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준 작가는 요즘 가장 주목받는 젊은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완판 작가’라는 수식어로도 유명한데, 유행에 편승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요. 오히려 디지털 시대에서 회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지속되고 공유될 수 있는지 고민에 고민을 더합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의 경험을 드로잉과 회화로 연결하고 확장하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그는 자신의 작업을 “결론 없이 이어지는 소설이나 옴니버스 수필”에 비유해요. 오늘의 질문을 탐구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매체로서 회화는 개인의 시선을 느리지만 깊게 전달하려 노력할 수 있는 매체라고 믿는답니다. 하나의 확고한 정답을 추구하기보다, 끝없이 질문하고 고민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 이희준 작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동료와의 동행이 창작을 지속하는 방법이라고 믿는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회화 작업을 하는 이희준입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회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지속되고 공유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8살 때쯤 작은 화병을 그린 적이 있었어요. 인스턴트커피 통을 재활용한 화병인데, 병목 주변에는 알루미늄 껍질이 붙어 있었죠. 저는 꽃부터 시작해서 화병에 붙은 껍질까지 그렸는데요.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 제가 그린 그림, 특히 화병에 붙어있던 껍질 부분을 부모님께 보여주시며 그림을 계속 그리면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셨죠. 그때부터 계속 그림을 그리다 보니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제가 작가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은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모두를 다 언급할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Heejoon Lee», 국제갤러리 부산, 2022,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Heejoon Lee», 국제갤러리 부산, 2022,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한국에서 작업을 시작한 이후 많은 작업실을 사용했습니다. 2015년부터 5년간은 중랑구 망우동에 있는 작업실을 썼어요. 저를 포함해 네 명의 친구들이 같이 사용하며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작업했죠. 각자의 작업 공간이 있었지만, 네 명이 느슨하게 서로의 공간을 오가며 협업하고 공존했습니다. 친구들이 대학원을 가거나 회사를 옮기게 되면서 구성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얼마 전에도 올해 연말 모임을 가졌어요. 이후 인천아트플랫폼, 금천예술공장, 서울시립미술관 난지창작스튜디오를 거쳐 현재는 ‘캔 파운데이션CAN foundation’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에서 작업 중입니다. 레지던시를 거치며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저 자신도 많은 성장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어요. 좋은 동료를 만나 그들의 경험과 생각을 접할 수 있었고, 저의 세상 또한 넓어졌습니다. 정확히 셀 수는 없지만, 50명 이상의 작가와 같은 공간에서 작업한 것 같은데요. 그들이 공유하는 각자의 세계를 보고 경험할 수 있어서 크나큰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Between the Lines», 모바이캔, 2024
캔 파운데이션 레지던시는 명륜동에 자리 잡고 있어요. 저는 매일 1호선 외대앞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종로5가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탑니다. 종로 8번 버스로 이동해 국민생활체육관에서 내리면 일주일에 서너 번 이상 들리는 돈가스집 ‘젤로’가 있습니다. 이곳을 따라 골목 안쪽으로 지나가면 주택가 사이에 작은 글씨로 쓰인 ‘명륜동 작업실’을 찾으실 수 있어요. 작업실은 층고가 높아 쾌적하지만, 다소 추운 편입니다. 현재 김다움, 안솔지 작가와 공유하고 있는데요. 지난가을에는 캔 파운데이션의 새로운 전시 공간인 ‘모 바이 캔MO BY CAN’의 개관전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Between the Lines», 모바이캔, 2024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영감의 순간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매일 동일한 길을 걷더라도 그날의 햇빛이나 온도에 따라 새로운 자극을 받아요. 최근에는 학생들을 지도하며 필름 카메라로 거리의 일상을 찍는 수업을 했는데요. 저도 오랜만에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들고 나가 거리를 걸으며 사진을 찍으니, 기분이 남달랐습니다. 어디 먼 곳으로 여행을 가지 않아도, 인화된 사진으로 보는 풍경은 마치 멋진 여행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죠. 이렇게 영감은 새로운 장소나 낯선 여행지뿐만 아니라, 일상 속 우연히 맞닥뜨린 변화에서 찾아오기도 한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먼저 어떤 경험을 사진으로 기록해요. 바로 작업에 사용할 때도 있지만, 수년이 지나서 작업에 등장할 때도 있어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경험한 감각을 드로잉으로 연결하고, 이를 회화로 확장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의 경험을 드로잉과 회화라는 매체로 연결하고 확장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이전 사진첩을 뒤져 보며 전혀 연결점이 없는 사진들을 회화를 통해 연결하고 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이어나가 보려고 노력합니다. 어쩌면 결론 없이 이어지는 소설이나 옴니버스 수필 같을 수도 있겠네요.
