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화 작가는 물에 천착합니다.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속성에 흠뻑 빠져들었기 때문이죠. 이동과 형태가 자유롭고 감각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물은 모호한 공간감을 구현하고 배치하는 일을 즐기는 그를 자유롭게 만든답니다. 게다가 관련 없는 사물과 사건에 이야기를 부여하고 연결할 수도 있고요.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채 구획되지 않은 공간, 단정 지을 수 없는 입장, 언제라도 허물어지거나 결합할 준비를 마친 유동적인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그는 평면과 입체를 조합해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변화를 이어가는 순환 속에 위치시키는 도전을 멈추지 않습니다. 변주와 퇴적, 구축과 흐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작품은 새로운 작품의 뼈대가 되기도 하고, 형태를 유지하는 외피에 변주를 가하며 유동성을 이어 나가요. 물처럼 유연하게 생각하며 유연하게 작업하기를 바라는 허연화 작가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입체를 다루면서 창문이나 문, 작업실의 크기 등 물리적인 스케일을 견뎌내는 게 항상 과제로 다가왔어요. 그러다 보니 유동적인 속성들을 쫓아 평면과 조각이 공존하는 쪽으로 설치 작업을 풀어내게 됐어요.
‹Circle of Water›, 2021, 석고, 레진, 35 (H) × 30 × 10 cm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현재 4년 넘게 사용 중인 작업실 밖으로 나가면 바로 앞에 심곡천이라는 작은 하천을 따라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어요. 도시계획사업을 통해 콘크리트가 덮여 도로로 기능하는 복개천이 되었다가, 일부를 재생해 물이 흐르는 생태하천이자 공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제가 물과 관련된 소재로 작업을 많이 하다 보니, 작업실 앞에 하천이 있다는 사실에 큰 만족감과 뿌듯함을 느껴요. 작업 중에 환기가 필요할 때면 나가서 30분씩 걷고 옵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저는 바다와 강, 빗물처럼 물과 관련한 풍경을 다양한 이야기로 풀어내는데요. 작업 중 ‹벼락 맞은 날›(2022)은 소나기가 내린 어느 날, 엄마가 등산하다가 간접적으로 벼락을 맞은 사건을 듣고 시작했어요. ‹Sailing›(2022)의 경우에는 학부생 시절 해양 요트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직접 바다에서 배를 움직였던 경험에서부터 이어지기도 합니다. 해무가 잔뜩 끼어 가시거리가 짧은 바다에서 경계 없는 색의 변화로만 존재하는 눈앞의 풍경이 기억에 깊게 남았어요. 땅의 지형이나 욕조 같은, 다양한 용기에서 형태가 달라지고 유동적인 속성과 물성 자체로 스케일을 가늠하기 힘들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물이 등장하지 않는 작업에서도 액체의 유동적인 속성 혹은 가변적인 공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동과 형태가 자유로운 액체의 속성을 드러낼 때도 있지만, 물이 표현해 내는 감각적인 풍경을 시각과 촉각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일에도 관심을 보이고요. 신체의 모든 기관이 물에 둘러싸여 공기와 차단될 때 다가오는 먹먹함에서 일시적인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낍니다.
‹Sailing›, 2022, 메시 펜스, 천에 디지털 프린트, 조명, 로프, 석고, 에폭시, 유리, 스테인리스 스틸, 가변 크기
‹Sailing›, 2022, 메시 펜스, 천에 디지털 프린트, 조명, 로프, 석고, 에폭시, 유리, 스테인리스 스틸, 가변 크기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저는 어떤 모호한 공간감이 떠오르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들을 배치하는 일을 즐겨요. 설치 작업을 해오며 연출하고 싶은 공간을 위해 평면과 조각을 함께 구성해 왔는데요. 최근에는 전체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작업으로 압축하려고 시도 중이에요. 제가 물을 매개로 삼는 이유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속성 때문에 구획된 경계를 흐리기에 용이하기 때문인데요. 각기 다른 성질의 액체가 자연스럽게 섞이듯 단서 없는 연결에 관심을 두고 작업합니다. 이런 속성을 이용해 언뜻 관련 없어 보이는 사물과 사건에 이야기를 부여하고 서로 연결하는 상황을 만들어 가고 있어요.
가령 ‹벼락 맞은 날›은 등산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갑작스런 소나기와 마주하며 생긴 일을 담고 있습니다. 벼락의 전류를 통해 이어지는 연결성에 주목해 낙뢰, 신경 세포, 모세 혈관, 식물의 뿌리 간에 형태적인 유사점을 자각하는 어느 날의 사건을 다루죠. 여기에는 과거의 작업이 다시 등장하기도 해요. 산호를 그렸던 평면 작업과 다른 전시에 선보였던 손이 있는 조각을 재등장시켜 제 역할에 맞는 새로운 쓰임새를 부여합니다. 입체 작업에서 공간을 점유하고 고정된 크기를 벗어나는 다양한 시도를 꾀하는 과정에서 작업이 제 쓰임을 지니고 순환 속에 놓이는 일을 고민하는 게 최근 작업에까지 이어지게 돼요.
