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Visual Portfolio

휩쓸릴수록 또렷해지는 목소리

Writer: 김리윤
[VP]김리윤(0926)_1_오프닝 이미지

 © 윤혜정 

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김리윤은 특정한 정체성으로 기억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대신 언어와 이미지가 다시 읽히고, 연거푸 흔들리며 다른 삶 속에서 새로운 접속을 발생시키는 짙은 자국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언어를 기반으로 이미지의 생성과 전달 ‘보기’에서 파생되는 관계를 탐구하는 시인이자 그래픽디자이너로서 시와 산문을 쓰고 그 장면을 시각 매체와 물질의 차원으로 확장하죠. 시 속 이미지는 현실의 재현이 아닌 언어 내부의 충돌과 균열에서 새로운 지각을 연다는 굳은 믿음 아래 언어와 이미지, 손과 감각 사이를 오가며 그 틈에서 발생하는 유예와 진동을 집요하게 기록합니다.
하나의 현실이 아닌 진정 바라봄으로써 “펼쳐지는” 복수의 시점들. 흔들리고 비틀리며 지금껏 없었던 세상에 없던 의미를 낳는 언어처럼 김리윤의 작업은 결론이 아니라 ‘열린-보기’를 제안하죠. 완결보다 유예, 설명보다 감각, 정의보다 접속. 김리윤이 제안하는 보기의 연습이 과연 무엇일지 이번 BE(ATTITUDE)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VP]김리윤(0926)_2_인트로_이미지

『부드러운 재료』, 2024, 산문집, 봄날의책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언어를 기반으로 이미지의 생성과 전달, ‘보기’에서 파생되는 관계에 주목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김리윤입니다. 시와 산문을 쓰고, 근래에는 텍스트 기반 작업을 시각 매체로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재료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개체와 사물, 매체 각각의 의지와 이미지가 중첩될 때 일어나는 경험에 관심이 많습니다. 2017년부터 레이포에트리Lay Poetry라는 이름의 1인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로 활동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시인으로서 해온 것과 그래픽디자이너로서 해온 것, 크게 두 갈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2022년 첫 시집 『투명도 혼합 공간』(2022, 문학과지성사)를 출간한 이후로는 시 작업을 중심에 두고 있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여러 흐름이 겹쳐 지금에 이르렀어요. 그래픽디자인의 경우 20대 초반, 당시 유행하던 SNS인 싸이월드에 올린 그림을 보고 연락을 주신 클라이언트의 의뢰로 일러스트레이션과 웹사이트 디자인 및 제작을 맡았던 것이 첫 작업이었죠. 이후 운 좋게 일이 이어지면서 경험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계 수단이자 직업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학교에서는 회화를 전공했어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의식에 앞서 손이 먼저 움직인다는 감각에 가깝게 언제나 그림을 그리고 있었죠. 고민 없이 미술 대학에 진학했는데, 저에게 잘 맞는 매체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미술 작업이 수반하는 물질과의 관계가 현실적인 제약으로 느껴지곤 하던 차에 시를 읽기 시작했어요. 진은영 시인의 『우리는 매일매일』을 읽고 교과서에서 보던 시 너머의 한국 현대시가 지닌 아름다움에 부드러운 충격을 받았죠. 당시 졸업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업을 다루는 말을 날카롭게 매만지기 위해 시 수업을 등록했는데, 이 수업에서 처음 시를 쓰면서 언어를 매개로 이미지를 만드는 일의 자유로움에 매료되었어요. 하지만 여러 이유로 꾸준히 쓰지는 못했고, 느슨하게 쓰기와 읽기를 맴돌며 지내다 의식적으로 조금 더 몰두해서 쓰는 시간을 만들었어요. 이렇게 쓴 시기에 모은 원고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운영하는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시인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VP]김리윤(0926)_3

