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은 언제나 변한다. 그 개념도 그러하거니와, 그 범주도, 그 주체도, 그 자체도.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 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나 큐레이터, 컬렉터 혹은 기타 등등 전문가 그룹에 들지 않더라도, 순수한 관람객이나 지나가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제 기준을 바꾸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럴 땐 오히려 동시대적인 물결 한 가운데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감사할 때도 있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현대 미술을 감싼 신경망이 고도로 발달한 곳에서는 새로운 발견, 새로운 의미 부여, 추락 혹은 부활에 대응하는 찌릿찌릿한 연쇄 반응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테니까. 차라리 낡더라도, 단선적이더라도, 내가 파악한 범주가 손에 잡힐 때 흥미가 가는 까닭은 맥락을 온전히 이해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적 사고가 큰 역할을 담당한다.
이게 다 무슨 헛소리냐고? 짧게 말해,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도 계속 까먹는 사람에게 동시대 현대 미술의 유연한 계보는 너무도 스트레스라는 뜻이다. 게다가 바로 몇 년 사이에 극적으로 ‘재조명’ 받는 인물이라면 더더욱. ‘최초’라는 말을 좋아하는 내가 유독 ‘아시아 최초’라는 단어가 전시에 붙으면 괜히 불안해지는 이유다. 지금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가 참으로 알맞은 예다. 2021년 독일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국제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모더니즘 조각사의 ‘게임 체인저’라는 평을 받았다는 스위스 여성 아방가르드 예술가 하이디 부허Heidi Bucher의 아시아 최초 회고전?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조금 아는 계보도에 끼어들어, 인식의 틈을 억지로 넓히며, 또다시 지식을 확장하는 일이 생기는 것은 피곤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게 웬걸, 아주 명확한 주제 의식과 신비로운 작업을 보니 이토록 빠르게 한국에 온 일이 오히려 반가운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수많은 작가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급소를 맞아 신선함을 느꼈달까.
하이디 부허는 해방이라는 단어를 평생 가슴에 지니고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의 길을 우직하게 간 예술가다. 죽는 날까지 기성 예술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기 확신을 통해 아카이브까지 완벽하게 할 정도로 뒷마무리도 깔끔하다. 그러니 이제 ‘발굴’되어 ‘부활’의 폭포를 맞고 있는 거겠지. 부드러운 라텍스로 여성의 삶과 기억을 담은 물건을 방부처리하고, 신체를 라텍스로 감쌌다가 뜯어내어 잠자리로 은유되는 유충의 탈바꿈 흔적을 현실에 구현하고, 가부장적 위계 속에 존재하며 수많은 기억을 담은 공간에 라텍스를 붙인 후 마치 껍질(혹은 피부)을 벗기듯 공간의 형태를 뜯어 비로소 해방되는 행위를 사진, 영상, 퍼포먼스, 실물까지 다양하게 구비한 이번 회고전은 웹사이트에 올라간 텍스트를 꼼꼼히 읽으면 읽을수록 ‘아하’ 소리가 절로 나며 아주 낯선 작업이 내게로 찾아오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
어색해서, 잘 몰라서, 이상해서, 마음에 안 들어서, 거북해서, 이해가 안 돼서, 지금 삶에 하등 이득이 안 돼서 꼭 지금 경험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명명백백하게 충족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일상의 작은 틈을 벌리며 찾아오는 이질감과 새로움이 의도치 않게 우리 삶에 균열을 내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할 때도 있다. 겪고 보니 또 나름의 맛이 있는 게 우연의 멋이라면, 현대 미술의 맛과 멋을 탐험하는 흔치 않은 기회로 추천한다. 아, 그래서 따봉이냐고? 의미가 있었냐고? 할까 말까 고민할 시간에 일단 하는 게 낫다는 말도 있던데. 단, 약간의 능동성은 필요하다. 무조건 거부하는 자에게 만병통치약은 없나니.
Exhibition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
기간: 2023. 03. 28 – 2023. 06. 25
Place
아트선재센터: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3길 87
Admission
25-64세: 1만원
19-24세: 7000원
9-18세: 5000원
예술인패스 소지자: 7000원
Writer
전종현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학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했고,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프포스트코리아»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 «LUXURY» «AVENUEL» 등에 글을 기고한다. «비애티튜드»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Photographer
박도현(@dhyvnpark)은 홍익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한 사진 기술자이다. 주로 렌즈를 기반으로 한 이미지를 제작하며, ‘좋은 이미지 제작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