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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생각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

Writer: 허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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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비애티튜드» 편집부에는 가끔 깜짝선물이 도착하곤 합니다. 바로 책입니다. 크리에이티브 업계에서 일하는 분들이 흔쾌히 보내주시는 신간은 굉장히 뜻깊어요. 본업 하기에도 하루하루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 명징한 문자 언어로 생각을 정리하는 행위가 마법처럼 다가오거든요. 아모레퍼시픽에서 크리에이티브센터를 이끄는 허정원 님의 『생각의 공간–창의성이라는 욕구를 다루는 법』이 얼마 전 책상에 도착해서 상큼한 라임색 커버를 넘기며 스르륵 읽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생각했어요. ‘아, 이걸 나만 읽는 건 좀 반칙 아닌가?’ «비애티튜드»를 찾는 독자들과 인사이트를 나누고 싶은 욕망이 샘솟더군요. 저자와 상의한 끝에, 몇 번이고 곱씹고 싶은 에세이 세 편을 골라 소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요즈음 가장 만족스러운 탈취(?) 중 하나인데요. 정원 님의 ‘생각의 공간’에서 뛰어놀던 친구들을 아티클에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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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아주 큰 공간으로 말이다. 자그마한 머릿속에 제멋대로 들어와 버린 생각들이 이리저리 날뛰다 뒤엉키고 벽과 천장에 부딪히며 게이지를 소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종일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의 공간’은 상상가능한 가장 넓은 공간으로 하자. 애당초 그 공간을 정리 정돈 할 마음은 없다. 어차피 생각의 공간은 어질러질 수밖에 없고, 한없이 어질러져도 괜찮은 유일한 공간이니까. 이렇게 상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어떤 생각이든 눈치 보지 않고 들어와서 마음껏 휘저으며 뛰놀고 에너지를 발산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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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Ludens by Katrin Korfmann

모든 생각은 자신을 ‘생각’이라 소개하지만, 대부분은 언어라는 탈을 쓰고 나타나는 ‘욕구’다. 생각이라 여기면 어렵고 머릿속이 복잡해지다가도, 욕구는 어쩔 수 없으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욕구는 심플하다. 발생한 크기만큼 에너지를 발산해야 한다.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창의성 또한 호기심과 상상력이 의기투합하여 만들어진 욕구가 아닐까 한다. 그 욕구가 생겨나면 자연스럽게 에너지를 발하게 된다. 그러니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 배우고 갈고닦으려 노력하기보다는, 자극받고 느끼면서 즐기고 상상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발상 역시 생각의 공간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생각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생각의 공간’에서 ‘창의성이라는 욕구를 다루는 법’은 이야기 나눠볼 거리가 된다.

스마트와 크리에이티브

“요즘 스마트한 사람은 많은데, 크리에이티브가 약하지? 크리에이티브를 더해주고 싶어.” 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호기심이 생기는 물음이다. 그 친구에게 ‘크리에이티브’란 단어의 이미지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스마트하다’는 표현을 짚고 넘어가자. 이는 칭찬임에 틀림없다. 누군가로부터 “스마트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정말 기분이 좋을 듯하다. 뭐랄까, 상당히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칭찬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하다’는 똑똑하다, 깔끔하다, 단정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세련되다, 활기차다, 자신감이 넘친다 등과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줄줄이 끌어들인다. 친구는 이토록 듣기 좋은 ‘스마트하다’는 칭찬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요즘 많다고 한다. 그런데 뭔가가 아쉽다면서, 크리에이티브를 더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흘려들을 수도 있었지만,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는 친구가 내뱉은 말인 데다, 크리에이티브 관련 일을 하는 나로서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스마트와 비교해서 떠올릴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의 속성은 발상과 시도에 대한 용기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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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하다’는 똑똑하다, 깔끔하다, 단정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세련되다, 활기차다, 자신감이 넘친다 등과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줄줄이 끌어들인다.

