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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디자인과 건축 없이 인간은 살 수 있을까?

Writer: 전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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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등 장편 소설로 워낙 유명하지만 단편 소설도 그에 못지않은데요. 특히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아마 어렸을 적 읽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입니다. 작가는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을 사랑이라고 해석해요. 너무나도 맞는 말이고 아름다운 교훈입니다. 하지만 창조론적 관점이 아니라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유인원(類人猿)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의 원인(猿人)으로, 그리고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불의 발견과 도구의 사용을 빼놓을 수 없을 거예요. 디자인의 탄생에 대한 개념은 학술적으로 명확한 편이지만, 무엇인가 만들고 해결하는 능력으로 광의적인 해석을 한다면 결국 인간이 이룩한 진화 중심부에 디자인이 놓이게 됩니다. 유랑하는 삶에서 정주하는 삶으로 탈바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농경 사회에서 집과 건물을 짓는 건축 또한 문명의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죠. 과연 디자인과 건축 없이 인간은 살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소소한 의견을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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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과 건축은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한 존재입니다. 왜 그럴까요? 동물에게 가장 필요한 3가지 요소를 의, 식, 주라고 하죠. 입는 일, 먹는 일, 머무르는 일은 생존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각각의 특성에 알맞게 의, 식, 주는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원래부터 타고났습니다. 육식 동물은 초식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발달했습니다. 초식 동물은 지천으로 널려있는 식물들을 먹으며 생을 이어갈 수 있었죠. 날씨에 따라 더운 지역에서는 얇은 털이, 추운 지역에서는 두꺼운 털이 이미 몸에 붙어있었습니다. 잠은 커다란 나무 위나 수풀에서 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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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동물들

인간은 어땠을까요? 고릴라, 오랑우탄, 침팬지 등 사람과에 속하지만 사람이 아닌 동물을 칭하는 유인원(類人猿)에서 진화해,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조상인 원인(猿人) 중 하나로 300만 년 전에 살았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를 볼까요.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의 숲속에 살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유인원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긴 팔은 거추장스러웠고, 나무 위에 잠자리를 마련한 것도 마찬가지였죠. 먹는 것 또한 맹수가 사냥해 먹고 남긴 고기를 다른 동물들과 다투며 쟁취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직립 보행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세렝게티 초원 근처에서 큰 화산 폭발이 일어났을 때 두 발로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다른 미지의 세계로 이동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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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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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립 보행이 가능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직립 보행 이후 원인에게 다가온 축복은 바로 불의 발견입니다. 불을 이용해 음식을 익히면 질긴 음식이 더 먹기 좋은 상태로 변합니다. 으깨지는 것이죠. 썩은 고기와는 다르게 더 신선하고 안전해져 소화가 잘되고 얻을 수 있는 에너지양도 늘어나서 생존에 훨씬 유리해집니다. 직립 보행, 불의 활용과 더불어 이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축복은 도구의 사용입니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라고 칭하는 원인에게서 발견되는 도구 사용의 흔적은 무척 특별합니다. 단순히 도구를 이용한 게 아니라, 만들어 썼다는 거죠. 실제 인류 문명이 생기기 전 가장 오래된 시대를 구석기 시대라고 칭하는 바탕에는 석기를 만들어 생활에 사용한 먼 옛날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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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바꾼 불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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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코시에르, ‹불을 나르는 프로메테우스›, 1636~38, 캔버스에 유채, 프라도 미술관 소장: 그리스 신화에서는 인류가 처음 불을 사용하게 된 역사적 사건을 ‘프로메테우스’라는 신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불을 선물한 덕분에 인류는 거대한 문명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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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렉투스가 사용한 좌우 대칭 아슐리안 석기(Acheulean stone tools)

석기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원인이 유인원과 완전히 구별되어 향후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기능했습니다. 돌과 돌을 접촉해 강하게 내리치며 날카로운 면을 만드는 행위를 반복한 끝에 탄생한 석기는 사실 엄청난 노력이 듭니다. 그까짓 돌로 무언가 뾰족하게 만드는 게 뭐가 어렵냐고요? 보기에는 쉽지만, 실제 행동으로 실천하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렵고 지난한 일이랍니다. 미국 에모리대에서 구석기기술실험실을 운영하는 인류학자 디트리히 스타우트Dietrich Stout 교수가 산 증인이죠. 그는 일반인을 상대로 구석기 만들기 체험 클래스를 운영하는데요. 손도끼라고 부를 만한 수준으로 돌을 내려치며 만들려면 20시간짜리 클래스 5번을 들어야 겨우 하나를 완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좀 더 정교하게 하려면 100시간이 아니라, 300시간이 걸린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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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디트리히 스타우트Dietrich Stout

