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서 마주하는 이름 없는 식물, 강풍에 밀려 날갯짓을 반복하는 어린 새의 뒷모습. 김재연은 우리 곁의 작은 존재가 보내는 하루에 주목합니다. 필름으로 포착한 빛의 조각 위에 그날 채집한 식물의 생기를 시아노타입으로 전사한 후, 다시 2주간의 집요한 레이어링을 거쳐 비로소 그 풍경을 담아내죠. 켜켜이 쌓인 식물의 선과 면은 무심하게 쌓인 것처럼 보이지만, 김재연이 일상에서 세밀하게 관찰한 생명의 흔적을 조심스레 보여줍니다. 중첩된 시간의 자국 위로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생명의 일상을 담아낸 김재연의 시선을 BE(ATTITUDE)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나아가지 못하는 새›, 2025, Pigment print, 24×16cm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사진 매체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김재연입니다. 사진 위에 식물의 형상을 겹치며, 삶과 자연, 작은 생명이 맞닿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기보다는 흘러가다 보니 작업을 하고 있네요. 초반에는 어떤 주제나 내용으로 작업을 해야하는지 몰라서 헤매기도 하고, 이미지에 관한 고민과 실험도 많이 했죠.
다행인 건 작업은 하면 할수록 재미있다는 거예요.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지만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들어요. 그런 마음이 제가 꾸준히 작업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같아요.
‹펑- ›, 2021, Pigment print, 120×80cm
‹구멍›, 2022, Pigment print, 60×40cm
‹보이지 않는 달›, 2022, Pigment print, 60×40cm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별도의 작업실은 없고, 집의 작은방을 작업실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큰 작업을 할 때는 한계를 느끼기도 하지만 여러 이유로 작업실을 얻기는 쉽지 않더라고요.
작은 공간이지만 한쪽에는 컴퓨터와 프린터, 스캐너 같은 장비로 꽉 차 있고, 다른 한쪽에는 채집해 놓은 식물이 오밀조밀 놓여 있습니다. 시아노타입, 테스트 프린트, 전사한 천 등 작업 과정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부산물이 어지럽지만 저는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쌓여 있습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저는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에서 영감을 얻곤 합니다. 문득 길을 걷다가 작은 생명이 무심하게 하루를 보내는 장면을 관찰할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어리고 작은 새가 잘 날지 못하고 날아오르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가 강풍에 밀려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저를 비롯한 주변의 누군가가 떠오르곤 합니다.
그런 장면이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가 이미지를 만들 때 툭 튀어나오곤 합니다. 그러면 그때의 감각과 시간으로 사진 이미지가 만들어져서 제목을 붙입니다. 제목은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을 때마다 간단하게 기록해 두는 편입니다.
김재연의 작업 과정
김재연의 작업 과정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제 작업의 과정은 크게 세 부분입니다. 첫 번째는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는 단계인데요, 연출해서 촬영하기보다는 좋아하는 빛이나 그림자가 있을 때 카메라를 드는 편입니다. 좋은 사진이 될 것 같은 장면에서 촬영하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예상할 수 없는 이미지를 만들기도 합니다.
다음으로는 식물 채집과 시아노타입입니다. 다양한 식물을 주워 와 주로 집에서 시아노타입을 하는 편이에요. 야외에서 하다 보면 생각보다 바람도 많이 불고 집중이 어렵더라고요. 마른 식물을 제외하곤 보통 채집한 당일 시아노타입으로 옮기는데요, 당일 채집한 식물이 가장 생기 있고 형태가 잘 보존되기 때문이에요. 사실 촬영과 채집, 시아노타입이 단계별로 이루어지기보다는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돼요. 저에게는 이 세 과정 모두가 최종 이미지를 완성하기 위한 재료를 구하고 손질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은 시아노타입을 스캔해 디지털 파일로 만든 뒤 촬영한 사진 위에 식물 레이어를 더하는 과정입니다. 요즘에는 한 이미지를 오래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스케치 단계를 길게 거치는 편이고, 적어도 2주 이상 파일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며 좀 더 집요해지려고 합니다. 하나의 식물이 시아노타입을 거치며 선과 면이 되고, 합성 과정에서 해체되고 결합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사진 작업을 한다고는 하지만 촬영은 캔버스로서 시작점일 뿐이고, 그 이후의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예전에는 좀 더 조형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려고 했다면, 요즘에는 손이 가는 대로 이전에 시도해 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닿지 않는 빛›, 2024, Pigment print, 27×22cm
‹해를 등지는 사람›, 2024, Pigment print, 14.8×21cm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어스러진, 숨›(2023~) 시리즈는 에세이 같은 사진 작업인데요, 아이의 여린 호흡에서 시작해 이제는 볼 수 없는 존재의 숨결에 관한 작업이에요. 사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숨을 쉬지 못하면 우리는 죽게 되잖아요. 몇 년간의 경험을 통해 그걸 더 느끼게 되면서, 가족에 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종종 ‘삶과 죽음 앞에서 작업이 무슨 의미일까?’하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식물의 호흡›은 눈으로 보거나 직접 느낄 수는 없지만, 식물도 각각 자기 방식으로 숨을 쉬잖아요. 그걸 시각화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제 나름의 방식으로 그려본 이미지예요. 흑백 사진 위에 식물 시아노타입으로 만든 선과 면이 쌓여 있는데, 심박수 모니터를 떠올리며 작업했어요.
‹지금,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는 작업을 하다 보면 가끔 숨이 턱 하고 막힐 때가 있거든요. 작가로서 미래가 아주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잘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올 때를 생각하며 만든 이미지예요. 원래 사진은 아이가 빈 색종이를 들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그 모습이 저 같기도 했거든요. 그 위에 무언가를 더했지만, 어쩌면 이 사진은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요. 미완의 상태로 열려 있는 이미지이길 바랐던 것 같기도 하고요.
