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틈에 상상력을 붓는 사람
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최지욱 작가는 기이하면서 끝없는 매력을 풍기는 초현실적인 풍경으로 관객을 초대합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일상적인 삶의 틈을 벌려 상상력을 추가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는데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을 놓은 테이블, 도심을 가로지르는 자동차, 파도가 들이치는 해변 등 일상적인 장면이라도 그의 렌즈를 통과하면 비일상적인 분위기로 탈바꿈하죠. 특히 미묘한 뉘앙스로 다루는 모호함은 남들과 ‘한 끗’ 다른 개성의 산물입니다. 낯설고도 익숙한 세계를 펼치는 최지욱 작가의 이야기를 지금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Lady Blacktronika EP ‹Trablonika Daly› 커버, 2023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그림 그리는 최지욱입니다.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으로, ‘만족감’이라는 단어에 꽤 집착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매일 일기를 쓰고, 수영을 하고, 그림을 그리며 하루 치의 만족감을 채우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장래 희망란에 늘 ‘화가’라고 적었어요. 그렇게 대학에서 순수 미술을 전공하게 됐는데 막상 설치나 영상, 퍼포먼스 작업을 주로 했답니다. 그렇게 작업을 이어오다 보니, 그림과는 데면데면해진 채로 졸업하게 됐어요. 이후 현실적인 문제로 이사를 자주 다니면서 더 이상 기존 작업을 이어 나가기 어려웠는데요. 놀랍게도 창작 활동을 하지 않는 삶을 견디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늦다면 늦은 시기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제 업이 되어서 거의 10년 차 작가로 살아가고 있네요.
Khruangbin 내한포스터, 2022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표지, 2023
설화수Sulwhasoo 패키지, 2021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따로 작업실을 두지 않고, 집에서 일하고 있어요. 책상과 컴퓨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한 가지 어려움이 있다면, 출퇴근 없는 삶에다 침대가 지척인 곳에서 일하다 보니 자신의 게으름과 매일 대면해야 한다는 거예요. 재택근무를 경험하신 분이라면 아마 제 말에 공감하실 것 같은데요. 스스로와 오랜 갈등, 타협, 조정 과정을 거쳐 이제는 어엿한 프리랜서의 루틴을 갖추게 되었답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매우 다양한 곳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받아요. 사소한 자극 하나가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과 얽히며 새로운 무언가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네요. 문득 시선이 머문 일상적인 장면, 수많은 짤 중 하나, 일기를 쓰다가 무심코 적은 문장 등 저를 멈칫하게 하는 모든 것을 두서없이 저장하고 기록해 둬요. 적어둔 것들은 대부분 시간에 흘러가지만, 그중 몇 개는 기어코 마음속에 남게 돼요. 특정한 영감이 마음에 남은 이유를 고민하고 이리저리 잘 매만지며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을 따르는 게 좋아요.
‹Alone at Night›, 2023 (좌)
『저주 토끼 』표지, 2023 (우)
‹Alone at Night›, 2023 (상)
『저주 토끼 』표지, 2023 (하)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프로젝트를 의뢰받는 순간부터 창작 활동을 시작한다고 볼 수 있어요. 본격적으로 작업하기 전, 머릿속으로 가볍게 온갖 소재와 구성을 만들어보고, 지워보고, 재배치합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운동을 하면서도, 영상을 보면서도 뇌 한구석에서는 작업에 쓸 만한 요소를 수집하고 콜라주하며 다양한 포맷을 떠올려요. 그중 그림이 될 것 같은 몇 가지를 골라서 바로 스케치에 들어가죠. 전체 작업 과정 중에서는 아이디어 스케치가 제일 힘든 것 같아요. 이후에는 스케치든 채색이든 열심히, 그리고 정교하게 다듬어 작업을 완성합니다.
작가님의 최근 작업들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 작업을 했어요. 제가 2016년 해당 영화제의 포스터 작업을 통해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길을 본격적으로 걸어서 그런지 감회가 참 새롭더라고요.
『저주 토끼 』표지, 2023
DJ 페기 구Peggy Gou의 레이블 ‘구두 레코드Gudu Records’의 바이닐 커버 작업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어요. 다양한 아티스트의 곡을 먼저 들을 수 있고, 자유도가 높아서 매번 작업할 때마다 즐겁습니다. 작년에는 구두 레코드에서 앨범을 발매하는 아티스트가 많아서 저도 덩달아 바빴네요.
Matisa EP ‹Tongue› 커버, 2023
SPECIAL REQUEST 싱글 ‹Sliver (feat. Novelist)› 커버, 2023
최근에는 특별한 기회로 벽화 작업을 했어요. 위스키 브랜드 조니 워커Johnnie Walker에서 기획한 ‘에어 잉크Air-ink’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는데요. 공기 중의 탄소를 채집해 만든 잉크로 4m 길이의 가벽에 도시 서울의 모습을 그렸어요. 물리적인 신체를 전부 사용한 작업이 오랜만이라, 그림 그리는 행위의 즐거움이 새삼 떠올랐답니다.
