 관람할 정도로 다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듯 보인다. ©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연구센터

“건전한 하극상”과 “강한 이빨”이라는 인상적인 비유를 남긴 백남준과 휘트니 미술관의 행정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도맡은 이용우(1952-)가 이 전시를 통해 어떤 고민을 해결했는지 공식적으로 알 길은 없다. 혹여 수십 년에 걸친 기나긴 군사 독재가 끝나고 문화적으로 꿈틀대던 한국 문화예술계에 일대 혁신을 꿈꿨던 걸까? 불과 2년 후인 1995년 개막한 제1회 광주비엔날레 개최를 위한 조직위원회에서 이용우와 백남준은 각각 전시기획실장과 «정보예술(Info ART)» 전시 감독을 맡았다. 임영방 관장은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들의 진정한 바람이 무엇이었든,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이 미술계와 일반 관객에게 미친 영향이 실로 엄청났다는 사실은 잘 알 수 있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한 달 남짓 진행한 이 전시에는 15만 4000명에 달하는 엄청난 관람객이 다녀갔다. 미술관에서 열린 이 색다른 ‘직수입’ 대관 전시는 동시대적 큐레이팅이 깊게 반영됐다는 측면에서 분명 대중이 보기에도 꽤나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 전시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뉴욕에서 백인 남성 평론가들이 내뱉은 불평과는 결이 달랐지만.) 임영방 관장은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을 유치했다는 이유로 꽤 오랫동안 문화 식민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당시 미술대학에서는 휘트니 전시에서 큰 충격을 받아 고리타분한 수업 방식에 반기를 드는 학생들이 나타났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만난 영상이나 설치, 퍼포먼스 작품들은 ‘조각-공예-서예’, ‘한국화-양화’로 장르를 나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매년 치루던 «현대미술초대전»에서 감히 접하기 힘든 ‘새로운 무엇’이었다. 심지어 이 전시를 관람한 작가 여럿이 뉴미디어 아트로 작업 방향을 돌렸다는 후문도 도시 전설처럼 전해진다. 필자 주변에는 당시 어린이 관람객으로 이 전시를 접한 후 ‘현대미술’을 창작하는 미술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작가도 있다. 무엇보다, 정치적인 성격의 작품으로 가득한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사실상 처음으로 정치색 짙은 전시를 선보인 자리이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태어난 정치적인 미술은 이듬해 «민중미술 15년 : 1980~1994»(1994)를 통해 비로소 국립현대미술관에 입성한다.)

대중에 전시를 공개하기 바로 전날, 나체 상태로 성기를 노출한 마네킹 작업을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인 채 바라보는 오프닝 참석자들의 모습. 특히 왼쪽과 오른쪽 끝에 선 남성 관객의 혼란스러운 표정에 주목해보자. ©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연구센터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은 ‘한국 최초’ 기록을 여러 가지 남겼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시가 끝날 때까지 매일 40분 간격으로 오가는 셔틀버스를 사당역에서 운행했다. 인턴십과 도슨트 제도가 공식적으로 없던 당시, 이 전시를 위해 인턴을 채용하고, 미술 이론을 전공한 대학원생을 도슨트로 활용하기도 했다. 부족한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거액을 후원받은 결과인지, 전시 도록에는 총 세 페이지에 걸쳐 총천연색으로 후원사 광고를 실었다.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의 유치와 진행 과정은 한국형 블록버스터 전시의 모체로 보이기도 한다. 미술관 내부 문서에 따르면 이 전시의 기대 효과로 클린턴 대통령의 전시 방문을 들기도 했는데, 이는 블록버스터 전시의 특징 중 하나인 다소 과장된 홍보와 비슷한 감이 있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한은 전시 개막에 앞서 7월 중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진행됐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1993년 봄날의 뉴욕에서 열린 휘트니 비엔날레와 이를 한국에서 선보인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을 동일한 전시로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당연히 ‘아니오’일 것이다. 일단 전시장 상황부터 무척 달랐다. 휘트니 미술관은 맨해튼 어퍼 이스트에서 매디슨 애비뉴와 75번가가 교차하는 부산스러운 길모퉁이에 있었고, 국립현대미술관은 사당역에서 셔틀버스를 제공한다고 홍보해야 할 만큼 서울에서 접근성이 떨어졌다. 휘트니 미술관 입구 코앞에는 찰스 레이의 거대한 장난감 소방차를 덩그러니 놓을 수 있었지만, 과천관은 어린이 대공원을 지나고서도 권위적인 대리석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비로소 입구가 나왔다. 미국에서의 휘트니 비엔날레가 ‘지금, 여기’를 외치겠다는 결기를 품었다면, 과천 휘트니 전시는 일상에서 유리된 먼 장소에서 치루는 특수한 행사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외국에서 온 대단하고 새로운, 하지만 뭔지 깊게는 알기 힘든 어떤 ‘볼거리’였달까.

