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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그의 작업은 언제나 벌서는 중

Writer: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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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유리 작가는 늘 그림과 기싸움을 합니다. 그를 가장 괴롭히면서도 창작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게 바로 자기 의심이기에, 자기 기준과 판단과 안목이 맞는지 작품을 세워두고 눈싸움하는데요. 가끔 여기에서 지면 그림을 안 보이게 돌려놓고 기약 없이 벽에 세워두는 상황을 ‘그림 벌세운다’라고 표현해요. 세상에 나온 그의 작업은 끊임없이 의심하는 시간의 산물입니다. 문자-시각 언어 사이의 간극 혹은 상호보완적 관계를 찾아 헤매며 회화와 아티스트 북 작업에 몰두하는 작가는 일단 해보고 싶은 게 생기면 저질러 보면서 판단하고 답을 내립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많으니까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기 위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작업하는 마음가짐과 용기를 가지고,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지치지 않게, 계속 멀리 보며 스스로 다그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유리 작가. 다음 스텝이 계속 궁금한 사람이 되고 싶은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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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된 감각을 숨기기›, 2024, Oil, color pencil on canvas, 162.2 × 130.3 cm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유리입니다. 평면 회화 위주로 작업하면서 책의 개념이나 형태를 취하는 아티스트 북 작업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언어로 정의되지 못하는 것들, 혹은 언어의 약속에 가려진 미묘한 지점에서 촉발되는 아이디어를 시각적으로 발화하는 과정에서 문자로서의 언어와 시각예술로서의 언어 사이의 관계성을 탐구 중입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사실 아주 어릴 적에는 제가 커서 발레리나가 될 줄 알았어요. 7년 정도 발레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발레리나를 꿈꿨죠. 하지만 건강 문제와 함께 가족들의 반대로 발레에 대한 꿈을 접게 되었습니다. 원래 미술을 좋아했던지라 발레를 그만두면서 발레 학원 바로 아래층에 있는 미술 학원이라도 보내달라고 떼를 썼어요. 그때가 미술 교육을 받은 첫 번째 기억입니다. 발레를 못 하게 되는 마음에 치기 어린 마음으로 보내달라고 한 미술 학원이었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나네요. 사실 부모님은 미술 또한 진로가 아닌 취미로 즐기길 바라셨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건 왜 다 못 하게 하냐’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저를 보시고 ‘얘는 하고 싶은 걸 시켜야 하는 아이구나’ 싶으셨대요. 그렇게 결국 예중, 예고에 진학해 미술과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자연스럽게 미대에 입학했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작가의 삶을 바라보았던 것 같아요. 중학생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창작자로 사는 게 늘 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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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어지고 쌓여질 것들›, 2024, Oil, color pencil, conte on canvas, 27.3 × 45.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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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어지고 쌓여질 것들›, 2024, Oil, color pencil, conte on canvas, 27.3 × 45.5 cm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지금 일산에 있는 상가 건물을 작업실로 쓰고 있습니다. 원래 서울에 계속 머물렀는데 작품이 점점 많아지고 작업 스케일도 커지면서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졌어요. 합리적인 가격대를 찾아가다 보니 일산에 이르게 됐네요. 직전에 계셨던 분이 가정집 같은 구조로 공간을 개조해 두어서, 거실과 세 개의 방으로 분리되어 있어요. 작업은 주로 거실에서 진행하고, 방들은 각각 수장고, 아티스트 북 작업을 위한 공간이자 서재, 휴식 혹은 캔버스 밑칠을 할 수 있는 용도로 사용 중입니다. 방이 나뉘어 있는 터라 어느 정도 숙식도 가능해서, 지난여름에는 넉 달 동안 반려묘 반달이와 함께 살면서 작업을 이어 나갔어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특정 소재를 꼽기란 어려운 일이에요. 혹은 ‘영감’이라는 게 특별하거나 아주 뚜렷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요. 저는 작가가 하나의 필터 같다는 생각을 늘 하는데요, 방대한 양의 무언가들이 작가라는 필터를 거쳐 걸러지면서 작가의 작품이 된다고 느껴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와 감각이 들어오고 그 모든 게 영감이라고 부르는 대상의 원천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를 지칭하기엔 어려움이 있어요. 제 내부에 어떤 안테나가 늘 작동하는 기분인데요.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일상적인 순간에 느끼는 낯선 감각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그중 언어적이고 시각적인 비중이 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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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2024, Oil on canvas, 30 × 3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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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그림과 눈싸움을 하고 있다’ 혹은 ‘그림 벌세우는 중이다’라는 말을 자주 해요, 그만큼 창작 과정은 꽤나 치열한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늘 그림과 기싸움하는 기분이 들어요. 많은 창작자가 그렇겠지만, 창작 과정에서 저를 가장 괴롭히면서도 또 한편으로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건 자기 의심이에요. 정답이 없고, 아무도 끝을 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모든 시작과 끝의 판단은 작가의 몫이 되는데요. 여기서 자기의 기준과 판단과 안목이 맞는지, 끝없이 의심합니다. 그래서 저는 작품을 제작하는 시간보다 작품을 세워두고 눈싸움하는 시간이 훨씬 긴 것 같아요. 가끔 그 싸움에서 지면, 그림을 안 보이게 돌려놓고 몇 주 혹은 몇 달을 벽에 세워두는데, 그걸 ‘벌세운다’고 표현해요. 그래서 한 작품씩 차례대로 작업하기보다, 여러 작품을 늘어놓고 동시에 진행합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늘어놓은 다른 작업을 계속 째려봐요. 빠르게 마무리하며 완성하는 작품도 있지만, 몇 달을 세워두었다가 수정하기도 한답니다. 저에게 창작 과정은 끝없는 의심의 시간이에요.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이제 작년이네요. 2024년 12월, TINC에서 열린 기획전 «황금 화살»에 선보인 작품들이 가장 근작인데요. ‘중간 단계에 놓인 존재들’에 관해 그린 작업이 많았어요. 원래도 관심이 깊은 주제였고, 전시 공간이 실제 교회로 쓰였던 곳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간 단계’를 실존-부재 그사이의 단계로 상정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탄생-죽음 그사이에 놓인,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그림이 많았네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 혹은 상황에 대해 시각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쓰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작품에 제목을 붙이거나 설명하기 위해서는 언어화가 꼭 수반돼요. 그 과정이 개인적으로 재밌는 포인트라, 그림에 이름을 지어주기보단 그 뉘앙스를 표현할 수 있는 약간의 힌트가 되는 말을 짓는다는 느낌으로 제목을 정합니다. 문자-시각 언어 사이의 간극 혹은 상호보완적 관계를 보는 게 작업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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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화살», TINC, 2024

