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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서 있으면서 앉아 있기

Writer: 크리스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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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지금 제기동 경동시장 안에 위치한 크리에이티브 스페이스 더 윌로The WilloW에서는 크리스 로의 개인전 «어딘가, 여기 아래, 어느 정도 안쪽, 모든 것 아래 하지만 들을 수 있는 정도로 가까운 곳에, 여럿이 잠들어 있습니다. 조용히, 속삭이며, 천천히 뛰고 있는, 끊임없는 그렇지만 때로는 부서진 마음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긴 제목은 외우기도, 발음하기도, 부르기도 쉽지 않습니다. 축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명확하고 효율적인 제목으로 바뀌면 30개의 단어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리듬은 아마 소멸하겠죠. 프리뷰 기간에 방문해 전시를 둘러보다 눈에 들어온 브로슈어에서 크리스 로의 에세이를 만났습니다. 예전 네덜란드에서 열린 전시를 위해 발표한 글 ‘지난해. 과거와 미래 모두’(Yesteryear. Both Past and Future)’를 기반 삼아 이번 개인전에서 다시 선보이는 글입니다.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꼭꼭 씹고 또 씹는 기적 같은 집중력이 발휘되더군요. 그때 그 시간에 에세이를 볼 수 있었던 건 행운, 혹은 운명이었습니다. 타인과 공유하고 싶다는 열망이 들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이 자리에 납치(?)했답니다! 부디 은은한 영감이 벼락처럼 스치길 기원합니다.

«어딘가, 여기 아래, 어느 정도 안쪽, 모든 것 아래 하지만 들을 수 있는 정도로 가까운 곳에, 여럿이 잠들어 있습니다. 조용히, 속삭이며, 천천히 뛰고 있는, 끊임없는 그렇지만 때로는 부서진 마음들.» 포스터

안타깝게도, 저는 많은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계속해서 잊어가고 있습니다. 대학 경험 중 배운 많은 개념과 지식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읽었던 책들이나 참석했던 강의는 이제 흐릿한 기억뿐입니다. 거의 꿈 같습니다.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배운 것 중 많은 것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남은 일부 지식이 있습니다. 제게 어떤 지식이 남아있는지 그리고 그 지식 조각들이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무엇이 가고 무엇이 남았을까요?

요즘 제 작업의 뿌리에는 건축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몇 가지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알렉산더의 글을 접하게 되었고, 어떤 이유에서 그가 생각하고 절대적으로 확신했던 것들은 제 정신 속에 이상한 집을 지었습니다. 제 전두엽에 소파나 안락의자가 놓여있다고 해 보죠. 이런 생각들은 갑자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요. 그리고 이 생각들은 제 뇌 속 가구에 앉아 제집처럼 편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절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는, 저도 그 생각들이 거기 있어 기뻤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저의 고유한 신념과 세계에 대한 관찰을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이 인생의 파도와 흐름에 함께하면서, 저도 종종 제 나름대로 비슷한 생각이나 고민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글을 접하고 나서는, 이런 생각과 관찰이 거의 믿음으로 변했습니다.

돌아보면, 이런 생각들이 제 정신 속에 그렇게 자리 잡은 것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때 저는 어떤 이들이 말하듯 형태에 빠져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이론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념적 사고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당시 딜러 스코피디오 스튜디오Diller Scofidio studio나 모포시스Morphosis의 건축물에 진심이었습니다. 그 매력에 사로잡혔지요.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시각적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든 면에서요. 그런 작업들이 저를 흥분시켰습니다. 아름다움. 형태. 표면과 외관. 그 당시, 저는 제 귀와 눈 바로 앞에서 잔뜩 펼쳐지던 이성의 세계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그게 나였고, 가끔은,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여전히 그런 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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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ler Scofidio studio, School of American Ballet © Diller Scofidio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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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phosis, Smithsonian Institution’s Arts & Industries Building © Morphosis

이런 성향에도 불구하고, 학기마다 구입하던 A4/레터 사이즈 강의자료 속 사진에서 알렉산더를 만났을 땐, 저에게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자료는 대부분 같은 시기에 같은 복사가게에서 매년 구입했습니다. 이 자료에 흥미로운 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책에 형태는 없었죠. 멋진 사진도 없었고, 작품 사진도 없었습니다. 세계 각지의 장소나, 예시를 담은 몇몇 무작위 이미지와 함께 텍스트만 있었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특정 텍스트를 기억했습니다. 제가 기억한 이유가 시각적인 형태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의 실제 건축물을 보는 것은 제게 그다지 흥미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시각이 조금 더 성숙해진 오늘날에도, 그것은 여전히 제게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흥미를 느꼈던 ‘그’ 형태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흥미를 이끄는 것은 그 뼈대 속에 존재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의 구조 또는 본질. 누군가는 이것을 개념적인 토양이나 흙의 형태의 한 종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작업과 생각의 기반인 무언가가 저를 계속해서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확신한, 그를 납득시킨 아이디어들. 이것들은 아직도 저와 함께 있습니다.