찰스 레이, ‹Firetruck›, 1993. 장난감 소방차를 실물 크기로 확대한 이 거대한 설치 작업은 운송 문제로 인해 서울 전시에서 제외됐다. © Charles Ray. Courtesy of Matthew Marks Gallery.

무엇보다,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의 미국판 ‘원본’과 한국판 ‘번안본’ 전시는 참여 작가와 전시 작품에서 차이를 컸다. 뉴욕에서는 아티스트 82명의 작품 150점을 전시했지만, 한국에서는 아티스트 61명의 작품 107점을 전시했다. 참여 작가와 작품이 각각 25%, 33%가량 줄었다. 작가와 작품을 솎아낸 기준 역시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일단 운송 문제가 걸렸다. 뉴욕에서 전시를 마친 뒤 한 달을 갓 넘긴 시점에 머나먼 한국으로 전시를 그대로 가져가는 건 오늘날에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찰스 레이의 거대한 장난감 트럭 설치 작업 등은 결코 한국으로 가져올 수 없었을 게다. 전시 후원사인 아시아나 항공에서 작품 운송비를 대폭 할인해 주지 않았다면 작품 수가 더 줄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국민 정서상 보여주기 힘든 작업 또한 한국 전시에서 스리슬쩍 제외됐다.

예컨대 알려지지 않은 신인 작가 위주로 구성한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신디 셔먼Cindy Sherman은 그나마 한국 관람객이 그 이름만 봐도 알아차릴 만한 거의 유일한 유명 작가였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측의 강력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에서 셔먼의 작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작가가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의 도판으로 대신해도 충분할 듯싶다. (미국판 도록은 작가의 약력과 함께 바로 위의 도판을 수록했다.) 한국적인 정서를 고려해 제외한 작가나 작품은 인종이나 젠더 문제를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바바라 해머Barbara Hammer가 사랑을 나누는 네 쌍의 퀴어를 기록한 ‹나이트레이트 키스Niterate Kisses)›(1992)는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도록에 실렸으나 전시 안내 브로슈어에는 없다. 아마 도록 인쇄에 들어간 후 전시 오프닝 전에 상영을 황급히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

신디 셔먼, ‹Untitled #264›, 1992. Courtesy of the artist and Metro Pictures, New York.

이처럼 대폭적인 ‘현지화’ 과정을 거쳤지만, 전시 시작에 앞서 열린 언론 회견장에서 로스 관장은 “이 전시 주제가 동성애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그는 동성애는 전시의 주제가 아니며, 정체성의 표현이라는 더 넓은 주제의 일부일 뿐이라고 친절히 설명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첨예한 문제였던 인종과 젠더 정체성 등을 다루며 논란을 일으킨 작품들이 막상 같은 시각 한국의 관객에게 잘 전달되었는지는 미지수다. 어떻게 번역해서 의미를 전달해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 작품은 전시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미술관 관람객에게 “백인이 되고 싶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문구가 들어간 입장 배지를 나눠준 다니엘 마르티네즈의 작품이 그랬다. 이 작품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이 생전 달아본 적 없는 입장 배지를 만들어야 하고, 영어 문구를 기가 막힌 센스로 국문으로 옮겨야 할 것이며, 백인이 되고 싶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문구가 왜 유의미한 것인지 설명하는 긴 글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전시 주최 측의 결정은… 해당 작가와 작품을 서울 전시에서 제외하는 것이었다.

