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의 작업실을 방문해 공간, 일상과 창작을 위한 도구 그리고 소중한 오브제를 글과 이미지로 소개하는 독창적인 섹션입니다
왼쪽부터 신해옥, 신동혁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디자인 스튜디오 ‘신신’을 함께 운영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신동혁, 신해옥입니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된 각자의 계기가 궁금합니다.
신해옥(이하 해옥): 학창 시절부터 용돈으로 디자인이 아름다운 책을 한두 권씩 수집하며 막연히 저런 책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죠. 지금은 책만 디자인하지는 않지만, 디자인에 대한 관심의 시작은 분명 책이었어요.
신동혁(이하 동혁): 저는 전공을 선택한 후에 그 매력을 알게 됐어요. 편집 디자인과 그래픽 디자인을 잘하는 멋진 선배들을 롤 모델로 삼고, 한글꼴을 만드는 동아리도 활동하면서 제 성향을 발견해 갔죠. 그 후에 해옥 씨와 연합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꿈을 구체화했어요.
함께 신신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해옥: 졸업 후 처음에는 각자 회사에 들어가서 3~5년 정도 경험을 쌓은 후에 우리의 스튜디오를 해보자고 얘기했는데요. 동혁 씨는 2~3개월 만에 그만뒀고, 저는 5년을 다녔어요. 재직 중에도 종종 동혁 씨가 하는 개인 작업을 돕다가, 2014년 신신을 함께 시작하게 됐죠.
동혁: 저는 당시 알게 된 뮤지션이나 기획자, 큐레이터들과 작업했어요. 단가는 낮았지만, 재미와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였죠. 반대로 해옥 씨는 디자인 에이전시에 근무했기에 가능했던 예산 높은 프로젝트를 다수 진행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고요.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기도 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부러워하기도 했어요. 각자 전혀 다른 경험을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빠르게 노하우가 쌓여서 2014년에는 이제 같이 시작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부로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함께 작업할 때의 장단점은 무엇일까요?
동혁: 초반에는 서로 요령이 없다 보니 일과 삶의 명확한 분리가 어려웠어요. 그렇지 않아도 신혼 때에는 작은 일에도 다투게 되는데, 일까지 함께하는 상황이 여러모로 쉽지는 않았죠. 시간이 지나고 서로의 장단점,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알게 되면서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어요. 서로 몰랐던 개인의 역량을 발견하면 깨달을 수 있게 돕기도 했고요. 지금은 이만한 동료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해옥 대표님은 잠시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오시기도 했죠.
해옥: 2년간 예일대학교 대학원에서 그래픽 디자인 석사 과정을 마쳤어요. 클라이언트 프로젝트를 계속하다 보니 저만의 디자인 언어를 정리할 필요를 느꼈죠. 항상 둘이 함께 작업하니까 혼자 힘으로는 어떤 결과물을 낼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한국에서 일과 병행하며 공부하는 게 어려울 듯싶어서 유학을 생각하게 됐어요. 신신으로서는 가장 바쁠 때 떠난 셈인데, 동혁 씨가 많은 지지와 응원을 보내줘서 참 고마웠어요.
10년 동안 경력을 쌓은 디자이너가 다시금 학생으로 돌아가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해옥: 입학 당시 교수님들과 인터뷰할 때, 경력도 높은데 학교에 다시 오려는 이유를 여쭤보셨어요. 그래서 ‘신해옥’이란 사람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던져 놓아 보고 싶다고 말했죠. 새로운 환경도 그렇지만, 살아온 배경과 관심사가 전혀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게 즐거웠어요. 또 다른 자아 독립의 시간이었죠.
동혁: 해옥 씨에게 유학을 권유한 건 저였어요. 해옥 씨가 회사에 다닐 때 거의 저를 먹여 살렸거든요. 용돈까지 주고요. (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남자 친구의 미래가 불투명해 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묵묵히 믿어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어요. 매일 화상 통화로 서로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고, 6개월에 한 번 정도는 미국에서 만나서 2년이라는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해옥 씨가 하는 과제를 함께 고민하며 발전시키기도 해서 저 역시 나름대로 성장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작업 중 신신의 아이덴티티를 잘 보여주는 결과물을 꼽아본다면요?