‘크리에이티브하다’라는 말은 먼저 감각적이다, 호기심이 풍부하다, 사고가 자유롭다 등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데, 그에 못지않게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에이티브는 결과에 대한 언어가 아니다. 무언가를 새롭게 또는 다르게 떠올려보는 딱 그 ‘과정’에 대한 언어이다. 그리고 떠오른 그 무언가를 드러내고 표현했을 때 비로소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어떡하지.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르기는 했는데, 상당히 별로일 수 있다.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봐도 좋다. 생각은 기억과 자극을 매개로 제멋대로 흘러왔다 흘러갈 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을지는, 떠오른 생각에게는 관심사가 아니다. 그 생각을 표현할지 여부는 결국 자기 검열로 결정된다. 검열 과정에서 수많은 아이디어와 생각이 탈락한다. 검열 능력이 뛰어나 떠오르는 생각들을 요리조리 잘 정제해서 내보내면 스마트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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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하다’라는 말은 먼저 감각적이다, 호기심이 풍부하다, 사고가 자유롭다 등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데, 그에 못지않게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스마트한 사람은 운 좋게도 뇌 용량이 크고 처리 속도가 빠른 게 아닐까 싶다. 이들은 맥락 없고 허무맹랑하다는 판단, 제대로 전달되지도 이해되지도 않을 가능성, 논리의 부적합성과 불충분성에 대해 공격받을 확률, 자신의 이미지가 입을 타격 등을 이유로 많은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다. 자기방어 기제가 펼치는 순기능인 셈이다. 대단한 능력이다. 그에 반해, 자기 검열의 확고한 기능에 기대기보다, 불확실성을 안고서라도 표현하고 드러내는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 크리에이티브가 아닐까 싶다. 스마트한 의견을 말하면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빈틈없이 명료하게 전달되기 때문에, 감정적 동의와는 별개로(궁극의 스마트함은 감정 케어까지 담고 있겠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 크리에이티브한 의견에는 자기 생각을 덧붙이고 싶어 한다. 상상력을 자극받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과학자도 충분히 크리에이티브하다. 기본 원리를 새로운 분야에 적용하거나 실용성을 높이는 응용 과학 분야는 물론, 기본 원리 자체를 탐구하는 이론 과학 분야의 과학자 모두 크리에이티브한 태도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론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 제시된다. 우연한 발견에서 번뜩이는 통찰이 불현듯 떠올랐다는 유명한 사례들도 있지만, 대체로는 오랜 시간 수많은 과학자의 추가 검증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결과로, 과학자가 처음 주장했던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새로운 가설은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관찰 결과를 놓고, 이런 원리이지 않을까, 저런 개념을 도입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다양한 생각이 연결되며 세워진다(고 생각한다). 자체 실험을 통해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획득했다 하더라도, 하나의 실험일 뿐이다. 새롭게 발표된 이론은 수많은 과학자의 또 다른 실험에서 검증 대상이 되며, 언제든 부정될 수 있다.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이론일수록 많은 과학자의 관심과 의심을 사고, 더 많은 검증과 반대 이론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이런 과정에 익숙한 과학자들이라도 여전히 새로운 이론을 제시할 때는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지금까지 없었던 발상과 함께 용기를 발휘하는 순간이 수반된다. 그 과정이 크리에이티브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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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설이 과학적 진실로 받아들여지던 시대, 그래도 지구는 돈다’며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당연한 명제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크리에이티브가 아닐까?

