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늘 이변이 일어납니다. 올해도 그냥 넘어가질 않네요. 45년 경력의 배우가 신기 들린 연기로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꼽혔는데, 처음 장편영화 주연을 맡은 1999년생 배우가 오스카 트로피를 쏙 가져갔어요. ‹서브스턴스›의 데미 무어Demi Moore와 ‹아노라›의 마이키 매디슨Mikey Madison 이야기입니다. 특히 무어는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 영화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더욱더 화제가 됐는데요. 데뷔 45년 만에 처음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에요. 과거 자신이 흥행에는 도움이 되지만 연기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배우를 비하하는 ‘팝콘 여배우(Popcorn Actress)’로 불렸다고 고백하며 그동안 쌓은 한을 모두 풀어버릴 것 같던 62세 여배우의 재기를 다들 응원할 정도였죠. «비애티튜드»에 언제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고하는 칼럼니스트 김도훈 님이 배우론에 가까울 정도로 무어를 파고들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고 나니, 이름과 외모만 익숙했던 무어의 진면목을 발견한 느낌이에요. 이 떨림을 여러분과 얼른 공유하고 싶네요. «비애티튜드» 웹사이트에서 아티클을 확인해 보세요.
데미 무어를 배우로 기사회생시킨 영화 ‹서브스턴스› 포스터
여러분은 데미 무어Demi Moore를 좋아했던 적이 없다. 이 첫 문장부터 ‹서브스턴스The Substance›(2024)의 격렬한 팬들을 화나게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겠는가. 사실은 사실이다. 여러분은 무어를 좋아했던 적이 없다. 무어는 흘러간 배우다. 아니, 모든 나이든 배우는 사실 어느 정도는 흘러간 배우다. 한때 유명했으나 지금은 그리 주목할 만한 활동을 하지 못하는 배우를 우리는 흘러간 배우라고 부른다. 가만 생각해 보면 흘러간다는 건 꽤 시적인 표현이다. 우리 눈앞에 흐르는 할리우드의 격렬한 강물 위에서 무거운 바위처럼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하류로 또 하류로 흘러간 배우들은 많다. 바위 같은 배우도 사실 몇 없다. 대부분의 배우는 어떻게든 흘러가지 않으려 상류를 향해 끊임없이 헤엄을 치는 존재들이다. ‘메릴 스트리프Meryl Streep’라는 바위 근처에서 오늘도 배우들은 격렬하게 헤엄을 치고 있다.
‹서브스턴스› 스틸컷
다시 문장을 시작해 보자. 여러분은 아마 무어를 좋아했던 과거의 기억을 갖고 있을 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40대와 50대라면 무어를 한때 잠깐 좋아했을 것이다. 여러분의 사랑은 오로지 한 편의 영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1990년 할리우드와 한국 영화계를 뒤흔든 ‹사랑과 영혼(Ghost)›이다. 사실 ‹사랑과 영혼›은 할리우드 직접 배급(직배)을 반대하며 극장에 뱀을 풀고 불을 질렀던 과거 한국 영화 운동가에게 완벽한 패배를 안겨준 ‘미제(美帝)의 첨병’이었다. 이전까지 모든 할리우드 영화는 할리우드 배급사가 직접 배급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직배가 시작되면 안 그래도 볼품없던 한국 영화 산업은 일시에 망할 거라는 예언이 가득했다.
‹사랑과 영혼›의 명장면
‹사랑과 영혼›이 전국 개봉관에서 350만 관객을 기록하자, 직배 반대 운동은 한 순간에 끝이 났다. 극장 숫자도 적고 관객 수 집계 전산화도 되지 않은 그 시절의 350만은 지금의 1000만에 가깝다. 뭐, 그렇다고 한국 영화 산업이 망한 건 아니다. 오히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한국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글은 한국 영화 산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니, 이쯤에서 구석기 시대 이야기는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소리를 자꾸 하다 보면 네안데르탈인이 된 기분이 든다.