먼저, 전시 «집합 이론»을 꼽아볼게요. 슬기와 민, 홍은주 김형재, 신신의 작업을 한데 묶어 세 팀의 방법론과 관심사가 각자의 주제에서 어떻게 지속하고 바뀌는지 이어보면서 그들의 지형도를 느슨하게나마 비교하며 포착하려는 전시였어요. 2014년부터 신신이라는 이름으로 완성해 온 결과물 40여 점을 이어 놓은 해당 전시를 통해 다시금 저희가 여러 가지 재료와 물리적 조건에 기반해 책이 지어지는 구조에 관심을 두고 작업해 오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상기하는 계기가 됐죠.
두 번째는 전시 «IF REVOLUTION IS A SICKNESS»를 기념해 출간한 동명의 도록인데요. 예술가 다이앤 세베린 응우옌Diane Severin Nguyen의 첫 번째 도록입니다. K팝으로 매개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 걸쳐 어떻게 엮여 있는지 고찰하는 책으로, 미국 뉴욕의 스컬프처센터SculptureCenter와 시카고의 르네상스 소사이어티Renaissance Society가 의뢰해서 진행했어요. 다이앤과 두 기관의 큐레이터, 편집자와 함께 화상회의를 하고, 완성한 지면을 주고받고, 인쇄 색상을 테스트한 교정지를 발송하고, 한국의 인쇄소에서 제작한 책을 미국의 두 기관에 운송하는 등 이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데 대략 2년의 세월이 걸렸죠.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대에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공동의 주제 의식을 공유하는 협업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세 번째로는 『푀유FEUILLES』를 선택하겠습니다. 푀유는 프랑스어로 잎사귀들이란 뜻과 함께 종잇장이란 의미를 가져요. 그래서 책과 디자인 간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각자의 기능을 돋보이게 했고, 물질과 내용의 연결을 섬세하게 다루려고 했어요. 이 책은 지난 2021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Best Book Design from All Over the World)’ 공모전에서 최고상인 황금활자상(Golden Letter)을 수상하기도 했어요. 책이 지어지는 구조 자체와 종이를 비롯한 3차원 물질이 2차원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기능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그 상호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전개하는 저희에게는 무척이나 의미 있고 중요한 피드백이었죠.
마지막으로는 세종문화회관 CI 리뉴얼 작업입니다. 세종문화회관을 이루는 세 단어인 세종, 문화, 회관의 상징성을 한글 창제 원리인 천지인의 형태소를 바탕으로 오선지 위의 음표, 건축물의 파사드로 포개어 놓았어요. 한글 조합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경우의 수에 따라 다양한 점과 선을 펼칠 수 있죠. 세종문화회관 CI 작업은 구조와 형식 위에 소리를 품은 글자를 조합하고 이를 그려내면서 보고, 듣고,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아이덴티티 디자인 개념을 제시했기에 의미가 큰 작업입니다.
『Diane Severin Nguyen: IF REVOLUTION IS A SICKNESS』 카탈로그, 2022, 오프셋 인쇄, 사철 각양장, 194×268mm, 244쪽, 클라이언트: SculptureCenter (New York), Renaissance Society (Chicago), 글: Cat Zhang, Nathanäel, Myriam Ben Salah, Sohrab Mohebbi, Jamieson Webster, Diane Severin Nguyen
『Diane Severin Nguyen: IF REVOLUTION IS A SICKNESS』 카탈로그, 2022, 오프셋 인쇄, 사철 각양장, 194×268mm, 244쪽, 클라이언트: SculptureCenter (New York), Renaissance Society (Chicago), 글: Cat Zhang, Nathanäel, Myriam Ben Salah, Sohrab Mohebbi, Jamieson Webster, Diane Severin Nguyen
동혁: 출판사 미디어버스의 임프린트인 ‘화원Hwawon’을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데요. 화원에서 펴내는 여섯 번째 책을 얼마 전 인쇄소에 넘겼어요.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김영나 작가의 모노그래프이자 아카이브인 『자화상』이에요. 평소 저희는 그래픽 작업의 모든 프로세스가 반드시 컴퓨터에서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번 작업이 그런 명제를 증명했다고 볼 수 있어요. 작가님의 과거 아카이브를 배치하고 출력한 결과물을 베를린으로 보냈고, 작가님이 이를 재료 삼아 자르고, 오리고, 변형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주셨죠. 저희는 최종 결과물을 받고 정리해서 다시금 책의 꼴로 만들어냈고요. 제작은 인타임 유성운 이사님께서 힘써주셨습니다.
