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 포트폴리오는 여러 작가에게 동일한 질문을 서면으로 물어보는 섹션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터뷰이의 답변을 윤문하고, 팩트를 체크하는 데 꽤나 많은 노력이 들어갑니다. 형용사, 동사, 조사, 접미사 등 각종 단어와 표현의 수정은 물론이거니와, 문장을 드러내고 재조합하고, 오탈자를 고치고, 논리적으로 연약한 부분을 메우기 때문인데요. 그런 점에서 이번 김유자 작가의 VP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문장인지 고심하느라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소요한 인터뷰에 관하여 큰 이유가 없다면 단어나 문장 부호 등의 수정이 없길 바랐거든요. 그의 창작 과정에서 언어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이번 답변 또한 작가에게는 일종의 완성된 작업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매체 기준에 따른 문장 부호의 교체, 전시와 전시장에 대한 오탈자 수정 등 크리티컬한 요소를 제외하고, 거의 처음으로 무편집으로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작가의 의도가 온전히 구현된 답변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은 또 다른 행운일 거예요. 김유자 작가의 ‘책임질 수 있는 문장들’을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물리적인 과정을 말하자면 크게 촬영, 텍스트 작성, 지지체와 액자 선정 세 단락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는데요. 편의상 구분한 기준일 뿐 순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촬영에서는 우연과 연출의 균형을 조정합니다. 직접 촬영한 이미지를 기반으로 작업하기에 길을 걷다 찍은 스냅 사진과 머릿속 이미지를 구현한 연출 사진을 활용해요. 텍스트는 작업의 성격에 맞게 변화를 줘 때에 따라 더 구체적이기도 묵시적이기도 합니다. 글의 톤도 조금씩 다르고요. 마찬가지로 지지체와 액자 역시 유동적으로 판단하므로 처음 염두에 둔 대로 제작할 때가 있고 여러 번 수정하는 경우가 있어요. 작업은 제 안의 믿음과 세계관을 구축하는 행위인 동시에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우연과 의도 사이에서 방향을 미리 정하지 않고 무엇이 가장 적합한가 찾고 있습니다.
2021년부터 이어온 ‹Cusp›라는 연작이 있는데 작년 합정지구에서 작업의 1부를 공개했고, 올해 4월 Hall 1에서 2부를 발표했어요. 작업은 선물받은 필름이 빛에 노출되어 피사체를 기록하지 못하는 경험에서 출발했습니다. 1부가 사라진 대상을 기점으로 유실과 재생에 주목했다면 2부는 정지와 떨림을 이야기해요. 1부의 ‹A cat›은 길 위의 고양이를 찍은 사진이에요. 필름을 현상하니 대상이 지워져 있었고, 알고 보니 공항 엑스레이에 여러 번 노출되어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본 것을 더는 볼 수 없는 상황이 흥미로워 일 년간 이 필름들로 촬영을 이어갔어요. 그러다 합정지구 전시를 준비하며 의견을 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지워지고 비워진 상황을 조명하는 일이 애도의 행위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후로는 유실의 단면을 남겨두는 동시에 무언가 채워지고 재생되는 순간을 상상하기 시작했어요. 이 충돌의 경험을 수제 한지의 불규칙한 절단면과 거친 질감으로 표현했고 사라진 고양이가 자유로이 움직이길 바라는 마음에 액자 없이 제작했습니다. 2부에서는 떨림을 신체로 구동하고자 했어요. 이때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사진을 여러 장 활용했습니다. 오래도록 사진은 빼기의 미학이라 생각했고 동어 반복이나 부연 설명이 되지 않도록 최선의 한 장을 고르는 데 집중했는데요. 그게 제 편협함 아닐까, 이미지를 양자택일하는 구조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간 의도적으로 이미지의 전후 맥락을 소거한 것과 달리 이번에는 여러 장의 이미지를 사용해 연속성을 만들어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연속성이 동작이나 사건보다는 시점의 다양성으로 드러나면 좋겠더라고요.
