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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네덜란드에서 발견한 투명해서 안전하다는 감각

Writer: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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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지난해 말에 홍보라 디렉터의 안전공간 Safe Space 세 번째 원고를 메일로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바로 열어보지 않고, 일부러 조금 묵혀두었어요. 지난 원고처럼 코펜하겐이나 헬싱키 어딘가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괜히 아껴두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제목을 보니 새해와 어울리니 말이죠. 이 글을 읽는 지금, 새롭게 맞이한 한 해를 조금은 투명하고 아름답게 시작되고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원고에서 ‘안전한 감각’을 건네는 장소는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에인트호번과 틸버그입니다. 틸버그라는 도시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밀라노 디자인 위크는 익숙해도 더치 디자인 위크는 아직 생소한 이름일 테니까요.

홍보라 디렉터는 말합니다. 이곳에서는 시장이 요구하는 매끈한 완성도보다 때로는 엉성하고 불완전하더라도 그 투박함을 숨기지 않는 태도가 더 중요해 보였다고요. 하나의 이벤트를 경험하는 일은 예술로 감싸진 도시와 일상을 다시 보게 만들고, 결국 ‘왜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합니다. 네덜란드에서 마주한 실용적인 솔직함, 불필요한 벽을 세우지 않는 태도, 그 투명함이 만들어 내는 안전한 감각을 이 글에서 만나보세요.구글 지도에 가고 싶은 장소를 하나둘 저장하게 될 여러분을 떠올리며, 안전공간 세 번째 이야기를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펼쳐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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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포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Depot Boijmans Van Beuningen) 공식 프레스, ©사진 Ossip van Duivenbode

Safe Space는 예술을 매개로 도시와 일상 속에서 자유로운 사고와 대화를 열어주고, 사변적 단상과 사회적 질문을 탐색하며 나누는 안전 공간입니다.

밀도의 시간, 열린 가능성의 시작

올여름 헬싱키의 느슨한 공기 속에 머물던 중 주한 네덜란드대사관의 멋쟁이 문정관 하진 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네덜란드의 국제문화교류 기관인 더치 컬처Dutch Culture가 한국을 중점 국가로 선정하고 문화예술 기획자를 초청한다는, 방문 의향을 묻는 제안이었다. 줌(Zoom) 화면 너머로 몇 차례 미팅이 오가고, 퍼블릭 아트부터 디자인, 건축, 텍스타일, 예술 정책에 이르기까지 나의 방대한 관심사를 가로지르며 이메일이 바삐 오갔다. 놀랍게도 그들은 극과 극으로 보이는 이 넓은 스펙트럼의 관심사를 4박 5일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완벽한 밀도로 담아낸 정교하고 세심한 일정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팩토리2의 동료와 함께 네덜란드의 입체적인 예술 생태계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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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 Amsterdam) 건물 이미지, 공식 프레스, ©사진 Ossip van Duivenb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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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 Amsterdam) 카를 마튼스(Karel Martens) 회고전, 철제 캐비닛을 활용해 벽을 없앰으로써 사방에서 관람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전시 구조

암스테르담: 미술관을 해킹하는 신체들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먼저 감각한 것은 ‘경계의 부재’ 혹은 ‘경계 흐리기’였다. 큐레이토리얼 교육기관이자 비물질적 현대미술의 수행적 아카이브인 드 아펠 암스테르담de Appel Amsterdam은 얼마 전 도심의 매끈한 북적임에서 거리를 두고, 생활감이 두터운 동네로 자리를 옮겨 새롭게 둥지를 틀었다.

현대미술 전시장에서 으레 마주하는 화이트큐브는 그곳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대신 과거 신지학협회 사원이자 공공도서관이었던 건물의 형태와 기억을 온전히 받아들여 다소 기묘한 곡선의 벽과 길고 좁은 창문이 살아있는 공간 안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유연하게 재맥락화하고 있었다. 이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떠밀려난 결과가 아니라 지역민과 섞이며 ‘초(超)로컬Hyperlocal‘한 커뮤니티 속으로 들어가려는 능동적인 시도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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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공립 도서관 건물을 개조해 이전한 드 아펠 (de Appel)의 전경, ©사진 홍보라

마침 열리고 있던 메르세데스 아즈필리쿠에타Mercedes Azpilicueta의 전시는 말 그대로 감각적인 ‘놀이터’였다. 이야기와 신체성이 가득한 이 전시는 드 아펠이 완결된 결과물의 쇼케이스가 아니라 어린이부터 지역 주민까지 모두를 향해 열린 예술 커뮤니티의 현장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장면은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 Amsterdam입구 옆 광장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다양한 신체의 시민이 소그룹으로 모여 PT를 받으며 권투하는 일상의 풍경이다. 

