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지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독립출판 서점 ‘고스트북스’를 이끄는 발행인이며, ‘리틀룸’이라는 브랜드의 운영자이기도 합니다. 대학 시절 탐닉했던 출판물의 물성이 그를 자연스럽게 직접 스케치하고 바인딩하며 책을 만드는 작가의 세계로 이끌었죠. 류은지의 드로잉은 좋은 선을 얻기 위해 어깨의 힘을 빼는 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렇게 힘을 뺀 그의 시선은 팬데믹 시기의 막연한 불안을 먹구름에 무서움을 느끼는 고양이의 서사로 치환하거나,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상실의 슬픔을 구름과 빵의 온기로 보듬으며 독자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다정한 여백을 그려내요. 이렇게 따스한 마음으로 채워진 일러스트 연작은, 류은지가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마주하며 길어 올린 일상의 단편을 독자에게 전합니다.
서점 운영자라는 현실적 자아와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창작적 자아 사이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나직한 일상을 일구어 가는 류은지. 슬로 라이프와 현실의 잔고 사이에서 소박하게 균형을 잡으며 종이 위 안식처를 빚어내는 그의 이야기를 BE(ATTITUDE)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Blue Cat and Apples›, 2025, 포스터, 29.7×42cm 또는 50×70cm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반갑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고스트북스라는 서점과 독립출판사를 운영하며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류은지라고 합니다. 책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며 독립출판으로 꾸준히 그림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고스트북스 서점에서는 해외 아트북 큐레이션 코너를 맡아 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의 개인 브랜드인 리틀룸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중학교 때 웹디자인에 빠지게 되면서 디자인 세계에 입문했습니다. 그렇게 미술대학으로 진학했고, 당연히 디자이너가 되리라 생각했어요. 대학 때 서점과 도서관에 있는 시간을 좋아했는데, 특히 아트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리며, 바인딩하고, 책을 만들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 당시에는 아트북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 여러 전시와 공간을 다녔습니다. 그러다 독립출판을 알게 되었죠. 도서관에서 보았던 책은 뭔가 조금 오래되고 낡고, 멀리 있는 것이었는데, 독립출판물은 그동안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어요. 창작자가 바로 앞에 있는 느낌이었달까요. ‘동시대의 다양한 작가들이 이런 걸 만들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나 역시 이런 걸 만들고 싶어!’ 하는 강렬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렇게 독립출판 ‘씬’에 들어가게 된 것 같아요.
20대에는 주로 페인팅 작업을 하며 조금씩 독립출판물을 만들었는데, 생활이나 작업에 관한 고민이 해결되고 있지 않다고 느꼈고 뭔가 결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2017년에 지금의 서점인 고스트북스를 인철 씨와 함께 운영하게 되었고, 이 선택이 제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 같아요. 그 이후부터 서점 운영자로 또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림책을 쓰고 그리고 만들고 있습니다.
서점 고스트북스 전경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저는 집에서 일하고 있어요. 이전에 작업실 생활도 해 보았지만, 혼자 있는 환경이 더 잘 맞아 집에서 일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어요. 지금의 집은 주택이라 1층은 거주 공간으로, 2층은 작업실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출퇴근 루틴을 명확하게 지키려 노력하고 있어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일상과 자연에서 얻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저를 둘러싼 환경에 영향을 잘 받는 편인데요, 그래서 그것을 가꾸어 나가는 것을 좋아해요. 그러다 보니 어떤 환경 속에서 거주하고 작업하느냐는 저에게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그렇게 선택하게 된 곳이 대구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시골의 주택이었어요. 이곳은 아주 조용하고, 매일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에요.
자연의 변화를 느끼고, 그에 따라 생기는 감각이 제 작업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글쎄요. 일단 편안한 옷을 입어야 하고요, 배가 고프지 않아야 하며, 커피를 한 잔 마셔야 합니다. 저는 그림 수첩이나 작은 종이에 드로잉을 먼저 하면서 손도 풀고 마음도 푸는데요, 어깨에 힘을 빼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좋은 선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계속 그려 가면서 구상하고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Carnet de dessin 까르네 드 데상』, 2025, 고스트북스
『Carnet de dessin 까르네 드 데상』에 수록된 그림, 2025, 고스트북스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Carnet de dessin 까르네 드 데상』 (2025년)
글, 그림: 류은지
발행: 고스트북스
최근에 발행한 화집입니다. 작년 초겨울부터 가을까지 일상과 자연을 바라보며 그림 수첩에 차곡차곡 그려온 그림들로, 여러 권의 수첩에 그린 32점을 한 장씩 떼어내어 『Carnet de dessin』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엮었습니다. 위의 질문에서 대답한 것처럼 어깨에 힘을 빼는 과정이 드로잉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애쓰지 않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와 마주하기 위한 과정이 담겨 있어요.
