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환은 일상 속에서 떠오른 직관을 닿을 수 있는 지점까지 천천히 밀어붙이는 실험을 택합니다. 아이디어를 의심하기보다 실행 속에서 방향을 찾아가죠. 그의 작업은 진실함과 진지함을 유지하는 것을 대전제로 합니다. 그와 동시에 유머를 놓지 않으려는 마음은 불쑥 찾아오는 슬럼프에도 다시 실험할 수 있는 유쾌한 동력이지요. 루틴과 느슨함, 진지함과 유머 사이에서 자신만의 기준과 관점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가는 사람, 정해진 경로보다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존중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이재환의 이야기를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발화점» 전시 포스터, 2025, 1080×1350px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월·화·수요일에는 학생들에게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 디자인을 가르치고, 목·금·토요일에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에이 스튜디오 에이(A Studio A)’에서 작업하며, 일요일에는 전시 공간 ‘피코(PCO)’를 운영하는 이재환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이들 활동이 요일의 경계를 넘어 자연스럽게 뒤섞이곤 합니다.
‘피코(PCO)’ 로고타이프 디자인, 2025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활동은 학생 때부터 종종 지인으로부터 외주 의뢰가 있었는데요. 그것들이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스튜디오 운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 운영 활동은 임시전시 공간을 운영해 본 동료들이 좀 더 장기적인 공간 운영을 원했고, 그 프로젝트에 합류하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유동적입니다. 주로 서촌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작업을 하는데 최근에는 외근이 많아 자주 출근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작업 공간은 집이고요. 현재 대대적인 공간 개편에 들어갔습니다. 세 번째는 ‘피코’의 사무실 겸 창고 한편인데요. 주로 ‘피코’ 관련 업무를 볼 때 방문하곤 합니다. 그 밖에 연희동에 위치한 ‘미도파 커피하우스’, 학교의 빈 강의실 등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지킬 건 지키기» 전시 포스터, 2025, 1080×1350px
«지킬 건 지키기» 전시 포스터, 2025, 1080×1350px
«지킬 건 지키기» 전시 포스터, 2025, 종이에 오프셋 인쇄, 594×841mm
«가난한자들» 전시 포스터, 2025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받을 때마다 어려운 질문인데요. 작업이 잘 안 풀릴 때는 주로 그래픽 디자인 관련 역사 서적이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그래픽 디자인 작품을 다시 살펴봅니다. 힌트가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더라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곤 해요. 학생들에게도 최근의 그래픽 디자인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역사 공부를 병행하는 것 역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산» 전시 포스터, 2025
『고대의 냉장고』, 2025, 210×297mm
«Total Shit Show» 전시 포스터, 2025, 1080×1350px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처음 떠오르는 직관적인 아이디어를 믿는 편입니다. 긴 숙고 끝에 나온 아이디어가 좋을 때도 있지만, 마치 순발력 게임처럼 첫 반응이 문제에 관한 솔직하고 명쾌한 해결책인 경우가 더 많다고 느낍니다. 처음 아이디어가 떠오른 후에는 이를 구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작업해 봅니다. 사고 실험 단계에서 스스로 기각했던 방향에서 오히려 좋은 결과가 나왔던 경험 이후, 가능한 한 많은 경우의 수를 실제로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스무고개» 전시 포스터, 2025, 종이에 오프셋 인쇄, 594×841mm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첫 번째는 ‘피코’에서 열린 김혜원 작가의 개인전 포스터입니다. 전시 제목의 맥락과 작가의 작업 방식을 그래픽 디자인 언어로 번역해 구성했습니다.
두 번째 역시 ‘피코’에서 열린 회화 작가 백경호, 서제만, 성시경, 이환희, 정주원 등 다섯 명의 단체전 포스터입니다. 이 작업을 선택한 이유는 평소와 다른 과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인데요. 전시 기획자의 요청은 ‘그냥 멋있는’이었고,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기획자와 실시간으로 화면을 공유하며 작업을 완성했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클라이언트였다면 이런 방식을 택하지 않았을 텐데요. 함께 공간을 운영하는 동료이기에 가능한 작업 방식이었습니다.