이 장면은 십여 년 전 파리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 광장에서 마주했던 스케이트 보더들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도시의 틈새를 파고들어 계단과 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킹하는 ‘바퀴 위의 사람들’. 세계 여느 미술관 앞에서도 보더를 마주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만, 이곳 풍경은 그 결이 사뭇 다르다. 미술관 입구를 마치 커뮤니티센터나 동네 체육관처럼 점유한 시민들. 그들은 미술관이라는 권위적 건축물을 어떻게 일상의 근육으로 해체하며, 공간이 진정 누구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하는지를 자신의 신체를 통해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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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 아즈필리쿠에타(Mercedes Azpilicueta) 작가가 구현한 놀이터로서의 전시, ©사진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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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닿을 듯 거대한 메르세데스 아즈필리쿠에타(Mercedes Azpilicueta)의 타피스트리 작품. 작품 뒤편으로 들어가 뚫린 구멍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볼 수 있다. ©사진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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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지고, 옮기고, 입어보는 체험이 가능한 메르세데스 아즈필리쿠에타(Mercedes Azpilicueta)의 전시 전경, ©사진 홍보라

로테르담: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퍼블릭 아트

로테르담 중앙역을 나서자마자 마주한 광장은 “여기가 바로 다양성과 퍼블릭 아트의 도시”라고 선언하는 듯했다. 그 강렬한 첫인상의 중심에는 영국 작가 토마스 J 프라이스Thomas J Price의 작품 ‹Moments Contained›가 서 있다.

4m 높이의 육중한 청동 조각이지만, 흔히 봐온 영웅이나 위인의 형상이 아니라 트레이닝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당당하게 서 있는, 기세 좋은 젊은 흑인 여성의 모습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 익명의 인물을 거대한 조각으로 만들어 광장에 놓는 순간, 주변의 역동은 달라진다. 그것은 단순히 광장을 점유한 미적인 오브젝트가 아니라 광장을 오가는 행인들이 끊임없이 교신하는, 살아 있는 주체로 그곳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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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 공공예술 홈페이지 내 공식사진, ©사진 Aad Hoogendo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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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 공공예술 홈페이지 내 공식사진, ©사진 Jannes Li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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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 중앙역 광장의 대형 조각 작품, 토마스 J 프라이스(Thomas J Price) 작품 ‹Moments Contained›(2023), ©사진 홍보라

로테르담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다문화적인 도시지만, 그 역동성은 인구 구성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된 이 도시는 과거를 복원하는 대신 과감하게 미래를 선택했다. 건축과 퍼블릭 아트를 중심으로 폐허 위의 도시를 새롭게 상상하는 실험이 오늘날 로테르담의 역동성과 정체성을 만들었다. 

이 같은 실험 정신은 MVRDV가 설계한 데포Depot와 그 인근의 뉴 인스티튜트Nieuwe Instituut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세계 최초의 공공 수장고인 데포는 미술관의 가장 핵심이면서도 은밀한 뒷무대에 머물던 수장 공간을 전면으로 공개했다. 작품이 복원되고 포장되며 저장되는, 미술관의 보이지 않는 심장부를 시민의 경험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다. 무엇보다 1층에서 천장까지 이어진 내부 중정의 거대한 유리 계단과 얽혀 있는 투명한 건축구조물을 올려다보면, 투명한 해파리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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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포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 수장고, ©사진 Ossip van Duivenb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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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포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의 투명하고 복잡한 내부 구조, ©사진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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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풍경을 담아내는 미러 파사드가 돋보이는 데포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 외관, ©사진 홍보라

뉴 인스티튜트는 건축과 디자인, 디지털 문화를 다루는 예술 기관으로,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권위적 태도 대신 시민의 참여와 학습이 유기적 연결을 지향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버섯을 주제로 한 전시 «FUNGI: 아나키스트 디자이너»를 준비 중이었다. 『세계 끝의 버섯』의 저자이자 인류학자 애나 칭Anna Tsing과 건축가이자 예술가 페이페이 저우Feifei Zhou가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한 이 전시는 ‘버섯’을 매개로 디자인과 창작에서 관습적인business as usual 접근을 근본적으로 질문하며 버섯의 관점에서 창작자 역할을 새롭게 제안한다. 큐레이터들은 이를 ‘안티-디자인’ 전시로 부르며, 버섯을 수동적 재료가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아나키스트 공동 디자이너로 제시한다. 