조니 워커Johnnie Walker 에어 잉크Air ink 프로젝트, 2023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자연스럽게 그리다 보니, 제 그림 어딘가에는 항상 비일상적이고 초현실적인 풍경이 나타나더군요. 지금까지의 작업을 돌아보면, 결국 제 일은 일상적인 삶의 틈을 벌려 상상력을 추가하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요. 제가 그린 상상의 풍경이 누군가의 일상에 새로운 의미로 작용하길 바라고 있어요.
Hiver EP ‹Wave Sliding› 커버, 2022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아침의 기분이 하루의 컨디션을 좌우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오전 시간은 저를 위해 최대한 느긋하게 보내려 합니다. 일찍 일어나 일기를 쓰고, 짧은 명상을 한 뒤 태블릿으로 드로잉을 1시간가량 해요. 이후에는 보통 수영을 하러 가는데요.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날은 집에서 간단히 요가를 합니다. 그리고 점심 즈음부터 일을 시작하죠. 요즘에는 잠들기 전에 집안을 정돈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어요. 저녁에 집을 정리하면 아침을 부산스럽게 보내지 않을 수 있어서 참 좋더라고요. 잔잔하고 평화롭게,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인터넷에 떠도는 다양한 뉴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부쩍 관심이 가요. 어느 시대나 늘 중대하고 시끄러운 사건과 사고가 존재하는데요. 지금의 위기들을 살피다 보면, 최근 몇 년 새 인류가 어떠한 변곡점에 돌입한 것처럼 느껴져요. 혼란한 소식을 관통하며 다가올 삶의 변화를 이해하고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Hiver EP ‹Dream Universe› 커버, 2023
Mogwaa EP ‹From Above› 커버, 2022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저는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사람이라, 작업에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상황이나 비유를 통해 표현하는 것 같아요. 양가적 감정, 아직 정의하지 못한 모호한 기분, 구구절절해서 쓰지 못한 문장, 흑백으로 나눌 수 없는 상황에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명확한 메시지보다는 우회적인 뉘앙스를 사용하는 편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저 자신이 약간 관찰자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러한 태도와 시선이 제 작업에 드러나는 건 아닐까 싶네요.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다행히 아직 심각한 슬럼프를 겪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작업을 하면서 답답한 느낌은 늘 받죠. 그 느낌이 오래가면 우울해지기도 하고요. 그럴 땐 지금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낮잠을 자 버려요. 자고 나면 마법처럼 고민이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새로 시작할 힘을 얻게 되더라고요. 만약 지독한 슬럼프를 겪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해 봤는데요. 작업을 통해 극복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이번 작업에서 슬럼프를 극복할 수 없다면, 다음 작업에서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다음 작업에서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다음 작업에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다음 작업에서는 슬럼프를 극복하겠다’라는 마음으로 넘어선 위기가 몇 번 있었던 듯싶어요.
최근 들어 작가님에게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면서 주로 클라이언트 작업을 해왔어요. 새로운 주제를 마주하고 다양한 변수와 제약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제 성격과 잘 맞았거든요. 하지만 앞으로는 저만의 콘텐츠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클라이언트 작업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작업자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개인 작업을 조금씩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업의 분위기가 자유롭다고 해서, 그 과정마저 자유로울 수는 없거든요. 작업이 구리고, 게을러지고 싶고, 지겨워도 동그라미 하나라도 그리려고 노력해요. 성실함이 영감을 부르고, 종종 좋은 그림을 탄생시킨다고 믿어요. 그런데 저 역시 부지런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조금 겸연쩍네요. (웃음) 다만 이렇게 부지런하지 않은 저도 성실히 살기 위해 매일 애쓰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좋은 작업을 내놓으면서 배우고 성장하는 것은 좋지만 절대 남과 비교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스스로의 그림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버려야 해요. 자기 작업에서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그냥 인정하고 보완하면 됩니다. 누군가의 작업이 훌륭하면 비교할 시간에 어떤 점이 좋은지 생각하고 배우면 돼요. 창작자는 더 좋은 창작물을 만드는 과정에 서 있는 사람이니까요. 긴 호흡의 여정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능력을 함께 키워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종종 흥미로운 작업을 만드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이전 작업에 의존하지 않고, 조금씩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나만의 방향을 만들어가는 창작자를 꿈꿉니다.
현재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막연한 불안이 엄습할 때가 있어요.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만큼 불안감이 찾아오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먼 미래에도 여전히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좋겠어요. ‘경력이 쌓인 만큼 그림이 유연해지지 않을까?’, ‘어쩌면 전혀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면 마음이 설렌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많이 웃는 할머니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Dukwa EP ‹Matter of Time› 커버, 2022
Artist
최지욱은 일상적인 풍경을 낯설게 구성하거나 조합해 은유적인 뉘앙스를 전하는 작업을 지향한다. 주로 화면 속 요소가 스스로 작동하는 독립적인 세계를 상상하며 그림을 그린다. 애플, 조니 워커, 페이스북, 현대백화점, 네이버 등 국내외 다양한 클라이언트와 협업했다. 포스터·광고·출판·앨범 등 분야를 넘나들며 활약하는 그는 최근 브랜딩 이미지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