이런 특성은 올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 «시공時空 시나리오»에 선보인 작품에서 잘 드러납니다. ‹식(蝕): 겹쳐진 시간, 펼쳐진 공간(Eclipse: Overlapping Time and Unfolding Space)›(2024)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이 가지고 있는 건축적 특성과 여러 시간에 걸쳐 개인적으로 경험한 미술관을 한 화면에 연결하고자 한 산물입니다. 이후 ‹접힌 공간, 연결된 시간과 기억(Folding Space, Synchronizing Time and Memories)›(2024)을 통해서 접혔다 펼쳐질 수 있는 입체 형태로 작업을 이어 나갔어요. 평면에서 입체로 작업을 전환하며 시공간을 연결하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동일한 주제나 현상을 두고 다른 매체로 접근하며 바라보니,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소화하는 방식도 확장된 것 같아서 흥미로웠습니다.
이후 진행한 작업에서도 제 기억에 저장된 여러 장면을 끄집어내고 연결하고 있습니다. ‹Night and Day›(2024)는 우연히 본 시멘트 표면에서 밤하늘의 별을 상상해 보며 시작한 작업입니다. 동시에 그 아래로 햇빛이 비치는 바다의 모습처럼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장면을 병치해 어떤 간극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런 간극을 회화로 채우고 연결하며 관람자의 상상과 질문을 초대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얇고 두꺼운 선들은 전혀 다른 시공간의 장면을 연결하고 그 경계를 따라 관람자의 시선을 유도합니다. 층층이 쌓인 여러 겹의 물감은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화면 속 감각에 더욱더 자세히 도달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물감을 한 겹 한 겹 올리면서 조금 더 세밀하게 어떤 감각에 접근하고, 그때그때 달라지는 감정, 생각, 감각, 혹은 기억 같은 것을 담습니다. 그 주변으로 화면 위를 부유하는 작은 조형들은 곳곳에서 또 다른 기억과 감각을 촉발하며, 관람자의 사유를 새로운 지점으로 안내합니다.
결국 회화에 관한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 같아요. 회화라는 매체가 오늘날의 환경과 조건에서 어떻게 존재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과거에는 회화가 대상의 재현, 역사적 기록, 철학적 사유를 전달하는 매체였다면, 오늘날의 회화는 조금 더 개인적이고 사적인 매체가 된 것 같습니다. 회화는 개인의 시선을 통해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며, 오늘의 질문을 탐구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매체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시선으로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느리지만 깊게 전달하려 노력할 수 있는 매체랄까요.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최근에는 특정한 전시를 목표로 두고 작업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업을 오랜 시간 작업실에 걸어 두며 조금씩 손보고 있어요. 작업실 소파에 앉아서 오랫동안 작업을 들여다보고 선택할 수 있는 과정이 만족스럽게 느껴집니다.