해옥: 저희의 제안이 아티스트에게 일종의 예술적 재료가 된 셈이에요. ‘아티스트의 이전 작업을 있는 그대로 싣는 게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고민하다가 새로운 작업을 위한 바탕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동혁: 그래픽 디자인은 결과물만 놓고 보면 굉장히 납작하거든요. 그런 납작함 속에도 깊이와 입체감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이번 출판물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어요.
해옥: 삼성문화재단에서 1년에 세 번 발행하는 «와나WANA»라는 잡지도 계속 디자인하고 있어요. 하나의 문화적인 주제를 세우고 그와 연관된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의 잡지에요. 대전과학예술 비엔날레의 아이덴티티 작업 또한 함께 진행하고 있어요.
해옥: 2014년 이사했으니, 올해로 10년이 됐네요. 신신의 사업자를 내고, 결혼도 하면서 여기에 살게 되었어요. 사실 이곳은 제가 학창 시절에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이에요. 아버지가 땅을 매입하고, 벽돌을 한 장씩 쌓아서 만드시는 과정을 다 지켜봤어요. 그곳에 저희가 합당한 비용을 치르고 떳떳하게 들어와 살고 있죠. 이제 거의 30년이 다 된 공간입니다.
두 분이 여기에서 10년을 지내니 장단점이 어떻던가요?
동혁: 단점이었던 부분이 어느 순간부터 점점 장점으로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요령이 없어서 정원 관리나 주택 개보수가 무척 힘들었거든요. 이제는 적당히 신체 활동을 하게 되어서 오히려 좋아요. 디자이너는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일하기 때문에 허리 디스크나 시력 저하가 오기 쉽거든요. 주택을 돌보다 보면 자연스레 계속 몸을 움직이게 돼요. 그리고 서울과 떨어져 있는 점도 예전에는 불편했는데, 이제는 서울에 가면 답답해서 얼른 집에 돌아오고 싶어져요.
해옥: 처음에 동혁 씨는 여기에서 조금만 살고 다시 도시로 가자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여기가 더 좋대요. 서울에 나간 김에 카페라도 가자고 하면, 집에 가서 커피 마시자고 할 정도예요.
동혁: 저는 집이라는 작은 세계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게 개인의 자존감과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느낀답니다. 이 집이 별 탈 없이 사계절을 날 때면 스스로가 대견하고 뿌듯해요.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아요.
2층에는 어떤 공간이 있나요?
동혁: 게스트룸과 책방, 이렇게 두 개의 방이 있어요. 결혼 전부터 각자 소장한 책이 워낙 많아서 방 하나를 책으로만 가득 채웠어요. 편안한 1인용 의자를 두 점 놓아 언제든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의자 사이에는 스튜디오 씨오엠(COM)이 디자인한 당구대 모티프의 테이블을 놓았어요. 한쪽에는 저희가 작업하는 디자인 결과물을 가제본하거나, 모델로 만들 수 있는 코너도 있고요.
해옥: 철제 선반을 맞춰서 책을 다 수납했는데, 이후로도 책이 점점 늘어나서 1층 계단 옆에도 책을 수납하는 공간을 만들었어요. 길종상가에서 책 수납이 가능한 바퀴 날린 트롤리를 만들어 주셨죠. 만화책부터 도록까지 저희가 좋아하는 책들이 다 쌓여 있어요. 사실 책장, 책방 등 책을 놓는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일은 별 의미가 없는 듯해요. 틈날 때마다 자유롭게 펼쳐볼 수 있도록 테이블, 의자를 비롯해 저희 손이 닿는 집안 모든 곳에 책을 쌓아두니까요.
책에 대한 애정이 엄청나네요. 이 중 최근에 읽었거나, 특별히 좋아하는 책이 궁금해요.
