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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창작은 직업이 아니라 역할

Writer: 박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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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박석민 작가는 현재에 조응하는 회화적 실천을 모색합니다. 그의 작업은 ‘멍때리기’에서 시작해요. 어떤 대상이 본질과 다르게 보이거나, 적확한 설명으로 표현할 수 없어서 붕 떠 있는 느낌이 오면 ‘왜 그럴까?’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죠. 그러다 일상에서 그 느낌과 연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잡아낼 때마다 열심히 수집하고 메모한 후 작업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과정을 시작합니다. 가끔 계획을 변경, 추가, 삭제할 필요를 강하게 느끼는데요. 그림에서 보이는 충동적이거나 비언어적인 요소는 그에 대한 산물이자 작업을 지속하는 큰 묘미라고 해요. 박석민 작가는 그림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복잡하고 입체적인 좌표 중 한 마디를 끊어내어 특정 시기의 작업으로 실체화한다고 말해요. 더불어 창작하는 일은 직업이 아니라 역할이라고 믿는데요. 조목조목 꼼꼼하게 의견을 제시하는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만나 보세요.

VORTEX 8, A-Lounge, 2023 (Old Present 07, 2023)

‹Old Present 07›, 2023, «VORTEX 8», 에이라운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회화 작업을 하고 있는 박석민입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작은 화랑을 운영하셔서, 그림을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누군가의 그림을 따라서 그린 기억이나 보고 들었던 여러 가지 경험이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된 바탕이자 동기가 되었어요. 대학 시절 건축이나 패션 분야에 기웃거렸던 몇 년을 제외하고는 그 후로 자연스럽게 지금에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VORTEX 8, A-Lounge, 2023 (Vortex-counterpoint 05, 2023)

‹Vortex-counterpoint 05›, 2023, «VORTEX 8», 에이라운지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시장 근처의 시끌벅적한 큰 길가 작업실에서 10년 정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곳을 사용하는 동안 줄곧 한적한 동네의 조용한 공간으로 가고 싶었는데, 얼마 전에 지금 쓰고 있는 작업실로 옮겨 왔어요. 여긴 고층의 고립된 닭장 같은 곳인데요. 이전 공간에 비하면 과하게 고요하고, 작업하기에 필요 이상으로 깨끗합니다. 개인전 준비를 위해서 6개월 정도 상주해 본 결과, 저와는 잘 맞지 않는 공간이라고 판단해서 계약 기간이 끝나면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지저분한 곳을 다시 찾아볼 계획입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SF 소설을 읽거나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오랫동안 한강 주변을 바라보거나 산책을 하거나 작업하는 동료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등의 일들의 상호작용으로 뭔가를 하고 싶은 의지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어요. 생각해 보니, 삶 자체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 같아요.

VORTEX 8, A-Lounge, 2023 (Old Present 05, 06, 2023)

‹Old Present 05›, ‹Old Present 06›, 2023, «VORTEX 8», 에이라운지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공상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은 편입니다. ‘멍때린다’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어떤 대상이 본질과 다르게 보이거나, 그동안 겪은 경험과 다르거나, 그전과 달라졌거나, 혹은 적확한 설명이나 형용사가 떠오르지 않는 등의 이유로 붕 떠 있는 느낌 때문인 것 같아요. 대상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몇 달 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일상에서 그런 느낌과 연결할 수 있는 현상, 사물, 사건, 형상, 단어, 이미지, 스토리 등이 유독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요. 그때마다 열심히 수집하고 메모합니다. 보통 그런 게 작업이나 전시의 밑바탕이 되었던 것 같아요. 큰 범주에서는 적절한 주제나 전시할 공간, 작은 범주에서는 기법, 마감, 프로세스 등의 계획을 사전에 설정한 후, 그림을 시작합니다. 계획을 나름대로 열심히 세우는 편인데도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계획을 변경, 추가, 삭제할 필요를 강하게 느낄 때가 있어요. 제 그림에서 충동적이거나 비언어적인 요소가 있다면, 많은 경우 여기에서 발생한 것 같은데요. 이런 부분이야말로 작업을 지속하는 큰 묘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VORTEX 8, A-Lounge, 2023 (Old Present 02, 03, 2023)