‹사랑과 영혼›은 지긋지긋했다. 아니다. 나는 그 영화를 너무 사랑했다. 쇼트커트를 한 무어의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큰 눈동자가 클로즈업될 때마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역시, 지긋지긋했다. 영화가 개봉한 이후로 라이처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의 ‘Unchained Melody’는 세상 어디서나 흘러나왔다. 음악 저작권 따위는 없던 시대다. 길거리 불법 레코드를 파는 리어카에서도 흘러나왔다. 쇼핑몰에서도 흘러나왔다. 라디오에서는 매일매일 흘러나왔다. 전국의 라디오 DJ는 “오늘도 이 지긋지긋한 노래를 틀어야 하냐”며 PD에게 짜증을 부렸을 것이다. 2025년의 여러분은 정말이지 청각이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로제ROSÉ의 ‘APT.’를 하루에 삼십 번 이상 들어야 할 의무가 없으니까.
‹사랑과 영혼› OST로 쓰인 라이처스 브라더스의 ‘Unchained Melody’
‹사랑과 영혼›이 개봉하기 전, 무어는 한국에서 그리 알려진 배우는 아니었다. 다만 «로드쇼»나 «스크린» 같은 당대 영화 잡지들을 모으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브랫팩Brat Pack’의 일원으로 약간 인기가 있었다. 브랫팩은 80년대 초중반 할리우드에서 인기를 끈 청춘스타들을 묶어 말하던 별칭이다. 그 시절 하이틴 영화의 대부였던 존 휴즈John Hughes가 제작하거나 감독한 영화들에 출연한 배우들은 다 브랫팩의 일원이었다. 내 세대는 뭘 그렇게 꼭 묶어서 이야기하길 좋아했다. 90년대 홍콩 가요계를 지배하던 네 명의 가수 겸 배우, 장학우(張學友), 유덕화(劉德華), 여명(黎明), 곽부성(郭富城)을 사대천왕이라 불렀던 것도 비슷한 결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곽부성을 제일 좋아했다. 여러분은?
브랫팩 시절 가장 중심에 있던 배우들은 롭 로Rob Lowe, 에밀리오 에스테베즈Emilio Estevez, 앤드루 매카시Andrew McCarthy, 몰리 링월드Molly Ringwald, 앨리 시디Ally Sheedy, 랠프 마치오Ralph Macchio, 맷 딜런Matt Dillon이었다. 이 이름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당신 나이는 적어도 마흔다섯 이상일 것이다. 브랫팩 시절 약간 변두리에 있던 배우들이 톰 크루즈Tom Cruise,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 제임스 스페이더James Spader, 숀 펜Sean Penn, 그리고 무어였고. 사람 인생이라는 게 이렇다. 젊은 시절 절정을 찍는 사람이 있고, 나이가 들어서 절정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다. 인생은 공정하지 못한 데다 참 변칙적이다.
‹사랑과 영혼› 이전에도 무어의 격정적인 팬이었다고 고백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말하는 누군가는 기억 조작으로 거짓말을 하는 거다. ‹사랑과 영혼›이 개봉하기 전 국내 극장에 걸렸던 무어의 영화는 오컬트 호러영화 ‹세븐 싸인(The Seventh Sign)›(1988)이 ‘거의’ 유일하다. 거의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도대체 그 시절 영화들의 제대로 된 개봉 정보가 한국에 남아있질 않는 탓이다. 우리는 정말이지 아카이빙에 인색한 민족이었다. 나는 극장에서 ‹세븐 싸인›을 봤다. 오컬트 호러영화광이었던터라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세븐 싸인› 포스터
연소자(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아니었냐고? 여러분은 80년대를 모른다. 그 시절 연소자가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들어가는 건 지나치게 쉬웠다. 사실 나는 국민학교, 아니 초등학교 시절 첫 데이트 영화로 ‘블랙·후라이데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13일의 금요일: 더 파이널 챕터›(Friday the 13th Part IV: The Final Chapter)를 골랐다. 머리에 꽃핀을 꽂고 내 옆자리에 앉아 사색이 되어 떨던 그 친구에게 뒤늦은 사과를 보낸다.
‹세븐 싸인›은 형편없는 영화였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파멸의 일곱 가지 예언이 하나씩 실현되는데, 알고 보니 미국의 한 젊은 배우가 낳는 신생아가 마지막 파국의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다. 왜 맨날 지구 종말은 미국에서 시작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 영화가 미국과 한국에서 화제를 모은 가장 큰 이유는 하나였다. 당시 무어는 TV 드라마 ‹블루문 특급(Moonlighting)›과 영화 ‹다이하드Die Hard›로 스타가 된 브루스 윌리스Bruce Willis의 아내였다. 무어가 뱃속에 그의 아이를 가진 상태로 출연했다는 사실은 영화의 주요 마케팅 수단이 됐다.