동혁: 패션 디자이너 가와쿠보 레이(川久保玲)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진행했던 아카이브 전시 대한 도록인데, 판형이 매우 커서 책장만 넘겨도 실제 전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별다른 텍스트 없이 작품 이미지만 시원하게 보여주니까 기분이 상쾌하더라고요. 책은 이러면 충분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도록은 공식 일정이 끝난 후에도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되는 전시 같아요.
해옥: 저는 『이영희는 말할 수 있는가?』라는 책을 얘기하고 싶어요. 얼마 전에 이 책을 만든 디자이너를 만나서 책을 선물 받았는데,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1963년생 이영희라는 여성을 바탕으로 풀어낸 책인데요. 실제 저자의 고모분이세요. 1990년대 초반 대구에 편집 디자인 회사를 설립하고 30년간 일한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담고 있죠. 당시만 해도 디자인이나 인쇄는 남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작업이었는데, 그 속에서 일하던 여성 디자이너의 순간과 서사를 기록하면서 함께 풀어낸 자료 사진이나 개인의 역사가 모두 새롭고 감동적이었어요. 거대한 역사를 아카이빙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다는 면에서, 책이 정말 대단한 매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달았답니다.
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해옥: 저는 2층 책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좋아요. 책을 보다가 가끔은 빔 프로젝터로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곤 하거든요. 겹겹이 꽃힌 책이 방음재처럼 소리에 몰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더라고요.
동혁: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창밖으로 나무를 바라보며 커피 마실 때가 좋아요. 날씨까지 쾌청하면 그날의 일이 모두 다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책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 볼까요. 작업자에게 책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동혁: 예전에는 매번 책을 정독했는데, 일이 바쁘다 보니 요즘은 깊이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편이에요. 하지만 틈날 때마다 집중력을 발휘해 몇 장을 읽기도 하고, 두서없이 훑어보기도 하는데요. 그런 우발적인 경험 속에서 어떤 이미지를 발견하기도 하고, 작업의 실마리가 풀릴 때도 있고, 하나의 글귀가 디자인의 이유가 될 때도 있어요.
해옥: 웹이나 소셜 미디어에서는 의도하지 않은 이미지나 텍스트를 일탈적으로 만나는 게 오히려 어렵거든요. 책은 그런 우연한 순간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이자 수단이죠.
동혁: 아무리 생각해도 책은 정말 위대한 발명품 같아요. 책은 만드는 과정에 비해 가격이 무척 저렴해요. 게다가 안에 담긴 생각이나 이미지가 워낙 탁월하니까 인쇄 과정까지 거쳐서 지금 우리 앞에 도달한 거겠죠. 이처럼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고차원적인 결과물을 향유할 수 있는 매체는 드물어요. 물리 법칙을 거스르며, 다채로운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차원의 문 같기도 하고요.
해옥: 저는 바이닐을 구입할 때 좋아하는 뮤지션의 앨범을 사기도 하지만, 전혀 정보가 없을 때는 아트워크가 예쁜 앨범을 고르고, 음악도 마음에 들기를 기대하곤 해요. 집에 와서 두근거리며 음악을 틀었을 때 노래까지 괜찮으면 기분이 정말 좋아요.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랄까요. 와인 라벨이 예쁘면 와인도 맛있게 느끼는 것처럼요.
각자 소장한 책을 합치는 순간이 흥미로웠겠어요. ‘서재 결혼시키기’ 같은 거죠.
해옥: 이사 날에 각자 본가에서 책을 갖고 왔는데, 동혁 씨가 갖고 있던 책의 양이 정말 어마어마했어요. 저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였죠.
동혁: 저희 어머니가 책 때문에 집이 무너질 것 같으니 얼른 가지고 나가라고 하셨어요. (웃음)
해옥: 둘 다 갖고 있어서 지금 책방에 두 권씩 꽂힌 책도 있어요. 아무렇게 꽂은 것 같아도, 나름의 배열과 규칙이 존재한답니다.
평소 작업할 때는 어떤 도구를 사용하시나요?