‹벼락 맞은 날›, 2022, 페트지, 천에 디지털 프린트, 조명, 로프, 석고, 에폭시, 실리콘, 유리, 스테인리스 스틸, 캔버스에 아크릴릭, 가변 크기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Cycle›(2023)이 흥미로운 예인 것 같아요. 산호가 구축되는 방식을 생각하며 만든 작업인데요. 2021년 열었던 개인전 «Floating people»에 선보였던 신체 형태의 조각 작업을 새로운 조각의 뼈대로 재활용하고, 여기다가 수정, 광물, 산호 등의 자연물과 산업 재료가 붙으며 재구축되는 광경을 생각하며 계속 변주되고 순환 속에 놓이는 상황을 생각하며 작업했어요. 산호초가 해양 생태계에서 뼈대 혹은 폐 역할을 맡으며 외부로 구축되고 확장되는 모습, 또 환경 보호를 위해 투입한 인공 구조물에 산호가 이식되어 성장하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Cycle›, 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수정, 산호, 테라코타, 레진, 석고, 실리콘, 플라스틱 점토, 모래, 광물, 철사, 유리, 조명, 가변 크기
‹Cycle›, 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수정, 산호, 테라코타, 레진, 석고, 실리콘, 플라스틱 점토, 모래, 광물, 철사, 유리, 조명, 가변 크기
«Floating people», 탈영역 우정국, 2021
«Floating people», 탈영역 우정국, 2021
더불어 벼락을 통해 비와 물줄기, 강과 바다가 일으키는 물의 이동을 순환이라는 거시적인 단어로 표현하면서도, 이러한 상황을 만드는 존재에서 계속 변수를 생성하는 미미한 신체와 존재들의 미시적이고 우연적인 개입이 다시 큰 사이클로 들어가는 걸 나타내고 싶었어요. 벼락과 산호는 중심에서 뿌리로 뻗어 나가는 면모가 형태적 유사성을 띠는데요. 벼락이 비에서부터 바다까지의 커다란 흐름을 연상시킨다면, 작은 조각은 이를 변화시키는 변수 역할을 맡습니다.
올해 치른 개인전 «푸른 폐»에서도 산호의 풍경을 통해 변주와 퇴적에 대해 다뤘어요. 폐는 호흡하는 기관으로 산소를 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뱉으며 유기체의 대사 활동을 가능케 하죠. 호흡을 통해 들어온 산소는 혈액에 녹아들어 체내에 전달되고 순환을 통해 유기체의 동적인 변화를 지속합니다. 호흡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촉진하면, 외피는 성장 과정 중 부차적인 더해짐을 갖거나 노화의 덜어짐을 겪습니다. 그런 면에서 전시 속 작업은 변화의 과정에 놓이는 셈이에요.
«푸른 폐», 갤러리밈, 2024
‹Cycle-Black coral. Pb2›, 2024, 종이에 아크릴릭, 40 × 31 cm
‹초록 폐 덩어리›, 2023, 산호, 레진, 플라스틱 점토, 석고, 실리콘, 광물, 모래에 아크릴릭, 52 (H) × 34 × 32 cm
최근 작업을 통해 작가님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상태, 경계가 없고 구획되지 않은 공간감, 단정 지어질 수 없는 입장, 언제라도 허물어지거나 결합할 준비를 마친 유동적인 것.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형태를 유지할 수 없는 가볍고 연약한 재료로 작업할 때 일회적인 측면 때문에 환경에도 해롭고 소모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뒤로는 되려 견고한 속성을 가지는 작업으로 방향을 바꿨는데요. 그렇다고 작품이 유동적이지 않은 건 아니에요. 형태를 유지하는 외피의 존재 덕분에 이를 계속 변화의 과정에 놓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계속해서 책임질 수 있는 조각을 만들고 싶습니다.
«Hey Siri, How’s the Weather Today?», 얼터사이드, 2023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대부분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에는 운동을 해요. 수업이 있는 날에는 작업과 수업을 마치고 운동을 하러 갑니다.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재료와 운동에 관한 것인데요. 먼저 재료 이야기를 하자면, 투명한 물성을 표현하는 재료로 기존에 사용하던 플라스틱 수지 대신 유리를 써보고 싶어서 방법을 찾는 중이에요. 일단 유리와 수지를 함께 사용하는 걸 실험하고 있습니다. 운동은 바로 턱걸이예요. 지금 팔굽혀펴기는 연속으로 15번 가능한데, 턱걸이 1개가 아직 안 되네요. 올해 안에 턱걸이를 연속으로 하는 게 목표입니다.
‹투명한 몸›, 2022, 종이에 아크릴릭, 45 × 34 cm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유연하게 생각하고, 유연하게 작업합니다.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힘들게 고민하던 시기가 지나가면 항상 선물 같은 작업이 찾아왔던 과거의 경험이 큰 위안이 돼요.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생업보다 작업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분배하는 일을 항상 고민해요. 또한 공들여 작업하고 전시를 열었는데, 저와 소수의 (감사한) 지인들에게만 닿는다고 느낄 때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을지 고민이 많습니다.
«수영의 시간», 갤러리민정, 2022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작업과 함께 ‘미술재활, 미술심리’라는 수업을 병행하며 생각했던 지점인데요. 처음에는 도상을 통해 심리를 파악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지만, 점차 논리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비언어적인 것을 교환하고, 이를 서로에게 전달하며, 언어로 설명하거나 포착할 수 없는 감각을 시각적인 표현으로 충분히 가능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강, 바다, 수영장, 비처럼 물이 있는 풍경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하는데요. 여름과 함께 연상되어도 무척 좋겠네요.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하고 싶은 작업을 스케일과 시간을 비롯한 각종 현실적인 여건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서 좋은 작업을 양껏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차별과 폭력이 사라진 미래를 꿈꿉니다.
Artist
허연화(@semiunderworldsilk)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풍경을 작업으로 구현하며 한정된 공간의 크기를 극복한다. 물리적 한계를 해소한 환경에서의 물처럼 유동적인 물질과 신체에 대한 관심사를 다매체를 이용한 설치 작업으로 표현한다. «푸른 폐»(갤러리밈, 2024), «수영의 시간»(갤러리민정, 2022), «Floating people»(탈영역우정국, 2021)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제23회 송은미술대상전»(송은, 2023), «Inter-face»(페리지갤러리, 2022) 외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