전시 오프닝에 맞춰 애나 칭과 도나 해러웨이의 토크 ‘어두운 시대의 다종 생존을 위한 구성Composing for Multispecies Survival in Dark Times’이 마련되었는데, 티켓 판매 시작 후 단 몇 분 만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전시와 토크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마침 지난 몇 년간 팩토리2가 버섯과 균, 곰팡이를 매개로 새로운 시대의 예술 역할을 고민해 오며 전시와 워크숍 등으로 이 고민을 풀어 왔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미술관이 답을 제공하는 권위적 기관이 아니라 질문을 수집하고 제기하는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또한 ‘초로컬’이라는 태도를 견지하며, 완결된 작품의 쇼케이스에 머물거나 권위를 빌려 시장 가치를 공고히 하던 미술관의 보이지 않는 관행을 기분 좋게 배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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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디자인풍의 뉴 인스티튜트(Nieuwe Instituut) 라이브러리 및 아카이브 전경, ©사진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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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인스티튜트(Nieuwe Instituut) 뮤지엄숍 ‘뉴스토어(New Store)’의 활용 매뉴얼, ©사진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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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로비에서 마련된 가든 프로젝트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사진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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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리2의 버섯 관련 예술 프로젝트 «미지의 곰팡이 페스티벌 The Third F Festival»의 전시 전경

에인트호번과 틸버그: 손의 기술과 오래된 미래

더치 디자인 위크Dutch Design Week 기간에 방문한 에인트호번은 전 세계에서 모여든 창작자들의 에너지로 도시 전체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하이엔드 브랜드의 상업적 완성도와 스타 디자이너의 발굴에 집중한다면, 에인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를 주축으로 한 더치 디자인 위크는 급변하는 사회적 요구에 관한 창작자의 반응과 실천을 통해 삶의 근본적인 전환을 추구하는 대안적 시각에 주목한다.

이곳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시장이 요구하는 매끈한 완벽함이 아니다. 스스로 만들고 수리하며, 주변에서 발견한 평범한 재료를 재가공해 사용하는 자율적인 제작자Maker의 주체성이다. 때로는 엉성하고 불완전하다 해도 그 투박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정직함, 다소 거칠고 덜 세련되었다 해도 새로운 시대의 질문과 고민을 가감 없이 디자인 언어로 실현하는 실용적 태도에서 묘한 해방감마저 느낀다. 기존의 대량생산 시스템과 디자인 문법에 의존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직접 조립하려는 디자인 아나키즘의 실천에 가깝다. 서울에 돌아와 사진을 복기해 보니 실제 기록된 작업의 반 이상이 자급자족과 수리, 손의 기술과 자원의 순환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제작 방식의 새로운 유행이 아니라 극도로 신자유주의화된 현대사회 에서 개인이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자립과 돌봄’, 스스로의 환경을 통제할 수 있다는 ‘안전한 감각’에 관한 실천이다. 기존의 디자인 규범을 가볍게 비켜가거나 뒤집으며 표준화된 질서에 균열을 내는 이른바 ‘조용한 아나키즘’의 기운이 도시 곳곳에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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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치 디자인 위크(Dutch Design Week) 화두, ‘일상의 재료와 적정 기술을 활용한 자생적 제작 방식 (DIY)’, ©사진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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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사이클링 가구로 명성 높은 피트 하인 이크의 스튜디오가 더치 디자인 위크 시상식장으로 변모했다, ©사진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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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치 디자인 위크 기간 중 에인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DAE) 전시에서 마주한 세 가지 화두, ‘자급자족, 쉘터, 그리고 디자인 아나키즘’ 01, ©사진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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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치 디자인 위크 기간 중 에인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DAE) 전시에서 마주한 세 가지 화두, ‘자급자족, 쉘터, 그리고 디자인 아나키즘’ 02, ©사진 홍보라

반 아베 미술관Van Abbemuseum의 위계 없는 전시 구성 또한 이러한 맥락과 궤를 같이한다. 몬드리안, 리시츠키, 피카소 같은 모던 거장의 작품과 원주민의 공예품, 비물질적인 동시대 타임 아트가 한지붕 아래 나란히 놓여 있다. 기존 미술관의 공간 디자인 문법을 비켜가며 다채로운 색채와 새로운 ‘보기’ 방식을 제안하는 공간은 작품을 규정하던 제도적 권위와 통제로부터 관람자를 해방시키고 있었다.