해옥: 저희 둘 다 어디를 가든지 랩톱을 분신처럼 지니고 다니면서 자유롭게 작업해요. 그리고 어떤 목적이든 책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을 생각한다면, 저희는 도구와 재료를 사용하는 데 열려 있는 편이에요. 책의 구조에도 많은 상상과 아이디어를 부여하며 실험적이고 복잡한 방식도 주저하지 않죠. 그래서 새로운 종이와 제본 도구 등을 시도하면서 가제본도 다양하게 만들어 보기도 해요.
동혁: 저희는 특별한 재료를 활용해 평범하게 만드는 것보다, 평범한 재료로 비범하게 연출하는 게 훨씬 더 멋지다고 느껴요. 특이한 제본이나 제작 과정도 좋지만, 익숙한 방식 안에서 콘텐츠의 내용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포맷을 생각하는 일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옥: 제가 지난 2021년 개인전 «Gathering Flowers»를 열었을 때, 종이를 말아서 손에 쥐면 꽃다발이 되는 형식으로 포스터를 만들었던 적이 있어요. 이처럼 평범하고 일반적인 포스터에 조금 다른 방식을 더해 새로운 경험이 가능한 구조를 실현해 보는 거죠. 그리고 그 행사에서 퍼포먼스를 위해 만들었던 책이 있었는데, 일반적인 책보다 훨씬 더 신체와 긴밀하게 관계를 맺어야 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디자인과 재료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프린팅과 가제본을 시도했던 기억이 나요.
동혁: 그래픽 디자이너는 으레 작업의 시작과 끝이 모두 컴퓨터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각각의 재료가 지닌 특성과 물성을 최대한 다양하게 살려보고 싶어요. 그래서 늘 사용하는 도구에 매몰되지 않고 항상 새로운 도구를 써보려고 해요.
게스트룸에서 재봉틀과 색색의 패브릭 조각들이 눈에 띄던데요.
해옥: 제가 예쁜 패브릭 조각을 재봉틀로 패치워크하는 작업을 좋아해요. 작은 블랭킷이나 소품을 만들기도 하고요. 컴퓨터에서 벌어지는 일과 스트레스를 단순한 수작업으로 가라앉히는 거죠. 그래서 평소에 패브릭 샘플을 수집하기도 하고, 일본에 갈 때는 작은 기모노 조각을 구입하기도 해요.
수납장 한쪽에 향수, 로션, 인센스, 룸 스프레이 등 향 관련 아이템이 모여 있어요. 특별히 선호하는 향이 있나요?
동혁: 예전에는 인센스나 향초 등을 자주 켜 놓았는데, 호흡기나 폐에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요즘 줄이고 있어요. 대신 향수는 꾸준히 사용해요. 몇 년간 샤넬의 ‘블루 드 샤넬’만 쓰다가 최근에 로라 제임스 하퍼Lola James Harper 제품으로 바꿨어요. 이 브랜드는 공간을 테마로 향을 만드는 게 콘셉트인데요. 제가 좋아하는 제품은 ‘서프 숍’(The Surf Shop of Stephane)이에요. 원래 룸 스프레이인데 향수로 활용 중이죠. 비누 냄새 같기도 한 여름 느낌의 향입니다.
집 곳곳에 가구들이 다양해요. 우선 색색의 USM이 시선을 끄네요.
동혁: 여기가 원목이 많이 쓰인 집이라서 자연적이고 단단하며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재질과 물성이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무, 스틸, 유리, 도자기 같은 소재의 가구와 소품을 선호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USM은 저희 집과 잘 맞는 면이 있죠. 디자인이 단순하고 색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점도 좋았어요. 왠지 정연한 질서로 디자인된 가구를 공간 여기저기에 무질서하게 배치하는 것도 길티 플레저 같아서 마음에 들어요.
해옥: 녹색 USM을 시작으로, 한 해 동안 수고했다고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처럼 연말마다 하나씩 구입하다 보니 이렇게 늘어나게 됐어요.
각기 디자인이 다른 만큼, 그 용도도 명확할 것 같아요.