‹Old Present 02›, ‹Old Present 03›, 2023, «VORTEX 8», 에이라운지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지난 7월 북촌에 위치한 WWNN에서 개인전 «Teal Greenhouse»를 마쳤어요. 제목에서 ‘온실(greenhouse)’은 현재와 근미래를 연결하고 구분하는 관념적 장치로 기능하는데요. 사실 이 전시를 제안받기 전에 전시를 보러 작년 여름쯤 WWNN에 방문했을 때 공간이 마치 온실 같다고 생각했어요. 1층 전시를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갔을 때는 순간적으로 어둑하게 해가 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이걸 또 기억하고 있었죠. 우연처럼 몇 달 후에 읽게 된 소설들이 아포칼립스 이후의 재건을 다루는 내용이었어요. 여기서 섬, 아파트, 테라리움terrarium, 온실, 소행성 같은 ‘폐순환 생태계(closed ecological systems)’가 중요한 코드로 등장하더라고요. 최후 인류의 터전이자 최초 인류의 인큐베이터로 말이죠. WWNN으로부터 개인전을 제안받은 후, 온실이라는 폐순환 생태계의 시공간적 감각에서 기획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 비슷하고도 다른 2개의 전시가 서로 호응하는 것처럼 구성하면서, ‘틸teal’이라는 청록 계열 컬러를 중심으로 1층과 2층에 놓은 작품에 스펙트럼을 각각 다르게 적용하는 등의 나머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Teal Greenhouse, WWNN, 2024 (1)

«Teal Greenhouse», 2024, WWNN

Teal Greenhouse, WWNN, 2024 (3)

«Teal Greenhouse», 2024, WWNN

‹Teal Greenhouse 01›, ‹Teal Greenhouse 02›는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변형 캔버스에 그린 한 쌍의 그림입니다. 관람객의 동선을 염두에 두면 각 층의 시작 지점에 위치해 있어요. 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에서 멸망 이후의 재건 혹은 이에 대한 의지가 가장 큰 줄기라고 생각했어요. 그 주체가 꼭 인간일 필요는 없었고요. 그래서 오래된 지형지물이나 미물들에 어떤 의식이나 의지가 깃든 상태를 상상했던 것 같아요. 또 회화에 있어서, 근미래의 지표로 상정한 지점이 레퍼런스의 구성 방식과 물질의 적용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추상적인 조건을 시각화하기 위한 도구 및 재료로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 빅데이터 기반의 AI, 아크릴릭 미디엄, 돌, 각종 건축 재료를 폭넓게 활용했습니다.

Teal-Greenhouse,-WWNN,-2024-(Teal-Greenhouse-01,-2024)
Teal-Greenhouse,-WWNN,-2024-(Teal-Greenhouse-02,-2024)

(좌) ‹Teal Greenhouse 01›, 2024, «Teal Greenhouse», WWNN

(우) ‹Teal Greenhouse 02›, 2024, «Teal Greenhouse», WWNN

(상) ‹Teal Greenhouse 01›, 2024, «Teal Greenhouse», WWNN

(하) ‹Teal Greenhouse 02›, 2024, «Teal Greenhouse», WWNN

최근 작업을 통해 작가님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제 작업이 표면적으로 어떤 서사가 바탕이 되든 어떤 방법론을 취하든, 결국은 그림과 현재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생각하는 그림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복잡하고도 입체적인 좌표 중 한 마디를 끊어내서 특정 시기의 작업으로 실체화하는 행위를 하는 거죠. 전시 준비 막바지에 느낀 건데요. 텍스처와 제스처를 일치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묘한 기시감이 들더라고요. 마치 가상 세계의 코드를 짜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요. 현재의 세계를 시뮬레이션의 내부로 보고 있는 수많은 보고서처럼, 어쩌면 제 그림들도 가상의 어떤 지점을 지시하거나 혹은 그 방향으로 이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그림 그리는 일이 오롯이 작가의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당연하고도 음모론적인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Teal Greenhouse, WWNN, 2024 (2)