2부를 제작하며 생각한 키워드는 침잠한 세계가 잠시 깨어날 때의 소리였고 그 순간을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가 중요했어요. 최근 몇 년간 일련의 경험을 통해 소리가 파동이라는 것을 강하게 실감했기에 제게 소리는 청각보다 시각과 촉각의 개념으로 다가왔는데요. 예를 들어 피아노 연주를 떠올릴 때면 각각의 음보다는 연주자가 건반을 더 세게/약하게, 길게/짧게 누르는 모습과 그 진동을 상상했습니다. 커지고 작아지는 소리. 높아지고 낮아지는 소리. 맺히고 퍼지는 소리.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소리. 동작을 연상시키는 감각을 용지와 액자라는 기본적인 구성 내에서 표현할 방법을 고민했어요. 다섯 점의 사진을 일정한 간격으로 놓되 사진의 크기, 용지의 종류, 액자의 두께를 달리해 강도를 조절했고, 인물이 등장하는 사진들은 오선지를 생각하며 간격과 높낮이를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했습니다. 사진의 이름에 음계를 붙여 작업 과정에서 소리를 참고했다는 사실을 기록했어요.
전시 오프닝 당일 이 비화를 공유했을 때 한 작가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데요. 청각장애가 있는 고양이의 이름을 부를 때 그는 대답하지 않지만, 나의 발걸음이 만드는 진동과 움직임으로 존재를 인식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단일하게 여겨지던 감각이 크고 작은 충돌 속에서 전이되는 순간을 궁금해하고 또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룹전이었기에 혼자였다면 어려웠을 선택이 가능한 것이 재밌었어요. 이번에는 전시를 기획하신 유승아 큐레이터님의 제안으로 용지뿐만 아니라 액자의 두께와 소재 역시 캡션에 기재했는데요. 그간 물성에서의 고민이 당연하다 여겼기에 이 부분을 표기하지 않았거든요. 덕분에 과정을 공유하는 세심한 접근법을 배웠어요. 더불어 박보마 작가님의 설치 작업이 제 액자 위에 놓이는 것을 보고 가벼운 알루미늄 액자에도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하구나 제가 미처 알지 못한 효용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일어나면 수영하고 이후로는 할 일을 해요. 인생의 20%를 전철에서 보내는 경기도민답게 이동 중에는 책을 읽고요. 여유가 있을 때는 영화 또는 전시를 보고 서점에 갑니다. 되도록 매일 산책하고 일지를 작성하고 주기적으로 정리해요. 보는 것을 좋아해서 오래 집중하지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거나 봅니다.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12월에 공개할 신작을 준비하고 있어요. 창작자 그룹 ORB로 발표하는 두 번째 기획전인데 연출 사진의 비중이 높아 각각의 사진을 어떻게 촬영할지 고심하는 중입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자주 상상하다 보면 언젠가 만나게 되리라 믿는 자세 같은 것이 닮아 있다고 느낍니다.
동력이 부족한 상태인지 점검이 필요한 상황인지에 따라 방법이 다른데요. 전자의 경우 산책, 수영, 독서와 영화를 통해 원동력을 기르고, 후자의 경우 동료들에게 의견을 물어 방향을 점검합니다. 스스로 질문하는 일이 선행되어야겠지만 저는 함께할 때 볼 수 있는 게 더 많은 사람이기에 주변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작업 방향을 점검하기 위해 언어와 이미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과정을 기록한 글을 완성하는 것이 올해의 목표인데 직면하기란 언제나 쉽지 않으므로 끈질기게 써야겠지요.
보상이 뒤따르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더라도 기쁨이 지속되는 환경이 아니기에 자신을 위해 작은 보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도움을 줘요. 사소해서 자주 반복할 수 있는 일들이요. 저는 단것을 먹거나 좋아하는 차를 마십니다. 더불어 내 안의 의심과 질문이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일인지 혹은 나를 괴롭게 만들 뿐인지 구분할 소요를 느낍니다. 문제는 모든 일이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만 계속해서 질문하다 보면 필요 이상의 가혹함 없이도 답을 구할 수 있다고 믿어요.
김유자(@yujakim)는 한 장으로 압축된 사진의 이면이 유도하는 상상력에 주목한다. 사진에서 본 것과 볼 수 없는 것은 경험과 사건, 우연과 연출, 다양한 지지체를 경유해 화면에 자리한다. 2023년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사전프로그램 ‘포트폴리오, 서울’ 비평 지원에 선정되었고, 개인전 «시스터 시티 : 지도의 바깥»(스페이스 카다로그, 2023)을 개최하였다. «Summerspace»(Hall 1, 2024), «흰 작살을 머금은 바다»(서리풀갤러리, 2024), «2023 Anti-Freeze»(합정지구, 2023), «Frankie»(N/A, 2021), «2020 미래작가상»(캐논 갤러리, 2021) 등의 그룹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