김리윤 시집 『투명도 혼합 공간』, 문학과지성사, 2022

VP김리윤0926_4

«100 Films 100 Posters» 중 ‹시련과 입문›(감독 백종관), 2025, 포스터 디자인,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의뢰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올해 초부터 베를린에 머물며 방 하나를 작업실로 쓰고 있습니다. 날씨나 작업의 성격에 따라 도서관이나 호숫가로 자리를 옮기기도 해요. 작업방에는 책상 두 개가 있는데, 큰 모니터가 놓인 책상에서는 주로 그래픽디자인 업무를 하고 창가에 있는 빈 책상에서는 글을 쓰고 책을 읽거나 물리적인 재료를 다뤄야 하는 작업을 합니다. 베를린은 간단한 절차만 거치면 누구나 카드를 발급받아 이용할 수 있는 국공립 도서관이 잘 갖추어져 있어요. 커다란 창문이 있는 넓은 공간, 수많은 책,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주는 아늑함이 있고요. 여름에는 연두와 함께 집 근처 호숫가를 거닐고, 비어가르텐에서 작업하는 시간이 제게 큰 즐거움이자 활력이 되었어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우선 영감이라는 것이 불현듯 구름을 뚫고 쏟아지는 빛처럼 작업이 찾아오는 체험이 아니라, 어렴풋한 출발점 혹은 진행 과정에서의 실마리 정도라고 정의하고 답을 시작하고 싶어요. 이렇게 본다면 그것은 특정할 수 없을 만큼 생활 전반에 스며들어 있고요. 누군가와의 대화, 전시와 공연, 책, 영화, 음악 같은 타인의 창작물, 제가 마주하는 풍경들, 그리고 특정할 수 없이 예측 불가능한 수많은 순간에서 작업이 촉발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늘 그런 식으로 경험해왔고요.

[VP]김리윤(0926)_5

«메아리 조각―소리 풍경 사이에서 Echoes in Pieces (In Between Soundspaces)» 서울 공연 포스터 디자인, 2024, 의뢰처: 메아리조각

[VP]김리윤(0926)_6
[VP]김리윤(0926)_7

‹아지테이트 2025년 달력›, 2025, 디자인 및 텍스트, 의뢰처: 아지테이트(agitate.site)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시 작업에 한정하여 말하자면, 제게 시 쓰기는 구상을 따라 실재를 건축하는 일이라기보다 예측 불가능한 운동을 따라가는 일에 가까워요. 언어를 다룬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공간 제약에서 자유로운 일이니, 평소 어디에서나 짧고 긴 메모를 남깁니다. 이 메모들은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의 시에서 떨어져나온 부스러기처럼 작동하죠. 다만 시 쓰기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부스러기의 궤적을 따라 하나의 길을 잇듯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파편 사이를 배회하다 불현듯 도약하는 경험과 닮아 있어요.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넘어지거나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면서요.

메모 하나하나는 이미지이자 문장의 단위로 흩어져 있다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접속하며 리듬이나 방향, 잠정적인 장소를 발생시켜요. 언어를 배치하고 충돌시키는 과정에서 시는 장면을 생성하고, 그 장면은 언제든 다시 해체될 수 있죠. 시는 현실을 재현하는 대신 언어 내부의 비인과적 접속을 통해 현실의 지각 구조 자체를 미세하게 흔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시를 쓰는 동안 세계에 대한 설명이나 서사를 구축한다기보다 언어가 만드는 균열과 진동, 허구의 불연속적인 운동을 따라가며 그로부터 발생하는 장면을 또렷하게 관찰하고 옮겨 그리려 해요. 저에게 시 쓰기는 하나의 이미지가 품고 있는 다중의 가능성을 일정 시간 동안 끈질기게 바라보고, 의심하면서도 그 가능성의 존재를 신뢰하며 견디는 과정이에요.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얼마 전 첫 번째 앤솔로지이자 수행서, 텍스트 스코어인 『그 밖에』(2025, 워크룸프레스)를 ‘메아리 조각’과 함께 출간했어요. ‘메아리 조각’은 저를 포함해 한국어로 시를 쓰는 여섯 명의 시인(김리윤, 김선오, 김소연, 이제니, 임솔아, 하미나)이 시작한 텍스트―사운드 퍼포먼스 팀이에요. 

