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혜 작가는 재료와 매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작업합니다. 근 2~3년 꽂힌 재료는 종이죽이에요. 폐종이를 종이죽처럼 걸쭉하게 바꾼 후 조형물을 만들죠. 종이 냄새를 날리기 위해 약재시장에서 이것저것 맡아보고, 대화형 AI와 상담하며 다양한 약재를 구입하기도 했답니다. 마치 씨앗처럼 손안에서 꾹꾹 눌러서 만들고, 바닥에 펼친 후 밀대로 납작하게 눌러서 말리고, 혹은 볼록한 물건을 지지대 삼아 납작한 철망을 덮어서 모양을 만들기도 하죠. 시간을 충분히 두고 천천히 해야 하는 터라, 작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존중하고 자연스럽게 보려고 노력해요. 요즘 AI를 활용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진짜로 존재하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 허지혜 작가. 이 세상을 이 시간에 진짜로 살았고, 경험했고, 느끼면서 작업한 창작자로서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Remember Repetition›, 2023, Reclaimed paper, iron powder, acrylic medium, glue and acrylic varnish, 123 × 16 × 36 cm. «Dimensional Veil», 휘슬, 서울, 2023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허지혜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작업실을 기반으로 일하고, 매체는 자유롭게 선택하는 편이에요. 그밖에는 필드 리코딩field recording도 하고 있어요.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물어보면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학부를 졸업한 후, 여행 많이 다니고, 미술관 아르바이트도 하고, 불어도 배우고, 학교 다닐 때 읽지 않고 쌓아둔 서적도 다 읽고, 영화도 많이 보고, 놀기도 엄청 놀았어요. 예술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면서 대학원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저 자신을 작가로 인식하게 되었어요.
‹Sausage and Garlic›, 2019, Collage, 59.4 × 42 cm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11년째 같은 공간에서 작업하고 있어요. 오래된 건물이라 처음에는 꽤 고생했는데 이제는 제 평생 가장 긴 시간을 보낸 장소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너무 진부한 질문인가요.
평소에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서 얻는 것 같아요. 강아지랑 매일 산책할 때 접하는 일상의 풍경이 작업에 직접적으로 나타날 때도 있어요.
‹Number or Grief›, 2019, Collage, 42 × 59.4 cm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처음에는 재료를 찾으러 돌아다녀요. 실제로 시장이나 작업장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찾기도 하고요. 작업이 어떻게 만들어질지 상상하며 여러 가지 재료를 탐색하고 작업실로 모으는 거예요. 요즘 만드는 종이 작업도 종이 냄새를 날리기 위해서 허브를 사용했는데 약재시장에서 이것저것 맡아보고 쑥, 정향, 느릅나무 등을 골라 와서 사용했어요. 대화형 AI와 상담하며 약재에 대해 알아봤고요. 작업실에서는 책을 읽거나 드로잉이나 콜라주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요. 그러다 보면 해야 할 일이 생기고, 그게 점점 커지면서 작업 루틴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JVOD4274›, 2019, Collage, 42 × 59.4 cm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최근 2~3년 동안 종이죽으로 조형물을 만드는 작업을 해오고 있어요. 종이죽을 만드는 과정도 재밌고, 재료를 만드는 동안 무엇을 만들지 상상하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해요. 처음에는 씨앗처럼 손안에서 꾹꾹 눌러서 만들다가 바닥에 펼친 후 밀대로 마치 종이처럼 다시 납작하게 눌러서 말렸어요. 작년 을지로 철망 가게 사장님이 네 꼭짓점을 모두 용접한 철망은 오직 한국에서만 만든다고 자랑하시길래 올해에는 그 철망을 사용해 만들기도 하고요. ‹Square (R)› 이라는 작업에 이를 기념하는 의미로 철망의 태그를 넣어놨어요. 여기에서 R는 빨강인데요. 연지, 양홍 등 한국의 수채 물감을 모은 컬렉션 중에서 나온 붉은색이에요.
작업실에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을 기록한 정보를 기반으로 만든 세라믹 작업이 있는데요. 이를 지지대로 사용해 납작한 철망을 덮은 후 눌러서 모양을 만들어 보니 예전에 한 과학 박물관에서 봤던 우주의 모습과 얼핏 비슷했어요. 우주 모형이 생각 외로 동그랗지 않고 납작하게 보였거든요. 여기에는 ‘빛’을 뜻하는 고대 단어에서 유래한 ‘Leuka’라는 작업 명을 붙였어요.
지난 2021년 서울 알떼에고alter.ego에서 선보인 개인전 «Let’s Meet After the Thunderstorm»에서는 2020년, 2021년 집중한 작업을 전시했는데요. 파란색과 노란색을 섞어서 초록색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어요. 그해 여름 서울에서 초록색을 처음 본 것 같았거든요. 다양한 명도와 채도의 노란색과 파란색을 잔뜩 모아두고 매일매일 초록색을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Let’s Meet After the Thunderstorm» 전시 전경, 알떼에고, 서울, 2021
‹Green #8›, 2021, Hemp,acrylic paint, acrylic varnish, glue, steel wire, cement, plastic pipe, Edition of 111, Size variable. «Let’s Meet After the Thunderstorm», 알떼에고, 서울, 2021
최근 작업을 통해 작가님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작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존중하고 자연스럽게 보는 것. 시간을 충분히 두고 천천히 작업하는 것.