17개월 된 아이를 돌보고 있습니다. 아침 6시쯤 아이와 함께 일어나 아침을 먹고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덧 오전 10시가 됩니다. 최근에는 10시에 전화 영어 수업을 받고 있는데요, 수업이 끝난 후 이메일 답장, 글쓰기 등의 일을 하고 12시쯤 작업실로 향합니다. 작업실에 도착하면 먼저 난방기를 켜요, 날이 많이 추워져서 9°C 정도에서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해요. 그렇게 저녁 5~6시까지 작업하다 보면 실내 온도가 20도에 이르는데요. 이제 조금 따스해졌다 싶으면 집에 갈 시간이 되는 거죠. 집에 도착하면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내다 아이를 씻기고 잠을 재웁니다. 아이가 잠드는 8시부터 간단한 일을 하고 저도 9시쯤에는 잠자리에 드는 것 같아요. 저도 이런 일상을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아이가 생기고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감사한 일상이죠.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2025년 영국 런던에 있는 ‘델피나 레지던시Delfina Residency’에 참가합니다. 영국에 가는 게 오랜만이라 영어 공부도 다시 시작하고 리서치할 곳도 알아보고 있어요. 최근 중력과 관련한 주제로 작업을 진행한 터라, 영국에 가게 되면 아이작 뉴턴의 흔적을 찾아보려 합니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가 스스로 장점으로 꼽고, 마음에 새기고 사는 게 있다면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일이라도 매일 매일 조금씩 풀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느껴요. 이와 마찬가지로 작업 또한 하루아침에 멋진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요. 매일 매일 꾸준히 잠깐이라도 작업실에 가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잠시 하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어떤 일에 너무 몰두하기보다는 잠시 거리를 두고 객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을 추천합니다.
건강과 인간관계입니다. 주변에 몸이 아프거나, 부모님이 편찮으신 분들이 있습니다. 모두 건강하고 평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도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의도치 않게 오해를 살 때도 있고, 선의가 비난으로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제 몸가짐과 행동, 생각과 말을 더욱더 잘 살펴야겠다는 마음입니다.
창작자로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드는지 뿐만 아니라, 그 작업의 근본에 어떤 질문이 담겨 있는지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같은 작업일지라도 다른 질문을 할 수 있다면, 그 작업은 새롭게 해석되고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어떤 하나의 확고한 정답을 추구하는 작가가 아닌, 끝없이 질문하고 고민하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제가 지금까지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주변에 존재하는 좋은 동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같이 즐길 수 있는 동료와 함께하는 일이 창작을 오래 지속할 방법이라고 믿어요. 예전에 자전거를 타면서 이런 말을 들었는데요. 혼자 자전거를 타면 빨리 가지만, 같이 자전거를 타면 멀리 간다고요. 창작의 길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보다는 제 창작물이 어딘가에서 지속적으로 사랑받고 공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보다 작업이 더 기억에 남는 창작자로 남고 싶습니다.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작업할 수 있는 미래. 최근 들어 개인적인 문제보다 사회적인 문제로 인한 불확실성이 커진 것 같아요. 이러한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데 개인으로서 많은 한계를 느꼈습니다. 우리 사회와 커뮤니티가 조금 더 안정적이고, 평등하며,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는 환경이 되길 바랍니다.
Artist
이희준(@lee.heejoon)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조소과를 졸업하고, 영국 글래스고 예술대학교에서 순수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Scaffolding»(MASSIMODECARLO Pièce Unique, 프랑스 파리, 2023), «Scaffolding»(금호미술관, 2023), «Heejoon Lee»(국제갤러리 부산점, 부산, 2022), «Image Architect»(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1), «The Tourist»(레스빠스l’espace71, 2020), «Emerald Skin»(이목화랑, 2017), «The Speakers»(위켄드, 2017), «Interior nor Exterior: Prototype»(기고자, 2016)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시립미술관(2024), 송은(2023, 2022), 록펠러센터(2023),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2023), 금천예술공장(2022), 아트선재센터(2021),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2019), 뮤지엄 산(2019), 세화미술관(2019), 아트스페이스 휴(2019) 등 국내 유수 기관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여했다. 2021년 인천아트플랫폼, 2022년 금천예술공장, 2023년 서울시립 난지창작스튜디오, 2024년 캔 파운데이션 명륜동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했고, 2025년에는 영국 런던 델피나 레지던시에 입주할 예정이다. 2019년 미술전문지 «퍼블릭 아트»에서 주관하는 ‘뉴히어로’ 대상 작가로 선정됐다. 주요 작품 소장처로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