백지 위에 배열된 활자의 형태로 인식되어 왔던 시의 소리로서의 측면을 탐구하며, 시인의 몸을 시의 일시적인 거처로 삼는 다양한 시도를 모색하려 하고 있습니다. 2024년 가을 광주비엔날레 독일관 오픈스테이지에서 진행된 퍼포먼스 «메아리 조각―소리 풍경 사이에서 Echoes in Pieces (In Between Soundspaces) »를 시작으로, 앞으로도 시적·음향적 몸짓이 지닌 가능성을 탐구할 예정이에요.

[VP]김리윤(0926)_8

«메아리 조각―소리 풍경 사이에서 Echoes in Pieces (In Between Soundspaces)», 2024, 시 낭독 퍼포먼스 광주비엔날레 2024 독일관 오픈 스테이지, 광주비엔날레 독일관, 2024 © 사진: 박소희

[VP]김리윤(0926)_9

«메아리 조각―소리 풍경 사이에서 Echoes in Pieces (In Between Soundspaces) 서울 공연», 2024, 고라니특공대 © 사진: 홍지영

[VP]김리윤(0926)_10

«메아리 조각―소리 풍경 사이에서 Echoes in Pieces (In Between Soundspaces) 서울 공연», 2024, 고라니특공대 © 사진: 홍지영

아지테이트agitate.site는 동료 시인 김선오와 함께 2023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구독제 웹사이트입니다. 장르와 매체, 지면과 기관으로부터 독립된 장소에서 텍스트 실험을 지속하고자 기획하게 되었어요. 동시에 ‘쓰기’라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공간으로 성립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이트(site)라는 단어가 내포한 의미 그대로,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장소로서의 웹사이트를 구축했죠.

웹은 물질을 가진 책에 비해 끊임없는 수선을 가하기에 용이한, 유동적인 지반을 제공하기도 하고요. 기획과 디자인, 개발까지 직접 진행했기에 무형의 상상과 결과물의 작동이 서로 관계 맺으며 가능해진 부분도 많아요. 가령 아지테이트의 색인 시스템인 ‘Word ― Sentence ― Text’는 ‘시’, ‘개’, ‘이미지’, ‘서울’, ‘시간’ 같은 키워드를 클릭하면 미리보기를 통해 해당 키워드가 포함된 글의 미리보기가 나열되고, 나열된 것 중 특정 문장을 클릭하면 다시  한 번 해당 문장이 포함된 작품 페이지로 이동하는 구조를 갖고 있어요. 이를 통해 단어 ― 문장 ― 텍스트 전문으로, 점층적으로 확장되는 공간을 탐험할 수 있죠.

[VP]김리윤(0926)_11
[VP]김리윤(0926)_12

‹아지테이트›, 2024, 김리윤, 김선오의 미발표·기발표 작업물을 연재하는 구독제 웹사이트(agitate.site)

 ‹아지테이트›, 2024, 김리윤, 김선오의 미발표·기발표 작업물을 연재하는 구독제 웹사이트(agitate.site)

2023년 여름에 했던 개인전 «새 손(new hands)»은 언어로 생성된 비물질적 이미지와 손의 노동이 부여한 물질적 이미지 사이를 왕복하는 과정이자 이에 대한 불완전한 기록이었어요. 전시를 위해 작업하는 동안 관찰을 단순한 ‘보기’가 아니라 시선을 통해 세계에 개입하는 행위로 두고, 세계를 무수한 레이어의 혼합 모드가 겹치는 장(場)으로 상정했죠. 시 속 비물질적 이미지가 손의 수행을 통과하며 잠시 물질이 되고, 다시 언어로 환원될 때 드러나는 간격·유예·움직임 자체를 작품 삼고자 했어요.

시 속의 이미지는 물질을 요구하지 않고도 존재하며, 불완전함과 개별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손상을 통해 되려 자유롭고 가변적인 비물질성을 획득해요. 그래서 이 이미지를 물리적 실체로 옮기는 순간 발생하는 유실과 생성을 자세히 관찰하고 싶었어요. 전시에서는 언어(비물질)와 시각(물질) 이미지가 서로의 재현으로 환원되는 대신, 서로에게 새로운 입구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탐색해 보았습니다.