앞서 크리에이티브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한 언어라고 했지만, 그 언어가 가진 뜻에는 ‘창의적’이라는 상태뿐만 아니라 ‘창의적 결과물’도 포함된다. ‘생각 끊기 연습’과 같은 발상 또한 이에 해당할 것이다. 충북 단양에서 농부로 지내고 계신 분이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제시한 생각 끊기 연습의 원리는 간단하다. 2초간 생각을 끊어보는 것이다. ‘에계계~’ 할 수도 있지만, 에너지가 거의 소모되지 않는 심플한 방식으로도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되는 경험을 했다. 그 개념을 (내가 이해한 대로) 간략히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해라, 저런 생각을 되도록 하지 말라’는 말들이 있지만, 가만 보면 생각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생각을 할지 안 할지 결정할 수 없고, 그저 아주 잠깐인 2초간 생각을 퍼즈pause, 즉 일시 정지해볼 뿐이다. (stop은 아니다. 이는 불가능하니까.) 그러면 과열된 엔진이 잠시 멈춘 뒤 정상적으로 작동하듯, 생각이 살짝 정리된다. 물론 깊은 감정을 수반한 생각은 2초 만에 정리되거나 사라질 리 없다. 그래도 괜찮다. 생각은 원래 그런 거니까.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생각이 잠시 끊기는 찰나에 느끼는 안도와 안심이 쌓이면서 뇌가 그 효용성에 반응한다. 즉 과열될 즈음에 잠시 멈추는 패턴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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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초간 생각을 끊어본다는 발상을 처음 접했을 때, 반신반의하면서도 크리에이티브하다고 여겼다. 생각의 흐름에 관여해 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라는 불교 사상에 기반한 수행법이지만, 종교적 믿음과 무관하게 생활 습관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나도 거리를 걷거나, 앉아 있거나, 심지어 회의를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실행해 보면서 효용성을 경험했다. (2초간 생각을 끊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그러니 머릿속이 복잡해 어지럼증을 느끼는 분에게 추천한다. 물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Relaxed,African,American,Businessman,Meditating,In,Office,,Practicing,Yoga,At

당연한 말이지만, 창의성은 디자이너의 전유물이 아니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뛰어난 감각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감각 자체를 창의성이라고 오해하지 않으면 좋겠다. 창의성은 사고와 태도에 대한 영역이기에 모두에게 열려 있다. 창의성은 디자인이라는 영역에서 멋지고 매력적인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하지만, 감각의 영역에 갇히지 않는 훨씬 방대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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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은 디자인이라는 영역에서 멋지고 매력적인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하지만, 감각의 영역에 갇히지 않는 훨씬 방대한 개념이다.

소비자, 사용자, 고객, 타깃

디자이너들에게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니, 적확한 단어를 잘 써야 한다는 긴장감에 놓이곤 한다. 누군가 작심하고 “당신은 얼마나 언어를 올바르게 쓰길래요?”라고 질책하면 “저도 더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정말 ‘중요’하고, 능력이 부족하다면 노력해야 한다. 일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언어 중 하나는 디자인의 대상을 지칭하는 용어다. 디자인이라는 일의 특성상 대상을 항상 떠올리게 되는데, 사용하는 용어에 따라 사고의 흐름이 무의식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대상을 뜻하는 용어로는 소비자, 사용자, 고객, 타깃을 꼽을 수 있다. 내 나름대로 구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비자’(consumer)는 소비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재화나 용역을 소모하는 사람’이라고 풀어 말하면, 혹 부정적으로 들리는지? 낭비가 심하고 무분별한 소비가 자행되는 전 지구적 위기 상황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사람을 폄하하는 용어라고 발끈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드러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속가능성, DEI(Diversity, Equity, Inclusion. 즉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와 같은 시대적 가치를 소비 행위로 실천하면서, ‘가치 소비’처럼 긍정적인 의미와 결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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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DEI(Diversity, Equity, Inclusion. 즉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와 같은 가치 역시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소비 기준이 되었다.

다만, 디자인 업무를 할 때 떠올리기 적합한 단어인지는 고민해 보자. 대상을 ‘소비자’로 인식하면, 디자인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소비가 일어나는 시점’에 집중하게 된다. 물건은 ‘쓰려고’ 산다. 당연히 ‘쓰는’ 과정에 대한 고려와 배려가 중요한데, 소비자라는 단어를 곱씹다 보면 ‘사는’ 순간에 무게중심이 실릴 수 있다.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누군가가 “더 많이 사고 싶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디자인의 역할이야”라고 주장하더라도, 굳이 부정하지는 말자. 잘 팔리면 좋으니까. 매력적으로 디자인해서 그런 소리가 안 나오게 하되, 사용하는 상황과 사용성을 충실히 고려하면 좋겠다. 어쨌든, 소비자라는 용어가 소비 행위의 순간에 집중하게 만드는 만큼, 디자인이 창출하는 가치를 폭넓게 풀어내기 위해 개인적으로 그 사용 빈도를 현격히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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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user)는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 용어는 구매 시점보다는 구매 후의 사용 행위에 집중하게끔 한다. 사용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비교적 ‘무엇’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무엇’에 해당하는 사물이나 서비스 자체를 중심으로 발상이 일어나고, 사용하는 사람의 상황과 사용 방식, 사용의 편의성에 대한 생각이 펼쳐진다. 인간의 인지 원리나 어포던스affordance, 즉 행동유도성을 고려한 아이디어를 끌어내기에 적합하다. 디자인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디자인 원칙은 대부분 ‘사용자’ 관점으로 정리돼 있다. 복잡한 사용성을 가지거나 복합적인 서비스와 관련한 디자인 영역이라면 사용자라는 단어가 적합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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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포던스(Affordance)는 어떤 행동을 유도한다는 뜻으로 행동유도성이라고도 한다. 어포던스가 잘 되어 있다면 사용자는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물의 쓰임새를 추론하여 디자인의 의도에 맞게 사물을 이용할 수 있다.