디트리히 스타우트의 구석기 만들기 워크숍

이렇게 만든 돌도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전문적인 사냥이 가능해집니다. 맹수가 남기고 간 고기나 길거리에 내팽겨쳐진 사체의 썩은 고기가 아니라 인간이 직접 만든 도구로 생존을 능동적으로 이어갈 수 있죠. 게다가 단단한 힘줄로 가득한 고기를 살살 자르거나 두드려서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덤입니다. 죽은 동물에서 가죽을 벗겨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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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든 도구를 활용해 사냥을 시작한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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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이용해 고기를 익혀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식생활과 의생활이 자급자족하는 상태가 되는 데에는 도구의 힘이 엄청났습니다. 스타우트 교수는 이토록 경이롭게 진화한 호모 에렉투스에게 별명을 선사합니다. 바로 ‘호모 아티펙스Homo artifex’입니다. 라틴어로 아티펙스는 기교, 창의성, 장인정신을 뜻하는데요. 이 말에서 단박에 떠오르는 단어가 없나요. 맞습니다. 이건 디자인입니다. 무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안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 실제 물건으로 만드는 행위를 디자인의 일부라고 보지 않으면 무엇이 디자인에 속할 수 있을까요? 즉 인간은 디자인을 통해 구석기 시대를 열었습니다. 디자인이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만일 디자인적 사고가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 존재하지 않았겠죠.

수렵하며 떠돌아다니던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한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인류에게 문명을 선사한 농업 혁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구석기보다 더 진화된 신석기를 쓰는 이 시대에는 하천이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먹거리를 기르며 자급자족으로 살았습니다. 여기서 예전과 가장 달라진 게 무엇일까요.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게 디자인이라면, 현생 인류의 직계인 호모 사피엔스가 살던 신석기를 대표하는 행위는 바로 건축입니다. 전에는 동굴 등지에 숨어 자연이 만든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살았다면, 이제는 도구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뉠 곳을 창작했습니다. 도구를 만드는 것과 집을 짓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도구는 움직이는 작은 물체이지요. 하지만 집은 오랜 기간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여기에는 공간에 대한 인식과 함께 암묵적으로 습득한 중력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집은 무너지지 않게 짓는 게 제1원칙이니까요. 즉 무언가를 ‘구축’한다는 것은 ‘만드는 것’ 그 이상의 행위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미 입는 것과 먹는 것을 충족하고, 남은 걸 저장하기 위해 토기까지 만들었던 존재였습니다. 이들에게 남은 건 이제 동굴을 대신한 삶의 거처였고, 이를 스스로 생산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인류의 문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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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스톤헨지 인근에 재연한 신석기 시대 주택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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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섬의 신석기 시대 원형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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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토기

디자인과 건축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행위이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고도의 세련된 행위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서 디자인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하는지. 300시간의 시간을 들여 돌을 깎는 시절로 되돌아가야 인간의 삶이 최소한으로 보장될 수 있습니다. 비와 바람을 피하고 어딘가에 정착하려면 건축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건축 없는 세상은 수평선의 세계입니다. 높이와 넓이를 지닌 채 볼록 솟아오른 삶의 거처가 존재하지 않는 수평선의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걷고 또 걷는 이동이 필수였지요. 하지만 우리는 가족을 이뤄 어딘가에 정착하고, 이웃과 함께 마을을 이루고, 더 커진 사회와 국가를 이루며 엄청난 속도로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발전은 곧 투자하는 것입니다. 투자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내달리는 용기는 바로 기존의 것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존재의 유무에서 결정됩니다. 집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결국 디자인과 건축이 없는 인간의 삶은 엉망진창의 악몽입니다. 아주 아주 오래전으로 후퇴하는 멸망의 전조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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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하지 않는 수평선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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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과 건축이 이룩한 문명

지금은 너무나 흔해서 귀한지 모르는 디자인과 건축은 인류의 진화 속에 늘 함께했던 핵심적인 행위였습니다. 온몸으로 체화되어 공기처럼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늘 당연하고 상식적으로 언제나 존재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디자인과 건축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우리의 삶, 나아가 현생 인류의 삶은 어찌 될는지. 생명의 본질은 생존이고, 생존의 근원은 번식입니다. 이 ‘동물’의 습성을 인간의 말과 사상으로 덮은 건 아마 디자인과 건축이 획득한 가장 큰 성과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재케 하는 뼈대와도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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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과 건축을 통해 인간다움을 구축하는 인류. ‹이타미 준의 바다›(2019) 스틸컷 중 일부, © 기린그림

덧. 이글은 경기문화재단 특강 ‘디자인 탐험을 위한 오디오 가이드’를 위해 작성한 내레이션을 처음으로 지면화한 일부입니다.

Writer

전종현(@harry.jun)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하며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등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고, 2021년부터 2023년까지 기아글로벌디자인센터와 함께 «기아 디자인 매거진» 창간 작업과 콘텐츠를 총괄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기고 중이며, 동시대 한국의 기발한 창작자에 주목하는 «비애티튜드» 편집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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