[VP]김리윤(0926)_14

«새 손new hands», 전시공간 리:플랫, 2023 © 사진:김진솔

[VP]김리윤(0926)_15

‹손이란 부서진 물질을 올려두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복원하는 다음 장면을 만들어내는 정물이구나›, 2023, 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 종이에 연필, 캔버스에 유화, 230×330 cm, «새 손new hands», 전시공간 리:플랫, 2023, © 사진: 김진솔

[VP]김리윤(0926)_16

‹아직 더 망칠 수 있는 날씨가 남아 있는 것 같다›, 2023, 종이에 수채, 돌, 42×42 cm (49),10×294×294 cm (전체), «새 손new hands», 전시공간 리:플랫, 2023 © 사진:김진솔

가장 최근에 마무리한 그래픽디자인 작업은 봄날의책에서 출간한 첫 번째 그림책, 안 에르보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해』 한국어판 디자인입니다. 익숙한 고백의 말 ‘사랑해’를 반복하며 언어가 감정을 담는 방식, 혹은 언어가 감정의 운동에 따라 어떻게 흔들리고 실패하는지를 실험하는 책이에요. 저는 이 책의 디자인 과정에서 사랑의 언어가 지닌 비문법성과 반복의 운동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프랑스어 원제와 한국어 제목을 반투명 북재킷 위에 겹쳐 인쇄하여, 두 언어가 단순히 병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교란하고 중첩되는 다성적 풍경을 이루도록 했죠.

사랑이 단일한 정체성이나 관계로 고정되지 않고, 반복과 변주 속에서 미끄러지고 흔들리는 감정이라는 점을 시각적으로 번역하고 싶었어요. 이와 함께 봄날의책 그림책 라인의 BI 역시 작업했는데, 점·선·면의 기본 조형을 기반으로 유기적인 형태의 한글 워드마크와 심볼을 만들었어요. 그림책이라는 장르 특성을 고려해 책마다 어울리는 색 조합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VP]김리윤(0926)_17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해』, 2025, 북 디자인, 의뢰처: 봄날의책

[VP]김리윤(0926)_18
VP김리윤0926_19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해』, 2025, 북 디자인, 의뢰처: 봄날의책

[VP]김리윤(0926)_20

‹봄날의책 그림책 브랜드 아이덴티티›, 2025,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 의뢰처: 봄날의책

오랜 팬이었던 음악가 조월의 앨범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 CD 디자인 역시 무척 즐거웠던 작업이었어요. 쥬얼케이스를 사용하지 않고 CD와 종이 재킷, 가사집, 다운로드 코드와 패키지, 포스터 등을 하나로 묶는 방법을 고민했죠. 모든 구성품이 하나의 조각으로 완결된 동시에 기능적으로도, 조형적으로도 전체를 이루는 부분으로써 유기적으로 작동하기를 바랐어요.

무엇보다 음악과 가사, 목소리가 관계 맺는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형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싶었고요. 곡의 질감을 반영하기 위해 페이지마다 다른 입자와 노이즈를 더한 가사집을 만들며 앨범 전체를 반복해서 듣고, 음악을 듣는 경험과 물질적 형식이 맞닿는 지점을 찾으려 했던 과정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VP]김리윤(0926)_21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 2022, 음반 디자인, 의뢰처: 조월

[VP]김리윤(0926)_22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 2022, 음반 디자인, 의뢰처: 조월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인가요?

최근 작업인 «전망들» 연작을 통해 제가 다루고 싶었던 것은 ‘보는 행위’ 자체가 지닌 불안정성과 실패, 복잡성, 시선의 운동 자체였어요. ‘전망(展望)’이라는 단어는 ‘펼 전(展)’과 ‘바랄 망(望)’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눈앞의 풍경을 단순히 조망하는 행위가 아니라 바라보려는 마음 자체가 세계를 펼쳐 보이게 한다는 이중적 의미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언어적 구조에서 출발해, ‘보는 행위’와 ‘바라는 마음’ 사이의 동시적인 진동을 지각의 조건으로 삼으려 했어요.