서울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쓰레기의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쓰레기가 있습니다. 많은 쓰레기가요. 우리는 그것을 버리지만, 그것이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다. 쓰레기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책임감을 덜 느끼게 만듭니다 – 결과에 대해 덜 걱정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덜 걱정합니다. 그리고 이는 어떤 유형의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저는 이를, ‘재시작 문화’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지우고, 버리고, 다시 시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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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woong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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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woong Hong

© Kiwoong Hong

서울만이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런 문화가 여기에만 존재한다고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이와 같은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지죠. 사라지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저는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며, 공간과 삶에 대한 제 관찰과 생각은 이 도시 안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이러한 ‘보이지 않는’ 문화는 여기서 특별한 징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고, 알렉산더의 생각과 함께 저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 서울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 봅시다. 알렉산더는 종종 건물이 자랄 수 있다는 개념을 고민합니다. 아마 도시도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시간과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있는 건축. 환경에 딱 알맞은 건축. 주변과 하나가 되는 건축. 제가 배운 바에 따르면, 이러한 것의 기초는 한국의 뿌리 깊은 사회, 역사 및 전통적 미학적 사고, 즉 풍경이나 환경과의 조화에서도 똑같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그 장소와 함께 성장하고 나이들 수 있는 건물. 주변 환경에 어울리는 건물. 어쩌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창조하는 것은 쓰레기가 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창조하는 것이 지구의 영구적인 부분이 될 수 있는 거죠. 이 세계요. 이는 정말로 아름다운 아이디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아마도 산업화된 한국 이전의 생활과 행동에 더 가까웠을 것입니다. 지난 70년쯤의 세월과 유사하게, 오늘날에도 격렬하고 빠른 경제성장이 존재합니다. 팽창과 부는 때로 공간에 대한 감각이 매우 부족한 콘크리트 밀림을 만들어 냈습니다. 앞서 언급한 ‘보이지 않는’ 쓰레기 문화를 계속하는 환경이죠.

짓고 없애고.

짓고 없애고.

짓고 없애고.

우리는 종종 자라지 않는 건물을 세웁니다. 그들은 존재하고 그리고는 소멸합니다. 그들은 지어지고 사라집니다.

한국에는 ‘재개발’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도시 재개발 사업’의 유형 또는 변형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제 눈에는 또 다른 종류의 개발입니다. 재개발 대상이 될 수 있는 특정 동네의 많은 주민들은 이를 환영합니다. 그들은 변화와 개발 모두를 환영합니다. 재개발 과정에선 일반적으로 개발 그룹이 기존 주민의 집/건물/부동산을 모두 구매합니다. 주민들은 현금 또는 미래의 새 아파트를 제공받습니다. 그들의 옛 주택은 폭파되고 전체 동네는 모두 사라집니다. 남아 있는 것은 흙뿐입니다.

짓고 없애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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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woong Hong

이전 동네 자리에 대신해 들어오는 것은 아파트나 콘도와 같은 거대한 복합 건물이 위에 있고, 아래에 일종의 광장, 상업 공간이 있는 단지입니다. 이 동네에 거주했던 주민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매우 손쉽게 부자가 됩니다. 복잡한 리모델링, 땅의 재측량, 부담이나 소란은 없습니다. 그저 깨끗한 시작이죠. 그리고 아마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간단하면서도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승리라는 것입니다. 이전 그들의 부동산은 팔리지 않을 위기에 처해 있었고, 호재 없는 도시의 한 부분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주택 가치가 절대로 오르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집을 팔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집을 꽤 좋은 가격에 팔 수도 있고, 이 돈으로 다른 동네로 이사해, 아이러니하게 또 이 과정을 다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짓고 없애고.

그래서 이제 여기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한 동네, 또 다른 동네, 동네들이 계속해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득 어떤 과거와의 연관도 없는 아파트 단지가 갑자기 이 공간에 나타납니다. 아무런 연결도 없습니다. 즉 이 단지는 난데없이 이곳에 나타난 것처럼 보입니다. 과거도 없고, 어쩌면, 알렉산더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미래도 없을 수 있습니다.