‹Seed(64)›, 2023, Paper, glue, screws, stainless steel wire and copper pipe, 41 × 20 × 137 cm. Paris Internationale, 2023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종이죽을 만들 때마다 만족감을 느껴요. 지금은 어느 정도 예상가능한 부분이 있는데, 처음 종이죽을 시도할 때는 생각지도 못한 색이 나와서 놀랐어요. 예를 들어, 요리책으로 만들 때 분홍색 종이죽이 탄생했는데 딸기 아이스크림 같은 느낌에 어찌나 신나던지요. 물론 마르고 나니 그 느낌은 사라졌지만요. ‹Seed(8)›이 여기에서 나왔답니다.
‹Seed(8)›, 2023, Reclaimed paper, wood and beeswax, 18 × 18 × 28 cm. Paris Internationale, 2023
‹Seed(37)›, 2023, Reclaimed paper, acrylic paint, wood and white wash, 14 × 14 × 51 cm. Paris Internationale, 2023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아침에는 운동하고 집안일하고, 낮부터 작업실에 있다가 밤에 강아지랑 공놀이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게 일상이에요.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양자역학에 관심이 있어요. 동양 철학과 서양 과학이 만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로워요. 제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어떤 확신을 주는 부분이 있달까요. 그 연장선에서 최근 AI를 활용하는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게 되었어요.
‹NW-5gsp›, 2022, Graphite, paper, plywood, aluminum angles, QR code to the album, Wednesday and redeem code, 7.8 × 10.8 cm. Paris Internationale, 2023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작업은 삶의 연장선이라고 봐요. 그러니 이 둘을 대하는 태도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NW-h6xj›, 2022, Silkscreen, acrylic paint, ink, paper, plywood, aluminum angles, QR code to the album, Wednesday and redeem code, 16.4 × 12.5 cm. Paris Internationale, 2023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예전에는 대체로 어떤 걸 만들 건지를 먼저 가지고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냥 느낌일 뿐이라도 시작점이 분명하게 있었죠. 그렇다 보니까 한 작업이 끝나고 나면 다음 작업을 시작하게 되기까지 비어 있는 시간이 생기게 되더라고요. 그때는 필드 리코딩을 하러 돌아다녔어요. 슬럼프라고까지 할 건 아닐지 몰라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을 때였어요.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녹음하고 그것을 듣다가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 같아요.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작가로서 현실적인 제 모습이 작업과 함께 보이는 상황에 고민이 들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인터뷰(특히 영상!)에서 어떤 말을 했는데, 인터뷰가 공개된 이후 제 말을 스스로 부정하게 될 때가 있거든요. 정말 당황스러워요. 그래도 계속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러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Puzzles and Memories›, 2023, Reclaimed paper, glue, paper clay, stainless steel wire, wood, bee s wax, solvent varnish and acrylic varnish, 42 × 103 × 93 cm. «Dimensional Veil», 휘슬, 서울, 2023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작업실에 있는 동안 솔직하고 자유로울 것.
‹Cosmic Horror›, 2023, News paper, glue, varnish, paper clay and stainless steel beads, 15 × 19 × 9.5 cm. «Dimensional Veil», 휘슬, 서울, 2023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작업을 하는 사람은 결국 계속하더라구요. 그래서 하고 마는 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 가설은, 일단 계속하면 무조건 된다는 거예요. 마음을 열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며 본인의 작업을 계속하세요.
‹Folded Pulp Glyphs 1›, 2023, Reclaimed paper, glue, paper clay, gesso, beads, solvent varnish and acrylic varnish, 45 × 40 × 4 cm. «Dimensional Veil», 휘슬, 서울, 2023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글쎄요… 질문에 관해 고민해 봤는데요. 요즘 AI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진짜 현실에 존재했던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세상을 이 시간에 정말 살았고, 경험했고, 느끼면서 작업했던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아직 이상적인 미래를 고민해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원하는 게 있다면 건강하고 여유로운 삶입니다.
«Unbearable Lightness» 전시 전경, 2024, ROH, 자카르타, 인도네시아
Artist
허지혜(@jiiehghur)는 서울 출생으로 현재 서울에 거주하며 작업 중이다. 오티스 미술대학에서 조각과 뉴 장르를, 시카고 미술대학원에서 세라믹을 전공했다. 주요 개인전으로 «Let’s Meet After the Thunderstorm»(알떼에고, 2021), «Electric Smash»(휘슬, 2019) 등을 열었고, «Unboxing Project 3: Maquette»(뉴스프링스프로젝트, 2024), «Unbearable Lightness»(ROH, 자카르타, 2024), «Dimensional Veil»(휘슬, 2023) 등 여러 단체전에 참여했다. 파리인터내셔널Paris Internationale(2023), 아트 바젤 마이애미 비치 ‘포지션스Positions’ 섹터(2015)에 작업을 선보였다. www.jiiehghur.com