『The Cat Afraid of Dark Clouds 먹구름을 무서워한 고양이』 (2024년)
글, 그림: 류은지
발행: 고스트북스
이 책은 손바닥만 한 아주 작은 그림책입니다. 원고의 초안은 코로나가 확산되던 2020년에 썼는데요, 우리 모두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는 정말 충격적인 상황이었잖아요. 모든 이들의 이동이 제한되었던 때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생각이 많아지던 해이기도 했어요. 그 무렵 친구들과 만들던 잡지도 휴식을 가지게 되면서 (보통은 아주 바빴던 시기였는데) 시간이 많아졌죠.
그 시기에 저는 밤에 자다가도 이상한 불안감이 몰려들어 거실 소파에 혼자 앉아 숨을 고르곤 했어요. 또 어느 날은 비가 엄청나게 오는 날, 꽉 막힌 도로 위에 있었는데 하늘이 너무 시커메서 ‘영영 파란 하늘을 볼 수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드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그때의 마음을 글로 적어두었는데, 그것이『The Cat Afraid of Dark Clouds 먹구름을 무서워한 고양이』가 되었죠.
이 그림책의 이야기 구조는 단순해요. 먹구름을 무서워한 고양이의 이야기이고, 고양이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지금 보는 것이 먹구름이라 해도 언제나 먹구름 뒤에는 반짝이는 해가 숨어 있다는 것을 저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었던것 같아요. 그래서 아주 애정하는 작업입니다.
『토토와 구름과 빵』 (2024년)
글: 이응준 / 그림: 류은지
발행: 민음사
『토토와 구름과 빵』은 이응준 작가님의 산문집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에 실린 작가님의 반려견 토토에 관한 세 편의 글을 모아 새롭게 편집한 그림 산문책이에요. 감사하게도 저는 그림으로 참여하게 되었어요.
저도 13년을 함께한 반려묘 쿠로를 보낸 경험이 있어요. 사실 그 친구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제안을 받게 되었어요. 원고를 읽으면서 정말 울다가 웃다가, 큰 위안을 받았어요. 누군가 이 책을 보며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림을 그렸어요.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조금은 빠져나와,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토토와 구름과 빵』 내지 그림, 2024, 민음사
『토토와 구름과 빵』, 2024, 민음사
『토토와 구름과 빵』, 2024, 민음사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없습니다. 다만 누군가가 제 책과 작업을 본다면, 그가 그곳에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여백과 자리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자주 되묻게 되는 것은, ‘내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라는 것이에요.
최근 작업에서 만족스러웠던 점과 불만족스러웠던 점이 궁금합니다.
위에서 소개해 드렸던 최근 작업인 『Carnet de dessin』 화집이 떠오르는데요, 시간을 좀 더 여유 있게 가지고 만들고 싶었지만, 하반기 북페어 시기에 맞춰 신간 작업을 하다 보니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점이 아쉬워요. 하지만 그 기간 안에서 최선을 다했고 제가 표현하고자 했던 부분에서 긍정적인 리뷰를 받기도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만족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가능하면 매일 루틴을 지키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집에서 작업하다 보니, 루틴을 지키는 일이 저를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에게 맞는 시간과 방식으로 올해부터는 좀 더 제대로 지켜보려고 해요.
제 하루를 떠올려보면 아주 단순해요. 오전에는 식사를 하고 집 정리를 간단히 합니다. 오후 12시에 2층으로 출근해 일과 작업을 시작하고, 오후 4시에 강아지 토베와 산책을 나갑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5시쯤 되는데, 잠시 쉬었다가 저녁 8시까지 일을 하고 1층으로 퇴근합니다. 이후 저녁을 먹고 여가 시간을 보내요. 여가 시간에는 드라마도 보고, 남편과 수다도 떨고, 토베와 밤 산책을 가기도 하고,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 중 한 가지는 자기 전 한시간 정도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고, 정적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잘 때 생각이 많아지는 편이라 고요하게 있는 시간이 좋더라고요.
일의 특성상 일이 몰릴 때가 종종 있어서, 바쁘지 않은 시기에는 최대한 잘 쉬고 놀려고 합니다.
