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애가 마주하는 세상은 조금 뒤죽박죽입니다. 흩어진 기억들이 서로 부딪히며 모양을 바꾸고, 그 틈에서 예기치 않은 징후가 갑자기 떠오르죠. 그런 순간이 그녀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합니다. 한번 속도가 붙으면 창작욕을 멈춰 세울 수 있는 건 거의 없어요. 그렇게 사로잡힌 잔상은 하나의 장면이 될 때까지 작가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현실의 작은 생채기들이 마침내 완전한 형태를 갖출 때까지 말이지요. 그래서 그녀는 무엇이든 작업의 ‘불씨’로 삼을 수 있어요. 흔들린 마음은 물론, 사회 속에서 매일 마주하는 현실의 감정들까지도 그녀 안에서 뒤틀리며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내죠. 어쩌면 작가를 더 멀리 이끄는 건 특별한 ‘영감’이 아닌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태도가 아닐까요. 끝없이 흔들려도 결국 다시 태어나고야 마는 박주애, 현실에 가로막혀도 스스로 새로 빚어내며 나아가는 그녀의 자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BE(ATTITUDE) 웹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거시기에서 옥수수 꽃이 자란다›, 2025, 캔버스에 아크릴·실, 162.3×130.3cm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제주를 기반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미술가 박주애입니다. 삶을 지탱하는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균열과 충돌의 순간에 인간은 어떻게 다시 살아가는가에 대해 회화와 설치 작업을 통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현실과 갈등과 욕망을 다양한 매체로 표현하고 기존의 감정과 상황을 작업을 통해 전복시키는 조형적 실험을 지속하고 있어요. 작업을 통해 인간의 무게, 유희, 회복과 붕괴 사이의 복잡한 에너지를 솔직하게 보여주고자 합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미술이 업인 부모님 덕분에 제겐 작업실과 학원이 곧 집이었어요. 어머니는 미대에 가려면 시집을 가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결혼 후 저를 임신한 채 미대를 다녔다고 합니다. 때문에 작업 공간은 제게 아주 일찍부터 가장 익숙한 환경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청동 조각상의 젖을 빨아본 적도 있을 만큼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어요. 그렇지만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조용해져서 부모님이 종이를 한가득 쥐여주곤 했죠. 주말마다 그림대회에 나가 상을 받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 경험이 작업을 꾸준히 하게 만드는 좋은 동력이 되었습니다. 한때는 미술가의 삶이 가진 불안정함 때문에 흔들린 적도 있지만, 심보선의 저서 『그을린 예술』에서 삶을 예술로 불태우라는 문장을 만난 이후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었어요. 결국 제가 끝까지 붙들 수 있는 일은 이 작업뿐이라는 확신으로 지금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머무는 작업실은 제주에 있어요. 강아지 메리와 고양이 야오밍과 함께 지내는 곳이라, 생활과 일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공간이죠. 하루 대부분을 손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다듬는 데 쓰다 보니, 그림이 달아나지 않게 곁에서 보초를 서는 마음으로 지낼 때도 많아요. 작업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유의하며 작업하려고 합니다.
도자 작업, 소프트 조각, 회화까지 할 수 있도록 환경을 갖춰두었고, 한구석에는 읽은 책과 아직 못 읽은 책들이 뒤섞여 자리 잡고 있어요. 긴 시간 삽질하듯 이어온 작업들, 커다란 테이블 두 개와 마음을 붙드는 문장을 적어둔 메모들, 드로잉과 리서치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전소하는꿈과 낙하하는 별의 배꼽» 전경, 갤러리2, 중선농원, 2025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세상의 모든 것에서 영감을 받아요. 최근에는 생물학 관련 다큐를 보며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생명체들이 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방식들은 인간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이나 아름다움과 추함을 나눌 수 없다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그런 지점들이 생태계의 관계, 인간의 삶, 사회적 존재의 의미까지 함께 떠올리게 하더라고요.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소멸하는지가 늘 경이롭게 느껴집니다.
