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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90년대 소녀 변신만화를 기억하시나요

Writer: 이화영
세일러문, 달의 요정, 픽셀, 이화영, 보이어, bowyer

Be Original

아티스트에게 직접 의뢰한 아트 워크를 소개합니다

‘비오리지널’은 매거진 이슈의 테마에 맞춰 아티스트에게 작업을 의뢰하고 그 과정과 결과물을 살펴보는 섹션이에요. 첫 번째 이슈의 테마는 ‘소닉 노스탤지어Sonic Nostalgia’. 그래픽 스튜디오 보이어의 멤버인 이화영 작가는 환상, 기억, 소녀,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은데요. 그는 이번 테마를 시각화하기 위해 ‹달의 요정 세일러문›의 오프닝 시퀀스를 가져와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다시 직조했답니다. 과연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까요?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보이어BOWYER’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로 황상준과 이화영이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번 작업은 그래픽 디자이너 이화영이 맡아 진행했다. 처음 ‘소닉 노스탤지어’를 주제로 한 작업을 의뢰 받았을 때, 기존에 진행하던 작업 전반에 깔린 주제 의식이 노스탤지어여서 무척 반가웠다. 과거에 대한 것은 주로 시각에 의존했던 기억이 대부분인데 소리와 연결하는 접근 방법이 새로웠다. 그런데 사실 시각적 기억이나 음향적 기억이나 근본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보는 행위’는 빛의 파동을 눈으로 수용하는 것이고, ‘듣는 행위’는 소리의 파동을 귀로 수용하는 것이라 결국 둘 다 어떤 진동, 즉 ‘파동의 감각’을 몸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받은 자극의 집합체인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기억과 그것을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의 감각은 진동의 기억, 파동의 기억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작업 주제를 해석하고 영감받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에서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억에 저장되는 것을 어떤 주제와 맞닥뜨렸을 때 적절하게 잘 끄집어내 조합하곤 한다. 그런 측면에서 어떤 대상을 해석하는 데 있어 객관적 사실이나 논리보다는 그 사물과 연관된 개인적인 기억, 그 순간의 감정,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 등을 더 중요한 요소로 사용하는 편이다. 노스탤지어는 결국 기억에 대한 이야기인데, 기억은 시각적인 것과 떼려야 뗄 수 없기에 ‘소닉 노스탤지어’라는 주제도 단순히 청각적 기억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시각과 청각을 결합한 시청각적 노스탤지어로 해석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시청각 자료를 생각해보니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어렸을 적 매일 같은 시간에 방영해주던 애니메이션의 오프닝 영상과 주제가였다. 저녁 6시만 되면 친구들과 놀다가도 TV 앞에 앉아 오프닝을 보며 오늘 볼 만화는 어떤 내용일지 두근두근하던 기억, 화려한 색채와 움직임으로 장식된 그림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기억이 참으로 선명하다. 그래서 어린시절 경험한 가장 강렬한 시청각적 기억인 90년대 한국에서 방영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오프닝 시퀀스를 소재로 삼았다. 작업자인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당시 소녀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였던 1996년 KBS에서 방영한 «달의 요정 세일러문»의 오프닝 시퀀스를 구체적인 작업 주제로 선정했다. 당시 어린 소녀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이었고, 세일러문과 관련된 각종 굿즈가 문방구에 좍 진열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서른세 살인 지금도 오프닝 시퀀스의 도입부 이미지, 음악을 잠시만 접해도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하고 이어지는 주제가가 자동으로 입에서 나온다.