‘고객’(customer)은 말 그대로 고객이다. “고객님”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공손해진다.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든다. 이 용어는 ‘소비’나 ‘사용’ 같은 특정 행위의 순간보다, 대상 자체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나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대상에 대한 나의 애티튜드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디자인의 영역이 상품을 넘어 서비스, 공간 등 어디로 확장하든 별 무리 없이 쓸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연결하기도 수월하다. 애티튜드를 자아낸다는 측면에서 긴장감까지 불러일으키는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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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깃’(target)은 표적이다. 단호하다. 적중시켜야 한다. ‘타깃 고객’, ‘타깃 유저’처럼 앞서 말한 세 가지 용어와 짝을 이루기도 한다. 타깃이라는 말의 울림은 다분히 전략적이고 사업적이다. ‘잘 맞춰야 한다’라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따라온다. 무엇보다 적중시켜야 하는 만큼, 타깃을 잘 정해야 한다. 과녁을 잘 그려서 10점 영역의 위치를 명확하게 제시할수록, 궁수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타깃 같은 단어를 계속 떠올리며 ‘적중하기 위한 디자인’에 골몰하다 보면, 디자인하는 행위가 다분히 도구적이고 소모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디자인을 상업적 성과로 평가하는 일은 피할 수 없지만, 사람과 세상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실 또한 자명하다. 디자인은 개인을 넘어 다수를 위해 창의성과 재능을 펼치는 행위이다. 디자인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느끼고 행동하는 바도 달라진다. 정보를 쉽게 이해하거나, 행위가 수월해질 수 있고, 기분이 좋아지거나 마음이 따뜻해질 수도 있다. 어떤 행위가 촉발되기도, 같은 행위가 반복되기도 한다. 디자인은 그렇게 우리 삶에 기여한다. 디자인의 매력이다.

용어 이야기, 하나 더. 언제부턴가 ‘브랜드 매장’이라는 표현보다 ‘브랜드 공간’이라는 표현을 선호하게 되었다. ‘매장’이라고 말하는 순간, 팔기 위한 장소라는 의미가 먼저 읽힌다. “매장에서 쑥쑥 매출을 올리는 게 당연하지, 무슨 소리야?”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맞는 말이다. 필요한 압박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매몰되어 공간 경험을 풍부하게 만드는 발상이 위축될까, 살짝 걱정된다. 브랜드 공간의 역할은 매출이면서 동시에 브랜딩이기도 하다. 브랜딩이란 고객과의 관계 형성이다. 브랜드 공간에 들어온 고객의 마음은 한층 열려 있다. 지금 이 공간에 자신의 천금 같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만큼, 그 시간 이상으로 가치를 끌어올려 소중한 기억과 경험을 얻고자 한다. 자연스러운 사람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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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브랜드 JACQUEMUS자크뮈스 성수동 팝업 현장. 동시대의 브랜드들은 물리적인 공간을 통해 비물질적인 정신을 표현한다. 브랜드 공간의 역할은 매출이면서 동시에 브랜딩 그 자체이기도 하다.