‹세븐 싸인› 스틸컷
‹세븐 싸인› 스틸컷
그 이전에도 무어가 스타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80년대 브랫팩의 일원이었던 무어는 꽤 인기가 치솟던 젊은 배우였다. ‹세인트 엘모의 열정(St. Elmo’s Fire)›(1985)은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어 영화 중 하나다. 배우 마틴 신Martin Sheen의 아들이자 찰리 신Charlie Sheen의 형으로, 당대 브랫팩 최고 인기 스타였던 에스테베즈가 감독하고 주연한 ‹위즈덤Wisdom›(1986)도 악명만큼 형편없지는 않다. 문제는 무어의 초기작들이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세븐 싸인› 이후라는 것이다. ‹사랑과 영혼›이 한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뒤늦게 무어의 출연작이 비디오로 출시되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나는 그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요즘처럼 배우 출연작을 커리어 순서대로 보는 시대가 오기 전이었다. 한국인은 ‹에이리언Alien›도 순서대로 보지 못한 민족이다. ‹에이리언 2(Aliens)›가 1986년 국내 개봉해 인기를 끌자, ‹에이리언Alien›(1979)이 이듬해 개봉했다. 영화 속 주인공, 리플리는 80년대 한국에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였다.
‹사랑과 영혼›은 모든 걸 바꾸어 놓았다. 무어는 슈퍼스타가 됐다. ‹사랑과 영혼›은 남편 윌리스의 ‹다이 하드 2 (Die Hard 2: Die Harder)›(1990)와 동일한 해에 개봉했다. 그해 미국 언론은 아내의 작은 슬리퍼 히트sleeper hit 영화가 남편의 블록버스터를 박스오피스에서 압살했다는 헤드라인을 서로 베끼듯 남발했다. 모두가 무어의 커리어는 이제 탄탄대로만 남았다고 예상했다. 한동안 이는 맞아떨어졌다. ‹위험한 상상(Mortal Thoughts)›(1991), ‹어 퓨 굿 맨A Few Good Men›(1992), ‹은밀한 유혹(Indecent Proposal)›(1993), ‹폭로(Disclosure)›(1994)의 흥행이 이어졌다.
‹위험한 상상› 포스터
‹위험한 상상› 포스터
‹은밀한 유혹› 포스터
‹어 퓨 굿 맨› 스틸컷
‹어 퓨 굿 맨›에서의 무어.
‹폭로› 스틸컷
무어는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와 함께 당대 여배우 최고 출연료를 경신하던 존재였다. 배우가 그 정도 지위에 오르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모두가 말리는 인생 프로젝트를 하나쯤 하고 싶어진다. 배우의 인생 프로젝트는 종종 배우의 경력을 끝장내거나 흔드는 실패작이 된다. 무어의 남편, 윌리스의 ‹허드슨 호크Hudson Hawk›(1991), 아놀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의 ‹라스트 액션 히어로Last Action Hero›(1993), 케빈 코스트너Kevin Costner의 ‹워터월드Waterworld›(1995), 지나 데이비스Geena Davis의 ‹컷스로트 아일랜드Cutthroat Island›(1996)가 그 슬픈 사례들이다.
요즘 시절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1990년대는 할리우드 스타 파워가 마지막 절정기를 구사하던 시대다. 스타 한 명의 이름만으로도 1억 달러를 벌어들였기에, 최고의 스타들은 자신이 염원하는 대형 블록버스터를 스튜디오의 큰 간섭 없는 지원으로 만들 수 있었다. 무어가 이 시기에 선택한 영화는, 그렇다. 그 악명 높은 ‹스트립티즈Striptease›(1996)다. 전직 FBI 요원이 여섯 살 난 딸의 양육권을 되찾고 양육비도 벌 겸 플로리다 소도시에서 스트립 댄서로 일하다가 주요 고객인 부패한 상원의원이 연관된 살인사건에 휘말린다는 이야기다.
