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작가는 개와 인간의 관계를 주제로 회화, 조각, 설치 작업을 합니다. 반려견 다섯 마리와 오랜 기간 함께하며 느낀 감정을 포착해 화폭에 담아내는데요. 일상부터 개와 관련된 다양한 신화와 옛 이야기까지 다양하게 작품에 녹여내요. 인간과 동물의 평등하고 나란한 관계, 그리고 두 존재가 함께 걸어온 발자취를 작품에 고스란히 담고 싶다는 이승희 작가. 동물과 더불어 사는 다정한 사회를 꿈꾸는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He answered me with smile 영원한 미소, Big Blue ver.›, 2023, acrylic and epoxy on resin with magnet, 18.5 x 18 x 4.5 cm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일산에서 반려견 다섯 마리와 함께 사는 1994년생 개띠, 이승희입니다. 주로 개와 인간의 상호관계성을 주제 삼아 회화, 조각, 설치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어요. 사랑과 낭만을 꿈꾸며 약간의 능청스러운 유머가 삶에 불어넣는 활기를 좋아합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끄적이기를 좋아했어요. 다만 정교하게 그리기보다는, 조금 엇나가고 특이하게 그리기를 즐겼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부터 미술을 하고 싶어서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떨어졌고, 미술대학에는 정말 간당간당하게 추가합격으로 들어갔어요. 대학에 입학한 후에 영국으로 넘어가서 현지 대학에로 편입했는데, 우리나라와는 다른 시공간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정체성의 차이를 경험했죠. 돌아보면 아마 그때부터 한국적인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고, 그렇게 지금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The Cerberus I Met›, 2023, acrylic and acrylic medium on canvas, 130 x 162 cm
‹Mobius strip(The Landscape of Smell) 뫼비우스의 띠(후각의 산수)›, 2023, acrylic, acrylic medium, water based marker and pigment powder on canvas, 130 x 162 cm (좌)
‹Poker Face(The Landscape of Smell) 포커페이스(후각의-산수)›, 2023, acrylic, acrylic medium, water based marker and pigment powder on canvas, 162 x 130 cm (우)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일산의 끝, 파주의 초입 어딘가에 작업실을 두고 있어요. 창고로 쓰는 컨테이너 공간 한구석을 작업실로 사용 중입니다. 천장이 5m쯤 되는 공간이라서 큰 작업을 하기에 최적이에요. 다만 주위에 논밭 투성이라 문명과 고립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웃음) 그래도 반려견들과 뛰어놀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씰룩거리며 작업하기에는 참 좋은 곳인 것 같아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반려견과 함께 지내면서 경험하고 느낀 감정을 포착해 작업으로 옮기려고 노력해요. 늦은 밤 현관문을 열면, 제가 키우는 친구들이 언제나 저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비록 그 마음은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머물렀던 자리에는 선명하고 따뜻한 온도가 남아있어요. 이런 온도를 시각화해 작업으로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매일 밤 현관문 앞에서, 형언하지 못할 엄청난 감정을 느꼈거든요.
‹Destiny›, 2023, acrylic, acrylic medium, water based marker and pigment powder on canvas, 117 x 92 cm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마치 기자가 된 것처럼 개와 관련한 문화·과학·예술·영화를 찾아보고 조사하는 편이에요. 특히 다양한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존재하는 신화라든지 과거 문화권에서 동물이 호기롭고 신비롭게 활약하던 방식이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그때부터 동물이 지닌 속성, 삶에 대한 태도 등의 요소를 눈여겨보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일상 속 우리 삶에 동물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상상하면서 작업을 시작하곤 한답니다.
‹The great dog 1›, 2021, acrylic, plaster, epoxy putty and various material on styrofoam
‹문짝 시리즈›, 2021
작가님의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지난 8월 디스위켄드룸에서 개인전 «End of Summer»를 열었어요. 전시에 선보인 작업들의 출발점은 반려견들과 함께한 일상 속 풍경이었어요. 매일 아침이면 그릇에 사료를 채워놓고, 그 앞에 앉아서 반려견들이 사료 먹는 모습을 쳐다보는데요. 먹다 흘리고 남긴 사료들을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별자리처럼 보이더라고요. 그 별자리를 눈으로 쳐다보고, 손으로 쓸어 담으면서 오늘의 운세를 가늠해 보거나 미처 찾지 못한 사랑의 운명을 점치곤 했어요. 마치 타로 보는 것처럼요. 그러다 오리온의 개였던 ‘시리우스Sirius’가 떠올랐습니다. 시리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자 사냥꾼인 오리온을 수호하는 존재인데요. 우리가 별들 아래서 꿈꾸며 잠든 사이에도, 다정함과 따뜻함을 지닌 채 서로 함께하는 모습이 그려졌어요. 그리고 해가 뜨면 우리는 그들과 함께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죠. 우리들의 발걸음에 맞춰 걷기도 하고, 그들이 이끌며 안내하는 미지의 항로를 따라 거닐기도 하면서요. 그들과 함께 떠나는 여정을 풀어낸 작품들을 선보이고 싶었어요. 그 중 ‹Supreme›은 일상을 예견하는 신비로운 점괘이자 미지의 풍경으로 진입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작품이에요.