이 새로운 단지는 당분간 존재할 것이고, 나중에는 아마 높은 가능성으로 똑같이 파괴되거나 교체될 것입니다. 심지어 대규모 아파트도 철거되고 정리되니까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것이야말로 ‘자라지 못하는 건물들’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환경과 분리된 건물. 환경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은, 무관한 건물. 어느 도시, 어떤 환경, 어디에나 거의 그대로 놓일 수 있는 건물. 저는 이런 수많은 예시를 한국의 신도시—현존하는 도시 지역 외부에 지어진, 기존에 지어진 거주지나 구조물 없이 텅 빈, 혹은 나무로 가득 찬 지역에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지어진 위성 도시들—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솟아나 비슷하게 빠르게 발전된 복합 단지/도시 주택들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지들의 현실은 엄청나게 빠르게 지어진다는 점에 있습니다. 때로는 매우 경제적인 건설 방식을 이용해서요. 이런 방식은 종종 건물이 빠르게 노후화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때때로, 불행하게도, 건물들은 안 좋게 나이를 먹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 이 건물들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증축되거나 확장되기보다 철거되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알렉산더가 걱정했던 유형의 디자인이죠: 과거, 그리고 또, 미래가 없는 건물들입니다.

그래서 현대 문화에서는 무엇이 이에 반대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도달했을까요? 그리고 이 개념은 지금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업과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요? 제가 기억할 수 있는 한, 순수한 형태에 대한 탐구는 항상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시각 형태의 순수한 탐구. 이는 중요한 순간이고, 소중한 시간입니다. 발견의 과정이죠.

어디로 가는지 보기.

어디로 가는지 느끼기.

이어 나가는 과정을 허용하기.

최근에, 제 탐색의 결과 또한 ‘만들고 지워버리는’ 세상에서 누락되었다고 느끼는 것들을 통합하고 있습니다.

삶의 흔적.

질감의 흔적.

존재의 흔적.

시간이나 변화의 흔적들과 공명하며, 성장하고 또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

알렉산더의 글에서 그는 종종 삶의 순간들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이를 “중심”(centers)이라고 부릅니다. 중심은 생명이 흐르거나 통과할 수 있는 장소, 공간 또는 구조물일 수 있습니다. 저는 중심을 어떤 면에서 ‘레이어’로 상상합니다: 질감. 거침의 정도. 시간을 통해 일어나거나 시간을 거쳐 일어나는 일들. 왜냐하면 이것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단계, 점진적 변화, 연결을 만드는 것은 직선이나 단단한 선이 아니라—변화를 통해 전환이 일어납니다. 전환은 단계별로 일어납니다. 움직임 속에서. 시간에 따라.

Christopher Alexander, 『The Nature of Order』

서울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동네들은 이러한 과도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이에 있죠. 그들은 과거와 현재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이러한 동네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불운한’ 동네였고, 때로는 재개발에 적격하지 않았거나, ‘짓고 지워버리는’ 것을 방지하는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동네들은 종종 구부러진 길, 골목길, 한두 층짜리 주택 및 빌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국에서) 빌라는 가치가 있는 ‘진짜’ 주거지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종종 고층 아파트의 불운한 자식입니다. 한국식 빌라는 일반적으로 가족과 개인을 위한 거주지로 구성된 다가구 건물입니다. 이는 보통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오르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아파트나 콘도미니엄보다 가치가 높지 않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빌라는 중산층보다 약간 낮은 계층을 위한 주거 유형이지만, 이러한 구조물은 단독 주택과 함께 시간과 삶만이 제공할 수 있는 멋진 층과 질감을 제공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단독주택은 때로는 상당히 비싸고 빌라의 경제 시스템을 따르지 않지만, 이러한 종류의 주거지는 종종 인간적인 규모의 주거 환경에서 함께 발견됩니다. 빌라와 단독주택이 함께 존재하는 동네에서는 공식적인 장기적인 계획이나 고려가 없었기에 종종 인간적이고 매우 생동감 있는 공간 경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물의 1층이나 차고 또는 주차장은 때로는 레스토랑, 카페, 소매점 또는 예술가/디자인 스튜디오로 임대되어 사용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이러한 공간이 기존에 있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갑자기 나타난 것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엔 길이나 거리의 그리드가 수십 년 동안 존재했습니다. 과거와의 연결이 있고, 이러한 동네의 경험에는 인간적인 규모가 있습니다.