‹스트립티즈› 포스터
‹스트립티즈› 스틸컷
‹스트립티즈› 속 스트립 댄스 장면은 지금 봐도 선정적이다.
누구도 영화 내용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버트 레이놀즈Burt Reynolds나 로버트 패트릭Robert Hammond Patrick 같은 남자 배우들이 나온다는 사실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스트립티즈›는 무어의 영화였다. 무어에 의한 영화였다. 무어를 위한 영화였다. 총제작비 5000만 달러 중 1250만 달러를 출연료로 받은 무어는 할리우드 역사상 처음으로 출연료 1000만 달러를 돌파한 여배우가 됐다. 그는 이 영화에 모든 것을 걸었다. 영화 홍보를 위해 데이비드 레터맨David Letterman이 진행하는 심야 토크쇼 ‹Late Show with David Letterman›에 나와 브라와 팬티만 입고 춤췄다. 지금 시대에는 모두가 소스라칠 일이지만, 무어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영화고 자시고 ‘나를 보러 극장에 오라’는 거였다.
‹Late Show with David Letterman›에 출연해 브라와 팬티만 입고 영화 홍보를 하는 무어
누구도 보러 가지 않았다. ‹스트립티즈› 박스오피스 최종 성적은 3000만 달러였다. 무어는 이듬해 최악의 영화와 배우에게 선사하는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Golden Raspberry Awards)에서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할리우드의 웃음거리가 됐다. 절치부심한 그는 리들리 스콧Ridley Scott과 손잡았다. 여성 참여를 금지한 해군 특전단 ‘네이비실Navy SEALs’ 훈련에 처음 투입된 여성 대원으로 분한 ‹지.아이. 제인G.I. Jane›(1997)이다. 이건 사실 거의 서커스 같은 전환이었다. 당시 리뷰의 표현에 따르면 “수술한 가슴을 볼링공처럼 흔드는” 스트리퍼를 연기한 배우가 이듬해에는 머리를 삭발하고 완벽한 근육질 몸매를 만든 뒤 네이비실 훈련을 연기하다니. 사람들은 말했다. 경력을 건 도박이라고.
전년도에 개봉한 ‹스트립티즈›와 정 반대로 파격적인 삭발과 거친 액션을 보여주는 ‹지.아이. 제인›
도박은 실패했다. 역시 누구도 보러 가지 않았다. 여성 관객의 반응도 별로였다. 남성도 반 이상 탈락하는 네이비실 훈련에서 여성이 근성으로 살아남는 게 무슨 여권 신장이냐, 라는 소리가 나왔다. 영화는 스콧의 수많은 실패작 중 하나로 남았다. 스콧은 하도 영화를 많이 찍어서, 성공한 영화와 실패한 영화 또한 지나치게 많은 양반이다. 그러니 ‹지.아이. 제인›의 비평적·흥행적 실패가 딱히 그의 경력을 발목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무어는 달랐다. 그는 반드시 영화를 성공시켜야 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1990년대에는 배우라는 직업이 그리 안전하지 않았다. 영화 몇 편이 연이어 실패하면, 경력은 멈추어 버렸다. ‘여배우’는 더욱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직업이었다. 무어는 ‹지.아이. 제인›으로 또다시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경력은 거기서 끝이 났다. 무어는 ‘팝콘 여배우(popcorn actress)’였다. 세상은 갓 튀긴 팝콘 여배우만 원했다. 무어는 갓 튀긴 팝콘 여배우가 더는 아니었다. 역시, 1990년대의 일이다.
무어가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순간은 2003년이다. 그는 ‹미녀 삼총사 2: 맥시멈 스피드›(Charlie’s Angels: Full Throttle)에 악역으로 출연했다. 악역은 배우의 경력에서 무엇을 의미할까. 전성기가 지났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요즘 할리우드는 좀 다르다. 악역이 젊은 배우의 경력을 치솟아 오르게 만드는 로켓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달랐다. 상업 영화의 악역은 노장 배우들 차지였다. ‹슈퍼맨(Superman: The Movie)›(1978)의 진 핵크먼Gene Hackman, ‹배트맨Batman›(1989)의 잭 니콜슨Jack Nicholson, 그 이후 ‹배트맨 3: 포에버(Batman Forever)›(1995)의 토미 리 존스Tommy Lee Jones와 짐 캐리Jim Carrey, ‹배트맨 4: 배트맨과 로빈(Batman & Robin)›의 아놀드 슈워제네거 등, 프랜차이즈 블록버스터에서 악역은 항상 중견·중년 배우의 몫이었다. ‹미녀 삼총사 2: 맥시멈 스피드›에서 무어가 악역을 맡았을 때, 사람들은 잊히는 배우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도 그랬다.