다니엘 마르티네즈Daniel J. Martinez는 ‹뮤지엄 태그Museum Tag›라는 제목으로 휘트니 미술관 입장 배지를 만들었다. 관람객은 백인이 되고 싶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I CAN T IMAGINE EVER WANTING TO BE WHITE) 는 문장을 달고 미술관을 활보했다.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이 이런 작품을 봐야 할 만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권리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다며 불쾌함을 표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Courtesy of the artist and Robert Projects, Los Angeles.

그러니까, 미국인조차 ‘이 많은 텍스트를 어떻게 다 읽어가며 작품을 보라는 것이냐’고 항의했던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는 애초부터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이식’하기 쉽지 않은 전시였다. 오늘날 현대미술 전시를 보다가 작품도 텍스트 범벅, 작품을 설명하는 텍스트도 길어서 힘들다 싶으면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이런 광경을 거의 처음 마주했을 관객을 한번 떠올려 보아도 좋겠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전시의 한국판인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에는 ‘해석’을 위한 텍스트가 거의 전무했다. 이를테면, 길게는 두 시간에 달하는 영화를 상영하면서 자막을 제공하지 않았다. (대신 한국어로 내용을 요약해 제공… 하지도 않았다.) 번역하기 난감한 여러 작품을 전시에서 제외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역설적인 일인데, 일단 운송 문제로 가져오기 어렵거나 내용이나 맥락상 전시하기 어려운 작품과 달리, 영화의 경우 필름만 가져오면 되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전시에 포함했던 건 아닐지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잊기 힘든 오역이 출현하기도 했다.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든 작품 제목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정책을 취했는데, 그 과정에서 지미 더햄Jimmie Durham의 작품 ‹Chastity Belt›는 ‘정조대’가 아닌 ‘순수 벨트Sun-su belt’로 뒤바뀌었다. 누가 번역했는지 알 길 없는 이런 아찔한 오역은 전시 전반에 퍼져 있었다. 작품명 ‹무제›는 오역에서 쉽게 벗어난다는 점에서 매우 다행이었다. 1000부 한정으로 발간한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도록은, 그렇다면, 한국인 입장에서 도무지 어려운 작업을 편안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까? 미국판 도록과 한국판 도록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호미 바바, 코코 푸스코Coco Fusco 등 미술관 외부의 이론가와 작가에게 요청해 수록한 글이 쏙 빠졌다는 것이다. 그 빈 자리에는 문화체육부 장관과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인사말, 한국 측 전시 조직을 맡은 미술평론가 이용우,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최태만, (아마도 미술관 최초의) 객원 큐레이터 김선정이 쓴 에세이가 들어갔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텍스트’와 ‘의미’가 과다하다고 비판받은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 한국에 수입 혹은 이식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번역과 자막이 사라지면서 외려 순수하게 시각적인 결과물에 집중하며 감상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오독과 오해를 증폭하며 정체성과 경계라는 첨예한 의제가 ‘동성애 전시’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작업을 접한 관람객은 환호했고 미술학도와 작가들은 기존의 수업을 거부하거나 작업 장르를 바꿀 만큼 신선한 자극을 얻었다. 휘트니 미술관은 한국에서 선보인 이 ‘복제판’ 전시에서 어떻게든 원본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좋게 말하면 역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혼란스러운) 해당 전시는 원래 의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1986년 개관 후 공간 협찬이나 다를 바 없는 전시로 프로그램의 일부를 채우던 국립현대미술관이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을 통해 군사정권 이후 진정 민주적으로 선출된 문민정부의 국정 과제인 ‘세계화’에 발맞추었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전시를 이해하는 데 정말 중요한 에세이는 쏙 빼놓고 국문 도록을 만든 결정이 옳았는지 따지는 것도 별 의미 없다. 미국에서는 작품 장르를 구분하지 않았는데, 굳이 한국 전시에서만 시각 예술, 비디오, 영화로 구분하며 작품을 선보인 사실도 그리 중요치 않다. 백남준이라는 독특한 작가의 진의를 알 수 없는 욕망이나 이용우라는 탁월한 조력자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십만 달러의 자금을 조성해 이 전시를 한국에 왜 굳이 들여오려 했는지, 그리고 목적을 실현했는지는 큰 상관이 없다. 1993년 여름 15만 4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아 생전 본 적 없는 종류의 ‘현대미술’을 두 눈으로 보며 적절한 번역이나 해설이 없는 상태로 자기만의 오해를 품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점이 우리에게 남은 팩트니까.