‹멀고 검은 자국›에 드러나는 네 다리가 달린 동물 같은 형상이 최근 작업에 눈에 띄게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요. 자연스럽게 이 형상이 무엇을 그린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이 형상은 무엇도 아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형상이라 말하고 싶어요. 문자로 귀결되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최근 몇 달 동안 길을 걸으면서 새의 사체를 몇 번이나 보았고, 운전하다가도 로드킬을 당한 동물들을 유독 자주 보았어요. 그런 존재를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는 순간을 겪을 때마다 죄책감을 포함한 여러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죠. 특히 로드킬의 경우, 어떤 동물인지 정확히 알아볼 수도 없었고 그저 어떤 자국으로 제 눈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존재가 그렇게 하나의 검은 자국이 되어 사라지는 과정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무척 마음이 시렸어요. 그래서 이를 특정하기보단 알아보기 힘든 모습 그대로, 이름을 붙이기 모호한 모양 그대로 그려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존재에 대한 일종의 애도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 죄책감을 덜기 위한 알량한 방법이기도 하고요. 살아있음과 죽음 사이에 놓인, 정의되지 못하는 모든 존재에 대한 애도 혹은 소생을 기원하는 작업이었던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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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검은 자국›, 2024, Oil and conte on canvas, 181.8 × 181.8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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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슬픔이 아닌 것으로 만들기›, 2024, Oil and conte on canvas, 72.7 × 72.7 cm

이처럼 제 그림에는 무엇인지 알 것 같으면서 명확히 이름 붙이기 힘든 형상 혹은 상황이 자주 등장합니다. 시각적으로 무언가를 마주할 때 그 형상을 해석하면서 자연스레 이름을 붙이게 되는데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는 순간의 조우가 제가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지점입니다. 적확한 낱말을 찾지 못하는 당황스러움에서 시작해, 언어를 넘는 감각으로 확장하면서 언어 사이의 틈을 들여다보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작업하는 것이죠.