‹미녀 삼총사 2: 맥시멈 스피드› 스틸컷
데미 무어는 다시 팝콘을 튀겼다. 당시 나온 기사들을 한 번 검색해 보시라. 키워드는 하나다. 전신 성형. 데미 무어가 50만 달러를 들여 전신 성형을 했다는 소문이 전 세계로 퍼졌다. 영화 스틸컷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감탄했다. 낙담했다. 조롱했다. 아예 성형수술 견적서가 풍문으로 나돌았다. ‹스트립티즈›에서 확대한 가슴을 다시 매만졌다고 했다. 심지어 무릎 주름 수술까지 했다는 소문이 났다. 아니다. 완벽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무어는 확실히 젊음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배우였다. 브루스 윌리스와의 이혼 후 세대가 다른 젊은 배우 애시튼 커처Ashton Kutcher와 2005년 결혼하면서 젊음에 대한 강박은 점점 심해졌다.
50만 달러를 들인 전신 성형으로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미녀 삼총사 2: 맥시멈 스피드› 속 무어의 비키니 신. 2021년 무어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무어의 성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알 수 있다.
당시 영화평론가 듀나는 이렇게 썼다. “하여간 세상엔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조카뻘 되는 젊은 남자 스타를 성공적으로 데리고 노는 무어를 보면서 통쾌해하고 시원해하고 영감을 얻는 수많은 아줌마들이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이 불장난의 가치는 상당하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최근 몇 년 간의 어정쩡한 경력보다는 훨씬 값어치 있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무어는 배우라기보다, 젊은 남자를 데리고 파티를 벌이는 ‘쿠거cougar’의 아이콘이었다.
애시튼 커처와의 오붓한 한때. 무어는 ‘쿠거’였다.
‹미녀 삼총사 2: 맥시멈 스피드›는 무어의 경력을 되살리지 못했다. 그 이후 출연작 제목을 한 번 열거 해 보자. ‹하프 라이트Half Light›(2006), ‹바비Bobby›(2006), ‹미스터 브룩스Mr. Brooks›(2007)까지는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플로리스Flawless›(2008), ‹어나더 해피 데이Another Happy Day›(2011), ‹포세이큰Forsaken›(2015), ‹와일드 오츠Wild Oats›(2016), ‹레이디스 나잇(Rough Night)›(2017), ‹러브 소니아Love Sonia›(2018), ‹플리즈 베이비 플리즈Please Baby Please›(2022). 나는 무슨 영화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당신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무어의 커리어는 이미 2000년대에 끝났다. 완전히 끝났다. 더는 끝날 수 없을 정도로 끝났다.
자, 당신은 그와 비슷한 시대에 인기를 누렸던 미셸 파이퍼Michelle Pfeiffer나 줄리아 로버츠 같은 배우들도 비슷한 처지 아니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들 역시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계속 활동하고 있지 않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무어는 그들과 처지가 달랐다. 다르다. 파이퍼는 80년대에 이미 “섹스 심벌의 육체를 가진 연기파 배우”라는 별명으로 불린 배우다. 젊은 시절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 후보에도 여러 번 올랐다. 1989년 ‹위험한 관계(Dangerous Liaisons)›(1988)로 여우조연상, 1990년 ‹사랑의 행로(The Fabulous Baker Boys)›(1989)로 여우주연상, 1993년 ‹러브 필드Love Field›(1992)로 여우주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에게 달린 별명이 너무 여성 비하적이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예쁘고 섹시한 배우는 연기를 잘할 수 없다’는 당대 편견이 가득한 별명이다. 어쩌겠는가. 그런 별명이 존재하는 시대였다는 걸 아예 잊어 버린 척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줄리아 로버츠? ‹귀여운 여인(Pretty Woman)›(1990)으로 1991년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 전인 1990년, 그 누구도 이름을 알지 못하던 신인 시절에 ‹철목련(Steel Magnolias)›(1989)으로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미 시작부터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다. 2001년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2000)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건 ‘인정받지 못하던 인기 배우의 오스카 수상’이 아니었다는 소리다. 미셸 파이퍼와 줄리아 로버츠와 달리, 무어는 단 한 번도 연기력으로 인정받은 적이 없었다. 물론 나는 그가 ‹어 퓨 굿 맨›으로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라야 마땅했다고 생각한다. ‹지.아이. 제인›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거야 오랜 팬인 나의 희망일 뿐이다. 누구도 무어를 진지한 배우로 여긴 적이 없다.