브랜드에게는 절호의 찬스다. 공간의 인테리어와 소품, 향기와 소리, 응대하는 애티튜드에 이르기까지 공간의 모든 요소를 고객이 브랜드에 감정 이입하는 장치로 활용할 수 있다. 오감과 이성을 총동원해 즐거운 경험을 마친 고객은 이제 소셜미디어로 자기 경험을 전파한다. 그 전파력은 강력하다. 온라인에 해당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 이런 인식을 충실히 하고 있다면 매장이라 부르든, 공간이라 부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뉴트럴한 단어인 ‘공간’이 더 좋다. 새로운 발상이 더욱더 자유롭게 떠오를 듯하다. 그뿐이다.

생각의 공간은 언어로 이루어진 만큼,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창의성이 더 잘 싹틀 수 있고 그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다. 창의적인 발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씨앗은 누구에게나 이미 충분히 뿌려져 있다. 단지, 어디서 어떻게 싹틀지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시선을 한 방향으로 고정시키는 단어보다, 여기저기 둘러보게 만드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더 좋다.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생각들이 연결되며 창의성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Why의 뒷면

우리는 ‘Why’의 시대에 살고 있다. Why가 모든 활동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 기후변화와 환경문제, 전염병과 보건, 인종차별과 성차별, 기술 발전과 그 영향, 국제정치와 안보 문제 등 인류의 미래와 지속가능한 발전이 위협받는 전 지구적 상황은 불안감과 불만족을 증대시키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가치 추구의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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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Why의 시대에 살고 있다.

브랜드도 시대적 화두에 기반해 존재 이유와 가치를 밝히며 고객에게 말을 건다. 브랜드가 선언하는 메시지가 고객의 공감과 호응을 이끌어내고, 브랜드에 대한 관심도와 호감도를 상승시키는 사례도 점점 늘고 있다. 브랜드마다 Why를 대하는 진지함의 정도, 쏟는 에너지와 시간은 다르겠지만, 이 시대에 존재하는 브랜드에게 이는 필수적인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나면, 브랜드의 취향에 대한 화두를 꺼내기가 멋쩍어진다. 가치와 의미는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옳은 것’을 추구하면서도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Why의 뒷면에는 취향이 존재한다. Why가 브랜드의 가치를 선언한다면, 취향은 브랜드가 가진 욕구의 결과 감도를 드러낸다. Why가 옳은 길로 가고 있는지를 일깨워주는 지도라면, 취향은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가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탐험하고 즐기는 과정에서 느끼고 발견하는 것들이다. Why가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는 한, 취향은 반드시 Why와 연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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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에게도, 소비자에게도 취향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브랜드는 커질수록 고민거리가 많아진다. 어른이 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과 유사하다. 지금의 모습을 좋아해 주는 고객과 새로움을 기대하는 잠재 고객 사이에서 고민한다.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면, 국가마다 상이한 니즈와 감성을 가진 고객 사이에서 고민한다. 온오프라인 채널이 다각화되면, 채널마다의 각기 다른 요구사항 앞에서 고민한다. 브랜드 내부 상황도 달라진다. 브랜드에 관여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만큼 다양한 생각이 펼쳐지기에, 일사불란하고 가벼운 몸놀림이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취향처럼 설명이나 설득이 어려운 논의 사항은 조금씩 뒤로 밀려난다. 취향처럼 말랑말랑한 이야기가 들어서기 어려워진다. 그나마 Why는 뚜렷하게 자기 자리를 잡고 그 역할을 하겠지만, 취향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점점 딱딱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신생 브랜드가 나타나 자신감 있고 자유롭게 ‘취향’을 펼쳐내는 걸 보게 되면, 위기감을 느낀다. (위기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그게 출발점이니까.)

주목받는 신생 브랜드들이 취향을 소화하는 방식에서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브랜드를 상징하는 시각 요소를 착실하게 규정하고 일관성 있게 꾸준히 지켜나가려는 다짐보다, 각종 요소를 감각적으로 큐레이팅하고 싶다는 욕구가 먼저 느껴진다. 뚜렷한 브랜드의 취향이 있다고 느껴진다. 때로는 일관성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더 넓은 범위의 취향으로 흡수된다. 이런 자신감 넘치는 활동력의 중심에는 디자인을 넘어서서 브랜드의 모든 행위를 진두지휘하는 개성이 있다. 능수능란하다. 이는 실제 사람이 종합적인 영향력을 펼칠 때 가능한데, 신생 브랜드의 경우 대개 창업자가 이런 역할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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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그룹 뉴진스의 로고. 30개가 넘는 로고 플레이를 통해 구축한 멀티 페르소나는 브랜드의 유연함과 다채로움을 그대로 드러낸다.