최근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요즘 그림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표면을 찾기 위해 실험 중이에요. 그림이 얹히는 표면에 따라 화면에서 표현할 수 있는 깊이가 달라지기도 하고, 어떤 지지체에 그림이 올라가는지에 따라 작업 내용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캔버스에 그리는 그림부터 종이에 그린 그림을 책으로 만들거나 혹은 나무를 깎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 오브제적인 작업을 하는 일까지, 캔버스 안이든 밖이든 어떤 표면에 어떻게 그림을 표현할 것인지 신경 써서 작업하고 있어요. 표면에 한정 짓기보다 그림이 얹히는 대상 자체와 회화의 확장성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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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물, 중간의 모양, 혹은 티끌›, 2024, Water-based spray, conte and oil on wood panel, 190 × 146 cm

 

‹The Unknown›, 2024, Oil on canvas, 33.4 × 19 cm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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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짐을 기다리는 것들›, 2024, Oil and conte on canvas, 112.1 × 162.2 cm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작업과 일상이 섞인 지 이미 오래라 정확히 분리할 수 없지만, (웃음) 작업과 관련된 것을 배제한 시간을 일상이라 한다면 요즘 고양이와 발레가 제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요. 어릴 때 발레를 그만두고 어언 20년이 지나 다시 발레를 배우고 있습니다. 늘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었지만 동시에 외면하기도 했었는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고 이제서야 다시 해볼 용기가 생겨서 취미 삼아 즐겁게 하고 있어요. 어릴 적 생각이 나서 좋기도 하고, 잘 쓰지 않던 몸의 부분들을 움직이며 낯선 느낌을 받는 것도 좋습니다. 운동으로도 유익하고요. 아침에 발레하고, 오후에 작업실로 이동해 할 일을 처리하고, 밤에는 고양이 반달이와 시간을 보내는 게 삶의 큰 패턴인 것 같아요. 작업실이 조금 멀리 있다 보니 운전하는 시간이 꽤 되는데요. 그 시간을 드라이브 삼아 음악도 듣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는 일이 일상의 큰 부분이기도 합니다. 뮤지컬, 발레, 클래식 등의 공연을 관람하며 종종 다가오는 일상의 권태로움을 달래기도 해요.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에 대해 자주 생각해요. 그림 그리고 책 만드는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엮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회화 작업을 할 때도 이미지 하나하나를 상상하기보다 시리즈를 상상하고, 떠오르는 단상을 한 화면에 담아내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나의 맥락으로 묶어내는 방법을 고민하죠. 더군다나 책을 만드는 제책(製冊) 과정에서 무언가를 물리적으로 꿰매거나 붙이면서 ‘연결’하는 일을 겪다 보니, 최근에는 ‘연결성’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머리에 떠돌아다니네요. 제가 하는 작업이 내 생각과 감각을 통해 타자와 나를 연결하고 있다고도 느껴지고, 종국에는 나-타자-세상, 이 거대한 연결고리에 관해 상상하게 됩니다. 이 연결성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갈지 아직 명쾌하지 않지만, 앞으로의 작업과 전시에 녹여보고 싶어요.

 