여기서 전망은 더 이상 풍경을 구성하는 거리나 높이 같은 물리적 조건에 기반한 보기의 양식이 아니에요. 지각과 감정, 언어와 형상, 인식과 이미지가 뒤엉켜 발생하는 관계이자, 불확실성과의 공존을 감각하고 감당하려는 실천에 가깝죠. 때문에 ‘전망’이라는 말을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 곧 전망들로 두었어요. 단 하나의 전망, 통합된 시점이나 결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보기의 감각을 강조하기 위해서요.

세계는 언제나 균열을 품고 있고, 언어 역시 그 균열을 봉합하기보다 흔들리고 비틀리며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죠. 전망들에서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복수의 전망을 통해 시와 세계 사이, 시선과 언어 사이에서 지속하는 운동을 기록하는 것이었어요.

[VP]김리윤(0926)_23
[VP]김리윤(0926)_24

시 커미션 작업 ‹언제나 신선한 프레임›, 2023, «젊은모색 2023: 미술관을 위한 주석», MMCA 과천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베를린에 머물기 시작한 이후 일상을 가능한 간결하고 단순하게 합니다. 개와 충분히 산책하고, 끼니를 직접 해 먹고, 꾸준히 작업하는 것 정도를 생활의 뼈대로 두고 있어요. 거처를 옮기면서 생활의 많은 요소가 바뀌었지만, 개 산책만은 하루라는 축에 세워진 기둥처럼 변함없이 같은 간격과 부피를 가진 채로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날씨에 따라 개와 함께 집 근처 기찻길을 따라 걷거나 호숫가에 가는 것이 하루의 시작입니다.

한국의 오후 업무시간과 맞물리는 베를린의 오전에는 자연스레 그래픽디자인 일을 처리하고, 오후와 저녁 시간에는 작업에 집중하려고 해요. 독일어 학원에 가는 날도 있고요. 물론 그때그때 해야 할 업무의 경중이나 양에 따라 구획된 영역 안의 일들이 서로를 마구 침범하기도 합니다.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관심을 둔다기보다 머릿속을 점유하고 있는 일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계속되는 학살입니다. 물론 제 생활을 이루는 것, 작업에 대한 많은 고민이 있지만 가자지구의 현실은 다른 모든 것 위로 떠다니는 연기처럼 언제나 모든 것을 덮고 있어요.

매일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이 일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글을 쓰는 지금이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동시에 보는 일 자체가 타자에 대한 응답이자 정치적 선택이기도 하다는 점 역시 다시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처한 현실 안에서의 ’보기’를 어떻게 행하고 감당할 것인지, 타자와 맺는 관계로서의 언어와 이미지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도 스스로 묻게 되고요.

[VP]김리윤(0926)_25

«100 Films 100 Posters» 중 ‹세이렌의 토폴로지›(감독 조너선 데이비스), 2022, 포스터 디자인,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의뢰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특별한 방법은 없습니다. 내부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어려울 때는 항아리가 된 것처럼 외부의 것을 많이 받아들이고 뚜껑을 열어도 될 것 같은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최대한 느긋해지려 합니다. 사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대부분의 일이 그러하듯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해야 할 일은 저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점이 어렵죠.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 주어진 일을 해내기 위해 어떻게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부끄러움을 감수한 채로 내놓는 것 역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VP]김리윤(0926)_26

1. ‹오드레(ODRE) NYC 브랜드 아이덴티티›, 2024,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 의뢰처: 오드레

[VP]김리윤(0926)_27

1. ‹오드레(ODRE) NYC 브랜드 아이덴티티›, 2024,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 의뢰처: 오드레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모국어가 아닌 언어가 주로 통용되는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이에요. 보기, 듣기, 말하기 모두에 훨씬 더 많은 체력이 소모되는 동시에 제가 구사하는 한국어의 정밀함이 무뎌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언제나 함께 있는 상태죠.