대신 무어는 단 한 번도 할리우드의 스포트라이트에서 사라진 적은 없다. 그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들과 끊임없이 연애하고 결혼했다. 에스테베즈, 윌리스, 그리고 커처. 그렇다. 무어는 스캔들의 여왕이었다. 동시에 미디어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았다. 1991년 8월 «베니티 페어Vanity Fair» 표지는 그 절정이었다. 윌리스의 아이를 가진 임산부는 누드 상태로 커버에 스스로를 내밀었다. 요즘에야 모든 셀러브리티들이 임신 누드 화보를 찍는 시대라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여러분. 1991년이었다. 당대 최고의 배우가 누드로 화보를 찍는 일도 드물었던 시절에, 만삭의 누드 화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어가 만삭 누드로 촬영에 임한 1991년 8월 «베니티 페어Vanity Fair» 표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잡지 표지 중 하나로 꼽힌다.
바로 직전 해인 1990년, 무어는 ‹사랑과 영혼›으로 (아주 90년대적으로 구린 표현을 쓰자면) 모든 남자가 바라는 ‘순정파 여배우’의 반열에 오른 참이었다. 물론 나는 웃었다. 이미 80년대 브랫팩 시절부터 그는 할리우드에서 알아주는 파티 걸로 유명했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걸 보며 무어가 얼마나 즐거워했을지 상상이 갔다. 무어는 그런 배우였다. 섹슈얼한 매력을 마음껏 이용하는 걸 즐겼다. 임신한 몸, 가슴 수술을 한 몸, 전신 성형을 한 몸을 잡지 화보와 스크린에 집어 던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게 자신의 셀링 포인트라는 것도 너무 잘 알았다.
무어는 모든 걸 억지로 하지 않았다. ‹은밀한 유혹›(1993), ‹폭로›(1994), ‹스트립티즈›(1996), ‹지.아이. 제인›(1997)으로 이어지는 선택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은밀한 유혹›에서 그는 백만장자의 제안으로 하룻밤을 보내는 유부녀를 연기했다. ‹폭로›에서는 권력을 이용해 남성 부하 직원을 성폭행하는 여성 상사로 나왔다. ‹스트립티즈›에서는 몸을 이용해 남성들을 무릎 꿇리는 스트리퍼이자 전직 FBI 요원이었다. ‹지.아이. 제인›에서는 아예 머리를 밀고 네이비실 역사상 첫 번째 여성 훈련병이 됐다. 지금 이 영화들을 다시 볼 Z세대 팬이라면 조금 헷갈리는 심경이 될지도 모르겠다. ‹서브스턴스›로 무어를 처음 접한 관객이라면, 이 모든 것이 대단히 이율배반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를 질문은 이것이다. ‘데미 무어의 경력은 여성주의적인가, 아닌가?’
그러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떤가. 바로 그 이율배반적인 경력이 ‹서브스턴스›의 출발점이고, 결말이며, 모든 것이다. 나는 ‹서브스턴스›를 보고 확신했다. 이 영화는 무어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영화다. 젊은 시절, 아름다움으로 승부했던 여배우는 많다. 그런 배우 중 절반은 약간만 나이를 먹어도 할리우드의 성전에서 타의로 퇴출당했다. 절반은 어떻게든 얼굴 분장을 해가면서까지 아름다운 여배우가 맡지 못할 법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오스카상을 받아냈다. 샤를리즈 테론Charlize Theron과 니콜 키드먼Nicole Kidman을 생각해 보시라. 그들은 특수분장의 힘으로 얼굴을 흉측하게 만들거나 가짜 코를 불이며 오스카 트로피를 얻어냈다. 육체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배우들이 자신을 스타로 만든 장점을 없애자, 그들의 품에 황금의 남성상이 주어졌다. 놀라운 아이러니다.