동혁: 1층에 놓은 흰색 USM은 순전히 권오상 작가님께서 선물해주신 책 조각을 놓으려고 주문했어요. 당시 책 조각을 작가님이 먼저 만들어 주시면, 그 조각을 가지고 저희가 다시 책을 만들겠다고 제안했는데, 흔쾌히 승낙하셔서 결과물이 나오게 됐죠. 이 책을 아름답게 진열하고 싶어서 가장 적당한 디자인으로 주문했어요. 현관에 놓은 고동색 USM에는 티셔츠나 스웨터를 잔뜩 수납하고, 파란색 USM은 오디오 시스템을 놓는 용도로 쓰고 있어요.
다이닝 테이블이 정말 기네요. 확장도 가능해 보여요.
해옥: 이 테이블은 결혼하기 전, 2013년쯤에 빈티지 가구 스토어 모벨랩Möbel LAB에서 구입했어요. 당시에는 너무 크고 길다고 생각했는데, 손님이나 친구들이 놀러 올 때 빛을 발해서 정말 잘 샀다고 생각하는 가구에요.
집안 곳곳에, 길종상가에서 디자인한 가구가 많다고 들었어요. 개인적인 인연 또한 깊다고요?
동혁: 제가 회사를 나오고 프리랜서로 활동할 때 길종 씨를 처음 만났어요. 당시 인디 뮤지션이나 공연 기획자와 자주 교류했는데, 한 재개발 반대 농성 현장에서 음악 페스티벌이 열렸을 때 포스터를 제가 디자인하고, 길종 씨가 무대를 디자인했죠. 그 후로 길종 씨가 하는 활동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전시를 하면 찾아가고, 가구도 구입하면서 가까워졌어요. 길종 씨가 길종상가를 처음 시작할 무렵 제가 명함 디자인을 맡았는데요. 그 대가로 재료비만 드리고 1층에 놓인 해옥 씨의 책상을 받았어요.
해옥: 당시 ‘RGB 책상’이라고 해서,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상판의 책상을 세 개나 주셨어요. 초록색은 조카에게 선물했고, 빨간색은 게스트룸에 재봉틀용 책상으로 놓았고, 파란색은 제가 사용하고 있어요.
해옥: 1층 콘크리트 벽에 걸린 둥근 선반은 해당 자리에 알맞은 가구를 아무런 조건 없이 의뢰해서 탄생한 작업이에요.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들었죠. 공간에 새로운 인상을 불어넣는 존재에요. 지난 10년 동안 유리잔을 비롯한 온갖 물건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모습도 보기 좋고요.
동혁: 현관에 있는 우체통도 길종 씨의 선물이에요. 잘 만들어진 기성품을 사는 것도 좋지만, 개인의 취향에 맞춰 세상에 하나뿐인 디자인을 소유하는 일은 정말 흥미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집안을 살펴보니 물건이 정말 많네요. 특별히 몰두해서 수집하는 아이템이 있나요?
동혁: 해옥 씨보다 제가 물건에 특히 관심이 많아요. 대체로 아름다운 이미지가 담긴 것을 좋아하죠. 커버만 보고 LP를 살 만큼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티셔츠도 평범한 단색보다는 어떤 이미지나 메시지를 담은 걸 선호하고요. 핀 버튼도 모으는데, 작은 버튼에 담긴 수많은 그래픽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요.
가장 최근에 구입한 수집품은 무엇인가요?
동혁: 눈독 들이던 핀 버튼을 이베이에서 몇 개 샀는데, 늘 배송비가 더 나오네요. (웃음) 프로파간다 프레스를 운영하면서 «GRAPHIC» 매거진을 발행하는 김광철 편집장님이 얼마 전 군산에 서점을 오픈하셨는데, 응원하러 방문했다가 책을 몇 권 구입하기도 했죠.
해옥: 최근 신덕호 디자이너와 함께 셋이 우래옥에 냉면을 먹으러 갔는데요. 대기 번호를 기다리며 주변을 산책하다가 바로 옆 건물에 자리한 ‘헬카페 뮤직’을 발견했어요. 세 명 모두 조용히 집중해서 LP만 고르던 기억이 나네요.
대부분의 가구가 큼직해서 자리 배치를 바꾸기 쉽지 않겠어요.