‹새들이 세수하는 곳›, 2024, 천에 아크릴, 도자, 혼합재료, 가변설치
‹새들이 세수하는 곳›, 2024, 천에 아크릴, 도자, 혼합재료, 가변설치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마음에 밟히는 문장이나 이미지가 생기면 노트에 먼저 기록해 둡니다. 그런 기록들이 일종의 예열이자 리서치의 시작이 되더라고요. 필요한 다큐나 책들을 찾아보고,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보이면 장소가 어디든 그냥 바로 허겁지겁 달려가 확인하는 편이에요. 동료 작가들이나 기획자 친구들을 불러 의견을 묻기도 하고, 어머니에게도 도움을 청하기도 해요. 그렇게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시각화를 위한 드로잉을 쌓아가고 이를 발판으로 완성된 작업의 형태를 하나씩 만들어가는 식으로 진행합니다.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최근에는 설치와 회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로 관계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어요. 독립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환상에 가깝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엄마와 저의 관계를 자연의 기생식물을 통해 은유한 설치 조각을 제작했어요. 양분을 나누고 균열을 일으키며 하나의 몸처럼 뒤엉킨 모습으로, 타자와 겹쳐지고 흡수되면서 순환이 이루어지는 생태의 일부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회화 작업으로는 사회로부터 분절되고 소멸을 강요받는 존재가 그 잔해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힘, 자신을 봉합하고 다시 짜내는 힘, 자신을 태워 창작의 꿈을 꾸는 일련의 과정을 여성의 신체를 통해 시각화해 보았습니다. 매일 드로잉했던 신체의 조각들을 모아 조각보 형태로 구성했어요. 이를 통해 여성으로서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태어나려는 집요한 서사를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작업을 통해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떻게든 다시 태어나는 힘이에요. 소멸을 요구받는 순간에도 결국 또 다른 형태로 이어지려는 의지를 강조하고 싶어요.
‹밤의 새를 삼켰다›, 2022, 혼합재료, 가변설치, 금호미술관
‹밤의 새를 삼켰다›, 2022, 혼합재료, 가변설치, 금호미술관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새로운 페인팅으로 방향을 바꿔보고 싶어요. 늘 그리던 관습이나 이미지에서 벗어나 다른 가능성을 찾고 싶습니다. 돌이켜보면 예전과는 생각도 상황도 달라지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그래서 그 변화를 작업 안에서 어떻게 다룰지가 요즘 가장 큰 관심사예요.
«티틴: 다시 만난 세계» 전경, 2025, 노블레스 컬렉션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저에게 폭소는 곧 포효예요. 어떤 상황에서도 큰 웃음을 찾으려는 태도는 제 삶을 지탱하는 방식이기도 해요. 웃음 속의 절망, 절망 속의 웃음이 곧 제가 추구하는 작업의 기조이자 태도입니다.
‹Self Breast Feeding›, 2020, ceramic, 23×15×10cm
‹Mrs. Boobs›, 2020, ceramic, 21×20.5×13cm
‹Vomit Womb›, 2021, ceramic, 32×29×23cm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그 시간이 영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결국 지나간다는 믿음으로 버팁니다.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생계와 작업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 여전히 쉽지 않아요. 불안을 견디며 매달을 버티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매번 저울질하게 되지만, 결국 작업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살아보기로 마음먹었어요.
‹Diver›, acrylic on canvas, 162.2×130.3cm, 2023
‹하늘걷기 Walk in the sky›, 2023, acrylic on canvas, 162.2×130.3cm
‹계절을 토해 내는 숲 The forest vomits the season›, 2022, acrylic on canvas, 130.3×162.2cm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진심으로 이 세계와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감탄할 줄 알아야 하고,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감당하고 더 알고 싶어지는 법이니까요. 모든 것을 이미 안다고 착각해 세상을 납작하게 보거나, 허무에 기대어 쉽게 단정해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꿈먹는 거지›, 2025, 캔버스에 아크릴, 50×65cm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한 개인의 경험이 삶과 예술 속에서 버무려지며 타인의 경험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변환의 순간을 만들어내는 작가로 남고 싶어요.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모두가 주체적으로 존재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존중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랍니다.
Artist
박주애(@barkjuae)는 제주에 거주하며 인간의 결핍, 여성작가로서의 사회적 위치를 개인의 서사를 통해 생태와 자연으로 은유하고, 예술과 창작의 투쟁을 작업으로 연결시켜 이를 전복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예술로서 지탱하는 방식으로 회화, 설치작업으로 풀어내고 있다. 개인전으로는 ‹2025. 전소하는 꿈과 낙하하는 별의 배꼽›(갤러리2 중선농원), ‹2023. 허공에 차오르는›(갤러리2, 서울), ‹2020. breastmilk›(새탕라움, 제주)등이 있으며, 단체전으로는 ‹2025. 티틴: 다시 만난 세계›(노블레스 컬렉션, 서울), ‹2022. 뉴라이징 아티스트: 탐색자›(제주현대미술관, 제주), ‹2022. 어떤 삶, 어떤 순간›(금호미술관, 서울)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또한 대주콜렉티브의 기획자로서 ‹2025.워싱턴야자›(갤러리레미콘,새탕라움, 제주), ‹2024.욕망탐구›(산지등대,제주) 전시를 공동 기획하며, 예술가 간의 공생적 관계망과 지역 기반 예술생태를 확장하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