«픽처레스크 투어» 전시 포스터, 2025, 1080×1350px
«픽처레스크 투어» 전시 포스터, 2025, 1080×1350px
«픽처레스크 투어» 전시 포스터, 종이에 오프셋 인쇄, 2025, 594×841mm
«6 murals» 전시 포스터, 2025, 종이에 오프셋 인쇄, 594×841mm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인가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실시간 협업 방식은 클라이언트가 마침 가깝고 친한 동료였기에 가능한 방법이었습니다. 그 외의 상황에서는 (혹은 비슷한 상황에서라도)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최근 진행한 작업에서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납품 시 최상의 품질을 항상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결과물에는 늘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만 가끔 예상보다 인스타그램 ‘좋아요’ 수가 적을 때는 아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최근의 일상은 매우 건조한데요. 일이 많고 일정이 많아, 일정을 다녀온 후 잠들기 전까지 일을 하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말이나 연휴에도 마찬가지이고요. 다만 잠시라도 시간이 날 경우에는 극장에 가거나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다녀오곤 합니다.
«반음계» 전시 포스터, 2024, 1080×1080px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작업 외의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생활 공간과 작업 공간의 시스템 구축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 집의 대대적 개편이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다음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정리를 마치는 것이 목표입니다.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정리되지 않은 삶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 묻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르코 예술창작실’ 로고타이프, 2025
«주머원 유치원» 전시 포스터, 2024, 1080×1080px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작업 관련 모든 프로세스를 종료하고 극장에 갑니다. 영화 관람 시간과 이동 시간을 합하면 4~5시간 정도 되는데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생각이 정리되곤 합니다. 물론 그래도 정리가 안 될 때는 집에서 한 편 정도 더 볼 때도 있고요.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체중이 갑자기 많이 늘어서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그래도 최근에 다시 줄고 있는 추세라 낙관하고 있지만).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자신의 작업에서 진실하고 진지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대전제입니다. 자기 작업에 대해 혹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조하는 태도는 지양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일말의 유머감각은 유지하려고 하는데요. 어쩌면 둘이 상충할 수도 있는 이야기 같네요. 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스스로를 낮출 수 있듯, 자신의 작업에 진실할 때 그것에 혹은 그것에 대한 유머가 깃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프타임 라커룸 레귤러’ 디지털 활자체, 2025
‘하프타임 라커룸 레귤러’ 디지털 활자체, 2025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루틴, 체계, 시스템 구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저 또한 현재 정리된 상태를 찾아가고 있는 단계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진지하지만 유머감각이 있는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어려운 주문인 것을 알기에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WELL» 전시 포스터, 2024, 1080×1080px
‹Jetlag›, 2024
«Park» 전시 포스터, 2024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경제적·사회적 안정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미래의 저는 지금보다 기성 세대에 가까워져 있을 텐데요, 그때는 업계에서 멋진 어른으로 존재하고 싶습니다. 이 부분은 평소에도 자주 고민하는 주제인데, 제가 존경하는 멋진 어른들을 떠올려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진지함과 유머를 잃지 않는 태도입니다. 저 역시 그런 균형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Artist
이재환(@goodboileelee)은 월·화·수요일에는 학생들에게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 디자인을 가르치고, 목·금·토요일에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에이 스튜디오 에이(@works.of.a.studio.a)’에서 작업하며, 일요일에는 전시 공간 ‘피코(@pco.seoul)’를 운영한다. 물론 실제로는 이들활동이 요일의 경계를 넘어 자연스럽게 뒤섞이곤 한다. 학교에서든 스튜디오에서든 전시장에서든, 학생이나 협업자 또는 관객, 혹은 자신에게 정해진 경로를 제시하기보다는 각자가 스스로의 방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기준과 관점을 제안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