여정의 마지막 도착지인 소도시 틸버그Tilburg의 텍스타일 뮤지엄Textiel Museum은 19세기 산업 유산이 오늘의 기술, 디자인, 예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이곳은 박제된 오브젝트의 박물관이 아니라 살아 있는 디자인 랩이자 만들기의 현장이다.

여기서는 과거 섬유산업을 이끌던 기계가 그저 전시용 유물이 아니다. 전 세계 창작자에게 개방된 텍스타일 랩Textiel Lab 안에서 새로운 재료를 실험하고 예술적 영감을 실현하는 도구로 여전히 가동되고 있고, 실제 이번 여정 중 만난 작가들도 이 랩의 워크숍을 통해 작업을 구현하고 있었다. 로테르담 기반 작가 코엔 타셀라르Koen Taselaar는 자신의 페인팅을 대형 태피스트리로 제작했고, 스리랑카 출신 작가 차투리 니산살라Chathuri Nissansala는 퀴어 정체성과 텍스타일을 연결하는 «Haus of fibre» 전시의 공동 창작 그룹에 참여하며 뮤지엄과 협력하고 있었다.

기존의 모던 마스터피스 전시 문법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안하는 반 아베 미술관(Van Abbemuseum)의 전시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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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아베 미술관에서 발견한 다양한 보기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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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버그 텍스타일 뮤지엄(Textiel Museum)의 텍스타일 랩(Textiel Lab) 공식 프레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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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버그 텍스타일 뮤지엄 워크숍 현장, 대형 터프팅(Tufting) 작업을 통해 완성되어가는 텍스타일 예술, ©사진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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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타일이라는 매체를 통해 퀴어성의 미학을 탐구하는 전시 «Hause of fibre»의 주요 참여 작품, ©사진 홍보라

투명함이 주는 안전감

고백하건대 나는 폐소공포증이 있다. 물리적으로 좁은 공간도 힘들지만, 더 견디기 어려운 건 심리적 폐쇄성이다. ‘말하지 않은 공기’를 읽어야 하는 압박, 솔직하지 못한 회피, 정직보다는 교묘한 처세술로 유지되는 관계, 그런 순간들이 주는 답답함은 내 몸보다 마음을 먼저 조인다.

네덜란드에서 경험한 실용적인 솔직함, 불필요한 벽을 세우지 않는 태도, 일상을 가로막지 않는 투명성이 예상보다 깊게 다가왔다. 도시의 동선부터 건물의 구조, 사람들의 담백한 화법까지, 그들의 ‘벽 없음’은 단순한 디자인 취향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근본적인 방식으로 느껴진다. 

여행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같은 투명함은 16세기부터 뿌리내린 칼뱅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불필요한 치장보다는 본질에 집중하고, 넘침이나 과도함보다는 성실과 정직을 미덕으로 삼는 문화, 복잡한 위계 대신 직선적인 소통을 선택하는 태도, 돌려 말하는 것이 서툰 내게 그들의 투명성은 더없이 편안한 ‘숨 쉴 공간’이 되어주었다.

서울로 돌아온 후 그곳에서 만난 창작자들과 협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작은 기록과 교류지만, 이후 전시와 워크숍, 퍼블릭 아트를 통해 점점 더 깊은 협업을 이어가려 한다. 한 달이 훌쩍 지나 이 기록을 정리하는 지금도 네덜란드에서 마주한 그 투명한 공기가 곁에 머물러 있다. 새로운 친구를 잔뜩 만났으니 내년에는 더 재밌게, 무엇보다 ‘안전하게’ 놀아보고 싶다.

Artist

홍보라(@borabola5)는 경복궁 서쪽에서 작고 뾰족한 예술 공간이자 기획 사무소인 팩토리2를 운영하는 디렉터이자 예술기획자로, 도시·사람·예술의 역동적 관계를 기반으로 퍼블릭 아트와 국내외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장르 간 경계를 선이 아니라 넓은 지대로 확장하고자 연구, 기획, 제작, 교육 등 예술과 문화 전반에 걸쳐 경계 없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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