공간을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전통적으로 브랜드 공간은 브랜드의 본질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브랜드의 핵심 가치를 상징할 수 있는 시각적인 요소로 파사드, 오브제, 집기, 조명, 의자 등이 창작되고, 이들이 공간 무드의 중심이 된다. 이 개념은 지금도 유효하고, 부정할 근거도 없다. 단, 브랜드의 본질을 담으려는 의무감으로 공간의 요소들을 재단하다 보면, 공간은 조금씩 딱딱하고 지루해진다. 주목받는 신생 브랜드의 공간은 (편차가 있긴 하지만) 본질을 보여주고 말겠다는 각오보다는, 내 집을 꾸미듯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낸 듯한 인상을 준다.

취향이 담긴 공간은 풍성하게 다가온다. 모든 것이 고유하게 만들어질 필요도 없고, 새것일 필요도 없다.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수집한 물건들도 취향이고, 그 정성도 소중하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창작한 것과 수집한 것이 어우러진다. 그렇게 꾸며진 공간은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고객들은 그 공간을 즐겁게 탐색하면서 브랜드의 센스를 느낀다. 고객 스스로 공간을 구성하는 갖가지 요소를 연관 지으며, 호기심 어린 의미를 부여하고, 브랜드 스토리텔링의 퍼즐을 맞추어간다. 신생 브랜드들의 플레이를 보다 보면, “저는 고객이 원하는 최고의 제품,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합니다”가 아니라, “저는 이렇게 태어났고 이런 사람이거든요.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당신께 선사할게요”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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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브랜드들이 잉태되고 태어나고 있다.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요건들은 과거나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각 요건을 충실히 구비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의 장벽은 예전과 비할 수 없이 낮아졌다. 기존의 브랜드들과 유사한 퀄리티의 제품을 만드는 ODM, OEM 업체가 즐비하다. 유무형의 어떤 재화이든 알리고 싶은 게 있다면, 온라인에서 무(無)비용으로 홍보도 가능하다.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면 상품으로 만들어 소비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얼마나 많은 창의적 시도가 펼쳐지고 있을까. 개성과 다름이 중시되는 시대적 흐름을 타고, 자신만의 취향을 선보이며 젊은 세대를 사로잡는 브랜드들이 늘고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또렷함과 신선한 에너지, 활기가 나를 고무시킨다.

덧.

위 에세이는 아모레퍼시픽 크리에이티브센터 허정원 센터장의 신간 『생각의 공간–창의성이라는 욕구를 다루는 법』에 실린 서른다섯 편의 글 중 세 편을 발췌 및 편집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가장 창의적인 작업마저 AI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어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창의성이 감각이나 스킬이 아닌 누구나 가진 욕구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창의성은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태도이며 결과가 아닌 과정에 가까운 행위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발상하고 공명하는 디자이너의 ‘생각 기록’을 이번 책에 켜켜이 쌓아 놓았다. “기억에 남을 만한 생각을 하고 있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아둔 듯한 책 『생각의 공간』이 독자 내면의 생각을 깨우는 대화 상대가 되길 기원해 본다.

생각의공간_앞표지

Writer

허정원(@wonjheo)은 연세대학교 생활디자인학과 및 주거환경학과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이탈리아 도무스 아카데미에서 디자인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일본 치바대학교에서 디자인 경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에 10년간 재직하며 제품 디자인, 디자인 전략, 통합 선행 디자인 등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일본디자인분소장을 지냈다. 현재 아모레퍼시픽 크리에이티브센터를 이끄는 센터장으로서 30여 개 브랜드의 상품과 공간 크리에이티브, 코퍼레이트corporate 레벨의 고객 경험 크리에이티브, 아모레 성수 등의 플래그십 사업을 총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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