«Teal Greenhouse», 2024, WWNN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지난 작업에서 생긴 고민으로 바꿔 말해보자면, 어떤 그림을 소셜미디어가 아닌 실제로 봐야 하는 이유에 관한 생각이 많아졌어요. 달리 말하자면, 기획이나 스펙터클에서 떼어냈을 때, 과연 제 그림에 자체적인 매력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에요. 지금껏 전시나 작업에 접근할 때, 퍼즐 맞추기나 수학 문제 풀이에 접근하는 듯한 방식을 취해왔기 때문에 자칫 공허하거나 설명적이거나 딱딱해질 수 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한동안 시간상으로 여유로울 때 작업실에서의 그림과 전시장에서의 그림 사이의 간극을 좁힐 방법, 맛이나 여지를 남기는 기법 및 제스처에 관해 고민할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Teal Greenhouse, WWNN, 2024 (Terrarium 04, 2024)

‹Terrarium 04›, 2024, «Teal Greenhouse», WWNN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전시를 준비하지 않는 시기에는 아침에 눈을 뜨고 샐러드를 먹고 작업실에 출근해서 커피를 마시고 소설을 읽고 작업을 하고 퇴근해서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잠에 듭니다. 전시를 준비하는 시기에는 일단 눈이 떠지면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그림을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퇴근해서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잠에 듭니다. 보통 한 달에 한 번꼴로 친구나 동료들을 만나게 되는 것 같네요.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개인전이 끝난 지금은 지난 몇 개월 동안 머릿속에 자리한 일종의 관성을 덜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즉, 아무것도 안 한다는 뜻입니다. (웃음) 그밖에는 조깅, 운동, 혹은 오늘 뭘 해 먹을까, 정도를 생각하며 지내고 있어요.  

Angel Tail, everyART, 2022 (1)

«Angel Tail», 2022, 에브리아트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세상이나 사회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아 보인다고 정말 좋기만 한 건 아니기 때문이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요. 이건 기질이나 세계관과도 각각 연결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새로운 장으로 넘어갈 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그동안 어떻게 자신의 환경을 구축했는지 여부라고 봐요. 저는 지금도 아주 천천히 그에 필요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Angel Tail, everyART, 2022 (2)

«Angel Tail», 2022, 에브리아트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아직 명확한 방법을 찾진 못했어요. 보통 맥주를 마시며 감정이나 생각의 강도를 줄이는 노력으로 갈음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1년에 2~3번씩 찾아오는 번아웃을 어떻게 극복할지, 가장 큰 문제예요. 취미를 가져 볼까, 아르바이트를 해 볼까, 등등 정말 여러모로 심각하게 고민 중이에요.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저는 창작하는 일이 ‘직업’이 아니라 ‘역할’이라고 믿어요. 그에 대한 이유는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Angel Tail, everyART, 2022 (Angel Tail 11, 2022)

‹Angel Tail 11›, 2022, «Angel Tail», 에브리아트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창작과 생활의 병행은 인생을 걸고 진행하는 실험, 혹은 어쩌면 도박과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 같은 경우,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 세상이 작은 당근을 하나씩 입에 물려줬는데 그게 몇 번 정도 반복돼서 지금에 이르렀어요. 결론은 팁이라고 할 게 딱히 없고, 어지간하면 하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Angel Tail, everyART, 2022 (Angel Tail 11, 2022)

‹Mining Depth 15›, 2022, «Angel Tail», 에브리아트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일단 제가 죽은 뒤에는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고, 그전까지는 ‘그 사람은 그대로 멈춰있지는 않았어’ 정도면 참 좋겠네요.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관계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거나 뭔가를 더 보려고 여행을 떠나거나 등의 활동은 선호하지 않는 편이에요. 감동하거나 놀라거나 신기해하는 감정은 잘 느끼는 성향인데요.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아주 나중에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설탕을 녹인 공기, Artspace Boan, 2020 (Melting a Lump Sugar 04, 2020)

«설탕을 녹인 공기(Melting a Lump Sugar)», 2020, 아트스페이스 보안2, 통의동 보안여관

Artist

박석민(@pk_sk_mn)은 현재에 조응하는 회화적 실천을 모색한다. 가능한 많은 것을 분류하고 재정의하는 것이 지상 목표이므로 그림 안팎의 다양한 맥락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한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Teal Greenhouse»(WWNN, 2024), «VORTEX 8»(에이라운지, 2023), «Angel Tail»(에브리아트, 2022), «설탕을 녹인 공기»(통의동 보안여관, 2020) 등이 있으며 WWNN, 드로잉룸,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더페이지갤러리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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