«End of Summer» This Weekend Room, 2023
‹Blue Moon(liae s smile)›, 2023, acrylic on canvas, 117 x 92 cm
‹Supreme›, 2023, acrylic, acrylic medium, water based marker and pigment powder on canvas, 91 x 72 cm
‹End of Summer›에는 앞서 설명해 드린 시리우스 자리가 한 여름날에 밝게 빛나며 펼쳐지는 일을 담아냈습니다. 세 폭의 화면에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와 그녀를 수호하는 개들, 아르테미스를 은밀하게 탐하다가 사슴으로 변해 그가 키우던 사냥개에게 물려 죽는 인간 악타이온Actaeon, 그리고 사랑했던 연인 아르테미스에 의해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는 비극적인 운명의 오리온Orion과 그의 충견 시리우스의 이야기가 얽혀있는데요. 화면 중앙에는 유니콘을 타고 떠나는 개를 그려 넣었어요. 여름의 끝을 향한 모험을 꿈꾸는 개의 모습을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장치로 활용했습니다.
‹End of Summer›, 2023, acrylic, acrylic medium, water based marker and pigment powder on canvas, 210 x 120, 210 x 240, 210 x 120 cm (from left)
‹천국의 신화›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관찰되는 개의 신비로운 속성에서 시작한 3D 입체 작업이에요. 동양화의 난에서 알 수 있는 전통문화와 철학, 그리고 전설적인 이야기의 상징을 개의 머리에서 솟아나는 난초의 형태로 묘사해 각 요소 간의 다중적인 관계를 그려냈습니다. 3D로 만든 상상 속 대상의 표면에는 다양한 회화적 매체를 운용해 실사적인 구현을 시도하기도 했죠. 또한 개의 머리 모양 화분은 개의 다리 모양을 본뜬 테이블이 받쳐주고 있는데요. 여러 문화권에서 개의 다리를 본뜬 가구는 개가 품은 ‘수호성’을 뜻하더라고요. 이런 서사를 바탕으로 영험한 기운을 지닌 신화적 토템을 완성했습니다. ‹강아지풀›은 빠르게 흔들리는 개의 꼬리에서 인간과 소통가능한 언어적 신호를 포착한 것을 계기 삼아 작업했어요. 강아지풀의 형태를 활용해 다정히 꽃을 건네는 듯한 모습으로 전환했습니다.
‹The Myth of Heaven 천국의 신화›, 2023, acrylic and epoxy on resin with aluminum plate, 17 x 32 x 40 cm (좌)
‹Dogtail Flower 강아지풀›, 2023, acrylic on resin, 3.2 x 12 x 78 cm (우)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인간과 동물의 평등하고 나란한 관계. 두 존재가 함께 걸어온 발자취. 그리고 동물과 더불어 사는 삶.
‹Human, What Are You Worry About 해우소, 휴먼 무슨 고민이 있는가? Carpediem ver.›, 2023, acrylic and epoxy on resin with stone, coin, and magnet, 67 x 35 x 37 cm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주로 오전 5시에 기상해 물 한 컵을 마시고 운동을 시작해요. 6~7시까지 몸과 마음을 수련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9시쯤 간단하게 끼니를 챙겨 먹고, 반려견 두 마리와 함께 작업실로 출근합니다. 반려견 세 마리와 작업실 주변의 개들에게 인사하고 본격적으로 작업에 몰두해요.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보통 저녁 8~9시쯤인데요. 오늘의 뉴스를 보며 맥주 한 캔과 함께 저녁을 먹습니다. 뉴스를 통해 인류의 앞날이 캄캄하다는 사실에 한탄하다가도, 끝나갈 무렵 약간의 희망을 느끼기도 해요. 그렇게 일말의 희망과 약간의 배부름, 취기를 품은 채 잠을 청하곤 합니다. 또 다른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서요.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개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천천히, 오래오래 작업하고 싶어요. 하고 싶은 작업은 정말 많은데, 어떤 걸 먼저 작업할지 고민입니다. 개인전에서 다룬 것처럼 개와 우리 사이의 낭만적인 역사도 있지만 슬픈 역사도 많잖아요. 동물 산업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야기도 동시에 존재하고요. 무엇보다 현재 저를 둘러싼 개의 상황이 마냥 좋지 않아요. 이런 현실을 외면하는 것 같아서 때때로 죄책감이 듭니다. 지금은 동물이 활약하는 방식과 일상에 대해 집중하지만, 10년 안에 역사에서 누락된 사건을 꺼내 너무 무겁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어요. 작업을 지속하는 방향에 대해서 고민하는 요즘입니다.
