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허앵이 그려내는 그림 속 존재들은 사람, 동물, 식물의 경계를 자유로이 오가며 변신의 한가운데에 놓인 생명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신화 속 환상 같은 것이 아니에요. 아이를 돌보며 매일 맞닥뜨리는, 아주 구체적인 경험에서 비롯한 존재죠. 그래서일까요? 달콤한 빛깔 뒤에는 불안한 현실 앞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일상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꼭꼭 담겨 있어요. 그렇기에 상황에 따라 춤추듯 모습을 바꾸는 작은 존재들의 몸짓은, 어쩌면 가장 다정한 방식의 저항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작가는 일상의 장면을 통해 두려움의 대상이던 것들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다시 맞이하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기존의 질서에서 한발 비켜섭니다. 크게 부풀리지 않고, 지나치게 정돈하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형상을 조금씩 일그러뜨리며 균열을 만들어내죠. 매일의 꼼지락으로 굳어진 현실을 비틀어내는 김허앵, 그 여진이 쌓여 완성된 그녀의 춤을 BE(ATTITUDE) 웹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문어 아가씨›, 2023, acrylic on canvas, 100×100cm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거주하며 작업하는 김허앵이라고 합니다. 본명입니다. 아버지께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허황이라고 지으려고 했는데, 여자아이에겐 조금 강한 이름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꾀꼬리 앵(鸎)자로 바꿔서 지으셨다고 하네요. 허황된 일을 하는 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때 만화랑 게임을 무척 좋아했어요. 매달 사 모은 만화잡지가 방에 키만큼 쌓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지만 서울로 대학을 오고 싶어서 미술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자율전공으로 입학했는데 입시미술이 너무 지겨워서 내 마음대로 뭔가를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회화를 전공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얼레벌레 이어져 온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저의 작업실은 북한산 등산로 가까이에 있어서 풍경이 아름답고 조용한 곳입니다. 가끔 멧돼지나 산에 사는 개들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해요. 장황하게 늘어져 있는 수많은 물건과 책들 사이에서 매일 칼과 연필, 물감을 잃어버렸다 찾는 일을 반복하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The Explorer›, 2025, acrylic on canvas, 40×400cm
‹우리들이 흔들리는 각기 다른 방향›, 2024, acrylic on canvas, 72.7×50cm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 망상, 그리고 그것을 깨트려주는 현실의 트리거들에서 시작합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연필로 종이에 먼저 스케치하고 캔버스에 옮기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글을 쓰기도 하는데 종이에 펜으로 적는 걸 좋아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할 때는 핸드폰 메모장에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놓습니다.
‹새들이 세수하는 곳›, 2024, 천에 아크릴, 도자, 혼합재료, 가변설치
«나의 지구를 지켜줘» 관련 스케치, 2023
«나의 지구를 지켜줘» 전시 전경, 2023, Space Willing N Dealing, 서울,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The Explorer›시리즈는 2022년 처음 제작한 시리즈입니다. ‘마법사가 되는 방법’ 이라는 90년대 RPG게임에서 모티브를 얻어 그린 그림입니다. 게임 속 3등신 플레이어 캐릭터에서 따온 인물들은 관찰하고 연구하되 사냥하고 약탈하지 않는 것을 전제한, 괴물을 물리치지 않는 플레이어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했어요.
2025년 개인전 «Dear morning»에서는 이 시리즈를 새롭게 발전시켜 동명의 그림들을 선보였습니다. 집 주변에 자주 출몰하는 지네와 개망초 등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이들의 강인함을 흡수한 새로운 생물로서 세계를 탐험하는 이들을 그렸습니다.