『The Cat Afraid of Dark Clouds 먹구름을 무서워한 고양이』, 2024, 고스트북스
『The Cat Afraid of Dark Clouds 먹구름을 무서워한 고양이』, 2024, 고스트북스
『The Cat Afraid of Dark Clouds 먹구름을 무서워한 고양이』, 2024, 고스트북스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인테리어와 가구입니다. 사실 집 꾸미기를 좋아하는 편이라 늘 관심을 두고 있는데요, 왠지 새해에는 좀 더 이것에 몰두하게 된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최근에는 내내 집 정리를 했어요. 잘 사용하지 않거나 공간 크기에 맞지 않는 가구들을 정리하고, 변화를 주고 또 변화를 주고…. 그러다 보니 사실 지금은 좀 지쳐 있는 상태입니다. (눈물)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내 안에 체화된 어떤 태도가 결국 작업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주 돌보아야 한다고 봐요. 나를 잘 돌봐야 내 안에 중심이 생기고, 그것이 제가 계속 작업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리라 생각합니다. 시간을 들이고 오래 작업할 수 있다면, 언젠가는 좋은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책 읽기, 트레킹하기(걷기), 그냥 무조건 그리기.
책을 읽으면 다른 이의 삶을 만날 수 있잖아요. 그러다 보면 내 자신 안으로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게 해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트레킹이 아니더라도 오래 걷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 참 좋은 것 같아요. 한때 트레킹을 자주 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정말 생각이 많았던 시기였거든요. 거대한 자연 앞에 서 있는 내가 너무 작고 별것 아니어서 허허 웃게 되더라고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어요. 너무 오래 걷다 보면 체력적으로 힘들어지기 때문에 복잡한 생각 같은 건 다 날아가고, 그저 ‘배고프다’ 혹은 ‘쉬고 싶다’라는 생각만 남아요.
가끔 종이에 뭔가 그리는 게 두려워질 때가 있는데요, 제대로 그려지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랄까. 오히려 그럴 땐 그냥 그려 버려요. 스스로를 조금 더 밀어붙이는 거죠. 속으로 ‘덤벼라, 류은지’. 이런 식으로 외칩니다.
그림을 그리다 망치면 찢어서 버리면 됩니다. 그런 걸 반복하다 보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두려움도 줄어드는것 같아요.
류은지 작가의 드로잉
류은지 작가의 작업 공간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금전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자영업이나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일은 결국 내가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이 있다 보니, 자신을 갈아 넣어야 하는 순간들이 있거든요. 마음은 슬로우 라이프를 지향하지만 잔고는 그것과 반비례하는 것 같아요. 일상을 슬로우하게 유지하면서도 잔고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입니다.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오르는데요, 그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어보면, 하루키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부지런하게 운용하며 지켜 나가는지를 느낄 수 있거든요. 단단함이란 결국 자신의 일상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기반이 있다면 언제든지 작업을 이어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많이 돌아보게 되었던 기억이 나요. ‘작가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요.
그래서 저도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고 작업을 해 나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중심을 찾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잘 돌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면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노력이 창작자에게는 태도가 되고, 나아가 철학이 되겠지요. 저는 아직 그 과정에 있어요.
류은지 작가의 드로잉 모음
류은지 작가의 작업 모습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대안도 필요해요. 현실적인 대안은 대부분 내가 하기 싫은 것들일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밝은 면을 찾아낸다면 그것도 영 하기 싫은 일만은 아닐 거예요. 그것을 내 시간으로 만들어 가다 보면 지속성이 생겨나고, 어느새 좋아하는 것과 현실적인 것이 만나면서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이 때로는 무척 고되고 힘들지만, 지나고 보면 나를 조금씩 성장하게 한 걸 거예요.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다음 책이 기다려지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할머니가 되어서도 계속 작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데, 주디스 커의 프로필 사진을 보면 백발로 작업대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담겨 있거든요. 또 어떤 사진은 거대한 고양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기도 해요. 너무 귀엽고 멋있어요. 그걸 보면서 나도 그렇게 늙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Artist
류은지(@eunji_room)는 그림을 그리며 작은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자연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 그것을 종이 위에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작가가 쓴 책으로는 『The Cat Afraid of Dark Clouds 먹구름을 무서워한 고양이』, 『은지의 하루만화』, 화집 『Rhythm and Drawing』 등이 있고, 그린 책으로 『나를 구해 주세요』, 『토토와 구름과 빵』, 『우리 여우 꿈을 꾼 거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