요즘 길을 걸으면서 무언가 연결된 방식에 대해 살펴보는 중이에요. 꼭 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연결 고리를 상상하게 되는 것까지 포함해서요. 커튼을 묶고 있는 매듭, 눈에 남은 발자국이 만든 순서와 모양, 공사장의 철골 구조, 전깃줄이 얽힌 모양, 새들이 나무에 앉은 모습, 나뭇잎이 가지에 달린 이음새, 손을 잡고 가는 두 사람의 모양새, 벽돌을 끼워 맞춘 방식 등등…느슨하거나 끈끈한 여러 방식의 모습을 살펴보며 그것이 은유하거나 의미하는 관계성과 연결성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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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낱말들(Heavy Words)›, 2024, Hand-crafted artist’s book, Carving and oil painting on wood block, 30.4 × 20.4 × 10.2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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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하고 싶은 건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지라, ‘하기 싫은 거 할 시간에, 하고 싶은 걸 더 하자’주의 인데요. 작업에도 적용되는 태도 같아요. 일단 해보고 싶은 게 생기면 저질러 봐야 하기에 작업 과정에서 많이 주저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작업량도 많은 편이고, 아주 명확하게 이유를 찾지 못하거나 살짝 의심스럽더라도 일단 작업을 실행해 봐요. 그러면서 답을 찾기도 하고요. 우선 시작하고 나서 많은 판단을 하는 편입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많으니까요. 회화 작가에게 다작은 필수라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전시를 위한 작품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으면 무조건 그리려고 합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 또한 보통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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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날›, 2024, Hand-crafted artist’s book, 376 pages (including 366 drawings), 21 × 15 × 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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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날›, 2024, Hand-crafted artist’s book, 376 pages (including 366 drawings), 21 × 15 × 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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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날›, 2024, Hand-crafted artist’s book, 376 pages (including 366 drawings), 21 × 15 × 5 cm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사실 작년에 조금 슬럼프를 겪었던 것 같아요. 극복이라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슬럼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슬럼프를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내려 놓진 않아요. 이번에 제가 취한 방식은 정면으로 마주하기에 가까웠어요.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걸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작년 여름에는 개인적으로도 상황적으로도 꽤나 힘든 시기를 겪었어요. 이를 돌파하고 싶어서 작업실에서 먹고 자며 시간을 보냈어요. 어떻게든 작업실에 저를 욱여넣어 피하지 말고, 뭐라도 해보자는 심산이었죠. 결론적으로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었습니다만, 슬럼프가 왔다고 작업을 피하거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평소보다는 분명 조금 느리고 더뎠지만, 결국 그 시간이 지나니까 그림이 남더라고요.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이렇게 그림을 남겼구나’ 생각하니, 슬럼프가 조금 지나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극복이라기보다 스스로에 대한 용기가 조금 더 생겼달까요. 앞으로 슬럼프가 다시 오더라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결국은 지나가는구나, 하는 마음가짐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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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히 껴안고 단단히 풀기›, 2023, Hand-crafted artist’s book, Oil and color pencil on paper, 52 × 770 cm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현실적으로 가장 괴로운 문제는 작업실과 관련됐어요. 지금 쓰는 곳이 네 번째 작업실인데, 매번 어떤 문제들 때문에 격년으로 이사를 다니고 있네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일산 작업실을 구했지만 몇 가지 문제가 생겨서 또다시 작업실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작업 공간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직업이다 보니, 당연히 작업실에 들어가는 비용도 늘 고민거리이고, 매번 이사할 때마다 너무 지쳐요. 항상 그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고른 공간에서 예기치 못한 문제와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나와 꼭 맞는 온전한 내 공간이 없음에, 또는 계속 이렇게 떠돌아다녀야 함을 느낄 때, 굉장히 버거운 짐을 진 듯한 느낌입니다. 계속 쌓여가는 작업을 보관할 장소와 방법에 대한 고민도 함께 들고, 점점 커지는 작업 규모를 감당할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과정에서 또 비용적인 문제에 부닥치게 돼요. 작업실과 관련한 여러 문제는 늘 마음의 큰 짐이 되는 것 같네요.

‹고작 한 장의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2023, Hand-crafted artist’s book, Oil, color pencil on wood block, 30.4 × 20.4 × 5.2 cm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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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미Dummy›, 2022, Hand-crafted artist’s book, Oil on paper, 38 pages, 30.8 × 24.5 × 3.5 cm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지속성을 중시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작업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용기를 갖는 것. 결국 계속 무언가를 해야만, 해 나가야만, 해결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이 부분에 대해서 저도 늘 고민해요.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앞으로도 변함없이 좋아할 수 있을까?’, ‘ 이 일을 계속 지속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까지요. 누군가에게 노하우나 팁을 주기에는, 저 자신도 아직 답을 내리지 못한 고민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가 판단한 임시적인 답은, 지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자신에게 맞는 속도를 찾고, 지치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좋아하는 일을 지속할 힘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계속 멀리 보면서 스스로 다그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에요. 쉽지는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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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관(Little Coffin Book)›, 2023, Hand-crafted artist’s book, Color pencil, pastel on paper, clay, wood, 14.5 × 27 × 11.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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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관(Little Coffin Book)›, 2023, Hand-crafted artist’s book, Color pencil, pastel on paper, clay, wood, 14.5 × 27 × 11.5 cm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다음 스텝이 계속 궁금한 사람.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차별 없고, 서로 존중하고, 미움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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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desvollmondes)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언어의 약속에 가려진 것을 들여다보고 이를 시각적으로 발화하는 일에 관심을 두며 작업한다. 문자로서의 언어와 시각 예술로서의 언어 사이의 간극 혹은 상호 보완성에 대해 탐구하면서, 평면 회화와 함께 책의 형태나 개념을 가진 아티스트 북 작업도 병행 중이다. 개인전으로 «없는 날»(페이지룸8, 2024), «느슨히 껴안고 단단히 풀기»(갤러리 인 HQ, 2023), «Double Bind»(포켓테일즈, 2023), «이렇듯 포옹은 문장이 되지 못하고»(별관, 2021) 등을 열었고, «황금 화살»(TINC, 2024), «메신저의 신비한 결속»(대전시립미술관 대전창작센터, 2024), «Lucid Mystery / Dark Clarity»(학고재, 2023) 등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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