‹식물의 호흡›, 2025, Pigment print, 80×53cm
‹지금,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2025, Pigment print, 60×40cm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산책하는 것을 좋아해서 하루에 최소 6,000보는 걷기도 하고, 날씨가 좋으면 1만 보 이상 걷기도 해요. 봄이 오면 하루가 다르게 풍경이 변하거든요. 못 보던 식물을 주운 날이면 새로운 이미지가 나오겠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합니다. 열매가 떨어지는 계절에는 채집할 식물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기도 합니다.
일곱 살 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이가 유치원에 갔을 때 작업과 공모 준비는 물론이고, 집안일과 막간의 휴식까지 아주 밀도 있게 시간을 보냅니다. 글을 써야 할 때가 있는데, 집에서는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종종 카페를 찾아다니기도 해요.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저와 가족의 건강이요. 인터뷰 내내 건강 타령을 하는 것 치고는 너무 그렇지 않게 살아서 부끄러운데요, 누구든 아프면 쉬어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 몇 년간 그 타이밍을 놓쳐서 저를 너무 몰아붙이다가 아팠는데, 푹 쉬지 못하고 또 하다가 병이 나고… 그런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에는 몸이 주는 신호를 잘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저뿐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 서툴지만 음식을 최대한 직접 만들어 먹는 등 규칙적으로 생활하려고 합니다. 그게 결국 오래 지속할 방법인 것 같아요.
‹오늘의 할 일›, 2024, Pigment print, 24×16cm
‹주말 습도›, 2023, Pigment print, 가변크기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저는 스펙터클하고 멋진 장면보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좋아해요. 사회 구성원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좀 더 나은 세상이 된다는 믿음이 있거든요. 꼭 사람뿐 아니라 동식물을 포함해 볼 수 없는 세계까지도요.
작은 식물을 소재로 사용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인데요, 떨어진 열매나 날아가는 씨앗이 없다면 봄의 풍경이 지금과는 많이 다를 거예요. 새싹이 나오지 않는 봄은 전혀 기다려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작업도 저를 둘러싼 미시적인 장면을 다루게 되는 거죠. 좀 더 구조적이고 멋진 방식으로 작업하고 싶다가도, 결국 매번 비슷한 감각을 다른 방식으로 전하게 됩니다. 어떤 관객에게는 스쳐 지나갈 이미지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까요.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슬럼프가 올 때는 지나가게 두는 편이에요. 작업도 쉬고, 최대한 생각을 지우면서 멍때리곤 합니다. 예전에는 모든 일을 바로 해야 하는 성격이었는데, 최근 들어 일을 약간 미뤄서 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물론 마감 전후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만, 이전보다 슬럼프라는 것을 훨씬 적게 느껴요. 작업을 단거리 달리기가 아닌 마라톤처럼 길고 오래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쉽진 않지만요.
«혼혼한 공기», 유영공간, 2023, 사진 유영공간
«혼혼한 공기», 유영공간, 2023, 사진 유영공간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한정된 시간이요. 하루가 24시간인 게 짧다고 생각하며 살진 않았는데, 부쩍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아이가 등원하고 나면 오후 3~4시까지 시간이 생기는데요. 그게 짧은 시간은 아닌데, 그 안에 모든 일을 몰아서 하다 보니 시간이 정말 빠르게 갑니다. 종종 아이가 아프거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기도 하고요. 내년에 학부모가 되면 저의 시간이 더욱 부족할 수도 있어 걱정이지만, 또 나름의 방법이 생기겠죠?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고3 때 책상에 붙여 놓았던 명언이 있었는데요,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라는 문장이었습니다. 20대 때에는 내가 왜 이런 오글거리는 문구를 붙여놓았을까 싶어 부끄럽기도 했는데요,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니 꿈이라는 것이 너무 성취나 목적의 측면에서 언급되지만, 어찌 보면 각자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창작자의 철학이라는 말이 조금 거창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국 꾸준히 지속하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는 타고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 속상하기도 했는데요, 집요하게 자기 것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 결국 좋은 작업에 닿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자기복제와 관련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반복되는 이미지가 작가를 각인하는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함정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을 할수록 어려운 점이 점점 많아지네요.
‹그런 날들이 있지›, 2025, Pigment print, 75×50cm
‹쓰러진 아이스크림 유령›, 2025, Pigment print, 가변크기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저는 무엇보다 과정이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면 아무리 성과가 좋더라도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종종 동료의 힘을 빌립니다. 혼자 생각에 빠져 진전이 없을 때면 가까운 동료를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곤 합니다. 마음이 말이 되어 나오면 어느새 정리되어 있을 때가 많아요. 머리를 맞대면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가더라고요.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계속해서 작업을 보고 싶은 창작자로 남고 싶습니다. 고정되고 안정된 작업보다는 다음을 궁금하게 만드는 창작자가 되고 싶습니다.
«공간불안: 장면과 소외», 안팎 스페이스, 2024, 사진 안팎 스페이스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나이가 들고 싶어요. 청춘이라는 말로 과거를 그리워하기보다는 그때그때 현재를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Artist
김재연(@potato89_)은 사진 매체를 기반으로 채집한 식물의 형상을 겹쳐 작업한다. 일상의 작은 생명과 순간에서 출발한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미시적인 세계를 다루고 있다.
사진을 캔버스로써 조형의 시작점으로 정하고, 아날로그적 우연성과 디지털 콜라주가 교차하고 반복되는 과정에서 이미지를 만든다. 개인전 «가루산»(온수공간, 2020), «혼혼한 공기»(유영공간, 2023)를 개최했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