‘원본성’ 유지를 위해 한국까지 온 휘트니 미술관 직원들. ©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연구센터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이 열린 지 정확히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한번 ‘좋게 말하면 역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혼란스러운’ 상황을 목도 중이다. 기록에 남은 몇몇 개인이 주요 플레이어가 되어 혁신을 시도했던 30년 전과 달리, 이번에는 그 상황이 좀 더 복잡하다. 당시 ‘선진국’ 문턱에 들어서기 위해 미술계마저 ‘세계화’를 외쳤다면, 지금은 주변 국가의 정치적 변화와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적 지위 상승, 지난 몇 년간 전 세계에 흘러넘친 유동 자산이 갈 곳을 찾는 가운데 다시 한번 맞이한 미술 시장의 호황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뒤섞여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정조대’를 ‘순수 벨트’로 오역하는 일은 더 이상 없겠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이 한국에 직수입되었을 때보다 더 복잡한 오해와 오역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마치 K팝처럼) 외부에서 수용한 새로운 것에 대한 오해와 오역, 그로 인한 파괴적 창조(?)야말로 한국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유치 과정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은 비엔날레 번외 격으로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의 주제라 할 수 있는) ‘경계’에 관한 전시를 열 명의 한국 작가와 함께 진행하길 제안했지만, 전시의 원본성을 지키고 싶었던 휘트니 미술관은 차갑게 거절했다. 그런데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전시 조직의 주축으로 활약했던 이들은 다시 한번 모여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열었다. 당돌하게도 전시 주제는 ‘경계를 넘어’였고, 한국 작가 열 명이 아니라 전 세계 49개국에서 초청한 87명의 작가를 선보였다. 인종과 젠더처럼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가 다룬 정체성이 제1회 광주비엔날레의 핵심은 아니었다. 도리어 광주비엔날레는 “국가, 민족, 이념, 종교 등을 초월하여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세계와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의미와 함께 예술을 포함한 각 개인의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통한 창조적 세계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제안했다.

만약 이 글을 통해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소동을 처음 알게 되었다면, 혹시 바로 지금 한국 미술계 안팎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에서 30년 전의 기시감이 느껴지지는 않는지 살펴보길 바란다. 2023년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각자 의도하는 바와는 달리 오해와 오역이 난무하고 뜻하지 않은 창조적 파괴가 새로운 사건으로 이어지는 상황 한 가운데 서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창조란 때론 지독한 오역과 오독, 오해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니까!

추신

이번 글의 시각적인 완성도를 위해서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연구센터가 제공한 귀중한 사진 자료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예술연구센터에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센터 내 미술아카이브(@mmca_archive) 자료는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검색한 후 현장에서 직접 열람할 수 있다.

이 전시를 가장 순수하게 즐긴 주인공은 당시 한국의 어린이 관객이었을 것이다. 사진 속 두 어린이는 이날 어린이대공원을 지나 국립현대미술관에 도착해 머물면서 난생처음 느끼는 신선한 자극을 받았고, 나중에 커서 (동시대를 다루는) 예술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2023년 현재 그들은 미술계와 더 넓은 동시대 예술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늠름하고 당돌한 왼쪽 남자아이는 김다움 작가, 이지적인 눈빛의 오른쪽 어린이는 김보람 작가다. 사진 속 성인 여성은 그들에게 현대 미술의 세계를 열어준 두 사람의 어머니다. 사진 제공: 김다움(@daum_kim)

Writer

박재용(@publicly.jaeyong)은 현대미술서가 서울리딩룸 (@seoulreadingroom)의 장서광이자, 뉴오피스(@new0ffice)에서 일한다. 큐레이터이자 통번역가, 연구자, 교육자이며, 허영균과 함께 리서치 밴드 NHRB(@NHRB.space)의 프론트맨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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