‹The Explorer›, 2024, acrylic on canvas, 65.4×53.2cm
‹The Explorer›, 2025, acrylic on canvas, 50×200cm
‹The Explorer›, 2025, acrylic on canvas, 50×200cm
‹The Explorer›, 2025, acrylic on canvas, 100×30cm
‹돌머리의 여행› 시리즈는 앞서 언급한 ‹The Explorer› 시리즈의 스핀오프격인 이야기입니다. 영민하게 변화하는 세계에 발맞추어 변화한 생물들과 다르게, 한참이나 늦게 깨어나버렸지만 느지막히 자신의 길을 떠나는 어떤 돌머리 생물을 그렸어요.
‹돌머리의 여행›, 2024, acrylic on canvas, 41.3×53cm
‹돌머리의 여행›, 2024, acrylic on canvas, 45.6×45.6cm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인가요?
다양성과 긍정적으로 미래를 맞이하는 태도, 한 스푼의 어둠.
최근 진행한 작업에서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만족스러운 점은 그림의 색채가 전반적으로 원하는 만큼 구현된 것, 불만족하는 점은 딱히 없고 추후에 개선하고 싶은 몇 가지를 다음 작업을 제작할 때 반영할 생각입니다.
‹내가 넙치였을 때›, 2023, acrylic on canvas, 100×100cm, «지구를 겪어본 적이 없네요», 2023, 서울연극센터
‹아래로, 아래로›, 2023, acrylic on canvas, 180×100cm
‹The Explorer›, 2025, acrylic on canvas, 45.5×27.3(cm)
‹사랑하는 저녁›, 2023, acrylic on canvas, 97×97cm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아이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매우 규칙적인 하루를 보냅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9시-10시쯤 작업실에 출근합니다. 12시쯤 밥을 먹고, 15-16시에 퇴근합니다. 엄마로 출근하는 시간입니다.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늘 오늘 저녁 메뉴를 뭘로 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사랑하는 저녁›, 2023, acrylic on canvas, 97×97cm
‹도자기›, 2024, 박은주 협업
‹너머의 지도›, 2022, oil on canvas, 197×197cm, «Furry ways», 미학관, 서울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사춘기 소녀였을 때 좋아한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을 아직도 가끔 되새김질하는데요, “Life is far too important a thing ever to talk seriously about” 라는 말입니다. 딸이 ‘엄마 나 너무 힘들어!’ 라고 말하면 저는 ‘그럼 춤을 춰라!’ 하고 말하거든요. 대체로 그런 식입니다.
‹너머의 지도›, 2022, oil on canvas, 197×197cm, «Furry ways», 미학관, 서울
2025년에 본격적인 편두통이 찾아왔어요. 평생 두통을 모르고 살았는데, 한번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니 정말 괴롭더라고요. 술을 좋아했는데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리엄마›, 2019, acrylic on paper, 18×18cm, «mama do», Keep in Touch, 서울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성실하게 일정 시간과 물리적 노력을 투자해야 약간의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운동 한가지는 꾸준하게 하고 과식이나 과음하지 않기. 제가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노력›, 2013, oil on canvas, 50×60.5cm
Artist
김허앵(@heo_ang_kim)은 모성과 여성성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해, 반려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동일한 사건과 장면을 다른 생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데 관심을 가져왔다. 최근에는 인간이 더 이상 인간으로 기능하지 않는 광막한 미래를 상상하며 그곳에서 살아갈 새로운 생물들을 산과 바위, 개망초와 지네 등 익숙한 자연의 형상을 빌려 표현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회화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인전으로 «Dear morning»(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5), «나의 지구를 지켜줘»(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3), «Furry ways»(미학관, 2022), «먹고 마시고 ~사랑하지만 역겨운 나에게~»(Instant roof, 2021), «mama do»(Keep in touch Seoul, 2020), «BAD ENDING ~어쩐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저녁~»(아카이브 봄, 2015)를 열었다. 주요 단체전으로 «미지의 운동장»(FACTORY 2, 2025), «점점 다가서는 우리들»(2024, 자하미술관), «지구를 겪어본 적이 없네요»(서울연극센터, 2023), «하-하-하-하우스»(수원시립미술관, 2021) 등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