‹EYES IN THE SKY›, acrylic on canvas, 200 x 200 cm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 보낸 반려견과 저 사이에는 긴밀한 연결고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작업의 주인공으로 반려견이 등장하는 것 같은데요. 개들은 저를 수호하고 위로해 주기도 하지만, 가끔 저에게 혼나기도 하죠. 이런 일상의 장면을 작업으로 풀어내고 싶어요. 캔버스 위에 켜켜이 물감을 쌓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하고, 깎아내기도 하면서 화면 곳곳에 애정을 담아내려 노력해요. 만족할 만한 작업을 위해 피땀 눈물을 흘리고 있답니다.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슬럼프는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난관을 피하지 않고 더 꼿꼿하게 마주서야 합니다. 슬럼프가 찾아올수록 더욱 치열하게 작업에 임해야 하고, 더 깊이 고민해야 하죠. 저는 살면서 한 번도 인생이 계획대로 순탄하게 흐른 적이 없어요. 짧지만 굴곡진 인생을 살면서 ‘내 앞에 위기가 닥치더라도, 고비를 잘 넘긴다면 더 나은 길로 향하게 된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아요. 그렇게 경험에 뿌리를 둔 믿음 하나로 슬럼프가 찾아오더라도 기꺼이 고군분투를 즐기는 편이에요. 물론 제가 파놓은 구덩이에 깊게 잠겨있을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면 주변에서 꺼내 주기도 해요. 맛있는 걸 사 먹이기도 하고, 칭찬도 해주면서, 잘될 거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해주죠. 그럼 다시 어깨가 으쓱해져요. 인터뷰 자리를 빌려 꼭 친구들에게 꼭 말하고 싶어요. 내 잔잔한 친구들아, 고맙다!
최근 들어 작가님에게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다매체에 관심이 많아요. 작업 사이즈도 더 키워보고 싶고요. 다음 작업으로는 스테인드글라스적 요소를 포함한, 새로운 형태의 병풍 시리즈에 도전할 계획인데요. 당장 가장 큰 현실적인 문제는 제작비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 개도사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도를 닦으며, 성실하게 지원금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려고 합니다. 물론 운이 9할이겠죠?
‹Energetic Dosa series(Blue)›, 2023
‹Dog Bird 2›, 2023, magnet, and arcylic and epoxy on resin
‹Dog Bird House(개새집)›, 2023, wood, magnet, and arcylic and epoxy on resin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건강한 몸과 마음이 가장 중요해요. 그 다음으로는 꾸준히 노력하는 태도가 필요하죠. 잘하지 못하고, 재능이 없어도, 끈질긴 사람이 끝내 승리하는 것 같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제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써주신 편지에 이런 글귀가 있었어요. ‘시간은 쓰는 만큼 더 많아지고, 삶은 경험하기 위해 뛰는 만큼 더욱더 충만해질 거라 믿는다.’ 참 인상 깊어서 줄곧 마음에 품고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매사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가려고 해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일단 저질러놓고, 수습해 가면서 경험을 체득하면 돼요. 가장 중요한 건 버티기!
‹Dogrog(Fluorescent) 야광 개구리›, 2023,phosphorescent pigments and epoxy on resin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매 순간 진심이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그리고 작업 곳곳에서 고민과 애정이 느껴지는 창작자로 남는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현재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하고 따뜻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고 믿어요.
Artist
이승희는 영국 런던예술대학교에 속하는 첼시예술대학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하고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2023년 8월 디스위켄드룸에서 열린 «End of Summer»를 비롯해, «신과 개의 마음»(2021, 문래예술공장, 서울), «고양 아티스트 365»(2021, 고양아람누리, 고양), «Blue eyes»(2020, 온수공간, 서울) 등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미안해요, 프랑켄슈타인»(2023, 전북도립미술관, 완주), «K90 – 99, K-Art as a convergence of Multi-culture»(2023, LUPO, 밀라노, 이탈리아),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2023, 대전창작센터, 대전), «동시대 이슈전 헬로! 펫, 또 하나의 가족»(2023, 성남큐브미술관, 성남), «This Title is Not Available in Your Region»(2022, GASP gallery, 뉴욕, 미국), «Blue»(2020, 을지로 of, 서울) 등이 있으며, 그밖에 ‘더프리뷰 성수’ 스포트라이트 작가(2023), 서울문화재단 ‘비넥스트’ 시각예술부문(2021), 고양문화재단 고양우수작가(2021)에 선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