작업을 진행하는 방식에는 여러 층위가 있어 뭐라고 딱 집어 ‘이것이 내 방식이다’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지만, 최근 몇 년간 이어가고 있는 작업자의 개인 작업에는 작고 단순한 요소인 ‘모듈’을 조합해 이미지를 제작하는 기법을 지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모듈 기법을 계속 사용하는 이유로는 행위적인 측면과 개념적인 측면이 모두 존재한다. 행위적인 이유는 이 기법이 공예처럼 반복적인 노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작은 모듈을 하나하나 옮기며 마치 수를 놓듯 작업하곤 하는데, 이렇게 반복적 행위를 하다 보면 생각이 점차 사라지고 명상적인 기분이 들며 나름의 치유적 기능이 생긴다. 개념적인 이유를 꼽자면, 모듈 기법이 작업자가 생각하는 세계의 구조와 유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대표적인 사상 중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개념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불변하고 분해할 수 없는 본질을 가진 게 아니라 다만 조건에 따라 조합되고 구성된 것일 뿐이라는 내용이다. 작업자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가장 합리적인 관점이란 이러한 제법무아에 가깝다.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인간의 몸은 작은 원자로, 그 원자는 더 작은 소립자로 쪼개져 서로 연결되고 구성된 따름이다. 즉, 우리의 복잡한 세상 역시 작고 단순한 모듈의 수많은 조합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 비애티튜드 Issue 1의 주제인 ‘소닉 노스탤지어’를 시각화하기 위해 대상으로 삼은 소재는 앞서 말한 «달의 요정 세일러문(1996년, KBS 버전)» 오프닝 시퀀스였다. 그리고 시각화 방법론으로는 모듈 기법을 사용했다. 오프닝 시퀀스는 약 2초 간격으로 30장 정도 프레임을 추출해 재조합했다. 이때 프레임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기보다는 가로로 길게 늘여 원래 이미지를 잘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형해 사용하였다. 이미지를 늘리면 압축되며 마치 짧은 소리 파동의 형태처럼 보일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서른두 개의 프레임을 위 아래로 눌러버린 기다란 직사각형 형태로 만들고 순서대로 이어붙였다. 그다음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추상 패턴이 되어 버린 이미지를 모듈 기법으로 재작업했다. 이미지 자체가 옆으로 일그러진 데다가 모듈로 인해 픽셀레이트되다 보니 정보가 더욱 압축, 소실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압축과 일부 정보의 소실 현상 또한 우리의 기억 저장 과정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 이미지를 모듈로 한 땀 한 땀 모두 작업한 후에는 일부에 그라데이션 효과를 입혀 세일러문이라는 콘텐츠가 지닌 환상적인 뉘앙스를 첨가했다. 그다음 과정에서 완성한 이미지를 다시 한 번 양 옆으로 눌러 원래 비율로 만들었는데, 이 과정이 작업 결과물을 더 재미있게 만들었다. 그 결과 원래 이미지처럼 형태가 얼핏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압축되고 늘어진 기억을 다시 상기할 때 예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원래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는 것과 유사했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 Expanded› © 이화영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 Compressed›  © 이화영

압축되고 늘어져 버린 기억, 그래서 반짝거리며 추상적인 진동의 형태 정도로만 남겨진 기억, 보일 듯 말 듯 하기도 하고,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고, 생생하면서도 꿈결 같은 기억을 형상화했다는 점이 이번 작업의 주요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이런 내용을 본 적 있다. 평생 장님으로 살던 사람에게 눈을 이식해 세상을 보게 하면 처음에는 온갖 색과 형태가 뒤섞여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보인다고. 우리는 어떤 명확한 형태가 그 모습대로 존재한다고, 혹은 명확한 소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이 그렇게 보이고 들리는 이유는 우리의 축적된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 얼핏 보면 알아볼 수 없고 아무런 의도 없는 것 같은 색과 형태의 나열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을 대입할 때 그것이 갑자기 구체적인 의미와 형태를 띠고 다가오며, 더 나아가 익숙한 소리가 들리는 듯한 경험을 체험해보길 작게나마 기대해본다.

평소 상업 작업과 개인 작업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개인 작업은 그것대로, 클라이언트 잡은 그것대로 진행하고자 한다. 다만 클라이언트 잡 때문에 개인 작업을 손 놓지 않고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런 노력 덕분에 개인 작업으로 진행했던 것을 보고 연락을 하는 클라이언트도 조금씩 생긴다. 노력이 더 쌓여 결국 클라이언트 잡과 개인 작업의 구분이 크게 의미 없어지는 날이 오길 소망해본다. 기존에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나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개인적으로 주제를 찾아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작업했다면, 이번 커미션 작업은 생각해볼 만한 좋은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시각 작업으로 표현하는 과정이었다. 마치 마음 맞는 친구와 즐거운 대화를 한 느낌이다. 평소 창작자의 한 사람으로 그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이 거대한 세계에 작게나마 배치해본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쩌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르기에. 명확하고 구체적인 미래 계획은 없지만, 어제보다, 한 달 전보다, 일 년 전보다 조금은 더 확장되고 깊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Artist

이화영은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으며 환상, 기억, 소녀, 동양철학 등에 관한 내용에 관심을 갖고 있다. 2014년부터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플랏의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2016년 보이어를 황상준과 함께 설립했다. 보이어는 문화예술 혹은 크고 작은 상업 프로젝트의 비주얼 아이덴티티, 각종 인쇄물, 제품 등 폭넓은 분야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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