이러한 동네에 대한 사랑은 공유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여전히 앞서 언급한 거대 복합단지가 투자와 생활의 우선 선택지입니다. 만약 주민이 두 종류의 동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대다수는 아파트 단지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는 동네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 때문이 아닌(비록 일부는 이것을 더 선호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이 투자와 경제적 이유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아파트 단지는 대체로 항상 더 나은 투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작은 범위의 동네에 매료되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매료되고 있습니다. 큰 아파트 단지는 아직 저에게 이러한 규모의, 공간적인, 또는 분위기적인 경험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아파트 단지는 아직 이러한 레이어를 저에게 제공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규모 동네에는, 이들이 제공하는 감각,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성, 그리고 여기에 매우 살아있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전환에 관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극도로 명백합니다. 이러한 공간은 저로 하여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과 감정이 제가 지금까지 탐구하고 있는 작업 속 유사한 현상들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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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rry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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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rry Jun

저는 최근에 형태를 만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이 어떻게 레이어, 공간 그리고 질감과 함께 작용할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렉산더의 “중심”의 시각적 동등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구별을 통하는 것이 아닌 흐릿함이나 부드러움의 렌즈를 통해 일어나고 보여지는 특성, 이 전환의 시각적 동등물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덜 직접적이고.

덜 냉철한 과정들.

이 작업에 대한 제 동력의 일부는 수년간 모든 것에 컴퓨터를 이용한 뒤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컴퓨터와의 작업은 앞서 언급한 미래나 과거가 없는 건물과 개념적으로 유사할 것입니다. 컴퓨터 역시 ‘만들고 삭제하는’ 모델을 따릅니다. 그것들은 속도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효율성을 위해서요. 파일을 만들고, 지웁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너무 쉬워서 종종 폐기하고 삭제합니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컴퓨터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합니다. 이 소프트웨어는 특별히 정밀성과 속도를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에서는, 삶의 흐릿함을 표현할 기회는 적고 멀어 보입니다.

이것은 마치 크리스토퍼 알렉산더가 이른 아침 시간에 여기저기에서 조용히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아마도 수년 동안 나에게 말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다른 무언가를 갈망하도록 했습니다. 나는 디자인의 정확성, 컴퓨터의 정밀성, 컴퓨터를 사용하는 과정의 예리함, 0과 1의 이진법 세계에 지쳤습니다. 저는 피곤했습니다. 저는 다른 것을 원했습니다.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제3의 세계?

얼마 전, 관찰력 좋은 한 친구가, 제가 최근 작업하고 있던 몇 가지 흐릿한 실험을 살펴보는 중에, 작업에서 무언가를 ‘들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기분 좋게 놀랐습니다. ‘소리를 듣는다고? ‘무엇’을 듣지?’ 

소리는 없었습니다. 저는 소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물리적으로도 저의 작업에는 어떤 소리도 없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그가 소리를 듣고 있는 걸까요? 그것이 가능한가요? 가능하다면, 그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눈으로 소리를 듣는다니. 내가 만든 형태에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도록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경이로웠죠. 나는 두 차원에서, 즉 정적으로 그리고 동적으로 작업하고 있었지만, 결코 소리는 없었습니다. 아니, 적어도 의식적인 소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관찰은, 간단한 만큼, 너무나 새로웠습니다. 저는 그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했고, 더 중요하게는, 해방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리 없이 소리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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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woong Hong

제가 기억할 수 있는 한, 제가 만든 모든 형태에 사람들은 의미를 요구했습니다:

이 형태는 왜 존재합니까?

왜 이것을 이런 식으로 만들었나요?

이 형태를 만들 때 어떤 생각을 했나요?

이 형태는 왜 이런가요?

그리고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때, 특별히 깊은 생각이 없었을 때, 저는 항상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이것을 만들었습니다. 그저 그것이 내게 오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리고 전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모두가 더 많은 것을 원했습니다: 클라이언트들은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내 설명이 들리든 안 들리든, 그들은, 의미를 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사들, 교수들도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은 자주, 제 기분을 끔찍하게 만들었습니다—가끔은 그냥 만들 뿐이므로.(그리고 그 이상은 없으므로.)