이곳에 와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답답했던 순간은 연두가 다른 개에게 물렸을 때였는데, 그 개의 보호자가 사과하지도 상태를 확인하지도 않았을 때였어요. 생각과 감정이 언어로 도달하기까지 너무 큰 시차가 생겨, 몸과 발화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제가 놓인 현실은 이 시차를 기다려주지 않고요. 충분히 화내지도, 저희 개를 변호하지도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웠어요. 그날 무슨 말을 더 해야 했는지, 그 말을 어떻게 구사해야 할지 수십 번 곱씹어 생각하면서 언어가 어떻게 행동을 제약하는지를 실감했어요. 분노가 언어를 갖지 못할 때의 무력감도요.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철학이라기엔 거창하지만, 창작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직함을 갖고 자신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태도입니다. 보이는 것을 의심하는 동시에 보는 행위 자체를, 그것이 지닌 불완전함과 복잡성을 포함하여 믿는 것도요. 언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닌 소리·리듬·시간성·배열 같은 물질적 성질을 지닌 관계적 매개라고 생각해요. 언어를 통해 세계와 접속한다는 것은 곧 관계 속에 서는 일이고요. 이를 토대로 창작하는 일 역시 타자와 사물, 사건, 실패와 우연이 함께 일어나는 과정이라는 점을 늘 의식해요.

이 과정에서 현실을 단단하고 완결된 실체가 아닌, 언제나 흔들리고 변형될 수 있는 부드러운 재료에 가까운 것으로 대하려고 합니다. 불확실성과 다층적인 시간성을 품는 동시에 불안정한 현실을 감당할 언어를 마련하고, 유동성과 실패를 받아들이는 미완의 윤리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작업을 통해 불확실성을 생산하고, 부드럽고 불완전한 현실을 견디며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남는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요. 자기 완결적인 진술이 아니라 관계적인 실천으로서의 창작을 지속하고 싶어요.

[VP]김리윤(0926)_28

‹현대아울렛 SPACE 1 와인리스트 브랜드 아이덴티티›, 2022

브랜드 아이덴티티 및 애플리케이션·사이니지·패키지 디자인, 의뢰처: 현대백화점

[VP]김리윤(0926)_29

‹현대아울렛 SPACE 1 와인리스트 브랜드 아이덴티티›, 2022, 브랜드 아이덴티티 및 애플리케이션·사이니지·패키지 디자인, 의뢰처: 현대백화점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글쎄요, ‘기억된다‘는 것은 제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시간의 일이기에 특별히 상상해 본 적이 없네요. 특정한 정체성으로 기억되기를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것이 제게 좋은 태도로 느껴지지 않기도 하고요.

언어로 이미지를 다루는 작업에서 좋아하는 점 중 하나는 이것이 지닌 불확정성과 유동성이에요. 그렇기에 저와 제 작업 역시 단단하게 완결된 것이 아니라 다시 읽히고, 다시 흔들리며 다른 삶 속에서 새로운 접속을 발생시키는 흔적으로 남는다면 그것이 제가 바라는 가장 정직한 기억일 거예요.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여전히 건강한 연두와 함께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는 생활의 기둥이 있는 것, 사랑하는 존재들과 서로를 돌보며 지내는 것, 피로와 무력감에 지치지 않고 호기심을 갖는 것, 호기심을 질문으로 옮기는 것, 더 보려는 마음과 더 가보려는 기운을 잃지 않고 오래오래 작업을 지속하는 미래.

[VP]김리윤(0926)_30_엔드_이미지

Artist

이유미(@halominium)는 MADE IN SEOUL을 내세우는 패션 브랜드 HALOMINIUM의 디렉터이다. 상업 영역 패션을 넘어 패브릭으로 다양한 작업을 하는 것이 목표인 작업자다. 패션 브랜드 할로미늄은 2013년에 시작해 컬렉션 전개, 전시 «I WISH I HAD A FRIENDS LIKE ME.(세화미술관, 2019) »와 SeMA 벙커 개관전 «HALOMINIUM YEOUIDO BASEMENT SeMA, (2017) » 등 다양한 형식의 전시를 열었고 뮤지션 실리카겔, 퍼포머 박민희, 페인터 노상호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하기도 했다. 그 외 콜렉티브 ‘ISVN games’, ‘우주만물’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Thank You for Subscription!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애티튜드»는 매주 금요일 아침 10시 1분, 창작자의 반짝이는 감각과 안목을 담은 소식을 메일함에 넣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