동혁: 맞아요. 거의 처음 놓은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저는 주로 식탁에서 랩톱으로 작업하는데, 해옥 씨는 큰 모니터를 사용하거든요. 해옥 씨가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후 거실에 책상을 따로 놓으면서 배치를 조금 바꿨어요. 오랜 고민 끝에 찰스 앤 레이 임스Charles & Ray Eames의 오피스 체어 ‘EA-215’를 구입하며 작업 테이블을 완성했죠.
그러고 보니 임스 부부의 가구도 많이 있네요. 거실 테이블, 2층의 라운드 테이블, 책방의 라운지체어 모두 임스 부부의 디자인이죠?
동혁: 임스 부부의 가구는 투박하면서도 디테일이 아름다워서 이 집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책방에 있는 LCW와 라운지체어도 사용할수록 만족스러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범한 재료를 비범하게 조직화했다는 사실이 저희에게 많은 영감을 줘요.
집안 곳곳에 아트워크가 보이는데, 컬렉션을 위한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
해옥: 저희가 직접 만든 것도 있고, 선물 받은 것도 있어요. 이광혁, 돈선필, 박현정, 이윤성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현관 쪽에는 전용완 작가와 김뉘연 작가의 이미지 작업도 있네요. 각자 본가에서 갖고 온 오래되고 작자 미상의 작품도 많아요.
동혁: 해옥 씨의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오래된 전축, 저희 어머니가 모으신 광물, 해옥 씨 외할머니 댁에서 데려온 족자나 빈티지 샹들리에도 있답니다. 결국 이 집에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클래식한 것과 키치한 것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네요.
마지막으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스테이에이치STAY H’가 크리에이터스룸을 위해 준비한 아이템에 관해 얘기해 볼게요. STAY H의 큐레이션 목록에서 인터뷰이가 자기 공간과 어울리는 아이템을 하나 고르면 선물로 드리는 건데요. 신신은 어떤 아이템을 선택하셨나요?
해옥: 덴마크 브랜드 무토MUUTO의 ‘터브 저그Tub Jug’ 다크 그린 컬러를 선택했어요. 프랑스 디자인 스튜디오인 아틀리에 BL119에서 디자인한 아이템인데, 연료 용기 또는 커다란 주전자처럼 생긴 외관이 독특하게 느껴졌어요.
동혁: 세라믹 소재에다 모양새도 단단해서 저희 집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죠. 한편으로는 색상도 형태도 왠지 군용 트럭에 매달린 기름통 같기도 했고요. 섬세하게 디자인된 군용 기름통이라니, 생각할수록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해옥: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겠지만, 저희는 처음 보자마자 꽃병으로 사용하고 싶었어요. 정원에 있는 조팝나무 가지를 터브 저그에 꽂아 놓으니까, 예상보다 더욱더 잘 어울리네요. 이제 계절마다 각기 다른 꽃을 거실에 들여놓을 수 있겠어요.
무토MUUTO 터브 저그Tub Jug
Artist
신신은 신해옥(@new_of_newnew), 신동혁(@shin_of_shinshin) 디자이너가 함께하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다. 편집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 등에 바탕을 두고 큐레이터, 에디터, 아티스트를 비롯한 여러 문화예술 기관 및 단체와 협업해 책, 도록, 전시, 포스터, 전시 아이덴티티 등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작업한다. shin-shin.kr
Editor
정윤주(@chungyunjoo)는 대학에서 실내 디자인을 전공하고 «메종 코리아» 인테리어 에디터와 «보그 걸» 피처 디렉터로 일했다. 영화 속 인테리어와 데커레이션에 주목한 책 『영화 속의 방』의 저자이며, 온라인 매거진 «디퍼 differ»의 디렉터 겸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프리랜스 에디터 겸 EYES and EARS 디렉터로 다양한 매체에 인터뷰와 라이프스타일에 관련된 글을 기고한다. «엘르 데코 코리아»의 객원 에디터이기도 하다.
Photographer
이우정(@iopppic)은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수년간의 어시스턴트 생활을 거쳤다. 현재 «보그 코리아», «엘르 코리아», «GQ 코리아», «하퍼스 바자 코리아» 등 다양한 매체와 협업하며 앨범, 광고 등 커머셜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