해방. 갑자기, 소리와 형태 간의 연결이 너무나 자유롭고 해방된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음악가와 그들의 작업 과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빌 에번스Bill Evans나 사카모토 류이치(坂本 龍一)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원은 이러한 순간에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이 소리를 왜 만들었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소리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묻지 않습니다. 단지 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소리를 해석할 수 있는 개방성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 안에서 큰 자유를 느꼈습니다. 아마도, 어쩌면 아마도, 나는 소리와 유사한 것을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리 없는 소리라는 경계 사이의 세계를 탐험해 왔습니다: 악(惡)을 듣지 말고, 악(惡)을 보지 말며, 악(惡)을 말하지 말라. 이 모든 과정은 여러 가지 면에서 반직관적입니다. 인쇄물이나 움직임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탐색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위해서, 저는 알렉산더식이라 부를 수 있을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탐험 방법처럼 느꼈습니다. 그것은 과도기적이고, 덜 명확하며, 어렴풋하게 흐린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어떻게 느끼나요? 어떻게 변화를 직감할까요? 어떻게 덜 명확한 선, 정의, 구분을 만들 수 있을까요?

아날로그의 바스락거림과 인쇄물을 탐구하는 과정도 비효율적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컴퓨터가 의도적으로 제거하려고 했던 시간입니다. 컴퓨터가 결코 원치 않는 긴 시간입니다. 이런 연구의 대부분은 모두 비효율적이며 시간상으로도 비효율적입니다. 목표가 없는 게 목표였으니까요. 무언가 있었다면, 그것은 순수한 호기심이었습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특정한 연관성: 어떤 삶의 감각이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었죠.

알렉산더는 그의 저서 『패턴 랭귀지A Pattern Language』에서 이러한 레이어들과 전환의 여지를 주는 단계를 ‘대략적으로 중간에 있는 것’이라는 개념의 시(詩)적 표현으로 “중간 공간”(middle places)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작업 과정이 되었습니다. 때로 이것은 순간의 집합체인 ‘소리’로, 경계 지역에 대략 자리 잡은 서로 다른 물질들 위에서 발견됩니다. 다른 물질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순간들은 레이어와 공간, 그리고 그사이에 놓인 것들을 탐색하며, 특정 형태나 경험에 ‘생명을 준다’는 의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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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pher Alexander, 『A Pattern Language』

저는 덜 정확한 것을 원했습니다. 저는 변화할 수 있는 것, 즉 시간이 지나며 성장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아마도 어떤 사람의 환경의 일부가 되거나. 변화, 살아있는 변화이거나 더 나아가 그냥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어떤 장소의 일부가 되기를요.

그저 버려지지 않기.

없어지도록 짓지 않기.

과거와 미래 모두를 지닌.

서 있으면서 동시에 앉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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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woong Hong

덧. 이번 전시는 2023년 8월 문을 연 크리에이티브 스페이스 더 윌로The WilloW의 첫 번째 기획전이다. 더 윌로가 위치한 건물은 1955년 사료 창고로 지은 곳으로 제기동 경동시장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 70년 가까운 장소성을 지닌 전통시장 속 크리에이티브 스페이스라는 지리적 특성에서 드러나듯, 더 윌로는 상충하는 요소 사이의 충돌 지점에 주목하며 감각적인 믹스 매치를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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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ngu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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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ngu Kang

Writer

크리스 로(@chris_____ro)는 종종 보이는 것보다 느껴지는 개념을 탐구해온 아티스트다. 유머, 소리, 지리학, 도둑, 우주 등을 반복적으로 다루는 그의 작업은 때때로 운동성, 공간성, 시적, 분위기적 특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인쇄, 설치, 애니메이션, 글쓰기, 전통 회화 및 드로잉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그는 UC 버클리에서 건축학 학사,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에서 그래픽 디자인 석사, 서울대학교에서 디자인학 박사를 취득했고,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시각디자인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다양한 나라에서 전시를 가진 그의 작업은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 파리 장식 미술관(Musée des Arts Décoratifs), 뮌헨 국제디자인박물관(Die Neue Sammlung), 서울대학교 미술관, 홍익대학교 미술관, 플랫폼엘 현대미술관, 국립한글박물관 등에서 영구적으로 소장 중이다. www.chrisro.kr

Exhibition

«어딘가, 여기 아래, 어느 정도 안쪽, 모든 것 아래 하지만 들을 수 있는 정도로 가까운 곳에, 여럿이 잠들어 있습니다. 조용히, 속삭이며, 천천히 뛰고 있는, 끊임없는 그렇지만 때로는 부서진 마음들.»

기간: 2024.06.05 – 2024.07.07

11시~18시 (매주 월요일 휴관)

참여 작가: 크리스 로

Place

더 윌로: 서울시 동대문구 고산자로36길 38,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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