무어는 그러지 않았다. 끝까지 출발점의 무어로 남았다. 끝없이 성형하고, 끝없이 몸을 유지하고, 때로는 젊은 남자를 쟁취하고, 파파라치 앞에 서는 존재로 남았다. 카메론 디아즈Cameron Diaz처럼 더는 좋은 역할이 들어오지 않자 할리우드로부터 잠시 벗어나 휴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사실 디아즈도 ‹서브스턴스›에 적절한 캐스팅이었을 것이다. 모델 출신인 그 역시 언제나 남성들이 바라는 섹시한 여성만 연기하다가 몇 번의 다른 시도를 했다.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1999)와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2002)은 디아즈의 경력을 전환할 만한 기회였다. 나는 아직도 ‹존 말코비치 되기›로 디아즈가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분통이 터진다. 그런 시대였다. 오스카는 젊고 아름다운 배우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나이 든 노장을 존중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무어는 휴식도 취하지 않았다. 어떤 역할이든 끊임없이 연기해 왔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영화에도 출연해 왔다. 그는 존경받는 배우가 아니라 여전히 시끌벅적한 스타로 늙었다. 여전히 육체의 매력으로 승부를 거는 셀러브리티로 남았다. ‹서브스턴스›의 캐스팅은 바로 그 덕분에 완벽했다. 무어는 남성이 원하는 섹슈얼함으로 인기를 얻은 여배우가 맞다. 다만 돌이켜보면, 그가 맡았던 역할들은 남성이 원하는 바를 자신의 무기로 삼은 무어의 선택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배우였던 적이 없었다.
‹서브스턴스› 스틸컷
‹서브스턴스› 스틸컷
‹서브스턴스› 스틸컷
무어는 그냥 팝콘 여배우가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팝콘 여배우였다. 스스로 제작하고 프로젝트를 이끄는 팝콘 여배우였다. 그는 선택했다. 남성들이 갈망하는 섹슈얼함을 선택적인 무기로 삼았다. 동시에 남성들이 바라는 지점에서 항상 약간은 빗겨나간 역할을 선택했다. 최전성기에 그가 선택한 ‹폭로›, ‹스트립티즈›, ‹지.아이. 제인›이 증거일 것이다. 남성을 짓밟고, 남성을 홀리고, 남성에게 도전하는 그 영화들은 남성의 시선 안에 존재하면서도, 그걸 벗어나 여성적이기도 하고, 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니기도 한 동시에,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무어적이다. 누구도 무어처럼 살아남지 못했다. 누구도 무어처럼 돌아오지 못했다. 누구도 그렇게 생존하지 못했다.
처음 이 글을 시작한 문장을 다시 소환해 보자. 여러분은 데미 무어를 좋아했던 적이 없다. 솔직히 없다. 나는 계속 좋아했다만, 누군가는 비겁한 변명이라 말할 것이다. 맞다. 변명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비겁한 변명을 이다지도 길게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무어의 예전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시길 간절히 원한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어가 ‹아노라Anora›(2024)의 마이키 매디슨Mikey Madison에게 여우주연상을 양보한(혹은 강탈당한) 것은 그의 패배가 아니다. 배우의 승리다. 여배우의 승리다. 모든 살아남은, 그리고 시작하는 여배우들의 승리다. 여러분은 이제 ‹서브스턴스›의 무어뿐 아니라 지난 반세기를 어떤 배우와도 다른, 꼬이고 뒤틀리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경력으로 관통하며 살아남은 데미 무어를 좋아하고 사랑할 준비가 마침내 됐다.
Artist
김도훈(@closer21)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다. 영화주간지 «씨네21» 기자, 남성지 «GEEK» 피처 디렉터,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으로 일했다.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에스콰이어»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유튜브 영화 채널 ‹무비건조›에 출연 중이다. 낯설고 비범한 인물들을 탐구한 『낯선 사람』(2023)과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2019)를 썼다. 최근 『패션 만드는 사람』(공저)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